어떤 속죄
때는 당나라. 황제는 국경을 성가시게 하는 융(戎 지금의 신장이나 티벳)을 정복하기 위하여 군사를 파견하였다.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로 물류의 출입이 많으나 당에 복속하기를 거부하는 오랑캐였다.
만여명의 군사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행군을 하였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황제로부터 사자(使者)가 왔다.
황제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좋은 술과 안주를 장군에게 하사하였다.
장군은 그 술을 혼자 또는 참모들과 마시지 아니하고 근처에 있는 샘에 부었다. 예전에 혁수네 동네에 있던 박샘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고는 모든 군사들에게 그 물(술)을 먹게 하였다. 그 물에서 술맛이 났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술을 마신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황제의 하사품을 마셨다는 황송함과 자기가 다 마시지 않고 모든 군사들에게 고루 베풀어준 장군의 배려에 감읍하였다.
이러한 ‘베품’에 힘입어 장군의 군대는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 샘을 일컬어 주천(酒泉; 술이 솟아나는 샘)이라 불렀고, 중국 서북쪽에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한다.
그 주천이 조선에도 있으니, 영월군에 속하며 영월과 제천 사이에 있다. 주천강과 수주천 등 주변 경치가 뛰어난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그 주천에 내 선배가 살았는데, 약국을 경영함면서 한편으로는 사슴 목장을 운영하였다.
예전에는 주천 농고를 중심으로 하여 사슴을 많이 기르던 동네였다. 나는 당시 태백에 살았고, 6월 하순이면 사슴의 뿔(녹용)을 잘랐다.
말랑 말랑한 사슴뿔의 끝부분(분골)은 육회처럼 먹을 수 있고 피(녹혈)도 마신다. 나는 생피는 싫어하여 먹지를 않았고, 분골만 독주와 함께 마셨다. 충청도 사람으로 나 보다 12년 선배인 그 분은 나의 입담을 너무 좋아하여 뿔을 자를 때면 반드시 연락하여 함께 술을 마시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농장에 가서 사슴을 돌보고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농로를 따라 귀가를 하다가 그의 짚차가 농수로에 빠지고 말았다.
난감해 있던 차에 조금 있으니 마침 경운기 한 대가 마주 오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그 경운기의 도움으로 차를 빼내서 집으로 왔다.
한편 경운기를 끌고 가던 사람은 농로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수로에 빠져서 엎어져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얼른 내려서 건져내니 논물을 보러간 자기 아버지였다.
좁은 농로에서 조금 전 구해준 짚차의 백미러나 차체에 부딪혀서 물에 빠진 것이다. 짚차는그것도 모르고 그냥 갔던 것이다. 경운기 주인이 그 선배의 집을 찾아갔을 때는 선배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결국 선배는 음주에 뺑소니로 당장에 구속되어 영월 법원에 유치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몇 달을 구속되었다가 거액의 합의금과 변호사비, 그리고 벌금까지 물고 나왔다.
그분이 언제부터 불교에 심취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교도소 생활 중에 그런 서적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농장이고 약국이고 모든 걸 정리하였다. 좋아하던 술도 버리고.
그리고 작은 곳에 기거하면서 자신으로 인해 저 세상에 간 그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매일 매일 속죄의 발원을 이어갔다.
나모 관세음보살, 나모 팔만사천 대불, 보살 마하살! 나모 대자대비 비로자나불!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내가 사람을!
부디 극락 왕생하소서!
그는 오랜 기간을 그렇게 속죄하고 서원(誓願)하다가 수 년전 세상을 떠났다.
벌써 49년째다. 올해 아흔 살 노인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속죄의식을 치른다.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병사들을 위해 불경을 봉독하고, 나무아미타불을 1만 번 염불한다.
그의 심장엔 1950년 11월이 불도장처럼 찍혀 있다. 6·25 당시 평북 박천까지 올라갔던 그는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경북 청도 출신의 15세가량 소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의 유탄에 쓰러진 소년이 더는 가망이 없을 것으로 여기고 그에게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했었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소년의 간청을 저버릴수 없었다. 그도 탈출해 살아야 했다.
만 17세때의 일이다.
그는 평생 죄의식을 지울 수 없었다. 1974년부터 저세상의 소년병을 위해 예불을 드려 왔다. 처음에는 집에서 시작했다가 13년 전쯤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작은 법당을 차렸다. ‘심우원(尋牛苑)’이다. ‘소를 찾아서’라는 뜻으로, 불교 구도 과정을 상징한다. 그는 1998년부터 매해 6월 호국영령을 기리는 합동위령제를 열어 왔다. 올해도 지난 21일 심우원에서 거행했다. 심우원에는 소년병 위패 3241위, 풍기·영주 전투 전사자 위패 244위, 그리고 한국전쟁 전사자 위패 3만7635위가 봉안돼 있다. 그는 여태껏 국방부·현충원을 수십 회 방문하며 정부가 누락한 소년병 870명과 6·25 전사자 3만7635위를 대전현충원에 모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21일 눈물과 통한의 추모사를 6·25 영령들에게 바쳤다. 포항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소년병의 일기장을 인용했는데, 그 사연이 가슴을 후볐다.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고향의 옹달샘, 이가 시리도록 찬물을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그는 이 글이 생각나면 “잠자리에서도 두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집니다”고 탄식했다. 그는 박태승씨다. 군번 0350115. 1950년 8월 입대해 4년6개월간 복무했다. “나를 따라 군대에 가지 않겠느냐”는 육군본부 수색대원의 권유로 들어간 군 생활이 그의 운명을 180도 돌려놓았다. 바로 소년병의 비애다. 사실 소년병은 20여 년 전까지 까맣게 잊힌 존재였다. 국방전사에도 관련 기록이 없었다. 18세 미만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식 군번을 받고 참전했으나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병사들’이다. 2011년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에서 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한국전에 참전한 17세 이하 소년병은 2만9603명, 전사자는 2573명에 달했다. 박씨는 지난 반세기 동안 소년병 명예회복에 진력해 왔다. 하지만 국가는 아직도 응답이 없다. 2000년대 이후 관련 법안이 몇 차례 거론됐지만 구체적 결실이 없는 상태다. 그도 이제 지칠 만큼 지쳤다. 남은 소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소년병의 공적을 인정하는 번듯한 현충시설을 마련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직 모시지 못한 6·25 전사자의 위패를 현충원에 봉안하는 것이다. 가족·후손이 없어 국가에 위패 하나 신청하지 못한 영령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충정에서다. 박씨는 “이제 아흔입니다. 얼마나 더 살겠어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현충일에도 꽃 한 송이 받지 못하는 그들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맞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다행히 올해 지역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주시민 217명이 모여 그의 뜻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지난 25일 6·25 7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나라에 헌신하신 분들을 제대로 대우하는 나라를 만들겠다”(윤석열 대통령), “참전 유공자를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하겠다”(한덕수 총리)고 했다. 1년 365일 중 하루의 다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년 6·25엔 91세 소년병의 웃음을 볼 수 있을까.(中央日報拔萃)
나모관세음보살 마하살
壬寅 小暑後
豊 江 合掌
첫댓글 당나라 장수의 용병술! 이 보다 더한 용병술은 없을진저.......
풍강의 12년 선배님! 술을 욕하기전에 선배님의 운명이라고.........
심우원에서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와 이름없이 스러져간 소년병들의 혼을 위로하시는 91세의 소년병 출신 어르신의 생.......
부하 사랑에서 우러나온 용병술! 모든것을 접어 버리고 속죄의 길을 걷다가 가신 선배님!
죽음앞 참을수 없는 고통을 멈추게 해준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평생을 참회하며 살고 있는 어르신...... 가슴 밑바닥을 서늘하게 하는 세편의 이야기...............
누구든, 종교가 무엇이든 풍기에 가거든(풍기국민학교 앞) 심우원에 들러서 쓰다 남은 용돈 10만원 정도씩은 후원하시기 바랍니다.
훌륭하신 분을 모셔서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