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충무공 이순신
이순신장군은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 세 번 싸워 스물 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 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 책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중에서 -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1544년 4월28일 탄 문반(文班)의 가문 아버지 덕수 이씨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하였다.
32살에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1576년12월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
1579년 2월 훈련원봉사,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1582년 1월 무고로 파직, 훈련원봉사
1583년 7월 함경남도 군관 건원보(乾原堡) 권관 훈련원참군
1585년(선조 18년) 1월, 종6품 사복시 주부(主簿) 조산보(造山堡) 만호,
녹둔도(鹿屯島) 둔전관
1586년 여진족 백의종군
1588년(선조 21년) 여진족을 물리침
1589년(선조 22년) 조방장과 선전관, 정읍현감
1590년(선조 23년) 종3품인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
1591년 종3품의 가리포(加里浦) 수군첨절제사, 정3품의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1592년 임진왜란 왜군을 물리침
1593년 삼도수군 통제사
1597년 모함으로 투옥 백의종군, 삼도수군 통제사
1598년 11월19일 노량 해전에서 전사
이순신과 해전
옥포, 함포, 적진포 - 1차출전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 2차출전
한산, 안골포 - 3차출전
장림포, 부산포 - 4차출전.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10월 25일)
노량해전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순신의 전사
‘나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유비무환의 정신 '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
(천하가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긴 후에 즐겨라)
“출전하여 만 번 죽을지라도 한 번 살려는 계책을 돌아보지 않으련다
(出萬死 不願一生之計).”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 (必死卽生)“
영구 평화국가를 꿈꾸고 안출한 이순신
긍정적 사고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의 정신은 긍정적인 지도자 였다
진중에서 기록한 <난중일기>
이순신의 리더십
철저한 기록정신에 바탕을 두고 투명하고 윤리적이었으며, 자기희의 리더십
전략, 커뮤니케이션, 인적자원관리, 창의력, 의사결정, 위기관리, 그리고 갈등관리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성웅 이순신(충무공 탄신일 1545.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