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부는 1950년 12월 27일에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의 이름은 마쓰하라 아키오 (松原 明夫). 도토리니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드래프트 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 굴하지 않고 68년, 일본 최고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연습생으로 입단합니다. 1년 후, 같은 재일교포 선수 출신인 김일융이 갑자원 준우승투수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드래프트 규약 자체를 바꾸게 되는 파동을 일으키며, 거액에 요미우리에 입단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차이가 나는 시작이지요. (*주1)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가와카미 감독아래 65년부터 73년까지 9년간 연달아 일본시리즈를 우승한 일명 ‘전설의 V9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왕정치, 나가시마 같은 일본 최고의 타자들과 와타나베, 호리우치등의 탄탄한 투수진으로 무장된, 사상 최강이라 불리는 팀에서 우완 사이드암의 연습생 투수를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명부는 2군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열심히 훈련하여 드디어 코칭 스태프의 눈에 띄는데 성공합니다. 그의 자질을 높이 산 코칭스태프는 70년 시즌 11경기, 40이닝에 그를 등판 시키며 테스트를 해 봅니다. 하지만 의욕이 너무 앞섰던 탓일까요, 3패만을 기록한 그의 성적표를 본 코칭스태프는 별 미련 없이 그를 포기했습니다. 방어율은 3.07로 괜찮은 편이었으나 당시 호화멤버를 자랑하던 자이언츠 투수진에서 그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장명부는 다음 두 시즌에 2경기, 5경기만을 패전처리로 등판하며 허송세월 하게 됩니다. 요미우리 측에서도 그는 별로 기대하고 있지 않던 2군 전력으로 취급하였고, 급기야 72년 오프시즌, 퍼시픽리그의 난카이로 트레이드 해버리고 맙니다. 71년도 첫 시도에 4승 3패, 방어율 2.02를 기록하며 구단의 눈에 든 김일융과는 이때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일본 최고 구단이었던 요미우리에서 선수 생활을 해보려던 의지가 꺽이자 한풀 죽은 장명부는 난카이로 쓸쓸히 발걸음을 돌립니다.
개화의 시기
눈물을 흘리며 자이언츠를 떠났지만, 난카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가 그토록 원했던 기회였습니다. 잠시 적응기를 가진 그는 곧 5선발 자리를 꿰어차며 7승 7패, 방어율 2.87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합니다. 교진과는 비교도 안되게 약한 전력의 난카이는 장명부와 같이 난카이로 온 에이스 야마우치의 활약과 대포수 노무라 가쓰야의 타격을 바탕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야 맙니다.
일본시리즈 상대는 장명부를 버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칼을 갈며 덤볐으나 8년 연속 우승을 해 온 요미우리와의 객관적인 실력 차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맙니다. 이 우승을 마지막으로 요미우리는 대망의 V9을 달성하게 됩니다.
난카이에서 장명부가 만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당시 감독 겸 포수였던 노무라 가쓰야였습니다. 현재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왕정치와 더불어 대표적인 홈런 타자일 뿐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포수로 뽑히는 선수로 투수리드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보였습니다. 노무라와 같이 뛰며 장명부의 실력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게 됩니다. 후에 한국야구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수싸움이나 데이터 야구 등은 이 당시 노무라에게 전수받은 것들입니다.
74년도 9승 6패 방어율 3.04를 기록하며 선발 중 방어율 선두를 기록한 장명부는 그 다음해 팀 내 최다승인 11승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만개합니다. 이 당시에만 해도 장명부에 대한 기대는 대단했습니다. 만 25세의 나이로 10승 투수의 반열에 들어가며 팀의 뒤를 이을 에이스로 추앙 받았습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라는 말이 있듯이, 급속도로 최고 정점에 섰던 장명부는 정점에 오르자 마자 추락을 하게 됩니다. 76년 그는 생애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됩니다. 6승 7패 1세이브. 방어율 3.68. 붙박이 선발로 188이닝을 책임져 주었던 전년과는 달리 중간계투를 전전하며 115이닝을 겨우 채우게 됩니다. 당시 리빌딩을 계획하고 있던 난카이는 더 시장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팔아 넘기자는 생각으로 장명부를 히로시마에 넘기게 됩니다.
시련을 이기고
히로시마에 온 첫해, 장명부는 여전히 부진한 모습을 보입니다. 역시 중간계투와 선발을 넘나들며 6승 6패 5세이브를 기록하지만, 방어율은 무려 5.13. 25세의 촉망 받던 미래의 에이스가 그저 그런 중간계투 투수로 전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명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후반기부터 그는 신인으로 들어온 미래의 에이스 기타벳부 선수와 함께 3-4 선발을 오가며 부활의 날개짓을 시작합니다.
78년, 장명부는 화려하게 재기합니다. 230 이닝을 던지며 15승 8패 방어율 3.60. 팀 내 최다승이자 방어율 선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활에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히로시마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는 심정이었고 난카이는 땅을 쳤지요. 전해까지 히로시마의 에이스였던 다카하시가 부진하고 미래의 에이스인 기타벳부, 오노 유타가가 아직 개화하기 전인 이 시절, 장명부는 명실 상부한 히로시마의 에이스였습니다. (*주2)
그러나 단 한번도 190이닝을 넘겨본 적이 없고 그 전 2년 동안 연간 100이닝을 겨우 넘긴 투수가 230이닝을 던져버린 여파는 컸습니다. 이름을 후쿠시 아키오(福士明夫)로 바꾸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79년, 장명부는 무리의 여파인 부상으로 전반기를 최악의 성적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후반기부터 몸이 정상을 찾기 시작하자 다시 활약을 시작해 결국 7승 9패 1세이브, 방어율 3.57로 시즌을 마칩니다.
이 해 히로시마는 야마모토 코지, 기누가사 사치오를 필두로 하는 붉은 헬멧 타선과 영파워 기타벳부, 철완 마무리 에나쓰를 위시하여 센트럴 리그를 독주합니다. 후반기부터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장명부도 한몫을 하기 시작하자 히로시마를 막을 팀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히로시마는 센트럴리그 우승을 따내어 일본시리즈에 나가고, 일본시리즈에서도 긴데쓰를 4승 3패로 누르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합니다. (*주3)
구단 사상 첫 우승이었으니 히로시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장명부에게는 그리 달갑지는 않은 우승이었지요. 자신이 제대로 활약하지도 못한 상태에서의 우승이 어찌 기쁘기만 하겠습니까? 장명부는 다시 한번 칼을 갈며 다음시즌을 기약했습니다.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로 다시 한번 이름을 바꾸고 시작한 80년 시즌이 오자 장명부는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을 다 풀어내는 것처럼 미친 듯이 투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완벽하게 78년도의 모습으로 돌아간 장명부는 다시 팀 내 최다승을 기록하며 15승 6패, 방어율 3.95로 화려하게 재기합니다.
야마네, 키타벳부, 이케야, 오노, 에나쓰로 대변되는 히로시마 투수진의 에이스로 장명부는 붉은 헬멧 타선과 함께 다시 한번 센트럴리그를 폭격하며 우승을 이루어 냅니다. 일본시리즈에서도 다시 한번 긴데쓰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어 내지요. 장명부는 이해 그의 일본 프로야구 통산 유일한 타이틀인 승률왕을 따내는 쾌거를 거두어 냅니다. 장명부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이 생애 최고의 해였습니다.
하지만 만 서른살이 된 장명부에게도 나이라는 장벽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3년간 부상에도 불구하고 혹사당한 그의 어깨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81년에도 200 이닝을 던지며 기타벳부에 이어 팀 내 다승 2위인 12승을 기록한 장명부였지만 방어율은 4점대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운명의 82년… 장명부는 완전하게 무너집니다. 단 111이닝을 투구하며 3승 2패 2세이브 방어율 3.66. 중간계투로 강등된 장명부는 타자들에게 정신없이 얻어터지며 무릎을 꿇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른 두살의 나이는 투수나이로 환갑이나 다름없는 나이. 어깨가 빠지도록 구단을 위해 봉사했으나 별다른 해결책을 내어주지 않았던 구단에 배신감을 느낀 그는 통산 성적 91승 85패를 남기고 돌연 은퇴를 선언, 잠적해 버립니다.
은퇴… 그리고 차별
장명부의 은퇴선언은 많은 팬들에게 뜻밖으로 다가왔습니다. 비록 82년도에 심하게 부진하기는 하였으나 이미 부진에서 여러 번 재기한적이 있는 그가 다시 한번 부활할 것이라 믿었던 팬들은 그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장명부에게는 더 이상은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장명부 선수는 귀화를 하지 않은 엄연한 한국 국적의 선수였습니다. 일본에서 자라나고 교육을 받은 선수는 용병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신분상 용병은 아니었으나 일본인들에게 그는 엄연한 외국인, 그것도 대우 받지 못하는 ‘조센징’ 이었습니다.
모든 투수들은 몇 번의 슬럼프를 격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꾸준함의 상징이라 불리며 14년 연속 20승을 이루어낸 일본 최고의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도 한번의 슬럼프는 있었습니다. 선동열도 마찬가지지요. 그렇기 때문에 투수들이 한해정도 부진해도 대부분의 경우 구단은 기다려 주곤 합니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있는 법이고 대투수일수록 슬럼프를 극복해 나가면서 커가기 때문이지요.
젊은 투수의 경우 오히려 슬럼프가 없으면 이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인왕 수상자들이 겪게 되는 2년차 슬럼프가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이럴 때 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게 해주어 투수가 경기 감각을 잃지 않고 슬럼프를 이겨내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장명부의 경우, 그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구단이 기다려 준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미우리 시절, 첫해 부진을 보이자 구단은 그를 거의 기용하지도 않고 있다 난카이로 팔아버렸습니다. 난카이 시절, 꾸준히 승수를 쌓아올리다 76년 한해 부진하자 구단은 바로 그를 히로시마로 팔아 넘깁니다. 히로시마 시절, 부상 때문이었던 79년의 슬럼프 때 구단은 그를 선발 로테이션에 넣어 감각을 되찾게 해주기는커녕 중간계투로 그를 혹사 시켰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들 중 하나는 그가 조센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구단의 눈에는 그가 용병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성적을 내면 기용을 하지만 조금이라도 퇴보의 기미가 보일 경우 가차없이 짤리는 것이 용병입니다. 우리나라 용병이었던 베이커나 로마이어의 경우처럼, 아무리 팀 공헌도가 높고 뛰어난 성적을 올리더라도 조금의 이상이 있으면 바로 퇴출 되는 것이 용병의 운명이지요.
장명부는 바로 이러한 풍조에 신물이 난 것입니다. 그를 팀의 스타로 키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필요한 만큼 써먹기만 하고 버리려는 구단의 횡포에 넌더리가 난 것이지요. 82년 전반기에 부진하자 바로 그를 중간계투로 돌려버리는 구단을 보고 장명부는 미래를 예측하고 은퇴를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