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원년의 처참한 성적을 담보 삼아 85년으로 예정되었던 재일교포 수입을 2년 앞당
겨 실행하게 된 삼미 슈퍼스타즈는 구세주를 찾아 일본 프로야구계를 뒤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과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
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스타급 선수들을 불러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습니
다.
일단 스타급 재일교포 선수들이 일본 무대를 떠난 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될 뿐더러 그
들이 아무리 고국이라지만 낯선 나라에서 플레이 하게 되는데 대한 보답치고는 국내
프로야구의 연봉이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80년대 초반, 스타급 일본 프
로야구 선수들의 연봉은 몇천만엔을 호가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A 급이라고 불리던
박철순, 김봉연 선수들의 연봉이 고작 2400만원, 엔화로 환산하자면 800만엔 정도 였습
니다.
같은 해에 재일교포 수입을 시작한 해태의 경우 이러한 이유로 일본 프로야구 2군에서
어느 정도 기량은 인정 받았으나 1군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던 선수들을 물색하게 되
고, 결국 히로시마 2군 포수 출신인 김무종을 비교적 싼 값에 스카우트하였습니다. 어
차피 1군에 올라갈 가망이 없는 판국에, 고국에서 괜찮은 연봉으로 부른다면 마다할 이
유가 없지요. 이러한 방침은 그 후에도 계속 지속되어 송일수, 고원부등 2군 출신 선수
들이 한국에서 대 활약을 하게 됩니다. 고원부 선수의 경우 상당한 유망주 였으나 2군
에서 코치 폭행사건으로 방출되자 한국 프로야구의 문을 두드린 약간은 특이한 경우입
니다.
하지만 삼미는 달랐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전력을 보강하기에는 팀 전력이 너무나
약했고, 팀을 이끌어나갈 스타 한명이 아쉬운 상태였습니다. 인천야구에서 가장 이름
을 날리던 김진우, 정구선과 임호균을 모두 대표팀으로 내보내고 관객들의 눈을 끌 스
타가 단 한명도 없이 82년 시즌을 보낸 삼미는 이미 ‘슈퍼스타즈’가 아닌 ‘노스타즈’라
고 해도 할말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하위권이라도, 김성한, 김봉연을 보유
하고 있는 해태, 김용희, 김용철을 보유한 롯데는 삼미와는 인지도 면에서 비교가 되
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전력상승은 물론이고 획기적인 뉴스메이커가 될 스타를 찾던 삼미의 눈은 드디어 한
선수에게 고정되게 됩니다. 일본야구에서 통산 91승을 기록한 스타급 재일교포 선수
가 82년 시즌을 끝으로 히로시마에서 은퇴를 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후쿠시 히로아
키 (福士敬章), 즉 장명부를 포착한 삼미는 즉시 특사를 파견하여 그를 설득하기 시작
합니다.
Come Back Home
2편에서 서술한 대로, 당시 장명부는 구단의 차별대우에 환멸을 느끼고 유니폼을 벗은
상태였습니다. 요미우리, 난카이, 히로시마등 가는 구단마다 ‘조센징’이라는 이유만으
로 겪는 수모를 더 이상 참아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느 팀에서 불러도 가
지 않겠다고 공언한 그였지만 삼미의 특사를 만나고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비록 한번도 살아본 적은 없으나, 그가 고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나라에서 뛸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매력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에서도 상당
한 거액이었던 4천만엔 (계약금 1500만엔, 연봉 2500만엔)에 주택제공까지 포함된 패
키지는 상당히 뿌리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장기간의 심사숙고 끝에 장명부는 마
침내 한국에 가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삼미는 장명부의 결정을 받아내고는 기뻐 날뛰며 신문에 대서 특필을 하기 시작합니
다. 덕분에 삼미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비보가 아닌 주제로 신문에 올라갈 수 있었지
요. 장명부는 아직 팀에 들어오기도 전에 삼미가 그에게 원했던 역할 중 뉴스메이커의
역할 하나는 해낸 것입니다.
처음 시행된 재일교포 수입은 좋은 화제거리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몇 달 전 김재박
과 한대화의 활약으로 일본을 꺾고 우승한 세계선수권대회를 떠올리며 일본의 수준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33살이나 먹은 일본 프로야구 퇴물 투수에게
막대한 금액을 안겨준 것에 대해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일본 프로야구 출신으로 82년 40이 넘은 나이에 4할 대를 돌파한 백인천을 떠올리며 장
명부의 성공가능성을 점치기도 했습니다.
야구계 내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장명부가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 짐작하고 있
었습니다. 당시 삼미의 허형 사장과 김진영 감독은 장명부가 한국에서 통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장명부의 호언 장담을 들은 허형 사장과 당
시 KBO 사무차장 이던 이호헌씨는 장명부의 시즌 승수를 놓고 한참을 논의한 결과 30
승은 무리겠지만 전년도 박철순이 기록했던 24승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
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명부가 허형 사장에게 ‘만약 30승을 하
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묻자 허형 사장은 ‘30승만 하면 1억원의 보너스를 주겠다.’라
고 약속합니다. 당시 농담 비슷하게 던진 이 말이 1년 후 얼마나 큰 파동을 몰고 오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체 말입니다.
완벽한 준비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은 장명부는 진정한 프로 근성과 그가 너구리라고 불리게 된 이
유인 능청을 보여줍니다. 당시 장명부는 한국 타자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였습
니다. 아직 계약을 하려면 시간이 남아있고, 한국에 가기는 이른 상태였던 장명부는 당
시 일본에서 전지 훈련을 하고 있던 삼성을 찾아가서 배팅 볼을 던져 주겠다고 자청을
합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삼미로서는 자기 선수가 되기로 구두 합의까지
끝내고 계약서 사인만 남겨놓은 선수가 다른 구단에 가서 집적거린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길길이 날뛰는 삼미에게 장명부는 한마디로 응수해 줍니다. ‘나 아직 계약서
에 사인 안 했는데?’ 법적으로 걸고 넘어질 수는 없는 행위였지만, 삼미에게 설명 정도
는 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명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배팅볼을 던지고 있는 진의가 파악된다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배팅볼을 던지며, 장명부는 장효조와 이만수로 대변되는 국내최강 삼성 타선을 철저하
게 분석해 나갔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훗날 큰 결실을 맺
게 됩니다. 83년 타율, 안타, 출루율, 장타율 타이틀과 홈런 4위, 타점 3위, 득점 2위, 도
루 4위를 기록하며 타격의 신이라 불린 장효조도 장명부를 상대로는 전반기 내내 15타
수 1안타를 기록하며 무너집니다.
영문도 모르고 날뛰는 삼미와 계약을 한 후, 장명부는 기자회견에서 “20승은 기본이
다. 30승이 목표다. 20승도 못할 경우 유니폼을 벗겠다.” 며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리
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가 상대해야 할 상대팀 타자들에 대한 자료를 삼미 프론트
에 요청합니다. 그에게는 뜻밖이었겠지만, 삼미는 빈손을 내밀어 버립니다. 당시 프로
야구 초창기였던 한국에서는 일본처럼 데이터 수집이나 분석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난감해진 장명부는 스스로 자료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처
음으로 시행된 83년 시즌 시범경기 중 원하는 경기에 모두 등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단에 요청합니다. 3월 19일 롯데전을 시작으로 시범경기에 무더기로 등판하기 시작
한 그는 첫 경기에서 2이닝 5실점을 기록하는 등 팬들이 보기에는 매우 기대이하의 모
습을 보여줍니다. 변화구는 아예 던질 생각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평범한 직구 하나로
만 승부한 결과입니다. 팬들이 어떻게 생각했던지 간에, 장명부는 그가 시즌을 꾸려나
가기에 충분한 자료를 얻었고 타자들은 장명부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방심하기 시
작했습니다.
그렇게 시범경기가 끝나고, 전설의 83시즌은 시작되었습니다.
장명부의 스타일
장명부는 우완 사이드암 투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성기를 지난 퇴물로 취급 받았지
만 당시 일본 야구와 상당한 수준차이가 있던 한국에서 그의 공을 쳐낼 사람은 없었습
니다. 당시 장명부는 사이드암으로는 엄청난 속구였던 145km 정도의 직구를 완벽하
게 코너워크 할 수 있었으며 국내 투수진들의 두 배 이상의 낙차를 가진 커브와, 스크
류볼까지 사용했습니다. 당시 그의 스터프는 Knee-Breaking 이라는 말 그대로 엄청나
게 떨어져서 타자들이 칠 꿈도 꾸지 못하게 하던 커브였습니다.
단순히 구위가 좋은 것으로 따지면 당시 국내 최고의 투수로 불리던 박철순, 최동원,
김시진 등보다 그렇게까지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명부에게
는 대포수 노무라 가쓰야에게 물려받은 수읽기와 재일교포에게 배타적이었던 일본 야
구계에서 살아 남으며 터득한 배짱과 능청이 있었습니다.
장명부는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몸쪽 공의 위력을 가장 먼저 선보인 투수였습니
다. 최근 삼성의 외국인 투수 갈베스가 몸쪽 공을 위협구로 쓴다며 말이 많은데 83년
장명부의 투구는 갈베스와 비교도 안될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타자 머리로
바짝 붙인 몸쪽 높은 공을 꽂아놓고 멍해져 있는 타자를 향해 히죽히죽 웃고 있는 그
의 모습은 정녕 너구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 난투도 심심
치 않게 벌어지곤 했습니다.
모든 투수들은 몸쪽 공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몸쪽으로 강한 직구를 뿌려 타자를 뒤
로 물러나게 한 후 바깥쪽 낮은 공을 뿌리면 제 아무리 강한 타자라 하더라도 삼진 감
입니다. 하지만 다른 투수들이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일단은 몸쪽 공 컨
트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고 만약의 실수할 경우 같은 동업자인 타자에게 돌
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힐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느 정도
낭만이 남아있는 시대였고, 선후배끼리 좋은 공도 던져주며 적당히 봐주고 하는 것도
모른 척 용인이 되던 시대였습니다. 선동열이 고대 동기들에게 술자리에서 ‘내가 옷깃
을 만지면 직구다!’라고 공언한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는 될 지 모르나 프로야구 선수라는 측
면에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낙제감입니다. 진정한 프로라면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업야구 시대에는 야구는 어디까지나 부업이므로 그러한 행위
가 용납되었을지 모르나 야구를 직업으로 삼는다면 이러한 행위는 절대 용납될 수 없
는 것입니다.
몸쪽 공이 효과는 좋으나 컨트롤 하기가 힘들 다면, 매일 밤을 새서라도 컨트롤을 마스
터하여 몸쪽 공을 써먹어야 하는 것이 프로 정신인 것입니다. 당시 용병으로 성적을 내
야만 했고, 한국에 인맥도 전혀 없는 상태였던 ‘프로야구선수’ 장명부는 가장 효과가 좋
은 몸쪽 공을 충분히 사용하였고 그 결과 대 성공을 거둡니다.
그렇다고 장명부가 무대포로 몸쪽 공만 우겨넣던 곰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철
저하게 계산된 행동을 하며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능청을 부리는 너구리였습니다. 빈
볼이나 위협구는 어디까지나 타자의 배팅패턴을 어지럽히기 위해서만 사용되었고 철
저하게 실력을 이용한 피칭을 주로 해나갔습니다.
너무나 뛰어난 그의 성적 때문에 그가 부정피칭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으나,
철저하게 프로였던 그의 행동을 생각해 볼 때, 그토록 위험하고 불법적인 일을 했으리
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음 칼럼에는 장명부가 전설의 83시즌을 위시하여 한국에서 낸 성적들을 이야기해 보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