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12월29일 당선자 신분으로 군부대를 첫 방문했다. 색깔론으로 수십년간 군부의 비토 발언에 시달렸던 김전대통령으로서는 의미심장한 행사였다. 80년 ‘서울의 봄’ 시절 강경 군부로부터 “김대중이 되면 수류탄을 까 던지겠다”는 말까지 들었던 그다. 청와대는 고르고 고른 끝에 호남 출신이 사단장을 맡고 있는 중부전선 28사단을 찾아갔다. 바로 얼마전 비리 스캔들로 옷을 벗은 군내 호남 인맥의 리더 신일순 대장이 당시 그곳 사단장이었다. 제왕적 카리스마를 가진 DJ에게도 군은 그렇게 껄끄러운 상대였던 모양이다.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상고 5년 선배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아마 청와대와 군 불신이 심각하다고 하는 마당에 군을 내부에 맡기기는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권력 중추기관에 신진 인사보다 내 사람을 심는 양상은 정권이 수세에 몰렸을 때, 내외 기반이 취약할 때 종종 보았던 현상이다.
인수위 시절 노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리는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은 사석에서 말했다.
“우린 과거 정부와 다를 거예요. 모든 인사는 부처내 상하좌우 평가, 외부 전문가 추천, 다단계 면접을 거쳐 정말 베스트라고 꼽히는 사람, 누가 봐도 그 자리엔 그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최고를 추려낼 겁니다. 일은 이 사람들이 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다 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다단계 인사시스템에 다면평가다. 인사 추천-검증·심사-선정의 3단계 절차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됐느냐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인사시스템이 허울뿐이란 것은 굳이 정동영·김근태·정동채 장관이 입각한 ‘6·30 정치 개각’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법무장관의 교체를 둘러싸고 나도는 얘기는 차마 믿고 싶지 않다. 노대통령의 29일 광주·전남방문 하루전 강금실 전 장관을 전격 경질하고, 호남출신 법무장관 기용을 서둘러 발표한 사실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요체다. 측근인 윤광웅 장관 기용을 발표하던 날, 법무장관 교체를 끼워넣은 것도 ‘물타기’란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일석이조(一石二鳥), 삼조(三鳥)식 정치적 활용이다.
대통령의 뜻을 잘 아는 측근 인사들이 요직에 중용돼 대통령의 통치의지를 뒷받침하고, 국정과제를 강력히 추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인사 사유가 ‘부서 장악 미흡’이고, 인사의 주안점이 ‘조직 장악’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한편의 소극(笑劇)이다.
참여정부 2기 국정운영의 시작이 ‘조직 장악’에 집중돼 있다면, 역으로 그만큼 부서의 이반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처 공무원의 정권 이반 현상이 실존한다면 거기에는 근본적 이유가 있을테고, 그것은 가마솥 뚜껑을 덮듯 장관 한 사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나는 마치 섬에 떠 있는 것 같다. 당에 있을 때는 그냥 사이드에, 비주류로 있었는데 지금은 사방이 포위된 채 고립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노대통령이 취임이후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상황이 호전된 게 없으니 지금은 그런 생각이 더욱 깊어졌을지 모르겠다. 점점 듣기 싫은 말에 짜증이 나고, 자신을 옹호하고 선전하는 전도사만 곁에 두고 싶을 수 있다. 악순환이자 정말 위기의 시작이다. 가신(家臣)들만으로는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경영의 순익을 내긴 어렵다. 사방을 적으로 규정하는 생각으로는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고립을 탈피할 수 없다.
첫댓글 놈의 의식구조에는 적과 아군만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