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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1테살 2,1-8
복 음 : 마태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도 밝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러나 ‘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 따라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
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사랑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신학생이었을 때 무서웠던 선배 한 명이 생각납니다.
이 선배님은 신학교 전례부장이었는데, 후배들의 다른 것은 잘 보지 않아도
너무나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 미사를 봉헌할 때 신는 구두였습니다.
즉, 구두에 먼지가 묻어 있거나 광이 나지 않고 더러우면 미사 후에 끌려가 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미사를 봉헌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로
구두부터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겠지만,
구두만 깨끗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것보다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구두 닦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미사 복장에 이상이 있는 것은 상관없이
오직 구두만 깨끗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미사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항상 구두닦이에 충실하게 되더군요.
미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구두를 깨끗이 닦으라는 의도가
오히려 거꾸로 미사보다도 구두 닦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 일상 삶 안에서는 이렇게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이 가장 중요한데
오히려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들인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주님께 불평불만만 가득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과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그들을 향한 강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농산물이나 과일의 소출 중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지요.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규정을 더욱 더 세분화합니다.
그래서 목록에도 없는 것들, 박하, 시라, 소회향 등의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고 하지요.
이렇게 하찮은 채소에 관해서까지 십일조를 엄격히 주장하면서
정작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더 중요한 것들을
실천하지 않는 모습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겉만 깨끗하고 속이 더러운 모습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앞서 미사보다 구두 닦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처럼,
또한 십일조의 정신보다 십일조의 목록이 더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면서,
정작 주님께서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곁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면서 보여주셨던 사랑입니다.
이 사랑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께 저주가 아닌 축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타성에서 벗어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에스키모들이 늑대를 사냥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굉장히 춥습니다. 수은주가 영하 40도, 50도까지 내려갑니다.
그들은 칼 한 자루와 짐승의 피만으로 늑대를 잡습니다.
먼저 예리한 칼날에 짐승의 피를 발라 그것이 얼 때까지 놓아둡니다.
그리곤 또 다시 그 위에 피를 발라서 얼리고, 또 피를 발라서 얼리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나면 칼날은 얼어붙은 피로 완전히 덮이게 되겠지요.
그런 다음 칼날을 위쪽으로 향하게 하여 칼자루를 땅에 단단히 묻습니다.
작업을 끝낸 에스키모는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잡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늑대가 다가와 칼날을 핥기 시작합니다.
늑대의 혀는 얼어붙은 칼날에 쩍쩍 달라붙고 혀는 감각을 잃게 됩니다.
늑대의 혀는 칼날에 베어 피가 흐르게 되고,
늑대는 짐승의 피인지 자기의 혀에서 흐르는 피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신나게 피를 핥아먹습니다.
아마 곁에서 다른 누군가가 “야, 네 혀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라고 말해 주면,
그 늑대는 오히려 역정을 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시끄럽다! 맛만 좋구만...”
그리곤 허겁지겁 먹는 데만 신경을 쓰겠죠. 이제 이 사건의 결말은 뻔해졌습니다.
늑대는 결국 과다 출혈로 인해 장렬하게 쓰러지고야 맙니다.
에스키모는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이 전리품을 챙기기만 하면 됩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짱, My Life,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법]
‘타성’이란 주변에 새로운 사물이나 자극이 생기면 처음에는 그것을 강하게 인식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버린다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새 손목시계를 차면 처음에는 손목시계의 존재를 느끼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손목시계를 찼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새집으로 이사를 가면, 사름들은 고쳐야 하거나 개조할 것들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그런 것들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5년쯤 지나면, 여전히 그 목록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고쳐야 할 부분들이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영적 타성’에 젖어,
그저 ‘나는 큰 죄에 빠져 있지 않고,
구원을 잃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어.
나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성이라는 뜻은, 아마도 늑대의 혀가 마비되어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임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내가 하는 일의 결과에 대해 무감각 해진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영적 타성에 젖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해 오던 십일조와 많은 율법을 지키는 것들은 열심히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타성은 행위에 집중하여 그 결과를 깊이 분석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처지를 깊이 성찰하고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깊이 성찰해야합니다.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결과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무리 행위를 잘 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그 행위는 타성에 젖어 의미 없이 한 행위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라 합니다.
먼저 내 마음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행위가 아무리 좋더라도 분명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타성에 젖지 않으려면 내적으로 진정 행복한지 매순간 살피고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까지 해 오던 삶의 방식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합니다.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힘이 센 강자도 아니고, 두뇌가 뛰어난 천재도 아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했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성공비결이다.”
그러나 변하기 위해서는 그 동인, 혹은 동기가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히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든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되기를 열망하는 등의 바람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부족함을 깨닫고 스스로 변화해 나가며 타성에 젖지 않게 해 줍니다.
살아있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변화가 멈추어가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계명을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접고,
하느님처럼 완전해지기까지 절대 만족하지 맙시다.
그 길을 가라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무지
감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읽다가 문득 의문이 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명색이 율법학자인데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무시한다니!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을 율법의 대가라는 사람들이
몰라서 무시한 것인가, 알고서도 무시한 것인가?!
어제부터 저희는 ‘프란치스칸 가족 수련자 모임’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데
그제는 오늘 할 수련자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그것은 산행을 하면서 하는 우주적 형제애 체험 프로그램인데
저희 수련 형제들이 그중의 하나로 게임을 준비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 게임이 재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의미를 살리면서도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하는 거라면 좋지만
그저 재미를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제가 짚어줬습니다.
이런 경우는 생각이 짧아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짧아서가 아니라 교만해서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를 보면 ‘무지’란 뜻의 ignorance란 말이 있는데
제 생각에 이 말은 ‘무시하다’는 뜻의 ignore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교만하면 무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바꿔 말하면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뭣을 자기가 모른다고 생각하면 겸손하게 알려는 태도를 취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되거나 적어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겸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자기는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알려고 들지 않고,
알려고 들지 않기에 모르면서도 여전히 자기는 다 안다고 교만하게 됩니다.
크게 깨지기 전까지는 이 교만과 무지의 악순환에는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불쌍하다고 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교만에는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래서 의로움, 자비, 신의가 십일조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주님, 제가 무지에 대한 이 교만한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