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정진 강조하는 시토수도회 신부
박제화 된 가르침 대신 체험을 중시
동양 정신만이 문명비극 극복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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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인도인들. |
20세기 미국의 사상가 중에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은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호방한 시인이자 깊은 영성의 종교인이었으며, 반전 평화운동과 사회정의 구현에 적극적이었던 사회 활동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1915-1968)을 꼽을 것이다. 그가 33세에 쓴 자전적인 책 『칠층 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은 1948년 출판 당시 베스트셀러였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여러 판본으로 세계 전역에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가톨릭 수도원 지원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열독하는 책으로 『내셔널 리뷰』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 비소설류 10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프라드(Prad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미국인으로 명상을 중시하는 개신교 일파인 퀘이커 신도였다.
머튼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해 미국의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있던 외가로 이주했다가 1917년 뉴욕 근교 플러싱에 정착했다. 그 후 동생 존 폴이 출생했으나 머튼이 여섯 살 되던 해인 1921년 10월 어머니가 위암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맛보게 된다. 또 화가인 아버지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알제리 등지에서 예술 활동에 전념하면서 머튼은 동생과 함께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야 했다.
힌두 승려 통해 종교의 벽 극복
청소년기를 프랑스와 영국의 기숙사 학교에서 보낸 머튼은 18세가 되던 해인 1932년 캠브리지 대학에 합격하면서 성인으로서의 자유를 얻게 됐다. 그는 뒤늦게 얻은 자유를 만끽하려고 유럽 전역을 주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톨릭의 산실인 이탈리아 로마의 어느 성당에서 본 예수님 모자이크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됐는데 그 후 그는 여러 성당을 찾아 참배하고 틈틈이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머튼은 밤마다 죽은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있는 듯한 묘한 신비감을 체험한 후 오랫동안 자기를 따라다니던 공허감의 실체와 직면하게 된다. 그 후 작은 깨달음을 얻은 그는 신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기도를 드리며 어두움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을 간절히 갈구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한 뒤 트라피스트 수도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강력히 간직하게 됐다.
로마에서의 신비스러운 경험이 계속되면서 그는 라틴어 성경을 읽고 가톨릭 성당, 성공회 성당, 퀘이커 모임에도 열의를 가지고 참석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마음에 꼭 맞는 교회를 찾지 못했다. 이유는 조직과 규율로 움직이는 박제화 된 종교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미국 캠브리지 대학에서의 생활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자서전에서 그 때의 삶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에 따르면 머튼은 떠돌이처럼 다니면서 공부보다는 술집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성(性)적으로도 자유분방했다고 한다.
“장자는 나와 동류 인물” 자평
1935년 1월 머튼은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겼다. 컬럼비아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종교와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교내 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남긴 그 때의 글과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걸림 없는 자유정신의 소유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 활발했던 평화반전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에띠엔느 질송(Eienne Gilson)의 『중세 철학의 정신』이라는 책을 읽고 가톨릭 사상의 정수를 맛보게 됐고 특히 올더스 헉슬리(Auldus Huxley)의 『목적과 수단』이라는 책을 통해 종교의 신비주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머튼은 1938년 1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끝내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해 6월, 그는 그의 삶에 가장 큰 전환점을 제시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힌두교 승려인 마하남브라타 브라흐마차리와의 만남이었다. 이 특이한 힌두 승려는 그를 방문한 서양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들의 정신적 뿌리를 찾아 들어갈 것을 권유하고, 머튼에게는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마스 아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힌두교 승려가 가톨릭 책을 추천하는 것이 너무 신기했던 머튼은 그 책들을 열심히 통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학원 논문 주제가 된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제랄드 맨리 홉킨스가 어떻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신부가 되었는가에 대한 책을 읽고 불현듯 자신도 가톨릭 신도가 되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였다. 그는 당장 근처 성당으로 가서 신부를 만나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고 이내 교리문답 공부를 거쳐 영세를 받았다. 그는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 과정을 계속할 생각이었으나 이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인생의 행로를 수정해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그는 로마에서 산 라틴어 성경을 들고 아무데나 펴서 손가락 지피는 곳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의 시도에서 신약 누가복음의 “잠잠하라.”하는 구절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것이 하늘이 주는 계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묵언정진을 강조하는 시토(Cistercians)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오랜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1941년 12월 10일 마침내 켄터키 주 루이빌 부근 겟세마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자기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3일간 손님방에서 머물며 창문을 모두 열어놓기도 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 겨울 옷 한 벌, 여름 옷 한 벌만 입고 살았고, 병이 나도 약을 쓰는 것이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수행에만 전념했다.
수도원의 규율은 엄격했지만 머튼의 성실성과 재능을 모두 인정받아 수도원장의 특별 배려로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종교서적을 번역하고 성인들의 전기를 썼으며,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을 쓰는 일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 후 1965년부터는 수도원 내 암자에 칩거하면서 오로지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
머튼의 전기(The Man in the Sycamore Tree)를 쓴 그의 친구 에드워드 라이스에 의하면 머튼은 마지막 몇 년을 날이 새고 날이 질 때까지 평화와 동양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쓰고 설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저서 중 특히 동양 사상과 관계되는 책은 앞에서 필자가 교과서로 사용했다는 책들 외에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 『아시아 여행기』, 『비폭력과 간디』 같은 책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시작한 머튼은 1968년 태국에서 열리는 가톨릭과 비가톨릭 수도생활에 관한 학회에 참석하고, 가는 길에 아시아 몇 나라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수도원으로부터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여비가 없었다. 위대한 저서『칠층산』의 판매로 엄청난 수익금을 올렸지만 머튼은 단 한푼도 소유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출판사에 여행기를 써서 넘기겠다는 조건으로, 말하자면 입도선매(立稻先賣) 식으로, 마련된 여행비를 가지고 인도 다람살라에 있던 달라이 라마를 비롯하여 티베트 스님들을 만났다. 실로 뜻 깊은 만남이었다. 티베트 스님들은 머튼을 보고 생불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 머튼은 스리랑카 폴론나루와의 부처님 석상들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1968년 12월 10일, 54세 생일을 40일 정도 남겨 둔 머튼은 수도원에 들어온 지 꼭 27년 되는 날 태국 방콕의 숙소 목욕탕에서 허술한 전기 선풍기 줄에 걸려 감전 사고로 죽었다. 일설에는 반전 평화 운동을 하던 그의 행적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튼 그렇게 평화를 위해 애쓰던 머튼의 시신은 미 공군 B-52 폭격기에 실려 미국으로 운송된 후 겟세마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머튼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올더스 헉스릴의 책을 읽고, 그리고 힌두 승려 바라흐마차리를 만난 이후 이웃 종교들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졌다. 그는 여러 종교들 중에서 특히 선불교와 노장사상을 좋아했다. 그가 선불교나 노장사상에 심취한 것은 이들 사상이 그리스도교처럼 신비주의적 차원을 잃어버린 채 ‘설명(explanation)’에만 의존하는 박제화 된 가르침이 아니라 ‘체험(experience)’을 강조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초기 ‘사막의 교부들’과 선사들이 체험을 중시 여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중심으로 스즈키 다이셋츠와 서신교환을 하기도 했다. 『장자』를 너무 좋아해 번역서들을 읽으며 5년간 명상한 끝에 장자의 중심사상을 뽑아 시적 표현으로 재구성하여 『장자의 길』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장자를 두고 ‘나와 동류의 인물’이라고 했다.
달라이라마-스즈키 선사와 교류
머튼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 박사들이 선물을 가져다 준 까닭에 그리스도교 탄생이 있을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2000년이 지난 오늘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활기를 되찾으려면 다시 동방으로부터 선물이 와야 한다고 말했으며, 그것은 선불교와 노장사상 같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들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머튼은 꼭 그리스도교와 같은 종교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인간과 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비극을 촉진시키는 일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서구 사회가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틱낫한 스님, 도나 루이사 쿠마라스와미 등 세계 종교지도자들과도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우려 했다. 물론 머튼이 말하는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란 역사적 불교나 역사적 도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역사적 종교를 배출하게 된 인류 보편의 영적 바탕, 즉 명상의 침묵과 신비적 체험 속에서 만나는 ‘신 너머의 신’에 대한 체험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동양의 종교 심층에 깔린 정신적 유산을 귀히 여기고 거기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강조한 토마스 머튼의 글을 읽을 때마다 여전히 우리 자신의 유구한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등한시해 온 것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등잔 밑은 본래 어두운 법이라는 말이 유일한 변명거리가 될 것이다.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1037호 [2010년 0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