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수행은 네 가지 명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과 덧없음과 죽음, 카르마의 법칙, 윤회의 비참함 이다.
1.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은 대개 [1]귀한 인간 몸 받음 의 의미, [2]그 가치의 명상, [3]그 희유(希有)다.
(1) 귀한 인간 몸 받음이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발견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 저 그것이 참으로 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어 다시 있기 힘 든 횡재를 한 줄 알고 유익하게 써야겠다 결심할 것이다.
귀한 인간 몸받는 일은 이 금덩이와 같다.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은데 무슨 귀한 인간 타령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상 그렇 지 않다. 열 여덟 가지 점에서 귀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 된다. 이제 소개할 열 여덟가지 훌륭한 특성이 곧 귀한 인간의 조건이다. 티벳에서는 귀한 인간을 "자유롭게 다르마를 수행하 는 사람"이라 부른다.
# 여덟 가지 자유로움 #
(a) 지옥에 나지 않음 : 지옥 세계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이 끊일 새 없다. 다르마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한다. 사지(四肢)를 거센 불꽃 위에 올려 놓은 자가 한 순간인들 명상 을 할 수 있겠는가?
살생, 극심한 분노 따위가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다. (b) 굶주린 귀신, 즉 아귀로 태어나지 않음 : 아귀 세계의 생 명들에게는 채워질 줄 모르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다르마를 수행할 넉넉한 마음이 도무지 없다. 보통 사람들은 하 루만 굶어도 아무 일도 잡히지 않는 법이다. 아귀들의 비참함은 그런 경험으로는 상상이 안될 정도다.
분노와 탐욕(貪慾)이 굶주린 귀신세계에 태어나는 원인이다. (c) 짐승의 몸 받지 않음 : 이 짐승 세계의 고통은 우리가 직 접 볼 수 있다. 무지하고 지극히 어리석은 까닭에 짐승들은 다 르마에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예컨대 온 세상의 모든 종 교적 스승들이 모여서 쉬임없이 가르침을 베풀어 준 다 할지라 도, 한 마리의 개는 그것을 경청하는 대신 먹이를 기대하며 꼬 리를 살랑살랑 흔들 것이다.
그릇된 성생활(性生活)과 다른 사람을 짐승취급 하는 일, 다르마 배우기를 혐오함 등에 의해서 짐승 몸을 받게 된다. (d) 하늘 나라에 태어나지 않음 : 욕망없는 하늘 나라(色界), 욕망과 형체없는 하늘 나라(無色界)의 신들은 매우 오랜 생활동 안 삼매(三昧)의 축복을 즐긴다.
그리고 욕망이 있는 하늘 나라 (欲界)의 신들은 감각적인 즐거움 속에 파묻혀 한 삶을 지낸다. 복은 많지만 참된 다르마를 수행할 동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하 늘 나라에서 태어 난다. 그 세계의 삶은 남의 돈을 많이 빌려서 살 때에 얻는 즐거움과 같다.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어려움이 고개를 치켜든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동기는 없으되, 늘 착한 일을 하거나 하늘 나라에 태어나겠다는 강한 염원을 가지고 사 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보답이다.
(e) 다르마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그러한 곳에 나지 않음 : 다 르마의 견지에서 본다면, 일하고 먹고 자고 잠시 즐거울 요량으 로 또 다시 일어나 일해야 하는 인간의 삶이란 짐승의 삶과 별 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f) 그릇된 소견(所見)에 빠지지 않음 : 사람이 아무리 다르 마가 풍성하고 훌륭한 스승들의 많은 곳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만일 그 자신이 삿된 견해에 집착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좋 은 다르마는 결국 개 발에 편자다. 그릇된 소견은 참으로 위험 하다. 지난 세상에 뿌리고 가꿔놓은 선(善)의 싹을 파괴하여 깨 달음으로 가는 탄탄한 길을 봉쇄하기 때문이다.
(g) 그릇된 수행에 몰두하지 않음 : 모든 에너지를 그릇된 수 행에 쏟아 넣는 사람들이 있다.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몸과 마 음을 학대하며, 다르마의 봉리마라(Angulimala)이야기가 대표적 이다. 앙굴리마라의 스승은 그를 가르칠 때,'천 명의 사람을 죽 여서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염주를 꿰어 목에 걸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앙굴리마라가 자기 스승의 말을 곧이 듣고 실천하여 이제 마지막 한 명의 희생자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도 붓다를 만나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크 게 뉘우치고 힘껏 노력한 결과 마침내 앙굴리마라는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h) 백치로 태어나지 않음 : 학습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이 가 르침을 받아 한 줌의 지혜라도 얻기는 매우 어렵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거듭 명상해 보라. 그렇게 하면 죽음이 닥쳐 왔을 때 자신이 삶을 살아오면서 저지른 옳지 못한 행위들 이 세 가지 천한 세계 (지옥, 굶주린 귀신, 짐승의 세계)에 몸 받을 요인이 되는지 어떤지를 알 수가 있다. 되풀이 해서 명상 을 해 나가는 동안,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심은 점점 사라질 것 이다. 모든 사람들은 "여덟 가지 자유로움"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엄연히 살아 있으면 그릇된 소견없고,백 치가 아닌 한, 옳고 그름을 가려 바른 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난 세상에 선한 씨를 뿌린 결과로 부여받 은 이 삶의 귀한 싹을 기꺼워 해야 한다. 행여 잃어버리지나 않 을까 조심하면서 소중히 가꿔야 한다.
지옥같은 감옥을 탈출한 죄수는 자유를 회복한 기쁨을 무한히 느낄 것이다. 동시에 그 는 다시 체포될까봐 몹시 두려워 한다. 자신을 내내 괴롭히던 벼룩을 가까스로 잡아낸 눈먼 사람은 어물거리다가 바보처럼 그것을 다시 놓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 생에 인간몸 받은 이도 이 귀한 선물을 한 순간에 쓸모없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음을 굳세게 먹어 높디높은 명상을 실천하려 는 큰 동기가 세워진다.
# 열가지 축복 #
가) 개별적인 복 다섯 가지
a. 사람으로 태어남.
b. 다르마의 중심지에 태어남.
다르마의 중심지는 다르마가 융성한 곳이다.
c. 결함 없는 몸을 소유함. 건강하고 오관(五管)이 온전한 몸이 결함없는 몸이다.
d.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쫓아 다섯 가지 극악한 죄를 짓지 아니함. 다섯 가지 극악한 죄란, 어버이를 시해함, 아라한을 죽임, 붓 다의 몸에 피를 냄, 교단(敎團)의 화합을 깨뜨림 등이다.
e. 붓다의 말씀과(經)과 큰 스승들의 해설(論)과 계율(戒)을 신봉하여 실천하고자 함. 대부분의 사람들은 붓다와 다르마를 선뜻 믿으려고 하지 않는 다. 사실상 믿음은 먼 과거부터 조금씩 쌓아온 종교적인 카르마 를 바탕으로 할 때 쉽게 생겨나는 법이다.
나) 복된 환경의 다섯 가지
f. 붓다가 계시는 세상에 태어남. 우선은 하고 많은 세상 가운데 붓다가 계시는 세상에 태어나 기 어렵고, 설사 그곳에 태어나더라도 붓다의 가르침을 신봉하 여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g. 붓다가 다르마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 태어남.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에 출현하신 붓다가 가르침을 펴지않고 곧바고 완전한 니르바나에 드시는 일도 있다.
h. 붓다의 가르침이 아직 세상에 전해지고 있을때 태어남. 이 또한 얻기 힘든 특별한 복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아직 심오한 다르마를 전하는 스승들이 살아 계시는 곳 이다.
i. 붓다의 가르침 곧,다르마가 행해지고 있는 세상에 태어남. 주위에 다르마를 실천하는 이웃들이 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 적(鼓舞的)이다.
j. 생활수단이 넉넉한 곳에 태어남. 다르마의 수행에만 전심 전력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풍부함이 필요하다. 성취자 루이빠(Siddha Luipa)는 생선 찌꺼기로, 밀라 레빠(Milarepa)는 풀죽을 쑤어 연명하며 수행했다. 넉넉한 환경 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왜 감각적 기쁨만을 추구하며 그들처럼 수행하지 못하는가?
이 열 여덟 가지 자유를 죄다 갖추기는 아주 힘들다. "귀한 인간 몸"을 자신이 부여 받았다는 사실에 가치를 두는 일 은, 앞에서 이야기한 사나이가 금덩어리라는 확신을 갖는 것과 다름없다. 놋쇠나 구리도 누런 빛을 내긴 하지만, 금은 스스로 흉내 낼 수 없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고상한 세계와 천한 세계의 중간 지역에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 어림에서 바르게 행동할 기회를 놓친다 면, 끝내는 이 "귀한 인간의 몸"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점을 굳 게 새겨 다르마의 실천에 몰두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2) 귀한 인간 몸의 가치에 대한 명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다면, 거의 모든 세 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고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붓다의 바른 깨달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앞서 열거한 열 여덟 가지 조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완전한 자유" 가 저절로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귀한 인간 몸"의 진 정한 가치는 당사자가 그걸 올바르게 사용할 때에만 발휘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귀한 몸으로써 세상을 다 정복한다 하 더라도 "완전한 자유"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윤회의 소용돌이에 영문도 모른 채 휩싸여 도느라고 고개 한번 떳떳이 쳐들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르다. 저마다 결단하여 조잡한 카르마(業)을 떨쳐 버리고, 깨달 음에 대한 열망과 큰 자비심을 발휘하면 각자 노력한 만큼의 자 유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 생(生)에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 는 일도 가능하다. 이 몸이 다르마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귀한 인간의 몸"이란 사실을 한시바삐 알아차려야한다.
3) 귀한 인간 몸 받기의 희유(希有)함에 대한 명상
이책을 읽고 잘 기억하는 일만이 능사(能事)는 아니다. 읽고 간직한 바를 일상(日商)의 마음 씀씀이에 적용하고 명상으로 실 천하는 일이 긴요하다. 적어도 매일 세 차례씩 반복해서 행하노 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모양이 크게 바뀐다. 여느 사 람이 돈 벌이가 수월한 일에 힘을 쏟고 싶어 하듯이,
다르마의 벗들은 자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수행에 던져 넣고 싶어한다. 이 명상이 적절히 행해지지 않으면 작은 결실도 기대할 수 없 다. 급기야는 '애당초 쓸데 없는 짓을 시작한 게 아닐까?'하는 의심만 잔뜩 싸안고 주저앉기 십상이다.
'이번 생에서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생에서나 잘 해봐야겠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계산이다. 또다시 "귀 한 인간의 몸" 받을 기회가 올 확률이 극히 작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희망을 경계하기 위하 여 다음의 명상이 제시된다.
이 명상은 아래의 순서에 따라 행해진다. . 귀한 인간 몸 받을 확률이 적음 . 눈 먼 거북이의 비유 .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원인행위
a. 귀한 인간 몸 받을 확률이 적음
하늘 나라 신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지옥 중생들의 수는 굶주린 귀신(아귀)의 수보다 많고, 곤충, 짐승들의 숫자는 인간의 수를 능가한다. 인간 세계에서도 열 여덟가지 조건을 두 루 갖춘 이는 드물다. 무슨 이유로 귀한 삶을 사는 이들은 많지 않고, 비천한 세계만 자꾸 비대해 지는가? 바르지 못한 행위들 만 셀 수 없을 정도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바르게 행동하기 위 해서는 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데, 그것이 시냇물을 언덕배기로 치흐르게 하는 일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보리행경(Bodhicaryavatara)에서 산티데바 보살은 노래했다.
이 귀한 삶 얻기 어렵거늘 가까스로 도(道)의 몸 되어서도 부질없이 세월만 소비하네 불현듯 저 검은 숲 속으로 끌려가면 언제나 다시 사람 속을 거닐꼬.
사정없이 몸과 마음 후리쳐 몰면 윤회의 저 강 건널 수 있네 이 배(온전한 몸) 다시 얻기 어려워라 오, 어리석은 이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닌 것을.
또 밀라레빠가 사냥꾼에게 충고했다.
일찍이 말하지 않던가 귀한 인간 몸받기 어렵다고 그대 삶이 아직껏 그러할진데 이 말들은 진실을 잃었느니라.
비록 겉 모양은 같지 않아도 사냥꾼과 그가 사냥하는 짐승은 동일한 미로(迷路)에서 헤매고 있는 셈이다. 바르지 못한 행위 는 희귀한 까닭에 열 여덟 가지 복된 조건을 부여받은 이가 매 우 드물다. 여기에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훌 륭한 비유가 있다.
a. 눈 먼 거북이의 비유 앞에 소개한 산티테바보살의 시(詩)는 단순한 우화가 아닌 진 지한 명상거리로 받아들여 져야 할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깊이를 잴 수 없는 큰 바다 밑에 백 년마다 한 번씩 물 밖으 로 고개를 내미는 눈 먼 거북이가 살고 있었다. 고개를 내밀고 잠깐 동안 떠있다가, 금새 바다 밑의 안식처로 되내려가곤 하였 다. 마침 눈 먼 거북이가 물 표면에 떠오를 그 무렵, 금빛나는 멍에 하나가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쉬지 않고 흘러서 그 바 다까지 떠 내려왔다. 공교롭게도 때 맞추어 물 위로 떠오르던 거북이의 고개가 금빛나는 멍에의 한 가운데를 정확히 뚫었다.
이 비유에서 거북이는 윤회에 허덕이는 어느 생명을 상징한 다. 큰 바다의 표면은 복된 세계이다. 그 거북이는 어리석음에 가리워 지혜의 눈을 잃어 버려서,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구 별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 처럼 눈이 멀어 있다.
인간이 진지 하게 다르마를 실천하고자 할 때, 심지어는 경전을 읽거나 진언 을 외고자 할 때조차 늘 그 자신의 육체와 언어와 생각이 스스 로를 방해하듯이 거북이 또한, 자기 자신의 딱딱한 등껍질에 둘 러 싸여 있다. 또 거북이가 살고 있는 깊은 바다 속은 우리가 사는 낮고 열등한 세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 넓은 바다 속 에 살면서 백 년마다 한 번씩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거북이 가, 어쩌다가 파도에 밀려 떠 내려온 금빛나는 멍에에 목을 걸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적다. 마찬가지로 짧은 인간의 목숨을 받고 태어나 다르마를 실천할 의지를 갖는다는 사실도 매우 드 물고 귀한 일이다. 한량없는 세월 중에 붓다가 계시는 시간은 아주 짧다. 혹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신다 하더라도 다르마의 수 레바퀴를 굴리시는 일이 드물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있는 다 르마의 전통(불교의 스승들)을 만날 수 있는 밝은 경전이 있지 만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 숙고함으 로써 열 여덟가지 복된 조건의 귀중함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c.귀한 인간 몸 받기의 원인행위
밀을 수확하고자 하는 농부는 우선 씨를 뿌린다. 같은 이치 로,귀한 인간 몸 받기를 원하면 특정한 씨앗 - 도덕적이고 깨끗 한 행위를 습관화하는 것 - 을 뿌려야 한다. 수 많은 도덕적 행 위 가운데서 특히 열 가지 그릇된 행위를 버리는 것을 귀한 인 간의 씨앗으로 여긴다.
그 열 가지란 몸으로 짓는 세 가지(살 생, 도둑질, 바르지 못한 성행위) 입으로 짓는 네 가지(거짓말, 중상 모략하는 말, 욕지거리, 경솔한 말) 마음으로 짓는 세 가 지(탐욕, 해코지 하려는 생각,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밀라레빠는 말한다.
깨끗하고 바른 삶 사는 이가 만나보기 힘드니 귀한 인간 몸받아 나는 이 참으로 드무네
세상의 인구가 점점 늘어가고 있기 때문에 다시금 인간 모습 으로 태어날 기회가 훨씬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귀한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는냐 하는 데에 있다. 기본적으로 열 가지 바르지 못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음은 물론 베푸는 일(보시), 참는 일, 여덟 가지 세속의 관심사에 초 연함 등이 장차 귀한 인간의 몸 받을 원인을 이룬다.
항상 반복 해야 할 것은, 나의 속에 온전한 인간 몸 받을 원인이 형성되고 있는 가 하는 자문(自問)이다. 상점에는 팔 물건들이 잔뜩 진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상품을 사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자신의 돈 지갑을 검사해 봐야 하지 않을까?
도덕성(Sila:戒)은 모든 성취, 특히 삼매(samatha:三昧)와 선 정(dnyana:禪定)의 기본 조건이다. 다르마의 맛을 처음 본 때부 터 붓다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도덕성(戒), 사마디(定), 지혜 (般若)의 세 가지 공부를 균형있게 실천해야 한다. 이 세가지 공부의 관계를 상징하여 다르마의 수레바퀴에 비유하였다. 도덕성(戒律)은 바퀴의 중심 부분을 나타낸다. 다르마의 모든 성취가 이 도덕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올바르게 가도록 통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마디(定)는 테두리의 쇠 에 비유하였고, 또 수레바퀴의 여덟개 살은 어리석음을 양단(兩 斷)하는 지혜(智慧)의 칼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수레 바퀴의 양 면에 마주 앉아 위 쪽을 쳐다보고 있는 두 마리의 사슴은 지혜 와 방편(方便,upaya)을 상징한다.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지혜/방편, 이 두 가지가 필수 요건임을 알아야 한다.
2. 덧 없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
이 명상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죽 음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생을 초월한 동반자-다르마이다.
1) 피할 수 없는 죽음
삼계를 윤회하는 한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하늘 꼭대기에 올라간다 할 지라도, 바다 속에 들어가거나 산을 쪼개고 그 가 운데 몸을 숨긴다 할지라도 죽음은 반드시 그를 찾아내다." 육신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는다. 큰 지혜로 깨달음을 열어 막강한 신통력을 갖추었던 인도의 대학자, 나가르쥬나(Nagarju na)나 위대한 성취자 마하리쉬(Mahasiddhas)와 같은 이들도 몸 을 떠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도 열반을 맞 이하여, 현상계가 덧없다는 이치를 스스로 뭇생명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요컨대 죽음이 손을 뻗치면, 이 세상의 모든 기술과 박학다식 이 한결같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므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르마임을 자각할 일이다. 구루 파담빠,상가이(Phadampa,Sangay)는 말한다. "틴그리(Tingri)의 민족들이여! 태어나는 그 순간 이미 그대들 은 죽음의 손아귀에 잡혀있다. 서둘러라! 허비할 겨를이 없다." 도살장에 끌려온 왕이나 다를 바 없다. 에스커레이트의 발판 같은 1분 1분이 우리를 죽음의 층으로 밀어 올린다. 시커먼 카 르마의 입 앞에서 마치 교수대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두려움에 전율한다.
밀라레빠는 말한다. "해질 무렵 서산 골짜기 그림자가 덮쳐 오듯, 덧없음은 도처에 깔린다. 필사적으로 도망하여도, 어둠은 끝내 그대를 찾아내어 덧없음의 덮개를 씌우리라. 이제 어디로 숨을꼬?" 지난 세상에 행한 행위의 결과로 이 삶의 인간 수명을 획득했 다. 단 1분이라도 죽음을 늦추는 일은 그의 능력 밖이다.
인간 의 몸은 지붕이 약한 낡은 집과 같다고 밀라레빠는 말했다. 세 월이 흐를 수록 작고 큰 빗물에 점점 상하며, 쉬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에 이곳저곳이 숭숭 뚫리어 어느 틈인가 비가 샌다. 그러나 비록 약한 집일망정, 바른 깨달음의 터전으로 요 긴히 사용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비유하는가 하며 불쾌히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쾌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덧없음에 대한 제한된 설명으로는 다르마의 바른 의미를 드러내기 힘들다. 싯 다(Siddhas)와 탄뜨라의 신(Tantric)들이 뼈로 만든 장신구와 해골 바가지 등과 함께 묘사되는 이유도 죽음의 보편성을 상기 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점이 분명히 인식되면 당장 다르마를 수 행하겠다는 결심이 설 것이다.
2) 죽음은 언제 들이 닥칠 지 모른다.
죽음의 여러가지 성질들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인 식만으로는 다르마 수행에 완전한 동기를 줄 수 없을런지 모른 다. 죽음이 예고없는 방문자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당장이라 도 수행을 시작해야겠다는 내부적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죽음의 시기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삶의 설계를 세우는 데 차질이 생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명에는 보증 (保證)이 없다. 노인이 젊은 이보다 일찍 죽는다는 법칙에 조차 예외가 허다하다. 재산,권력,지혜,젊음은 죽음 앞에서 한가 지로 무력하다. 병약한 사람도 튼튼한 사람도 죽음의 법정에 서 면 평등하다. 어제까지 정정하던 사람이 오늘은 황천객이 되기 도 한다. "나" 만은 그렇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사람의 내부에는 늘 살 요인보다 죽을 요인이 훨씬 많다. 423 가지 잠재적인 병이 종이에 묻은 기름때처럼 몸 속에 골고루 퍼 져 있다. 그것들을 몸 밖으로 영원히 추방할 약은 없다. 우연히 한 가지의 병인(病因)을 제거했다 할지라도 새로운 병의 씨가 금새 그 자리를 메운다. 가련한 목숨은 맹수에게 쫓기고, 귀신 에게 홀리며, 사람들∮사물들에 의해서 마냥 겨누어진다.
몸은 뎃(地), 물(水),불(火),공기(風)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 어져 있다. 네 요소가 고르게 유지될 동안은 건강하겠지만, 만 일 조금이라도 조화가 깨지면 당장에 병(病)의 조짐이 생긴다. 이 네 요소는 대나무통 안에 사는 네 마리의 독사와 같다. 머리 를 가지런히 세워두면 조용히 지내지만, 한 마리라도 고개를 두 드러지게 치켜 들 경우에는 당장에 서로 해치려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가 극성(極盛)해짐으로써 죽는다. 그러므로 몸이 네 가지 요소와 결별할 때까지 항상 이 러한 점에 유의하여 그것들을 조화롭게 다스려야 한다.
대개 육체의 부서지기쉬운 이러한 성질과 시간의 침식 작용이 짧은 삶을 갉아 먹는다. 그러나 늘 우리는 시간이 삶의 매듭을 풀어 젖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어쩌면 슬픈 심정이 되 기도 하겠지만, 그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도리어 시간은 삶 의 스승의 되고 조력자 노릇을 한다. 삶은 바람 앞의 기름 등잔불이다. 우리의 생활을 유지시키고 편리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조차 잦은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 는 실정이다. 농약으로 기른 음식물, 자동차 등과 같은 것처럼.
밀라레빠는 말한다.
"그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어우러질 때 죽음이라는 말을 까맣게 잊고 있겠지만 청천(靑千)의 날벼락처럼 죽음은 그대의 뒷통수를 때릴 수도 있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 자신 의 목숨을 위하여 걱정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의 위험은 평상 시에도 늘 개개인에게 붙어다닌다. 건강하던 이가 별안간 죽는 것을 목격하면, 이유 모를 강한 불안에 휩싸인다. 자기 자신도 인간인 한, 돌연한 죽음에 얻어맞을 확률이 있다는 본능적 직관 때문이다.
티벳의 한 스승은 말했다.
"새벽을 무사히 맞이할 기약도 없으면서 밤늦도록 무사히 일생(一生)을 설계하는 이여! 사신의 손아귀가 목을 누를 때 비로소 떨며 후회하려는가?"
세속적인 목적에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사는 우리 모두가 귀 담아 들을 교훈이다.
나가르쥬나(Nagarjuna)는 말했다. "삶은 나약하고 곧잘 뒤집힌다.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는 물거 품 마냥 불안정하고 들뜬다. 이번 호흡이 끝나면 반드시 다음 호흡이 이어진다고 여기는 사람들, 이 밤을 자고나면 깨어나 새 로운 아침을 맞으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그들의 태연자약함이 참으로 경탄스럽다."
"머리칼과 옷이 불붙더라도 그 때문에 근심하지 마라. 그 순 간 죽음의 참 모습을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동기를 갖는 다면, 그보다 더 귀중한 계기는 없으리라." 티벳의 위대한 스승들은 극심한 상처를 입고서도 명상을 계속 하곤 했다. 그러한 자세를 본받아 어떤 경우든 - 꿈 속에서 까 지 - 수행이 계속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숙달시켜야 한다. 자, 주저하지 말고 당장 수행을 시작하기로 결단하자.
3) 생을 초월한 동반자 - 다르마
죽음이 덮쳐왔을 때, 이제까지 쌓아온 수행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면 죽음의 체험 자체를 명상의 과정으로 삼으면 된다. 죽음은 병을 얻어서 자연스럽게 겪는 수도 있고, 돌발적인 사 고 등으로 말미암아 급작스레 당하는 경우도 있다. 두 경우의 경험 과정은 같지 않다. 여기서는 병을 얻어 자연스럽게 겪는 죽음을 설명한다.
의사가 치료의 모든 노력을 포기할 때부터 그 "경험"은 비롯 된다. 건강한 사람은 입맛대로 변덕 부리며 음식을 즐기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물 한 모금도 제대로 삼킬 수가 없다. 너무 민 첩하여 때때로 화(禍)의 뿌리가 되기도 했던 그의 혀와 입술은 이제 한 마디의 말도 구사하기 힘들다. 뻔질나게 걸치고 다니던 고급 의복과 값비싼 패물도 무용지물이다. 따스함과 돋보임이 더 이상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나 돌에 입히 고 씌우는 것처럼, 세상의 어떤 것도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못 한다. 머리칼 한 올마저 다 버린 채, 그는 춥고 쓸쓸한 길을 혼 자서 떠나야 한다.
숙달된 다르마 수행 습관이 유일하게 그를 도울 수 있다. 이 제 그 이유를 명확히 인식한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힘껏 다르마 의 수행에 몰두하겠다는 결심이 설 것이다. 죽음이 어느날 갑자 기 창문을 두드리면, 당장 맞이할 준비태세를 갖춰야 하기 때문 이다. 수행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일을 치를 때 공포와 슬픔을 이기는 힘도 커지는 법이다.
평소에 실천해온 명상을 조용히 반 복하거나 일생동안 숭배해 온 붓다의 형상을 기억해내어 상기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거나 귀한 인간의 몸을 받기 위하여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후회와 한탄 속에서 매우 산란한 마음으로 죽어 갈, 다르마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
죽음이 가까이 오면, 양팔과 양다리처럼 의식을 떠 받쳐오던 네 가지 요소들이 힘을 잃는다. 육체는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 며 이윽고 육체에서부터 의식이 분리된다. 이 과정은 죽어가는 이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주위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바깥 징표(徵表)이고 둘째 는 죽어가는 자 자신이 느끼는 내부적 경험이다. 몸의 네 가지 요소 가운데 먼저 지대(地大:굳고 단단함을 성 질로 하고 몸전체를 지탱하는 역활을 하는 바탕)의 힘이 시들어 진다.
첫째, 몸의 전반적 통제력이 멎는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여름 한낮에 아스팔트로 부터 발산 되는 뜨거운 기운과 같은 열기(熱氣)를 느낀다. 그 열기로 말미암아 수대(水大:축축함을 성질로 하고, 생명력 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말라 간다.
첫째, 몸이 바짝 마른 나무처럼 되어 간다. 피부는 빛과 색깔 을 잃고, 입안과 눈의 물기가 사라진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엷은 안개가 천지를 뒤덮은 듯한 모습을 본다. 이제는 화대(火大:따뜻함을 성질로 하고 성숙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사그라 든다.
첫째, 몸이 차디차게 변한다. 머리에서부터 심장을 향하여 몸 이 식어가는 사람은 바람직하지 못한 후생(後生)을 얻는다고 여 겨진다. 반면에 심장부터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훌륭한 세상에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는 모습을 본다. 끝으로 풍대(風大:움직임을 성질로 하며 성장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사라진다.
첫째,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그 횟수가 눈에 띠게 즐어든다.고 통스러운 안간힘이 한참 계속되다가, 한 번의 긴 날숨(呼)을 마 지막으로 그의 삶은 막을 내린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고요하고 어슴프레한 빛을 경험한 다.
중음(中陰)의 상태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두려움과 환 상이 모두 걷히게 되고, "자아(self)"에 대한 조잡한 인식도 없 다, 생전에 명상의 수행을 숙달한 사람은 이러한 죽음의 과정을 겪는 동안, 조금도 당황함없이 순간순간을 찬찬히 음미하며 조 용히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릴 것이다. 외부적인 삶의 징표가 사라졌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바로 처리해 버리 지는 않는다.
죽는 자의 내부적 경험은 며칠간 더 계속될지 모 르기 때문에, 당장 그의 시체를 묻어버리거나 장례지내 치우면 참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몸의 좌우에 있는 에너지 채널(nadis)을 단단히 죄어 에너지의 순환질서를 통제한다. 그러나 죽음과 함 께 몸의 통제력과 좌우 에너지 채널은 자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달아난다.
이러한 점 외에 따로 징표는 없다. 이제 그는 달이 떠오르기 직전 하늘을 가로질러 퍼지는 희미한 빛과 비슷한 것을 느낄 것 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아 정수리의 차크라 (cakra:정신 물리학적인 중심)에 지니고 있던 정기(精氣:white cell)가 심장의 차크라로 보내질 때 발생한다. 그가 다음에 보 는 것은 해질 녘, 하늘에 퍼지는 노을과 같이 붉고 아련한 빛이 다. 이것은 어머니로 부터 받아 배꼽 아래의 차크라에 지니고 있던 혈기(血氣:red cell)가 중앙에너지 채널(central radi)를 타고 심장의 차크라로 보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두가지 기(氣)가 심장 차크라에서 만날 때 두 단계의 경험 이 시작된다. 우선 칠흙같은 어둠이 닥쳐오고 그 자신은 의식을 완전히 잃는다. 깊은 무의식의 바다에 잠겨있는 시간이 오래될 수록 그에게는 유리하다. 바로 다음 단계는 수행에 가장 적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모든 형체와 색깔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을 본다. 그 러나 그 상태가 수냐다(sunyata:空)인 것은 아니다. 이 무렵의 의식은 미묘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상태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 라져가는 현상에 불과할 것이므로 헛되이 소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탄트라의 수행을 깊이 한 사람은 이 미묘한 의식상태를 수냐타의 명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죵까빠(Tsonh Khapa)도 다른 많은 성취자들처럼 이러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성취했다. 일반적으로 이 단계가 지나면 기(氣)는 흩어져 몸을 떠난다. 혈기는 콧구멍을 통하여, 정기는 요도(尿道)를 통하여 각각 빠 져 나간다. 잠잘 때나 죽을 때 사자와 같은 자세로 누우면 이 두 가지 징표를 볼 수 있다.
붓다가 인간의 몸을 버리실 때, 오 른 편 옆구리를 땅에 닿게 하고 누우신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심장 차크라를 떠난 의식은 곧장 중음신(中陰身,bardo body) 으로 들어간다. 이 중음의 상태는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하여간 그 속에 들어간 존재는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과거의 행위로 말미암아 새로운 육신을 부여받게 된다. 윤 회의 싸이클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다르마는 죽음의 경험을 자유를 얻기 위한 좋은 기회로 삼으 라고 권한다. 다르마의 교훈을 실천하면 커다란 이익을 얻기 마 련이다. 이익의 정도는 개인의 수행 능력에 비례한다. 최고도의 수행 능력을 가진 사람은 붓다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고, 평 범한 능력의 소유자는 수행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부여받고 재생 하는 이익을 얻기도 한다.
이제까지 얘기한 명상의 힘을 키우려면 아래와 같은 기도를 반복하면 좋다.
"온 우주의 부처님들께 기원하옵니다. 오직 한 번 뿐인 온전한 이 삶 잠깐만에 부서지면, 다시 얻기 어렵거니 하찮은 일에 한눈 파는 일 없이 다만 이 삶의 진실한 모습 낱낱이 깨달아 마치도록 하소서"
3. 카르마의 법칙
카르마(業)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
첫째,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 평범한 존재의 행위. 여섯 세계(六道)윤회의 원인이 된다. 둘째, 행복을 부른는 카르마; 성자의 행위, 지옥, 굶주린 귀신, 동물의 세계에 결코 태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윤회의 법에 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다.
1)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有漏業)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는 어떻게 해서 생길까?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과 실랑이를 벌일 때 '나' - '무엇보다도 내가 옳다'던지 하는 식의 - 에 대한 강한 고집이 일어나면, 일 하고 먹고 공부하고 죽고 하는 상대적인 "나"가 마치 절대적인 자체의 성질을 가진 것처럼 독단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밤 길을 걷던 사람이 길 위에 떨어져 있는 새끼줄을 뱀인줄로 잘못 알고 놀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결국 모든 갈등은 덧없고 상 대적일 따름인 "나"에 독립자존(獨立自存)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이 상대적인 "나"가 "나"의 완전한 부정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내가 먹고 일하고 잠자 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 이다. 이 상대적인 "나"와 무지로 인하여 독단한 절대적인 듯이 보이는 "나"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면 수냐타(空)의 대한 체험 은 불가능하다.
모든 번뇌의 뿌리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그 어리석음("나"에 대한 착각)에 의하여 증오, 집착, 그 외의 모든 갈등이 생겨난 다. 그리고 그 번뇌가 남을 해롭게 하려는 욕망을 일으킨다. 그 러한 욕망이 일어나면, 곧 정신적인 타르마(意業)가 발동한다. 정신적인 카르마는 의식의 흐름에 어떤 인상을 남기게 되고 적 합한 경우를 만나면 구체적인 행위로 표출된다. 정신적인 카르 마는 몸이나 발의 카르마(身業. 語業)보다 작용 속도가 훨씬 빠 르다.
단 일분 동안에도 많은 종류의 정신적인 행위가 행해질 수 있다. 남을 해롭게 하려는 욕망도 이와같이 몸과 말의 행위 를 통해 구체화 될 정도로 깊어지면, 의식의 흐름에 새겨지는 인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밤이 가고 새벽이 와도 상처 받은 의식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 다. 무수한 종류의 선하고 악한 카르마가 우리의 마음속에 저장 되어 있다.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물론 이미 결실을 거두었거나 바른 수행을 통해 카르마의 상흔을 제거한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2) 행복을 부르는 카르마(無漏業)
다음의 예(例)는 행복을 부르는 카르마의 생성 과정이다. 어 떤 사람이 한 마리의 새를 죽이려는 광경을 보게 될 때, 측은한 느낌이 우러난다. 그 순간 '저 가련한 목숨을 구해야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때 행복을 부르는 정신적인 카르마가 움직 인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흐름에 바람직한 인상을 새긴다. 그 리고 그 의식이 몸이나 말의 행위로 구체화 될 경우, 새는 목숨 을 건지고 그의 자비로운 카르마는 넓고 깊어진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 남의 행복인 것이다.
카르마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개인적인 카르마로써 한 사람에 의해 창조되고 그 결 과도 그 자신이 겪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적인 카르마(共業)로 비슷한 환경에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심어지 고, 그 결실도 다같이 거두는 것을 말한다. 바로 숙명적으로 묶 이어 함께 울고 웃는 공동운명체를 구성하는 요인이다.
붓다가 세상에 계실 때, 한 무리의 덕 높은 비구니들이 음식 시중드는 여인네 한 사람을 데리고 암자에 모여 살았다. 어느날 암자의 오두막 전체에 불이 붙었다. 비구니들은 이 뜻밖의 재난 을 피하고자 저마다 신통력을 써서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그러 나 카르마의 위력은 비구니들의 신통력보다 더 강력하여, 비구 니들을 모조리 불더미 속으로 끌어 당겼다. 그때 그 가운데에서 가장 덕 높은 비구니는 자신들이 지난 세상에 저질렀던 한가지 일을 기억해내었다. 자신들이 지난 세상에서 어린아이였을 때 벽지불이 사는 오두막을 불 질러 그를 타죽게 한 일이 있었다. 한사코 그러기를 반대한 사람은 지금 음식 시중을 드는 여인네 혼자 뿐이었다.
결국 비구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바람직하지 못한 카르마를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청산한 것이다. 다만, 음 식 시중 드는 여인네는 하수구를 통해 달아나 혼자 목숨을 구했 다. 더불어 문제되는 것은 행위의 동기와 성취에 따라서 결과가 복잡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행위의 동기와 성취가 명백히 올바르다면 그 결과 역시 바람 직하고 올바르지 않다면 그 결과는 바람직 하지 않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행위의 동기와 성취가 단순하지 않고 다분히 복합 적이라면 그 결과 또한 뒤섞여 나타난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이나 음식물을 베풀면서 속으로는 깔보는 마음을 품 었다고 하자. 보시한 덕분에 장차 재물은 얻겠지만, 상속받을 재산에 법률적인 문제가 생기는 따위의 어려움을 아울러 만나기 십상이다.
다음과 같은 카르마는 보답의 무게가 특별하다. a. 부모님, 스승, 보디삿트바(보살), 병자나 곤경에 처한 사 람에게 행한 행위의 보답은 보통보다 정도가 크다. b. 존경심을 갖고 행한 카르마의 보답이 무겁다. c. 강한 증오나 탐욕은 카르마의 영향력을 진폭시킨다. d. 행위할 때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그 보답이 영향을 받는다.
카르마는 세 가지 독(三毒: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일 어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재물에 집착하여 남의 것을 훔쳤다면 그것은 탐욕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하고 살생을 했다면, 그것은 성냄의 번뇌로 말미암은 행 위다. 그때 그는 죽이는 편이 이롭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이는 동시에 어리석음의 번뇌로 말미암은 셈이다. 어리석음 중 에서도 가장 큰 어리석음은 "나"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그것은 실제로 모든 번뇌의 뿌리이다.
다시 카르마는 다음의 둘로 구분한다. a. 뭇생명을 여섯 세계 가운데 한 곳으로 "집어 던지는" 카르 마. a. 같은 세계에서 뭇생명의 생긴 모습과 생활환경을 "차별지 는" 카르마.
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어울린다. 첫째, 집어던지는 카르마와 차별지우는 카르마가 둘다 행복을 초래하는 종류일 때, 그 결실은 바람직한 세계에의 탄생과 훌륭한 생활환경이다. 특히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요한 조건은 생명을 해 치지 않고 계율(戒律)을 준수하는 것이다.
도둑질, 살생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즐겨 남에게 베풀기까지 한다면, 그의 삶은 온갖 훌륭함으로 장식된다. 남을 업수이 여기지 않고 겸손과 예의를 갖 추면 다음 세상에 권력과 자유로 보답받는다. 거기에다가 건강한 신체는 "참음"의 결실이다.
둘째, 집어던지는 카르마와 차별지우는 카르마가 번뇌를 초래하 는 종류일 때, 그 결실은 고통스런 세계에 태어나, 날 때부터 죽 을 때까지 숱한 고초를 두루 겪는다.
세째, 집어던지는 카르마는 번뇌를 초래하는 종류이고, 차별지 우는 카르마는 행복을 초래하는 종류일 때에는 그가 비록 나쁜 세 계에 태어날지라도 꽤 괜찮은 생활환경을 만난다. 가령, 애완용 개로 태어났다면 일단 그는 나쁜 세계에 던져진 것이 틀림없다
.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쁘게 생긴 덕분에 좋은 주인을 만나 잘 먹 고 귀염받는 처지가 될 경우, 그는 제대로 결실을 본 셈이다. 넷째, 반면에 사람 몸을 받기는 했으나 내내 궁핍과 고통을 못 벗어나는 경우는, 행복을 부르는 집어던지는 카르마와 괴로움을 초래하는 차별지우는 카르마가 함께 어우러진 결과이다.
카르마의 또 다른 특성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일부러 짓지 않은 몸과 말의 행위.
b. 그저 마음으로만 지은 행위.
c. 마음으로 짓고 행동에 옮긴 것.
d. 결실이 현재의 생(生)에 맺히는 강력한 카르마.
e. 다음 생에 보답받는 카르마.
f. 다음 다음 생, 혹은 그 다음 생에 보답 받는 카르마.
g. 카르마 법칙의 필연성: 행위의 결과는 어김없이 닥친다.
h. 작은 행위로 큰 보답을 받을 수 있다.
한 젊은 여인이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붓다
는 사람들에게, 그 여인이 이 행위의 결과로 아무 때 아무 곳에서 벽지불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여인의 남편은 그 러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정도의 작은 행위로 그토록 큰 보 답을 받는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까닭이다.붓다께서 미소지으 며 설명했다.
"한 알의 씨앗이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되듯이,카르마의 보답 역시 헤아릴 수 없다." i. 뿌린 카르마의 씨앗이 없으면 거둘 열매도 없다. 앞에서 얘기에서 덕 높은 비구니들의 음식 시중들던 여인네처럼. j. 카르마의 씨앗은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 죽는 듯이 잠자고 있다가도, 적합한 때를 만나면 언제고 싹을 틔운다. 다르마의 수행에 의해서 카르마의 잠재력을 완전히 제거 할 경우를 제외하고.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붓다는 당신의 무한한 자비심으로써 뭇생명의 고통스런 카르마를 제거해 주실 수는 없을까? 실제로 뭇생명들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의 인상을 저장해 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잠재의식이며, 인과응보의 카르마 법칙은 바로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 자비심에 찬 붓다의 가르침은 결국 인간 자신이 자신의 카르마를 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뿐, 성과가 있고 없고는 단연히 개개인의 자외적인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갖고 최선의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훌륭한 의원(醫阮)의 임무는 끝난다. 처방대로 치료를 받고 안받 고는 환자의 마음이다. 만일 붓다의 자비심 만으로도 뭇 생명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있다면, 윤회는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종식 되었을 것이다. 붓다의 사랑은 넓고 가이 없다. 태양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추듯이, 붓다의 사랑은 뭇생명의 마음자리를 평등하게 밝 힌다. 그러나 뚜껑 덮인 단지 안에서 어떻게 햇빛을 쬘 수 있겠는 가?
카르마의 인상이 뚜렷할 경우와, 붓다에 대한 믿음과 다르마의 깊은 수행으로 말미암은 큰 덕성(德性)과 결부되어 있지 않을 경 우에는 과보를 면하기가 어렵다. 설사 결부되어 있다고 해도 쉽사 리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비교적 인상이 약 한 카르마는 붓다에 대한 믿음과 다르마의 수행력 등에 의하여 상 당한 영향을 받는다. 가령 인간의 수명은 지난 세상의 카르마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 생에서의 악행때문에 급작스런 죽음을 당할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붓다의 자비심이 힘을 발휘한다. 붓다를 신앙하고 다르마를 깊이 수행하여 급살(急殺)의 원인을 미 리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수명은 기름 등잔불과 같다. 기름이 고갈 되던지, 거센 바람이라도 몰아치면 꺼져 버리지 마련이다. 붓다는 결국 바람막 이 역활을 하실 따름이다.
이처럼 카르마는 위험한 존재다. 카르마를 유발하는 번뇌의 뿌 리를 뽑아 버리려면 명상을 해야 한다. 번뇌의 본성을 잘 이해하 기 위해서는 일차적인 의식(the primary consciousness)과 특히 이차적인 의식(the secondary consciousness)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이차적인 의식은 51가지의 정신적 요인(caitta)으로 나뉘는데, 아상가(Asanga, 無着)의 아비달마집론(Abhidharma-samu ccaya)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것을 바르게 공부하면 모든 행위가 각각 선한지 악한지, 무슨 정신적 요인에 바탕을 두는지를 잘 이 해할 수 있다. 무릇 카르마는 매우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중 요한 것은 다르마의 여러가지 측면을 두루 아는 일이다. 뭇생명들 의 다양한 생활상태와 경험이 단순히 한 가지 카르마의 결과만은 아님을 이해하는 일이다. 카르마의 법칙과 그 결실은, 콩심은 데 콩 나는 식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매우 복잡하게 뒤엉켜있 다.
현상(現象)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감각기관을 통한 직접지각(直 接知覺 : 現量), 수냐타를 탐구할 때 사용하는 논리적인 분석과 추리(推理,比量), 붓다의 지혜(智慧)를 신뢰하여 그 말씀을 받아 들임 등의 세 가지가 있는데 카르마는 세번째 방법에 의해서 이해 한다. 공작새의 깃털처럼 현란한 현상 세계의 모든 원인은 오직 붓다만이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4. 윤회의 비참함
1)여섯 세계
뭇 생명이 다시 태어날 세계는 카르마에 의해서 결정된다. 괴 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는 뭇생명을 세 가지 악한 세계(지옥,굶 주린 귀신 세계, 동물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반면, 행복을 부 르는 카르마는 세 가지 복된 세계(인간 세계, 아수라의 세계, 하늘 세계)로 인도한다.
세 가지 악한 세계 가운데 동물의 세계는 매우 명백하다. 동 물들은 인간과 밀접한 카르마적 관계를 갖고 있는 까닭이다. 그 러나 지옥과 굶주린 귀신의 세계는 직접 지각이 불가능하다. 직 접적인 지각(知覺)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 세계를 부정할 충분 한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지각 능력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실제로 갖가지 카르마에 의하여 우리 의 정신은 어마어마한 제한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붓다의 지혜 가 큰 바다라면, 우리의 지혜는 고작 풀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사물에 색깔이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배냇봉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여섯 세계의 특 성을 하나하나 살펴서 카르마외 그 결과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 시키도록 하자.
* 지옥(地獄)
빙한(氷寒)지옥과 화염(火炎)지옥이 있다. 도둑질하고, 다르 마를 비방하며, 다른 사람들을 추위에 떨게한 죄과로 빙한지옥 에 떨어진다. 많은 원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이나 남의 삶을 파 괴한 죄과는 화염지옥에 걸맞다.
사람이 임종(臨終)할 때, 자신의 카르마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지옥에 태어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 다. 가령 어떤 사람은 굉장히 추위를 느끼면서 따뜻함을 구걸할 것이다. 바로 이 따뜻함에 대한 갈망이 그를 화염지옥으로 안내 한다. 독사의 맹독이 차차 온 몸에 펴져서 생명을 앗아 가듯이. 일찍이 뿌려 놓은 카르마의 씨앗이 무르익어 죽을 무렵에 완전 히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잘 깨우치면, 지옥세계 의 존재를 믿기가 수월하다.
화염지옥은 화산에 비유될 수 있다. 그의 의식은 용암(熔岩), 곧 녹은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불 속에 던져진 조개탄처 럼 불꽃과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빙한지옥의 좋은 예를 제공하는 것은 극(極)지역 이다. 얼음덩이를 몸삼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지옥은 악한 카르마와 악한 카르마를 해결할 장소와 고통을 받을 자, 이 세 가지 요건이 결합하여 창조된 세계이다. 보리행경에서 산티데바(Santideva)보살은 묻는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마루를 누가 만들었는고? 타오르는 자신의 몸을 뒹굴며 울부짖는 저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붓다께서 말씀하셨네. 이 모두 악한 마음의 열매라고."
비록 지옥이 마음의 영상(映像)이고 실재하는 세계는 아니지 만, 그 고통은 인간 세계처럼 리얼(real)하다. 곧 꿈 속처럼 환 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지옥의 일생은 몹시 길며, 카르마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다. 지극히 무거운 카르마 탓에 지옥 세계가 부서질 때까지 그곳에 살아야 하는 이들도 있다. 지옥에서 일생을 마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까? 우주에는 수없는 세계가 있지만, 아직 악한 카르 마가 덜 소멸된 생명들이 다시 태어날 곳은 역시 지옥보다 그리 낫지 않은 세계이다.
형기(刑期)를 다 마치지 못한 죄수가 남은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다른 형무소로 옮겨가는 경우처럼. 지옥에 대한 명상을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할 수 있다. 첫째, 어느 특정한 지옥을 택하여 그곳의 고통과 그 곳에 떨어지는 원 인을 명상하고, 그 원인이 현재 자신 가운데서 자라고 있지 않 는지를 검사해 보는 일이다. 둘째는 자신의 덧없는 삶과 죽음, 그리고 지옥에 태어나는 모습 등에 대한 명상이다.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자신을 지옥 사람으로 가정할 수 없거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지옥에 떨어질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고 여겨지면, 자신이 지난 세상에 지은 카르마 때문에 지옥에 태어 날 수도 있다고 상정(想定)해야 한다. 또한, 죽음은 필경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과 살아있음은 "아직 죽지 않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명백한 자연의 이법(理法)으로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 다. 마음의 작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대 부분 이를 믿으려 들지 않는 이유는 죽음에 의하여 그의 생(生) 이 바뀔 때, 하나의 원인이 지난 세상의 카르마 등에 영향을 받 아 복합적인 형태의 결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또 그는 이미 과거 생(生)의 기억을 잊어 버리게 되는 까닭이다.
사람이 아주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 를 저지르는 것도 지난 세상에 그러한 행위에 익숙해진 습관을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세상에 익힌 행복을 주는 카르마 역시 훌륭한 필적처럼 남아서 그를 수행의 길로 이끌어 준다. 세심히 살핀다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살펴 지난 세상의 일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오직 "윤회의 법칙" 을 믿을 때 여섯 세계에 대한 명상이 가능하다. 스스로가 현상 세계의 법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르마를 실천하지 않는다 면, 설명을 아무리 전개해 봐야 결과는 언제나 미흡할 것이다. 붓다는 말했다.
"나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라. 마치 금을 감정하듯이, 무게를 달아보고 잘게 부수어 녹여 본 다음 그것의 가치를 확신 하라. 단지 나를 신뢰한다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옳지 않다."
* 굶주린 귀신의 세계(餓鬼界)
정신적인 성취가 없는 사람은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탐욕과 재산에 대한 욕심이 이 세계에 태어나는 주된 탐욕과 재 산에 대한 욕심이 이 세계에 태어나는 주된 원인이다. 지난 세 상에 어떤 것을 지나치게 욕심낸 댓가로 그들은 항상 그것은 굶 주린다. 산같은 음식물과 바다만큼의 물이 눈 앞에 있어도 그는 그것들을 볼 수조차 없다.
수천년 동안 그런 처지로 지내기 마 련이다. 야윌대로 야윈 몸체, 툭 튀어나온 배, 그리고 쇠약한 건강이 그들의 특징이다. 여름철의 서늘한 달빛과 겨울철의 따 뜻한 햇볕도 그들에게는 타는 듯한 고통을 준다. 여는 사람들의 경우, 사흘만 굶어도 몸이 극도로 약해지며 게다가 더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목숨마저 위태로워 진다. 그러나 굶주린 귀신에게 는 고통을 그치게 할 죽음의 혜택도 없다. 카르마가 다할 때까 지 그런 삶은 끝없이 이어진다.
굶주린 귀신들의 삶은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이와는 약간 다 른 고통을 받는 귀신들도 있다. 가령 음식이나 물을 볼 수 있는 귀신이 있다. 우연히 음식물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들라치면 당 장 방해물이 나타나 그를 좌절시킨다. 또 그가 물을 보고 마시 려 하면 물은 금새 피고름이나 독수(毒水)로 변하여 구역질을 자아낸다. 굶주린 귀신 가운데에는 인간에게 이익을 주는 무리 도 있고 해를 끼치는 무리도 있다.
어떤 귀신들은, 비교적 작지 만 즐거움과 소유물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욕 심 때문에 항상 아무것도 갖지 않은 체 한다. 그런 귀신들은 언 제나 남을 해롭히려는 생각들로 꽉 차있다. 굴러가는 눈덩이처 럼 부푼 악한 카르마는 마침내 그를 더 열악(劣惡)한 세계로 내 던질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영원히 굶주린 귀신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언제나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단지 지 난 세상에 저지른 자신들의 악행 때문에 귀신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과 행위가 그 세계에 태어날 조건에 합당하면, 어 느 누구를 막론하고 장차 귀신의 몸을 받기 마련이다. 카르마와 그 과보의 법칙은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 동물의 세계
동물들의 괴로움은 쉽게 이해된다. 동물들은 힘없고 약하며 작은 과오로도 손쉽게 목숨을 잃는다. 게다가 인간은 커다란 고 통을 덧붙여 준다. 사정없이 때리고 잡아 먹기를 예사로 한다. 동물들은 모든 추위와 더위, 그리고 배고픔을 몸 하나로 견뎌야 한다. 이와같은 동물들의 괴로움은 거의 어리석음, 곧 지혜의 결핍에서 온다. 바람직 하지 못한 행위의 습관 때문에 한번 이 세계에 태어나면, 다시 인간의 몸 받기가 매우 어렵다. 동물들 의 삶에는 살아가기에 필요한 물자(物資)와 자유가 거의 결여되 어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성행위(性行爲)가 동물 세계에 태어나는 주 된 원인이다.
첫째, 대상 : 부모나 스승, 혹은 남의 배우자와 관계함은 삿 되다.
둘째, 시간 : 그믐날,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날, 또 여인네가 생리 중이거나 임신 중이거나 젖먹이를 기르고 있을 때, 이와 같은 경우에 성행위를 함은 그릇되다.
셋째, 장소 : 절.성지(聖地), 성직자가 거처하는 곳에서는 성행위를 피한다.
네째, 방법 : 변태적인 성행위는 금지된다. " ** 같은 놈"이라는 식으로 동물을 빗대어 남에게 욕설을 퍼 붓거나, 다르마의 수행을 방해하는 행위도 동물 세계로 내던져 지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살아오는 동안 그같은 일을 한 기억이 있는 사람은 참된 마음으로 뉘우치고 자신을 깨끗이 해 야 한다.
"세 가지 악한 세계의 고통을 면하고자 붓다와 법과 스승들께 나아갑니다. 원컨대,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선을 성취할 때까지 이 마음 한결같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 인간 세계 인간에겐 크게 생.노.병.사 등 네 줄기의 괴로움이 있다.
a. 태어남 태아(胎兒)는 어머님의 자궁 안에서부터 심한 고통을 받는다. 주머니같이 생긴 애기집이 늘 단단히 죄고 있는 데에다, 어머니 가 움직이거나 먹고 마시며 추위와 더위를 느낄 때마다 아기는 절벽에서 뚝 떨어지는듯한 충격을 받는다. 이윽고 열 달이 차면 공기의 카르마(air of Karma)가 아기의 몸을 자궁 밖으로 밀어 내는데, 이때 아기는 거대한 두 개의 산 사이에 꽉 끼이는 것 같은 압박감을 경험한다.
비록 어머니가 조심스런 순길로 아기 를 안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주지만, 차라리 그것은 모래종이 에 몸을 비벼대는 기분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큰 소리로 울어 젖히는 이유는 세상과의 첫 접촉이 그토록 고통스럽기 때문이 다. 어린이의 무지(無知)하고 어리석은 특성 -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한 특성은 어느 정도 남는다. - 은 바로 그가 자궁에서 보 낸 열 달의 영향이다.
b. 늙음 어느 누구도 늙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 갈수 록 몸과 마음의 기능이 쇠약해져 가기 마련이다. 젊은 날에는 칼끝처럼 예리하던 지력(智力)도 녹이 슬거나 아예 무뎌지고 만 다. 공원 주변을 할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노인들에게도 한 때의 젊은 시절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사뭇 모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결과적으로 자신이 늙었음을 자각하게 되면 그 번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기력하고 병약한 세월에 치여서 오직 죽는 날만 순꼽아 기다리는 노인들도 허다하다. 다 르마의 수행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도 늙음처럼 맞부딪치는 장 애는 없다.
c. 죽음 내일 신변에 무슨 사고가 생길지, 세상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 무도 모른다. 더구나 죽음이 언제 자신을 택할지 알 도리가 없 다. 언제 어떻게 죽게 되리라는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결국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그의 삶을 둘러 싸고 있는 가족, 친구 및 친척들과 영원한 이별이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목숨처럼 사랑하던 사람과도 그때에는 결별해야 한다. 지옥의 울부짖음을 듣고서도, 그것이 직접 자신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외마 디 절규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d. 아수라(Asuras)의 세계 시기, 질투가 많으면 이 세계에 태어난다. 아수라들은 욕망의 하늘나라 신들과 앙숙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전쟁이 그칠 날 없다. 승패가 뻔한 싸움일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e. 하늘 나라 일생 동안 열가지 악행을 짓지 않으면 하늘 나라의 신(神)으 로 태어날 수 있다. 수명은 엄청나게 길고 즐거움이 끝도 없지 만, 지나치게 안락(安樂)한 환경에 탐닉하느라 대부분의 신들은 다르마에 대한 생각을 않고 지낸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수 명이 너무 짧다고 여긴다.
마침내 복된 카르마가 고갈되며, 죽 음을 맞이하기 칠일(하늘 세계의 시간으로) 전에 하늘 신은 자 신의 죽음과 자신이 재생할 곳을 본다. 번민 때문에 마지막 칠 일은 그가 살아온 모든 세월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훌륭 하던 몸은 빛을 잃고 불결해지며 악취까지 풍긴다. 그의 몸을 장식한 하늘 꽃도 시들어 가고 앉은 자리도 불편하기만 하다.
친구들마저 그를 외면한다. 대부분의 하늘 신들은 죽은 뒤에 보 다 못한 세계로 떨어진다. 행복을 초래하는 카르마가 거의 다 소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늘 세계에 태어남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2) 세 가지 괴로움(三苦)
* 감각적인 괴로움
사람이면 으례 겪는 괴로움이다.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이 괴로움을 알 수있다. 세속적인 뭇생명이 감수해야 하는 정신적, 혹은 육체적인 고뇌, 고통, 갈등이다.
* 변화의 괴로움
다르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의 의미에 무지한 데에서 변화의 괴로움이 비롯된다. 그런데 이 괴로움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가령 그늘에 쉬고 있다가 몸 이 으스스 추워 온다고 느낀 사람은 곧 햇빛이 쬐는 따뜻한 장 소로 옮겨갈 것이다. 그러나 한참 지나면 태양빛도 너무 따갑 다. 그래서 이제는 도리어 서늘한 그늘로 다시 들어 선다. 이처 럼 자주 바뀌는, 규정할 수 없는 만족의 기준이 "변화의 괴로 움"을 드러낸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압제자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국민이 있다면 처음 해방을 맞았을 때 그들은 무조건 기뻐하였다. 그러 나 그 기쁨도 잠시, 얼마 못가서 이번에는 자국(自國)내에서 내 부적인 압박 요인이 우후죽순처럼 치솟는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애쓴 끝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성취의 댓가는 행복만이 아니다. 그 지위에 따르는 책임을 짊어지고, 뒤쫓아오는 경쟁자들에 맞서느라고 그에게는 문제와 어려움이 떠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의 행복은 새로 얻어 진 이질(異質)의 상황이 아니라, 전에 겪던 상황의 형식적 변형 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껍데기만 갈아씌운 그 괴로움덩이에 가치를 두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운다.
그런데 그것이 왜 행복처럼 느껴질까? 앞서 얘기한 "감각적인 괴로움"보다 이해하거나 경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참된 행 복은 한번 성취되면, 갈수록 시들해져서 마침내 괴로움으로 변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점점 행복감이 견실해져야 마땅하다. 결국 다르마의 눈(法眼)을 통하여 볼라치면 그런 건 행복이 아 니라 괴로움의 이명(異名)일 따름이다. 진정한 행복의 씨앗은 언제나 다르마의 수행에 있다.
* 삶 자체가 괴로움
윤회하는 삶 바로 그 자체가 괴로움이다. 삶 자체는, 앞의 두 가지 괴로움의 근거가 되며, 번뇌를 초래하는 행위를 만드는 도 구 노릇을 한다. 다음 생(生)은 그 행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다. 손등이 벗겨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은 첫번째의 "감각적 괴 로움"이다. 누구나 그 고통을 안다.
둘째의 "변화의 괴로움"은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깊은 사람이 이해한다. 그러나 "삶 자체 가 괴로움"이라는 이치는 오직 성자(聖者)만이 전체적으로 알 수 있다. 손바닥 안에 머리카락 한 올을 넣고 비벼보라. 쉽게 감촉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자들은 "삶 자체가 괴로 움"임을 눈속에 들어간 머리카락처럼 아프게 느낀다. "감각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모든 생명의 바램이 다. 욕망과 형체 없는 하늘 세계(無色界)의 신들은 "변화의 괴 로움인 삶 자체"로 부터 자유롭기를 갈구한다.
윤회하는 모든 생명들에게는 이 세 가지 괴로움이 불가피하 다. 첫째, 생존(生存)이 항상하다는 믿음. 둘째, 생존이 행복이 라는 견해. 세째, 사실상 더러움의 덩어리인 몸과, 마음의 네 가지 요소(감각작용, 표상, 의지작용,식별작용)가 깨끗한 것이 라는 신념. 네째, 모든 현상∮생명에 독특한 본질이 있다는 독 단(獨斷).
이와 같은 신념들이 그릇된 견해임을 인식하여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데 실패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괴로움을 피할 길은 없다.
다르마 수행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의 명상(meditation)이 소 개된다. 통찰(contemplation, 觀)과 집중(concentration)이다. 통찰을 실천하면 현상의 덧없음. 카르마와 결과의 법칙.절제. 온전한 몸 받음.만물의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 생기(生起). 자비심.보리심(Bodhicitta).수냐타(Sunyata, 空)의 의미 등에 관한 직관이 생긴다. 집중을 실천하면 마음을 순수한 하나의 점 (點)으로 모을 수가 있다.
통찰을 끝낼 무렵에는 언제나 그 직 관된 바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통찰을 제쳐두고 집중 만 해서는 명상의 성과가 없다. 다르마를 수행할 때, 무엇보다 도 먼저 배운 것을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받아 들일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하고, 그릇된 견해를 부수는 방법을 바로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수행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있고, 부적당한 시간 이 있다. 또 다양한 방법을 동시에 써서 수행할 수 없으므로 자 신에게 가장 적합한 한 가지를 택하여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그 방법으로써 수행에 몰두해 본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우 잠 시동안 통찰을 실천하면 침체한 기분을 돌이키고 집중을 위한 더 강한 에너지를 공급 받을 수 있다. 나무꾼이 거목(巨木)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우선 도끼날을 예리하게 갈아서(통찰), 정 확한 지점을 힘껏 내리찍어야(집중)하는 법이다.
더욱이 미혹 (迷惑)의 뿌리는 너무 깊어서 당장 뽑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쉬지않고 파들어가는 인내가 필요하다. 괴로움을 끝내고 싶으면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지 말아야 한 다. 한시바삐 올바른 방법을 찾아내어 익히고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불교의 수행에는 지혜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계시 (啓示)되는 법은 없다. 오직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갈고 닦아 서 - 지혜롭게 만드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뭇생명은 자신의 스승인 동시에 적(敵)이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 카르마를 소멸시키는 두 단계의 방법
첫째, 과거에 지은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 가운데에서 결 실할 만한 힘이 있는 것을 정화(淨化)한다. 둘째, 그와 같은 카르마를 새로이 짓지 않는다. 이책 후반부의 "특별한 기초수행"은 위의 두 가지를 성취할 목적으로 실천된다.
"붓다께 귀의하옵니다. 윤회의 삶은 즐거운 놀이터가 아니고, 쇠 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임을 깨달아 완전한 자유의 깃발을 거머쥐게 하소서. 성스러운 집에 들어서는 그날까지 성문(聲聞). 연각(緣覺).보살(菩薩)의 수행을 한시도 멈추지 않겠나이다.
첫댓글 자비도 탐욕이요 경멸도 탐욕이요/ 청산은 나보고 말없이 살라하네/자비도 내려놓고 경멸도 내려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