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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여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 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윈이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라고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나의 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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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 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나라를 건설하자고."
「나의 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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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싸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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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백범도 우리 나라의 부강을 경시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
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부강을 실현해야 하지만 그것은 최선진 부강국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면 족하고, 그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아름다운 문화 국가를 건설해야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백범이 가리킨 문화는 남을 모방하는 문화가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창조적 문화였다. 백범은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높은 수준의 창조적 문화 국가가 되어 세계 평화가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될 것을 소원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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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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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처음부터 통일 조국을 건설하지 않고 38선의 남북에 각각 두개의 정부를 수립하면,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를 매우 염려하였다. |
백범은 이렇게 크고 큰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희생당하더라도 동포들의 비극을 사전에 막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유 민주의 통일 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한국 민족의 영원한 큰 스승이었다.
백범 김구, Alfred Eisenstaedt, 1946,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단독정부 수립 반대과정 1948년은 연초부터 단독 정부 수립안이 기세를 올렸다. 1월 8일에 입국한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 측이 거절하자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이 합작하여 단정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범은 김규식과 합작하여 단정 반대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이때의 일은 복잡하므로 간추린 일지를 통해 보기로 한다. 2월 26일 유엔한국위원단 메논 위원장의 보고를 심의한 유엔소총회가 단선을 결의했고, 3월 1일 하지 사령관이 단선 실시를 발표) 김구선생 사망 후 경교장 앞에 모여든 민중들 Carl Mydans, 1949,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이번에는 '북측에서 홍명희를 대표로 보내라' 고 회신하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남북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되어 백범의 통일 노력은 봉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범은 남북 정부 모두의 냉대를 받았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까지 탄압을 받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민족의 비극이 아니던가. |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구글, 소소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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