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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16 ☏ 031-576-5412 남궁경( 알베르또) 신부 |
성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 기념
◐ 매일 ․ 특별 전대사를 얻기 위한 거룩한 예식 ◑
✚ 제대 앞에서 |
주님의 기도, 사도신경 |
✚ 오전 9:30 |
고해성사, 교황님의 권고 기도(바오로의 해 기도문) |
✚ 오전 11시 |
마재성지 전대사 미사 - 영성체 |
✚ 정성을 다해 (2가지 모두) |
① 십자가의 길 ② 예수성심께 바치는 봉헌기도 |
◐ ‘바오로의 해’ 성년 살기 금요 강좌(매주 금요일)
⇨ 시간 : 오후 1시부터(45분 동안, 남궁경 신부)
⇨ 교재 : 『사랑한다면 투쟁하라』,『여왕과 야성녀』
『삶의 기술』(안셀름 그륀, 분도출판사)
⇨ 오후 2시 : 십자가의 길
✚ 마재성지 후원 안내 ✚
⇨ ( 예금주) 천주교 의정부교구 마재성지
농 협 204040-51-082671
국민B 992801-01-132387
우리B 1005-901-065548
신한B 100-022-080872
수험생을 위한 기도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
주님의 크고 넓으신 사랑으로
저희를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리며 기도하오니
수험생 ( )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이번 시험을 치른 모든 이가
자신의 노력을 기울인 뒤의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또한 수험생들이 이번 기회를 통하여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며
좀 더 신앙이 깊어지는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 안에서 주님의 모습을 찾으며
서로 이해하고 도와줌으로써
용기와 희망을 나누는 진실한 이웃이 되게 하소서
자비로우신 주님,
수험생과 그들의 가족들을
늘 곁에서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 의탁하며 담대한 마음을 지니고
앞으로의 날들을 평화로이 맞으며
매 순간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년)
성 정하상 바오로 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당시 경기도 마재에서 태어났고,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과 함께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여 살길이 막연하였고, 의지했던 숙부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자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우며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유스티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양반 신분을 감추고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았습니다. 북경의 주교님께 사제 파견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입니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1839년 7월 11일 잡혀가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 성 바오로 사도의 생애와 영성 ◑
1. 초기 생애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는 바오로는 기원 후 5-10년 사이 타르수스(현재 터키)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타르수스는 당시 동서 교역의 요충지여서 상업이 번창하였고, 동방-그리스-로마 문화가 혼합되어 있었으며, 그리스-로마의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탓에 바오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배웠고, 다른 여러 문화들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이라는 로마식 이름 외에 사울이라는 성서적인 이름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런 환경에 사는 해외 거주 유다인들의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어렸을 때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힐렐 율사의 손자이자 당대 최고의 율사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성경, 조상의 전통 및 율법 해석 등을 철저하게 배웠다고 전합니다(사도 92,3; 26,4-5참조). 그의 부모는 유다인이었지만 로마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바오로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사도 16,37-38; 59,25-99 참조). 그의 이러한 배경 탓에 그리스와 로마 지역의 복음 전도자로서, 특히 하느님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유다 풍습을 따라 랍비들처럼 수공업을 배워 생활방편으로 삼았으며, 돈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1테살 2,9 참조). 기원후 51-52년경 코린토에서 전도할 때 아귈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하였습니다(사도 18,3참조). 그는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지중해 여러 지역에서 전도할 무렵에 만성적인 지병으로 몹시 고생하였습니다(갈라 4,13-14 참조). 제2차 전도여행 때 터키 중부에 위치한 갈라티아 지방을 그냥 지나칠 작정이었으나, 뜻밖에 병이 나 한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여러 교회들을 세웠던 것이 그 예입니다. 그는 43년경 몰아경에 빠졌을 때 계시의 말씀을 들은 이후 고질병을 앓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5코린 12,7-9 참조).
바오로는 신념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적 의지와 강한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2. 박해
사도행전에는 그가 열성적인 바리사이파의 일원으로서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맹신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사도 9,1-2 참조). 그의 성격도 다혈질로서 "조상들의 전통"(갈라 1,14)을 열광적으로 수호하여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사도 22,3)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로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이고 유다교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격인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가담하였고(사도7,58-8 참조), 스테파노 같은 헬레니스트 선교사들을 박해하려고 다마스쿠스로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실제 박해경력은 “그가 예루살렘교회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일, 살해 위협 때문에 몰래 도주해야 했던 일”(사도 9,96-30참조), 그리고 그 뒤 로마인들에게 붙잡혀 있을 때 “마흔 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 모의했던 일”(사도23,19-23 참조) 등에서 잘 드러납니다.
3. 회심
바오로는 33-35년경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을 보고 거기서 들려오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하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의 생애를 급격하게 변화시킨 이 사건을 세 번이나 길게 전합니다.
다마스쿠스 사건은 구약 예언자들의 소명사화에서 볼 수 있는(이사 6장; 예레 1,4-10, 에제 1,1-3,27참조) 하느님의 현현(Theophania)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오로 자신이 본인의 회심을 '하느님 은총의 힘'이고, '예언자들의 소명과 같은 것' 으로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회심 후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노선을 취하면서 유다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며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광범위한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때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삼고, 거기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1761-1839년)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Caecilia) 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신유년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 남편 정약종이 옥에 갇혔을 때, 그녀 역시 세 아이와 함께 붙잡혀 들어갔다가 다행히 풀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가산은 모두 몰수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살 길이 막연했던 체칠리아는 마재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에 가서 도움을 청했지만,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여 무수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정철상(가롤로)이 순교했고, 다만 자신이 낳은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만이 남았습니다. 한편 그녀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는 신심이 깊은 생활을 하며 선교사들을 조선에 영입하기 위하여 여러 해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인 7월 11일에 아들이 체포되고, 이어서 7월 19일에는 그녀 또한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큰 죄나 지은 국사범과 같이 오라로 꽁꽁 묶여 끌려갔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집안이 순교자 집안이요, 그녀의 아들이 외국인과 자주 만났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다섯 번 문초를 당하는 동안에 태형을 230대나 맞았습니다. 체칠리아는 참수당하기를 바랐으나 나라 법률에 노인에 대한 참수를 금하였기 때문에 재판관들은 때려서 죽이기로 하고, 두 번이나 그녀를 불러내어 문초를 거듭하고 위협하며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체칠리아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고통을 참아냈습니다.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옥 바닥에 누워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 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때가 1839년 11월 23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79세였습니다.
그녀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문모 신부님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고, 교리교육을 위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으로 정약종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의 명단에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박해 초기에 그의 책 상자가 관청에 압수되자, 조정에서는 즉시 그를 체포해 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습니다.
체포 이튿날부터 그는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으며 증언하였습니다.
“천주님을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입니다. 천주님을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체포된 지 15일 만에 그는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며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님을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형장에 이르자 곧 참수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아우구스티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습니다. 군문효수형을 당한 그는 배알머리(현 하남시)에 묻혔고, 현재는 천진암에 아들 성 정하상과 함께 이장되어 모셔졌습니다.
지난 2002년 1월 문화관광부는 정약종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고, 현재 한국순교자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는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을 124위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4. 체포와 구금 (58-63년경)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되는 과정까지의 경위는 사도행전 21장 17-3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시아 출신 해외 유다인들이 나지르 서원 제사를 바치러 성전에 온 바오로를 민족과 종교의 배신자로 규탄하고 폭행하였습니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인들이 구했으나, 안티파트리스를 거쳐(사도 23,31 참조), 지증해변 카이사리아 총독부 감옥으로 이송되며 그곳에서 미결수로 2년 동안(58-60) 갇혀 있게 됩니다(사도 23,13-24.27 참조). 바오로는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하였고(사도 25,1-9참조), 이 일로 바오로는 로마로 압송됩니다.
60년 가을(사도 27,9 참조) 카이사리아를 떠나 크레타섬을 거쳐(사도 27,8-13 참조) 항해하다 폭풍우를 만났으나, 구사일생으로 메리테 섬에 상륙하게 되고 거기서 겨울 석 달 동안 지내게 됩니다(사도 28,11참조). 61년 봄 다시 배를 타고 시칠리 섬을 거쳐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리 포구에 닿아 육로로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5. 죽음
로마에서(사도 28,16-31 참조) 바오로는 경비병의 감시 하에 다른 죄수들과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자유를 얻어 손님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로 유다인과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사도 28,17-28 참조). 로마의 클레멘스가 쓴 코린토 편지에 따르면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스페인에 가서 선교하였다고 합니다(로마 15,24.28 참조).
치명한 시기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도 네로 황제(54-68)가 로마 대화재를 이유로 일으킨 박해 때인 67년경 로마에서 치명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테르툴리아노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네로 박해 때 순교하였고,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바오로는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바오로는 로마 남문 밖 교외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트레 폰타네(Tre Fontane)'에서 순교하고, 그 근처인 현재의 바오로 대성전 자리에 묻혔다고 합니다.
(거룩한 부르심의 땅)
거룩한 부르심의 땅 마재성지는 조선 후기에 최초로 천주께 대한 신앙을 믿고 받아들인 한국 천주교의 요람입니다. 특히“천주실의”(예수회 마테오 리치 신부 저술)를 읽으며,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땅입니다.
이곳에 살던 나주(羅州) 정씨(丁氏) 집안의 후손으로 정약현, 정약전(흑산도에서 자선어보 저술),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다산 정약용(세자 요한)이 있습니다. 이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한역(漢譯) 서학서(西學書)를 읽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정약전은 1779년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주도로 열린 주어사(走魚寺) 천진암 강학회(講學會)에 참석하여, 이벽(李檗,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또 1784년에는 마재를 방문한 이벽이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상경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약종의 가족들은 1800년 양근(楊根) 지방의 박해로 마재에서 서울로 피난하였으며, 이때 유(柳) 체칠리아와 자녀인 정하상, 정정혜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곳의 주변은 이스라엘의 지형과 비슷한데,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갈릴래아 호수와 비슷하게 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산상설교와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답가(Tabgha)가 있는 언덕과 마재의 작은 언덕과는 환경적으로 상당히 닮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6년 9월 의정부교구가 개발하는 첫 번째 성지인 이곳은 2008년 9월28일(주일, 오후 2시)에 한옥 성전 축복식을 이한택 주교님 집전으로 봉헌하몄으며, 매일 오전 11시에 바오로의 해 전대사 미사(월요일 없음) 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한옥 성전 옆의 명례방은 전시관과 만남의 방이며, 약종 동산에는 십자가의 길과 예수성심상, 성모자상을 모셨습니다.
■ 순교자 ■ 유배자 |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가계도 | ||||||||||||||||||||||||||||
남씨부인 |
정재원 |
윤씨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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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현 |
정약전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
성녀 (체칠리아) |
정약용 (세례자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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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알렉시오) |
정난주 (마리아) |
정학초 |
정철상 (가롤로) |
성 (바오로) |
성녀 (엘리사벳) |
정학연 |
정학유 | ||||||||||||||||||||||
‘하느님의 종’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입니다.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웠습니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나 가족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사제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