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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장인가, 민요, 찬송가, 격언가(1525∼1600)
1. 시대적 특징
폭넓은 민중 계층을 통일된 행동으로 규합하여 봉건체제에 항거한 '농민 봉기'는 야만적인 탄압에 의해 좌절되어 거국적인 개혁 운동이라는 공통분모는 사라지게 되었고, 다양한 계급, 계층, 종파에 따라 각기 따른 개별 이해가 부각되고 공고화 되었다. 또한 독립적이었던 많은 자유도시들이 '제후지배체제'로 편입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살고 있는 시민 계급의 불안과 생활 감정이 다양한 문학 장르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거국적인 정치 활동이 단절된 상황에서 기독교의 종파는 점점 늘어갔고, 프로테스탄트적인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와 함께 '루터주의'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정착시켜 나갔다. 이 당시 문학작가들은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학교의 교사였기 때문에, 문학은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경향을 지니며, 루터의 학설을 전파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교육기관의 비약적인 증가는 16세기의 문학 독자층을 폭 넓게 만들어 주었고, '인쇄술'의 발명 역시 이에 크게 기여하였다.
2. 장인가(Meistersang)
2.1. 새로운 '정신'적인 매체-장인가
우리가 인문주의를 교회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새로운 정신적 매체'로 파악한다면,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신적 매체'를 중세와 근세 사이의 독일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서 인문주의의 한 측면인 동시에 유럽의 '르네상스'와 결부시키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문학, 즉 장인가(Meistersang)이다. 전해오는 장인가에서 우리는 '개성적인 고급 예술'을 찾아보기는 거의 어렵고, 대신에 '집단적 성격을 지니는 평균적 성과'를 대하게 된다. 즉 장인가수들의 예술 창작은 고전주의시대 이래로 통용되어온 규범으로 측정해 볼 경우 예술적 업적은 '본질'에 관해 전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는 견해가 기반을 이룬다. 때문에 '개체성의 표현' 또는 '일회적인 창작정신의 표현' 등은 요구되지 않고, 모든 예술가 동료, 즉 장인들에게 적용되는 규칙들의 목록에 완전히 상응되는 문학적 형상화를 추구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장인 가요들은 '가요학교'라는 집단에서 생겨났고, 바로 이 집단이나 좀 더 큰 전체, 즉 도시를 가르치고 즐겁게하는 데 기여했으며, 도시의 수공업자 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수공업자들이 교회 내에 합창단을 조직하여 축제 행렬이나 장례 행렬에 참가하여 노래를 불러줌으로써 축제의 여흥을 북돋우거나 장례식의 슬픔을 위로 하였고, 교회에서 1년에 2번 정도 장인가 경연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장인가는 중세 말 근세 초에 생겨난 도시문화의 산물이며, 인문주의의 한 측면이기도 했으며, 신분제 사회 속에서 자기의 확고한 위치를 주장하는 시민계층(평신도)들의 산물이었다. 때문에 '교의'가 아닌 '제도'로서의 기독교에 대립하는 관계가 처음부터 장인가요에는 내재했었다. 장인가의 생성에 관한 역사는 전설적인 이야기에세 시작하는데, 이에 따르면 오토대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교황청은 초창기 장인가수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인용 1.) 마인츠 가요학교 설립에 관한 노래
'이들은 가요학교를 세웠으며,/ 사제에 대해 나쁜 소리를 하는 사람을/ 그 맨 윗자리에 앉혔도다.' (Sy hand gemacht ain singschoul,/ vnd setzen oben vff den stoul,/ Wer bel redt vom pfaffen.)
따라서 모든 인문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인가의 경우에 있어서도 성직자 계층, 특히 이들의 욕심이나 소유욕에 대한 매도는 일괄된 특성이었으며, 이 매도는 후에 종교개혁운동에 수용되어 교황을 반대하는 교리 속에 용해되었다. 장인가는 독일문학사의 전통들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15세기 이래로 존재한 가요학교는 1875년에 문을 닫은 것으로 미루어 500년 간 존속했다고 한다.
2.2. 가요학교
장인가의 절정기는 15세기와 16세기인데 이 기간에 장인가의 주역을 담당한 시민계층의 조합원들은 사회적으로도 여전히 상가의 주역을 담당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여전히 상당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장인가수는 수공업자들이었고, 상당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가요학교에서 함께 활동하기 위해서는 교회적, 세속적 교양, 심지어는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학식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며,(가요학교에서 '일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결국 그 대가로 유복한 대우를 받았다.) 가요학교들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확신 가운데 가요학교가 할 일은 곧 '훌륭한'(=귀족적인) '가요예술'을 계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추측할 수 있다.(이제는 '가요예술'보다도 더 고귀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장인가수는 새로운 '귀족', 즉 '성품의 귀족'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용 2.) 플라우엔로프(Frauenlob) 1300년
'혈통과 금전에 의한 귀족은 육체적 세계의 현상들이며, 정신의 세계에서는 오직 인간적인 품성과 능력만이 중요하다.'(Schaz unt geburt g n l bes biegen,/ s wil der geist kunst mit der tugend wiegen).
많은 사람들이 마인츠의 가요학교를 가장 오래되고, 또 중요한 가요학교로 간주했으나, 도시의 이동으로 인해 16세기에 뉘른베르크 가요학교로 교체되었고, 서독과 남독에 산재해 있었으나 북독(저지 독일어 사용지역)에서는 거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2.3. 장인가의 형식 및 내용
장인가가 존속해 온 동안 형식적 원칙들은 불변으로 남아 있었다. 의무적인 요소들로는 언제나 각운과 일정한 수의 음절들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든 규칙들의 목록인 소위 『작가(作歌)양식표(Tabulatur)』 속에 집약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노래 전체를 뜻하는)'바(Bar)', (연을 의미하는)'게제츠(Ges tz)', (각운의 도식을 의미하는)'게벤트(Geb nd)', (운율적 음악적 전체 형식을 뜻하는)'톤(Ton)' 등과 연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라는 규정(동일하게 구성된 두 개의 '전단(Stollen)'과 하나의 '후절(Abgesang)') 등이 실려 있다. 장인 가수들에게는 단계별 순위가 있었는데, 가창음표를 익히고 있는 장인 가수를 '학생'(Sch ler)이라 했고, 가창 음표를 완전히 터득하였을 때에는 '학우'(Schulfreund), 처음 보는 노래를 선뜻 부를 수 있을 땐 '가수'(Singer), 기존하던 형식에 자신의 노래를 맞춰 부를 수 있을 경우에는 '시인'(Dichter),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여 자신이 만든 자작곡을 부를 수 있을 경우에는 '장인'(匠人:Meister)이라고 일컬었다.
장인가의 내용은 교회의 교리와 세계관이라는 포괄적 기반과 대우주와 소우주 전체, 고대적인 것, 중세적인 것, 현실적인 것, 도덕적인 것과 골계(Schwank:해학)적인 것 등의 내용과, 신, 마리아, 삼위일체 등과 같은 교회의 테마가 중심적을 강조되었고, 사회비판, 돈의 지배에 대한 탄식 등도 나타난다. 1517년 루터의 반박문 이후 장인가요를 통해 종교개혁 사상이 전파되며, 17세기의 반종교개혁을 통해 중단된다. 장인가에서 추앙받는 옛 장인으로서 라인마르(Reinmar), 발터(Walther), 볼프람(Wolfram), 나이트하르트(Neidhart)등이 있으며, 주목할 것은 수공업자의 세계에서 한스 작스(Hans Sachs)와 같은 대가가 배출되었다는 점과,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그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이 장인 가수들 Die Meistersinger von N rnberg>에서 삽입곡이긴 했지만 장인들의 활동을 선율로 형상화하였다.
2.4. 한스 작스(Sachs, Hans 1494∼1576)
뉘른베르크의 구두방 주인 한스 작스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비교적 부진하였던 16세기 르네상스시대에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특성있고 뛰어난 재질을 보여준 작가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장인가는 정교한 형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내용면에서 기독교 교조에 제한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이런한 속박을 깨고 장인가를 새로운 시민적 문화운동에 이용하여 계급 동료들에게 지식과 교양을 쌓는 발판이 되게 하였다. 그는 모든 소재를 사용하여 당시의 시민 계급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성서의 이야기, 고대·그리스 로마의 소재, 근대의 정치적·종교적·사회적 사건, 민중본의 소재, 이탈리아의 소설 문학, 소화, 종교, 설화, 그리고 전설 등을 토대로 6,000편 이상의 작품을 썼다. 또한 중세 후기의 골계, 우화, 단편서사의 작품 등은 그에 의해 운문형식으로 되살아났다. 그의 독특한 풍자와 해학이 어울어져 가장 성공한 것은 우화 및 사육제극인데 <바보수술 Das narren schneyden 1534> 오늘날까지도 공연된다고 한다. 또한 그는<뷧텐베르크의 꾀꼬리 Die wittenbergische Nachtigall>라는 격언시를 써 루터의 종교개혁 편에 서기도 했으며, <교황과 사제단에 대하여 Vom Papst und seiner Priesterschaft>, <면제부 행상인 Der Abla kr mer>등은 카톨릭과의 대결에서 큰 역할을 해 낸 작품들이나, 교회의 압박으로 '바보문학, '풍자문학'의 뒤를 잇는다. 오늘 날까지도 애호받고 있는 작품으로는 <송아지의 탄생 Das K lberbr ten>, <천국으로 가는 편력 학생 Der fahrende Sch ler im Paradies>, <노파를 데리고 있는 악마 Der Teufel mit dem alten Weib> 등이 있다.
3. 민 요(Volkslied)
3.1 서정적인 민요
15세기와 16세기는 독일 민요의 전성기이다. 민중의 정치적, 사회적 관심사들도 민요의 형식을 빌어 문학적으로 표현되었다. 때문에 이러한 노래는 지배계급의 박해로 전승되어 오는 기록물이 별로 없다. 전체적으로 민요는 민중문학(Volkspoesie)이라는 광범위한 분야의 일부이며, 이 경우 '예술문학'과 엄격히 대립되지는 않는다.(전승방식이 그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민요는 그 전승과정 속에서 살아 있으며, 그것의 전달자는 광범위한 '서민층'이다. 민요가 전승 속에서 '살아있음'은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요의 전통 법칙인 '가변성'은 생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민요들은 사회적 상황과 인간의 궁핍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하였다.
인용 3.) <농부의 탄식>
'아, 나는 가난한 농부/ 내 삶은 나에게 너무나 고달프구나.'
인용 4.) <Dat ole leisken van Henneke Knecht>
'나는 이제부터 어떤 농부에게도 더 이상 봉사하지 않을 것이네/ 그런 고생을 나는 경멸한다네.'
전단으로 복사되어 전파된 민요는 '농민전쟁'의 반주음악 역할을 했지만, 농민전쟁기의 민요들은 대부분 농민에게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검열 후의 일부만이 고문기록문서에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인용 5.) 동맹의 노래 <B ndisches Lied>
'농민들은 단결하여/ 힘차게 싸운다/ 거대한 단체를 이루어/ 다양한 모습으로 봉기한다/ 성들을 파괴하고/ 수도원을 불태운다/ 이제 아무도 우릴 속이지 못하며/ 사악한 강도들의 집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민요들은 대부분 삶의 일상적인 사건들, 사랑과 이별 혹은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 또 에로틱하며 심지어 외설스럽기까지한 민요도 있었으며, 계절과 축제, 춤, 술 등을 다루기도 했으며, 종교적인 것, 그리고 해학적인 것을 다루기도 하였다. 민요의 형식은 소박하고 단순하여 사용되는 어휘나 운율 그리고 모티브가 마치 확고한 공식과 같이 반복되고 변화된다.
장인가와 대조적으로 이전 시대의 민요의 연대는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지닌 모든 생각들<All mein Gedanken, die ich hab> ; 인스부르그, 나는 너를 떠날 수 밖에 없네<Innsbruck, ich mu dich lassen>는 16세기의 민요의 예이며, 민요 자산이 보존될 방대한 노래 모음집으로는 <<로흐아머 노래책>>(1452∼1460), <<로스토커 노래책>>(1460), <<암브라저 노래책>> 등이 있으며, 특히 필사되거나 인쇄되기도 한 민요 모음집이 이 시기에 나왔는데, 악보도 붙어 있어 민요전승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는 '게오르크 포르스터(Georg Forster, 1500∼1568)'의 다섯 권의 선집 <<새로운 독일노래(Frische Deutsche Liedlein>>(1539)가 주목할 만 하다.
3.2. 설화체의 민요
서정적인 민요 외에 설화체의 '민중 담시'도 있었다. 이는 대개 전설과 동화에서 유래하는 진기한 사건들이 종종 사실과 섞여져 불리어진 노래들이었다. 설화체의 민요에는 신문가요(Zeitungslieder)라 부르는 또 다른 유형도 있었다. 여기에는 전투, 포위 공격, 봉기 등 시사성 있는 실제 사건이 보고되며, 신문가요은 직접 공연되거나 전단으로 인쇄되어 널리 불리어진 르뽀(Reportage)였으며, 이것은 17세기에 등장하는 오늘날 신문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민요는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나, 18세기에 이르러 헤르더 (Herder)와 괴테(Goethe)에 의하여 그 문학적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았다.
4. 찬송가(Kirchenlieder)
이 시기에 즈음하여 성서를 민중의 정신적 문화재로 만든 번역에 이어서, 루터의 선동적인 '변명서'와 '항의서', 독일어의 '공개 문답'(Katechismus), 그리고 '찬송가'(Kirchenlieder)가 나타났다. 예배의 새로운 편성을 할 때, 루터는 민속어로 된 찬송가를 의식(儀式)의 구성부분으로 만들었다.
루터는 찬미가의 세계에 있어서 바로 시인이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복음에 의한 신앙 고백과 신도의 노래이다. 루터의 첫 번째 노래책은 종교 가요집(Geystliche gesangk Buchleyn Wittenberg 1524)이었으며, 32편의 독일어로 된 노래들이 포함되어있다. 또한1524년에 그는 '찬송가집'(Gesangb chlein)을 출판했다. 팜플렛에 의하여 그의 노래는 이미 그 이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카톨릭의 예배에 있어서도 대축제일에는 설교의 전 후에 독일어의 찬미가를 부르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결정된 의식의 요소로는 되어 있지 아니하였다. 루터는 성서의 시편과 라틴어의 성가에 많이 의존했지만, 또한 독자적인 힘에 넘친 리듬과 강한 음조를 창조해 냈다. 객관적인 신앙의 확고한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의 노래의 깊은 구석에까지 스며들어 있으며, 여기에서 노래하는 것은 한 사라의 '나'가 아니라, 자기들의 신앙을 위하여 싸우고, 신앙에 의하여 충만되고, 신앙 속에서 고민하고 환희하는 신도들의 마음을 대신하여 루터가 시작(詩作)하는 것이다.
루터의 찬송가는 민중의 공유재산이 되어, 그 영향이 근절되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노래인 제 46째 아가의 개작(2-8행)인 <우리 주는 굳건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과, 그리고 민요에 의한 <깊은 고뇌에서 당신에게 간구하옵나니 Aus tiefer not schrie ich zu dir>, <평온과 기쁨과 함께 Mit Fried und Freud ich fahr dahin>, 그리고 <높은 하늘에서 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 등이 있다.
5. 격언가(Spruch)
16세기에 와서 민중의 생활 경험이 속담과 속담적인 어투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민중과 결부된 학자들이 민중에 회자(膾炙)하는 격언적인 교훈을 발굴하여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독일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어 이러한 속담들이 수집되기 시작하였다. 요하네스 아그리콜라(Johannes Agricola)는 속담집(Sprichwortsammlungen) <속담...., Sprichw rter.....>을 간행하였고, 12년 후에는 인문주의 학자 제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k)가 2권으로 된 속담집을 간행하였다. 이 속담집은 해설을 달아 놓았기 때문에 큰 의미를 지니다. 상기한 두 작품은 민중에 구전되던 것을 모든 속담집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 독일 민중이 지니고 있는 주옥같은 속담들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해석되기 시작했다. 1523년 한스작스는 종교개혁을 '미천한 사람들'에게로 접근시키기 위해 격언시 <<비텐베르크의 나이팅게일, Die Wittenbergisch Nachmacher>>을 썼고, 이 작품을 통해 '미천한 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 문학을 하려한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6. 서정시(Lyrik)의 발전
찬송가와 장인가, 그리고 격언시는 형식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1596년 푸슈만(Puschmann, Adam)은 <독일 장인가 상보 Gr ndlicher Bericht des deutschen Meistersangs>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작가에 대한 '범례집'이었다. 이것은 운을 맞춘 시행의 규칙을 정한 것으로, 시행의 길이는 일정하지 않았고, 같은 구조의 두 개의 시절성분(Aufgesang:'민네장'이나 '장인가'의 전절(前節) 찬미가의 서곡)과 보다 긴 하나의 후절(Abgesang:'민네장'이나 '장인가'의 노래에서 삼분되고 있는 절의 마지막 부분)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규칙성'과 엄격히 대립되는 것은 민요의 시구인데, 자연스러운 악센트를 갖고 있으며, 시절의 구성은 비교적 짧은 4행시였다. 민요는 14세기 이후부터 발전되어 온 소재와 형식을 충실히 지켰으며, 찬송가에도 많은 영향을 키쳤다. 반면, 한스 작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인가는 그 이후의 발전은 정체되다가 세기의 전화기에 이탈리아의 음악가들이 뮌헨과 드레스데, 그리고 남부 독일의 상업 도시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 넣었는데, 그것은 소위 '마드리갈'(Madrigal:이탈리아의 전원 문학에서 발전된 자유형식의 서정단가( 情短歌), 16∼17세기의 풍부한 의성적 음향효과를 곁들인 4중창 또는 다중창의 세속적 노래로 작곡가에게 독자적인 표현을 가능케 함)이 득세하여, 곧 독특한 개작과 모방작이 나왔기 때문이다.
첫댓글 섬광의 백작님의 글은 언제나 잘보고있습니다. 세계사를 전공하시는게 아닐까 사료해 봅니다. 가능하다면 유럽의 바보스러운 단면인 십자군원정에 대해 써주시면 어떨지요?
요즘에 올리는 것들은 주로 퍼오는 글이거나 인터넷에 있던 글들입니다.
-_-;십자군 원정 같은건....솔직히 누구나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