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6일 金大中 前 대통령은 서울고등법원에, 1981년 대법원이 金大中씨에게 사형을 선고케 하였던 「反국가단체 한민통 결성 및 광주사태 선동」 사건과 관련하여 再審을 청구했다. 변호인들은 재심청구 이유로서 金泳三 정부가 全斗煥·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한 근거가 된 논리를 인용했다. 즉, 「5·18특별법」에 의하여 1980년 5월17일의 계엄확대조치는 國憲문란에 해당한다는 확정판결이 나왔으므로 金大中씨의 행동은 내란음모가 아니라 「헌정질서범죄에 대항한 민주적 활동인 동시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정치행위」라는 것이다.
이 재심청구서에는 그러나 중요한 부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81년에 대법원이 金大中씨에게 적용한 가장 무거운 법률 조항은 국가보안법상의 「反국가단체 한민통을 구성하고 수괴의 임무에 종사했다는 죄」이다. 이 죄에 대한 처벌은 사형과 무기징역밖에 없다. 재심청구서에는 이 항목에 대한 반론이 없다. 그렇다면 「광주사태 조종혐의」에 대해서만 재심을 청구하는 것인지 애매하여 판결의 귀추가 주목된다. 대법원은 현재까지도 金大中씨가 북한 측 공작원들과 함께 만든 한민통(「한통련」으로 改名)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판례를 유지하고 있다.
大選 전날 黃長燁 입 열다 기자는 최근 아래 문서를 읽어 볼 수 있었다.
<황장엽·김덕홍 1일 동정 보고(국가안전기획부/1997년 12월18일)
1. 1(黃長燁 지칭)은 집필보조원과의 대화시 북한이 오익제 편지 등을 통해서 金大中 지지 용의를 보인 것은 지금까지 金大中에게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를 확실히 대통령에 당선시켜 경제원조 등을 얻어내려는 의도임.
2. 1987년 大選 당시 허담이 1에게 金大中이 양쪽(북한·조총련?)에서 받아먹고도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며 화를 낸 적이 있다고 언급하였음>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씨가 이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하루 앞둔 1997년 12월17일이었다. 이날 그와 金德弘씨는 두 군데의 군부대를 방문하여 강연했다. 月刊朝鮮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직접 黃長燁씨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언젠가 黃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 보았습니다. 許錟이 黃선생님과 金容淳 등이 있는 자리에서 金大中씨에게 돈을 준 이야기를 했다고 하던데….
『그것을 이제 문제제기해서 뭣합니까. 내가 국제비서를 할 때인데, 아마도 1987년 大選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許錟이 그전에 어디 갔다가 와서 金日成에게 보고하는 자리였어요. 許錟하고 나, 金容淳 그리고 金正日이 (보고차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金日成이 나오면서 許錟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이렇게 수염을 씻더란 말이지, 하하하」. 수염을 훑는 시늉을 하더라고요. 그건 시치미를 뗀다, 즉 돈을 받고도 모른 척한다는 뜻이지요. 許錟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었어요』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許錟이 한국에 온 것은 1985년 9월4일이고 그때는 金日成의 밀사로서 全斗煥 당시 대통령을 만나 친서를 전하기 위해 왔으므로 감시 중인 金大中씨를 만날 수 없었을 텐데요.
『어쨌든 저의 기억으로는 외국에 갔다가 와서 보고한 뒤였습니다. 나는 許錟이 남한에 여러 차례 갔다가 온 줄 아는데』
―金日成이 金大中씨한테 돈을 주었다고 이름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까.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金大中씨를 지칭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거야 우리끼리는 상식이지요. 許錟이 金大中씨 쪽에 어떻게 해달라고 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말이었어요』
―그런 대화가 있었던 곳은 주석궁이지요.
『그렇습니다』
기자는 黃長燁씨에게 정확한 연도를 기억해 보라고 했다. 그는 1987년 무렵일 것이라고만 했다. 黃씨의 주장으로써는 金日成이 말했다는 「두 군데서 받아먹었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돈이 나갔다고 하더라도 직접 金大中씨한테 주었다는 것인지, 간접적으로 주었다는 것인지, 본인이 알고 받았다는 것인지, 모르고 받았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黃씨의 말 중에 흥미로운 것은 『(金大中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우리끼리는 상식이었다』는 대목이다.
1989년 徐敬元(서경원) 간첩 사건 수사 때 검찰이 밝혀 낸 사실이 하나 있다. 金大中 당시 평민당 총재가 徐敬元 의원을 통해서 許錟이 준 5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徐敬元 의원은 1988년에 북한에 밀입북하여 자강도 金日成 별장에서 許錟(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배석한 가운데 金日成을 만났고 許錟에게서 5만 달러를 받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검찰은 徐敬元이 그중 1만 달러를 金大中 평민당 총재에게 전달한 사실을 자백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徐의원을 조사했던 李相亨(이상형) 검사에 따르면 徐의원은 작은 성의라고만 이야기하면서 金총재에게 돈을 주었다는 것이다. 돈을 받은 金大中 총재는 그 보름 뒤 다시 徐의원을 불러 돈의 성격을 물었다고 한다. 徐의원은 『해외에 나가서 사업하는 후배들한테서 좀 뜯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李相亨 증언. 2003년 5월호 月刊朝鮮).
참고로 許錟은 1989년 여름에 당시 통일민주당 金泳三 총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에 나타나서 金총재를 만나 訪北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한 적이 있다.
申相玉 증언: 『金正日도 두 金씨에게 돈을 주었다고 말했다』 2000년 12월호 일본의 「文藝春秋」는 金正日이 1999년 2월4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활동가들에게 했다는 발언록을 게재했다. 이런 대목이 있다.
<수령님은, 金大中은 민족주의자임과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서, 오늘의 金大中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납북되어 가서 金正日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면서 金正日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녹음까지 했던 申相玉 감독은 月刊朝鮮 2001년 6월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金正日이가 金○○, 金○○씨에게 정치자금을 주었다고 밤낮 얘기했어요. 그 사람은 對南공작에 많은 돈을 써요. 만약 그 돈이 전달이 되었다면 金○○이나 金○○씨는 누구 돈인 줄 모르고 썼을 겁니다. 金正日이의 돈인 줄 알고 쓴 것은 아닐 거예요. 돈이 스리쿠션으로 가니까. 후에 알고 보니까 그거더라 이렇게 되는 거지요』
―金正日의 입을 통해 들으셨습니까.
『얼마를 주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죠. 내가 와서 그런 이야기를 안 한 것은 정치에 이용될까 봐, 어떤 정파에 이용될까봐 그런 얘기를 안 했고, 지금 와서는 그분들이 다 ○○○도 했고, 하니까 얘기하는 거죠』
―金正日이 實名을 들어서 이야기한다는 말씀이죠.
『다 實名을 들어서 했어요』>
金大中 측 반론:『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없다』 黃長燁씨의 주장을 전해 들은 金大中 前 대통령의 공식 비서관 金漢正(김한정) 前 청와대 부속실장은 『논의할 가치가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金씨는 『그런 이야기는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도대체 그의 주장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黃씨는 「국민의 정부」下에서 미국 방문이 무산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말이 모두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黃長燁씨의 말은 모두 진실이고, 대한민국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치부하는 논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黃씨는 자유를 위해서 왔다고 하지만 그보다 많은 시간을 金日成에게 충성했습니다. 그런 黃씨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솔직하게 반성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吳益濟 편지 도착
黃長燁씨의 발언 속에서 언급된 吳益濟(오익제) 편지는 1997년 大選 전에 펼쳐졌던 북한정권의 對南공작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정보통신부는 이해 11월20일 서울시 양천구 목동 소재 국제우체국에 접수된 우편물 중 수상한 편지를 하나 발견하여 다음날 안기부 對共수사실에 신고하였다.
발신자 명의가 없는 이 편지봉투에는 주소만 「평양시 중구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우표 2장엔 평양우체국 消印(소인)이 찍혀 있었다. 받는 사람은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양빌딩 3-4 김대중 귀하」로 되어 있었다. 국제우체국에선 이 편지가 북한을 출발하여 일본을 경유하여 온 것으로 확인하고 복사본을 안기부에 보낸 것이다.
안기부 對共수사실에선 자체적으로 편지의 필적을 조사했다. 그해 여름 월북했던 국민회의 고문이자 前 천도교 교령인 吳益濟와 같은 필적이라고 판단한 안기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공식 감정을 의뢰하여 吳益濟의 필적이 맞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날이 12월1일. 다음날 안기부 對共수사실장은 국민회의의 千容宅(천용택) 의원을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만나 吳益濟 편지의 사본과 吳益濟 편지 내용 중 金大中 총재와 관련 있는 부분에 대한 수사 질문서를 함께 전해 주면서 빨리 회신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12월5일 서울지검 공안부에 편지 원본에 대해서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고 서울지법은 영장을 발부했다. 영장 발부 직후 국민회의 총재권한 대행 趙世衡(조세형·현 駐日대사)씨는 기자들에게 吳益濟 편지 사본을 공개하고 「안기부가 金大中 후보를 음해하기 위한 조작극을 벌이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이에 맞서 안기부 對共수사실장은 다음날 오후 서울지검 기자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吳益濟 편지는 안기부가 조작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관련자료들을 공개했다.
金大中씨의 대통령 당선 이후 벌어진 소위 北風수사 과정에서 수사실장은 구속되어 吳益濟 편지 공개와 관련하여 선거법, 안기부법,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前 수사실장 K씨는 『국민회의가 먼저 편지를 공개하면서 안기부가 조작한 것이라고 몰아붙여 우리가 이를 해명하는 기자간담회를 연 것이다. 아직도 일부 국민들이 吳益濟 편지는 안기부가 조작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 평양방송은 1998년 6월3일 吳씨가 중앙통신과 회견하면서 『당시 金大中씨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金大中 총재와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잊지 못하여 그의 당선을 지지 고무해 주기 위한 뜻에서였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문제의 편지는 吳益濟가 쓴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북측, 吳益濟시켜 연방제 받아들이라고 金大中에게 권유 <후광 선생님, 옥체 건강하시고 사모님과 온 가족이 평안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놀라움 속에 받아 보실 줄 알면서도 기회가 기회인 것만큼 민족통일이라는 대제 앞에서 개인의 입장을 초월하여 생각 끝에 펜을 들었습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여러 번 전화를 하면서도 월북의 성공만을 생각하고 한마디 인사조차 못한 것을 심심 사죄합니다. 미국에 와서 편지를 선생님께 보냈는데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이남에서 정치인으로 생활하였다면 선생님과의 연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은 저를 이해해 주신 분도 선생님이었습니다. 지난번 선거 때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여 저에게 보내 주신 양해의 편지에서도 저는 선생님의 진정을 읽었습니다.
서울에서 듣던 바와는 아주 다르게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한 「위민위천」의 인덕정치가 실현되고 있으며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사람들의 기세는 「일심단결」의 자부심과 긍지로 신심에 넘쳐 있습니다.
선생님께 유리한 大選정국을 놓고 이북의 여러 인사들도 후광 선생의 대승을 기대하고 있음을 감지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북의 영도자와 합의하여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소신을 표명하였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金正日 영도자님께서 발표하신 로작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를 어떤 일이 있어도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북에서 제안하고 주장하고 있는 조국통일의 3대 원칙과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등을 깊이 연구한다면 받아들일 점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주체사회주의는 더욱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그것은 진리입니다.
후광 선생님이 집권하시면 금세기 안에 반드시 통일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대선에서 필승하시고 다가오는 통일의 그날 반갑게 상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97년 10월31일 吳益濟 드림>
비자금과 연방제를 매개로 한 관계 이 편지를 읽어 보면 북측의 몇 가지 의도를 유추할 수 있다. 이 편지는 정보통신부의 우편 검열에 걸려 안기부의 손에 들어가라고 보낸 것이다. 보낸 곳을 평양으로 명기했고, 북한 우표를 붙인 것과 받는 이의 이름을 金大中으로 쓴 것 때문이다. 북한 공작부서에선 이 편지를 가지고 안기부가 金大中 후보에 대해 수사를 시작하도록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측은, 그렇게 되면 국민회의가 안기부와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 쪽을 색깔론으로 공격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고, 진심으로 金大中 후보의 당선을 바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울러 이 편지는 金大中 후보 측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金正日 정권의 對南적화전략, 그 가운데서도 핵심인 연방제 통일방안을 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에서 발표된 공동선언 제2항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對南적화전략이라고 규정하여 절대로 수용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였던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상당 부분 인정하여 통일방안으로 수용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金大中씨가 5년간의 대통령직을 수행한 뒤 물러나 있는 지금, 이제 우리는 그의 全생애를 놓고 金日成·金正日-金大中 관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북한 정권 쪽 사람들과 국민을 속이고 돈거래를 한 金大中 前 대통령, 金日成 부자가 집념을 가지고 추진해 온 연방제 통일방안(의도는 적화통일방안)을 장래 통일방안의 한 축으로 받아들인 金大中씨, 집권 5년간 金正日에게 굴종하면서 그에게 넘겨준 國益과 國富와 안보의 수많은 리스트들, 이제 金大中씨의 정체를 좀더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金大中, 吳益濟 월북에는 관련성 없어
吳益濟 월북사건을 수사했던 안기부 수사간부 출신은, 이 사건은 북한 측이 黃長燁씨 탈북의 충격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기획한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에 들어서서 그들은 초조해졌다. 黃長燁 선생이 한국으로 탈출하는 바람에 기가 죽어 소위 범민족대회도 열 수 없었다. 그들은 黃長燁 선생의 탈출을 희석시킬 만한 일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吳益濟 월북공작을 추진하여 국내 선전에 이용하려고 작심했다. 그들은 그 전에 이미 월북했던 前 천도교 교령 崔德新의 아내 유미영을 1990년대 초에 北京으로 보내 吳益濟와 접촉을 해두었었다. 유미영은 吳씨의 在北 딸과 결혼한 사위를 데리고 와 인사시키고, 吳益濟가 월남할 때 北에 남겨두었던 본처가 아직도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면서 사진을 전해 주었다.
吳益濟는 그 뒤 북측과 연락을 유지하다가, 1997년 여름 부인에게 강원도로 여행한다면서 속이고 미국을 거쳐 北京으로 갔다. 北京에서 기차편으로 평양역에 도착한 것이 1997년 8월15일. 그는 환영객들 앞에서 金正日의 품에 안기려고 왔다고 말했다. 국민회의 측은 吳益濟 월북사건이 터지자 안기부가 金大中씨를 잡기 위해 기획入北시켰다는 모함을 했다. 吳益濟 월북은 黃長燁 탈출로 체면이 손상된 金正日 정권의 필요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유미영은 2000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 인솔단장으로 서울에 왔었다.
월북한 前 천도교 교령(국민회의 고문 출신) 吳益濟씨가 평양에서 金大中 총재 앞으로 편지를 보내기 전 안기부는 북한측이 공작 차원에서 金大中씨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더 갖고 있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았다. 이 편지들에는 북측이 金大中씨에게 제공했다는 돈 이야기가 등장한다. 먼저 1997년 11월11일자 金張洙(김장수) 명의의 편지.
<발신지: 中國 北京 太平橋大街 256號 金張洙
수신지: Seoul, South Korea 142-074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4동 563의 29
세형빌라 A동 301호 김원길 선생
존경하는 金大中 선생님께
귀체만강하옵니까.
고희를 넘기신 불편한 몸에 대선 성공의 고행을 하고 계시는 선생님께 본인은 진심으로 경의드립니다. 장기간 한국의 反독재민주화에 몸담고 고초를 이겨내며 헌신분투해 오신 선생님의 노고와 숙원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선생님과 맺은 연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겨 왔고 선생님과 함께 민주와 평화통일을 일일천추로 소망해 온 본인으로서도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본인은 평양에 다녀왔었습니다. 본인은 다행히도 일본에서 인연이 깊고 지금은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 계시는 김병식 선생님과 상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분도 이번 대선에서는 金大中 선생께서 꼭 당선되시기를 믿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이야기를 건네시면서 선생님이 가장 어려운 때인 1971년 가을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선생님과 조용히 만나 우의를 깊이하여 선생님의 반독재운동에 자금지원을 하고저 트렁크를 넘겨드리던 그때를 감회 깊이 회고하셨습니다.
그분은 과거 金大中 선생님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오셨고, 상호간 좋은 협력관계에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주」와 「통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오신 선생님과 같으신 분이 대성하면 금후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나라의 통일도 연방제 방식으로 결착을 보리라 확신하시며 선생님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인사와 후원의 뜻을 전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오랫 동안 선생님과 면식을 익혀 오면서 선생님의 투철한 민족관과 민주화의 집념에 감복해 온 저 역시 선생님께서 반드시 유종의 미를 보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이 민족에게 불행을 강요해 온 불운의 20세기와 결별하고 21세기를 통일의 세기로 맞자면 지금이야말로 애국애족의 입장이 확실한 정권이 나와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역사의 이 요청은 오직 선생님의 집권을 통해서만 성취가능한 줄로 압니다. 저는 이전과 다름없이 의리를 지켜 민주정권을 창출하고저 하시는 선생님의 귀한 노력을 각방으로 도와드릴 것임을 재삼 약속드립니다.
건승을 빌면서.
1997년 11월11일 김장수 근배>
『통일은 연방제로 결착짓자』고 계속 권고
이 편지는 北京우체국의 1997년 11월11일자 消印(소인)이 찍혀 있다. 만년필로 쓰였다. 이 편지 내용은 金大中 진영에 들어가 있던 金元吉(김원길) 의원을 통해서 金大中 후보에게 전달되도록 보낸 것이다. 국민회의 측은 怪편지가 도착했다고 발표한 뒤 이 편지를 안기부로 우송했다.
이 편지 내용에 金炳植(김병식)이 金大中씨에게 자금이 든 트렁크를 전달했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대목은 누가 읽어 보아도 협박용으로 보인다. 對共수사관계자는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를 받아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폭로할 거리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발신자 김장수」라는 사람은 정체불명인데, 그가 쓴 이 편지에서도 북한 측은 「귀하가 대통령이 되면 통일은 연방제 방식으로 결착될 것임을 확신한다」는 식의 메시지를 金大中 총재에게 계속 던지고 있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金大中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對南적화전략으로 규정하여 처벌대상으로 삼았던 연방제 통일방안을 6·15선언 제2항에서 「통일의 한 방향」으로 수용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편지 공작을 추진했던 북한 측 對南공작부서에서는 아마도 이 공작의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 모른다.
위의 편지에 등장하는 金炳植은 1919년 전남 신안(무안說도 있음)에서 났다. 그는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의 패망 뒤 조총련 간부로 일했다. 1967년엔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혔고, 3년 뒤엔 조총련 중앙위원회 제1부의장이 되었다. 1972년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서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해 11월부터 북한에 머물면서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국가부주석으로 있다가 1999년 7월에 사망했다.
黃長燁 선생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金炳植이 한덕수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조총련에서 밀려난 무렵, 그는 金日成에게 자신이 관리하던 1억 달러의 비자금을 바치고 북한에 머물게 되었다. 그를 통일전선부장 金容淳이 관리하게 되었다. 金容淳은 어느 날 나에게 오더니 金炳植이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서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 金容淳은 이런 사정을 金正日에게 이야기했고 金正日이 金炳植을 불러 혼을 냈다. 그 뒤로는 金炳植이 풀이 죽어 지냈던 기억이 있다』
「20만 달러밖에 보태드리지 못해 미안」
大選 투표일이 가까워지자 북측은 金大中 후보 측으로 편지를 또 보낸다. 이번에는 金炳植 명의의 타자로 친 편지였다. 북측은 金張洙 명의의 편지가 한국에서 문제가 되지도 보도되지도 않은 데 실망한 듯 이번에는 金大中씨에게 건네주었다는 돈의 액수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는 北京에 나와 있던 북한 對南공작지휘부서에서 부친 DHL편으로 당시 북한 측과 비밀 접촉 중이던 崔鳳九(최봉구) 前 평민당 의원 집(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배달하게 되어 있었다. 부친 날짜는 1997년 12월9일로 되어 있고, 부친 사람(Sender’s Name)은 「강선생」으로 적혀 있다. DHL 봉투에서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받는 이의 이름을 「金相賢」으로 썼다가 지운 부분이다.
안기부는 문제의 편지가 崔鳳九씨한테 전달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안기부 수사관이 이 편지를 받은 崔鳳九씨를 설득하여 개봉케 한 뒤 제출받았다고 한다. 안기부는 崔鳳九씨에 대해서 왜 「강」과 접촉하게 되었는지를 조사했다. 「강」은 北京에 와서 對南선거공작을 지휘 중이던 북한 통일전선부 간부 강덕순이었다.
이 봉투 속에는 이런 내용의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최봉구 선생 귀하
11월 상면의 우의가 아직 생생합니다. 12. 8 인편을 통해 보내드린 편지가 차단될 것이 걱정되어 다시 보내게 됨을 량해해 주시고 대선의 큰 사업에 분망하시는 金大中 선생에게 보내 주십시오.
선생과의 상봉을 확약하면서
북경에서 강」
편지의 본문은 이러했다.
<金大中 선생 귀하
이번 대선의 큰 사업을 앞두고 분망하실 선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그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선생의 오랜 소망과 뜻이 성공의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선생과 협력해 오던 지난 날이 회억되면서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달러)밖에 보탬해 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 데 밑거름이 되였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도 어느 회합에서 말씀하셨지만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정권이 서야 하며 북과 남이 민족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과의 뜻깊은 상봉을 확약하면서 옥체만강을 기원합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주체 86(1997)년 12월5일 평양
나는 이 편지를 평양에서 보내려고 하였으나 중도에서 차단될 것이 걱정되여 인편을 통해 해외에서 보내게 됨을 량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기부 자료: 북측의 의도 분석 북측은 이 편지를 당시 李仁濟 후보 측에 합류했던 兪成煥(유성환) 前 의원한테도 보냈다. 兪의원은 이 편지를 안기부 대구지부에 신고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1997년 12월 大選을 앞두고 金大中·李仁濟 두 후보 측근들이 북한 정권의 對南공작부서와 접촉하여 선거에 유리한 방향으로 북한 정권의 도움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내사를 벌였다. 북한 측은 北京에 大選공작팀을 상주시키다시피 하여 北京을 잇따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黃長燁씨의 위의 증언이 나온 것이다.
1997년 12월10일경 안기부는 金大中 후보의 국민회의가 吳益濟 편지 등과 관련하여 안기부를 조작說로 공격하고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언론보도 자료를 만들었다. 이 발표문 초안(언론사에 배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을 읽어 보면 金大中 총재 측에 대한 북측의 편지공세와 이에 대한 안기부의 視覺(시각)이 잘 보인다.
<북한의 金大中 후보에 대한 일련의 편지 공작과 관련하여
국가안전기획부는 吳益濟 편지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회의 측(金大中 후보 측)이 안기부의 정치적 조작 음모라며 정치공세를 취하여 지난 12·6 사건의 진상을 상세히 발표한 바 있는 데 국민회의 측이 그 이후에도 안기부가 북한의 金大中 후보 떨어뜨리기 공작에 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계속해서 當部를 매도하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최근 북한의 잇따른 편지공작 의도를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임.
북한이 金大中 후보에게 보내온 일련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1·12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 金炳植이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金大中 후보를 만나 反독재활동에 자금지원을 하고자 트렁크를 넘겨주었으며, 金후보가 집권하면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연방제 통일도 확신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고, 11·21 吳益濟가 북한에서 金大中 후보에게 월북을 위해 서울을 떠나기 전 金후보에게 여러 번 전화를 하였고, 또한 월북 전 미국에서 金후보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금강산무역개발 박경윤 사장에게 1971년 가을 일본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金大中 후보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달러밖에 제공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오늘날 金후보 정치역정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용 전송문을 보낸 바 있음.
이와 같이 북한이 大選을 앞두고 金大中 후보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을 적발 가능성이 높은 편지 또는 電送文 형식으로 잇따라 보내는 것은, 안기부가 편지나 전송문을 적발하는 즉시 그 내용을 공개할 경우 오히려 특정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안기부의 北風공작이라고 뒤집어씌움으로써 안기부가 마치 특정후보 낙선공작을 하고 있는 것인 양 국민적 오해를 유발하여 국민과 안기부를 이간시킴으로써 정국불안 야기는 물론 안기부 무력화를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이와 같은 북한의 공작의도는, 국민회의가 처음에는 北風공작설을 주장하다가 안기부가 金大中 후보를 떨어뜨리는 북한의 공작에 가담하고 있다고 입장을 변경하자, 북한은 국민회의 측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즉각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박경윤에게 기자회견용 電送文을 보내 과거 金大中 후보가 金炳植으로부터 20만달러를 수수하였다는 등 金大中 후보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음.
이와 같이 북한은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안기부의 분석, 판단능력을 시험하고 오판을 유도하여 우리의 大選 정국을 교란시키고 국민회의와 국가정보기관을 첨예하게 대립시킴으로써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한편 大選 이후에도 정국혼란의 불씨를 남겨 두려는 고도의 정치적 공작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됨.
따라서 그동안 국민회의가 주장해 온 안기부의 「北風공작설」이나 「북한공작가담설」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공작의도에 말려들 위험성이 큰 것으로 보이므로 좀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며 국민회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일련의 편지내용에 대한 실체적 진실 여부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임.
한편 북한은 안기부가 자신들의 공작에 말려들지 않자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금강산무역개발사장 박경윤에게 기자회견용 전송문을 보내 우리 언론을 상대로 또 다른 공작을 시도하고 있음.
안기부는 그동안 黃長燁 사건, 남파부부 간첩사건, 고영복 사건 등에서 보듯이 어떠한 對共사건에 대해서도 정치적 입장을 떠나 엄정하게 처리한다는 원칙을 지켜 왔는 바, 吳益濟 편지 사건에 있어서도 對共사안인 만큼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 국민회의 측 사전 양해를 얻어 의문사항을 질의한 것이며, 앞으로 북한의 제2,3의 편지공작이 있을 경우 북한의 저의 파악에 주력하면서 對共차원에서 조사할 수밖에 없음을 밝힘.
따라서 국민회의는 북한의 편지공작에 대해 大選 득실 여부만을 따져 정보기관을 더 이상 매도하지 말 것과 안기부가 질의한 의혹부분에 대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답변해 줄 것을 재차 촉구하며, 언론도 민감한 對共사안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판단, 보도할 경우 결과적으로 북한의 對南 공작에 말려들 소지가 많은 만큼, 반드시 對共전문기관은 안기부와 협조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림>
1971년 가을 도쿄의 金大中
金炳植과 金張洙 명의의 金大中 앞 두 편지의 핵심은 金炳植이 1971년 가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20만 달러가 든 트렁크를 金大中 당시 신민당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시기에 金大中씨가 과연 도쿄에 있었는지 알아보았다.
1980년 7월19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金大中씨를 조사하여 제3차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았다.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在日동포 인사들과 함께 反국가단체인 한민통을 만든 데 대한 조사였다. 신문조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피의자는 金載華(김재화)의 사위 郭東儀(곽동의)에 대해 말하시오.
『제가 郭東儀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1971년 8월경 金相賢 의원으로부터입니다. 당시 金의원은 일본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라는 연구소를 운영, 「在日韓國人」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民團 비주류파인 소위 베트콩파에서는 郭東儀가 조총련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했습니다.
1971년 11월경 신병치료차 渡日, 東京에 체류하고 있을 때 舊민단 東京본부단장 鄭在俊이 저의 대통령 낙선 위로를 겸한 파티를 東京 신주쿠 소재 야키도리 집에서 열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鄭在俊·裵東湖·趙活俊·양상기·유석준·김은택·김군부 등 민단 비주류인 베트콩파들이 참석했으며 郭東儀가 참석해 처음 인사를 했습니다. 1972년 2월 중순경 경제시찰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온 성명미상의 駐日 한국대사관 직원이 민단 이야기 끝에 郭東儀는 조총련과 내통해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이란 말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피의자 진술에 의하면 郭東儀가 사상적으로 불순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는데 郭東儀를 사상적으로 의심해 보지는 않았는지요.
『1971년 11월 중순경 저녁 때 그동안 자주 왕래하던 趙活俊(조활준)의 주선으로 긴자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金載華와 본인 셋이서 회식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본인이 「郭東儀에 대해서 사상을 의심하는 말이 많은데 사실이냐」고 했더니 金載華는 화를 내면서 「모략이다. 내 사위는 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북송 때는 니가타에 가서 철로를 베고 누워 이를 저지하려고 투쟁한 일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식사 후 趙活俊에게 물었더니 「郭東儀에 대해서 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나의 의심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에 그 후부터는 郭東儀를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간첩에 포섭되었다는 郭東儀 郭東儀씨는 金大中씨와 함께 韓民統(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만들 때 조직국장으로 일한 핵심 인물이었다. 1980년 駐日 한국대사관은 한민통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여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제출했는데 郭東儀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郭東儀는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48년 12월 남해군 인민위원장 박종환의 지령에 의해 밀항 도일했다. 郭東儀는 1960년경부터는 조총련으로부터 月 10만 엔의 보수를 받으며 민단 조직 와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 북한간첩 윤효동에게 포섭되어 북괴 공작선편으로 입북, 간첩 교육과 민단 파괴, 對南공작지령을 받은 후 동년 5월에 귀환한 그는 조총련 부의장 金炳植으로부터 민단 와해 및 對南공작 자금으로 5000만 엔을 받았다.
郭東儀는 1973년 7월13일부터 8월4일 사이 배동호, 趙活俊, 김종충 등을 조종하여 金大中과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도록 하고 자신이 同 조직국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8월13일 조총련 중앙본부로부터, 그간 한민통이 조총련의 의도대로 효과적인 反韓활동을 전개하여 왔고, 북괴가 의도하는 민주 민족통일 해외 한국인 연합을 결성하여 연대 투쟁 체제를 구축하는 데 공헌한 代價로 특별자금 5000만 엔을 받은 사실이 있음>
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郭은 金炳植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고, 金炳植의 편지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에 金大中씨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金大中씨의 진술에 의하면 (金炳植이 그에게 돈을 주었다고 주장한) 1971년 가을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북한 측 지령을 받고 있던 金載華, 郭東儀 등 문제 인사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때 그가 만났다는 金載華·郭東儀·趙活俊·鄭在俊씨 등은 1973년 여름에 한민통을 결성할 때 핵심 요원이 된다. 우리 대법원이 反국가단체라고 규정한 한민통의 인맥은 1971년 가을에 金大中씨와 연결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무렵에 金大中씨가 조총련의 제2인자이자 동향 인물인 金炳植과 접촉이 있었는가의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 金炳植이 풍부한 자금을 만지고 있었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1997년 12월18일자 黃長燁씨의 金大中 관련 발언 안기부 보고서에서 보고서 작성자는, 金日成 측이 金大中씨한테 두 군데로 돈을 주었다는 黃長燁씨의 발언에다가, 그 두 군데가 북한 측과 조총련으로 추정된다는 注를 달아 놓고 있다.
裵東湖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金大中 중요한 것은, 金大中씨가 북한 측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는가이다. 돈이란 것은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에서 오고 가는 것이다.
특히 발각될 때 重刑이 예상되는, 반국가단체로부터 정치인이 돈을 받는다는 것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은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설정이 이뤄진 다음에나 가능하다. 黃長燁씨의 발언, 그 진실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북한 측(조총련 포함)과 金大中씨 측의 관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金大中씨와 裵東湖·郭東儀 등 북한공작원들이 조직한 反국가단체 한민통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이 분기점임을 알 수 있다. 1980년에 駐日 한국대사관이 작성한 한민통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郭東儀는 1970년 4월경 소위 「민단유지간담회」 회원 중 북괴 간첩인 尹孝同(윤효동: 후에 자수하여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했음. 그의 증언으로 인해 韓民統이 反국가단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음-편집자 注)의 안내로 北海道 하코다데 해안에서 북괴공작원 편으로 入北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郭東儀는 「공산혁명에 관한 정치학습과 간첩 교양 및 對南공작 지령을 받고 同年 5월경 歸日하여 일본內 북괴 對南적화전략기지 조성을 위한 민단 파괴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70년 11월경 배동호, 郭東儀 등은 東京 우에노 소재 다카라 호텔에서 한창규(48세) 등 8명의 민단유지간담회 간부 학습회를 열어 북괴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의 金日成 교시를 학습하면서 남조선의 인민 민주주의 혁명 정권을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민단 조직원 중 反정부·反민단 인물을 규합, 혁명적 단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1980년 7월18일, 피의자 金大中씨에 대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신문 내용에 따르면 북한 측의 조종을 받는 裵東湖는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출마 이전에 金大中씨와 접촉했다.
<―피의자(金大中)가 裵東湖를 알게 된 경위를 말하시오.
『제가 裵東湖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1년 1월 하순경입니다. 그때 본인은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고 일본과 미국의 정계 시찰차 출국, 일본 東京 소재 데이고쿠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마침 故 柳珍山(유진산)·梁一東(양일동)씨도 그 호텔에 투숙하고 있어서 그들과 자주 만났는데, 裵東湖가 그들을 만났러 왔을 때 梁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渡日 때마다 만나 서로 이야기하고 친숙히 지내고 있습니다』
―피의자는 裵東湖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받았나요.
『裵東湖는 경상도 출신으로 金載華 밑에서 民團 사무총장을 지냈고, 당시는 兪石濬(유석준)을 民團 중앙본부 단장으로 당선시키려 적극 협조했으나 실패, 民團 非주류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의자는 裵東湖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
『梁一東씨의 소개로 알게 된 후 柳珍山·梁一東씨와 만나는 자리에서 수차 만났는데, 제가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숙박비를 계산하려 했더니 당시 숙박비 30만 엔 정도를 裵東湖가 이미 계산했습니다. 저의 미국 여비에 보태쓰라고 하면서 梁一東씨의 동생 양삼영이 미화 1만 달러를 주기에 그중 미화 3000달러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피의자가 韓民統 일본본부를 결성하기 이전에 裵東湖는 어떤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나요.
『그 사람은 前에 民團 중앙총본부 의장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들었으나 1971년 7월경 民團에서 제명된 후에는 民團에서 이탈한 교포들을 모아 民團 非주류파에 속하는 민족통일협의회를 구성했습니다. 그 의장직에 있으면서 기관지인 「민족시보」 편집에 관한 실무감독을 하는 등 주로 反民團, 反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피의자는 朝總聯과 연계 등 裵東湖의 사상성분에 대해 의심해 본 일은 없나요.
『裵東湖는 民團에서 제명당했으며 1972년 2월경 民團 중앙위원이던 동향인 박성준으로부터 朝總聯 관련 인물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으며, 民團 사람들은 사상이 불순하다고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본인과 동향인이며 국민학교 동창생인 金鍾忠(김종충)에게 「사상성분에 관해 자세한 것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더니 金鍾忠의 말이 「民團 세력 다툼에 문제가 있어 그를 불순하다고 밀어붙일 뿐이지 사상성분에는 의심할 데가 없다」고 해 그런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1973년 7월13일 東京 소재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서 裵東湖를 만났을 때 「林昌榮(임창영) 때문에 혼나셨죠」 하기에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林昌榮으로부터 이북 간다는 전화가 와서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하기에 더욱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3월21일 본인은 民團 非주류들에게 民團 복귀를 요청했는데, 결과는 실패했지만 裵東湖가 東京 상업은행 이사장 허필석씨의 주선으로 시도해 보았다고 본인에게 보고한 점 등으로 미루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경영하는 「민족시보」가 너무 反정부적이고 북한에 대해선 비판이 없다는 것이 본인의 불만이므로 趙活俊씨를 통해 충고한 사실이 있습니다. 통일정책에 있어서도 그는 본인의 공화국 연방제를 지지했으나 통일 후 중립을 주장해 그 점은 결론을 보류해 두었습니다』>
「金大中에게 간 것은 朝總聯 돈임이 확실」 裵東湖씨는 郭東儀·金載華와 함께 북한 측의 지령을 받아 韓民統을 조직한 핵심 인물이다. 이런 인물과 金大中씨는 숙박비를 지원받는 관계가 된 것이다. 上記 駐日 한국대사관 보고서는 朝總聯이 韓民統에 지원한 자금의 내역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朝總聯은 한민통에 反韓 데모 동원, 反韓 집회 개최, 북괴 및 朝總聯 선전 활동 등 비용으로 활동 高潮期(고조기)인 1973년 8월~1975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최성황기인 1976년 1월~1977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퇴조기인 1978년 1월~1979년 7월은 매월 500만~1000만 엔, 再고조기인 1979년 8월~1980년 2월은 매월 1000만 엔 등을 지원하여 왔음」
「1971년 3월25일 郭東儀는 朝總聯 중앙위원회 부의장 金炳植으로부터 민단 와해 공작 및 對南공작 사업 자금 5000만 엔을 받았다는 확실한 첩보가 있음」
「金大中에 대하여는 1972년 10월~1973년 8월 베트콩파인 金鍾忠이 金大中의 한민통 조직 등 활동비조로 10여 차례에 걸쳐서 약 1000만 엔, 裵東湖가 金大中의 滯日 호텔비 및 한민통 조직 자금 보조비 명목으로 5차례에 걸쳐 500만 엔, 渡美 여비 1회 2000달러, 정재준 등 베트콩파 사업가들이 金大中의 체류비, 활동비, 여비 등 명목으로 4차에 걸쳐 약 2000만 엔 등을 제공하여 金大中은 同자금으로 일본 한민통 및 미국 한민통 조직 자금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그중 金鍾忠 및 裵東湖가 金大中에게 제공한 자금은 同人 등이 특별한 사업이나 수입원이 없는 자들인 것으로 보아 朝總聯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
1971년 무렵부터 金大中씨와 裵東湖, 郭東儀 등 북한 측 공작원들 사이가 친밀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자료로서 확인된다. 1971년 가을 金炳植이 金大中씨에게 돈을 주었다는 편지 내용에 대하여 기자가 만난 복수의 안기부 前 對北공작 담당자와 對共 수사관 출신들은, 『편지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金大中 후보를 협박하려고 보낸 편지로 보이는데, 사실이라야 협박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북한공작원과 KBS 참고로 지난 9월27일 KBS에 방영된 「한국 사회를 말한다-귀향, 돌아온 망명객들」이란 프로그램은 거물간첩 혐의자 宋斗律씨만 민주인사로 미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대법원이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는 反국가단체라고 확정판결한 韓民統(일본. 요사이는 한통련으로 개명)의 조직국장을 지낸 郭東儀씨를 이렇게 묘사했다(KBS 인터넷에 떠 있는 시나리오에서 인용).
<정부의 조건 없는 귀국허용조치에 가장 기뻐한 것은, 郭東儀 한통련 의장이다. 한통련이 결성된 건 지난 73년 金大中 납치사건 당시다. 金大中 구명운동을 시작으로 번져나간 한통련의 활동은 해외 민주운동세력의 구심이었다. 허무주의에 빠져 있던 재일교포 청년들에게는 조국의 존재를 알리며 희망을 안겨주었고(하략)>
대법원이 反대한민국 활동 단체라고 판단한 韓民統의 親北활동에 대해 KBS는 「민주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북한 정권의 평가법이다. 북한 정권은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행동을 민주운동이라고 부른다. 우리 대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韓民統은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 金大中씨를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뒤엎으려고 했던 조직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KBS는 郭東儀씨를 미화하고 그의 뜻대로 하지 않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경직된 조국의 모습」, 「불분명한 정부의 태도」식으로 보도했다.
對共 수사관들의 견해 당시 안기부 對共수사 관계자들은 金炳植 편지 공작 등에 대해서 이런 견해를 보였다.
<吳益濟의 편지는 안기부에 적발되라는 의도로 보낸 것이었다. 평양우체국 소인에다가 북한 우표까지 붙여 보낸 것이다. 金張洙 명의의 편지 원본은, 국민회의 측에서 괴편지가 왔다고 발표한 뒤 우편으로 안기부에 보냈다.
이들 편지와 관련하여 70~80개 문항의 질의서를 국민회의 측에 보냈다. 국민회의 측에선 林모 의원을 통해서 선거에 영향을 주므로 공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다. 金大中 대통령 당선자 측에선 답변서를 1998년 초에 안기부로 보냈고 우리는 내사 종결 처리했다.
북측의 이런 편지 작전 의도는 金正日이 金大中 후보를 겁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봐주는 척하여 양수겸장의 효과를 노렸다. 즉, 한나라당 측에 이 자료를 주지 않은 것으로 金大中 후보 측을 도와준 것이며, 당선된 뒤에도 말을 안 들으면 이를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여 약점을 잡아두기 위한 포석이었다. 만약 이 편지가 안기부에 의해서 공개되면 국론분열로 혼란에 빠진다. 그런 것도 계산하여 보낸 편지였다.
당시 金泳三 대통령은 李會昌씨를 지지하지 않아 안기부도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金泳三 대통령이 권부장에게 강력한 수사를 지시를 하지 않았다. 나는 金大中씨가 북한 측에 약점이 잡혔고, 이것이 그의 對北정책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영향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무리 외화가 부족해도 공작금을 아끼지 않는다. 남조선노동당사건 때 김낙중 집에서 200만 달러나 발견된 것을 보면 金大中씨에게는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생각해 보라>
안기부 출신의 對日·對北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金大中씨와 북한 측의 연계는 확실하다. 이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측이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왜 金大中 대통령이 자신의 납치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지 않았을까. 이걸 제기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다른 자료가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고 본다. 郭東儀는 북한 측에 포섭된 간첩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난수표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본에 파견나가 있을 때 郭東儀를 전향시키려고 했다. 여권을 내주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마지막에 거부했다. 아마도 북한 측과 상의한 것 같았다. 郭東儀가 한번 남한을 다녀가면 그에 대한 북한 측의 신뢰가 떨어지고 효용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의 장인 김재화도 북한공작을 받아 움직이는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黃長燁 증언의 무게-북측에 약점 잡힌 金大中이 한 일들 金日成 부자와 金大中 前 대통령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규명해야 할 이유가 있다. 金大中씨는 광복 직후 좌익행동가였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도 북한 정권에 대해서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고 급기야는 북한 정권의 對南공작원들과 함께 反국가단체를 만들어 의장이 되었다. 그는 통일문제, 남북한의 유엔 가입 문제, 金日成 사망 직후의 조문 문제 등에서 대한민국의 입장보다는 북한정권의 입장을 더 고려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는 북한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경력이 확인돼 있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남북 頂上회담을 개최하면서 현대그룹을 내세워 적어도 5억 달러를 金正日 정권의 對南공작부서 비밀계좌 등으로 넣었다. 이 돈은 북한의 핵개발 등 무장력 강화와 對南공작에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對北정책을 추진하면서 국익과 국부를 희생시켜 憲辯으로부터는 반역혐의의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金大中씨가 대통령으로서 추진한 對北정책의 상당 부분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북한 측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한 報償(보상)이란 추측도 제기되었다.
특히 6·15 선언 제2항은 對南적화전략의 가장 중요한 고리인 연방제 통일방안을 상당 부분 인정한 것으로 대한민국을 敵의 전략에 노출시켰다는 비판이 강하다.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金大中과 金日成 부자 사이의 특수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런 金大中씨의 활동이 검증되고 견제되지 않으면 한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는 시민들이 많다. 黃長燁씨의 증언(『金日成이 金大中에게 돈을 주었다고 말했다』)은 金日成과 가장 가까웠고, 증언의 정확성이 宋斗律의 경우에서 증명된 인물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黃長燁씨가 1997년 12월18일자 문제발언에서, 북한 측이 金大中의 당선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동안 그에게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경제원조를 얻어 내려는 의도라고 풀이한 것이 흥미롭다. 북측은, 金大中씨가 金日成 부자 측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므로 대통령이 되면 그 도움에 대한 報償성격으로 막대한 對北 경제지원을 기대(또는 요구)했으리라는 추정을 낳는 말이기 때문이다. 많은 對北 전문가들은 金大中 정권이 對北 경계심을 약화시키고 안보망의 구멍을 뚫는 여러 일들을 추진한 것도 金正日 정권에게 약점 잡힌 상태에서 해준 일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李哲: 『金大中씨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하자고 했다』고 진술(金씨 측은 부인) 1997년에 金大中씨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權寧海 안기부장이 이 시기에 노출된 金大中씨의 이념문제와 북한 측의 공작에 대해 大選 기간인 점을 감안하여 본격적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金大中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소위 北風사건을 만들어 權寧海 前 안기부장 등 간부들을 사법처리한 것은 윤모씨가 안기부의 후원을 받아 한 金大中 후보 비판 기자회견을 문제삼은 것인데, 이 기자회견은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아 선거에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權寧海 부장의 안기부가 덮어버린 金大中 관련 정보가 훨씬 더 큰 폭발력을 가진 것들이었다.
안기부 관계자들은 1998년 3월 金大中 대통령 측이 소위 北風사건으로 자신들을 압박하자 「우리는 이런 것도 알고 있었으나 政爭을 우려, 大選 이후로 수사를 미뤘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있다. 그 내용을 한번 본다.
<간첩 고영복 대통령 당선자 관련 불순 언동 내용
간첩 고영복 진술 내용 1991년 간첩 고영복은 서울大 사회학과 제자인 이철(49·前 민주당 국회의원)의 자서전을 출간할 경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철의 자서전을 출간하기 위해 당시 자신이 운영하던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제자 金○○(40·독일 거주)를 이철 前 의원에게 전화로 소개시킨 후 金○○가 인터뷰한 내용 중 이철 前 의원이 동교동을 방문했을 때 金大中 총재가 자신의 지하실 서재에서 『우리 손잡고 인민을 위해서 잘해보자』라고 언동한 사실이 있어 이철 前 의원은 『金大中 총재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보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실망했다』는 내용을 한국정신문화원 객원연구원으로 함께 근무하는 권○○ 장군 등에게 말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첩 고영복과 함께 객원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예비역 장성 권○○(57), 김○○(59), 장○○(60), 강○○(60) 등을 접촉, 조사한 결과 1997년 9월경 정신문화연구원 내 팔각정에서 고영복이 객원연구위원인 권○○ 등 4명에게 대선관련 대화를 하던 중 『金大中씨는 공산주의자다』라고 하면서 연도미상경 모 정치인과 동교동 DJ 자택 지하실에서 단독 면담 시, 그에게 『이곳은 도청이 안 되는 곳이라 안전한 장소다,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함께 해 보자, 설사 이 사실이 외부에 누설된다고 해도 우리 둘만이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른다고 발뺌을 하면 된다』라고 언동하여 약 일주일 후 연구원 내에서 산책을 하던 중, 권○○ 객원연구위원이 고영복에게 모 정치인의 신원을 묻자 『모 정치인은 이철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사실이 있다고 권○○ 등 참고인 4명 모두 같은 내용을 진술하였음.
이철 前 의원 조사결과 1985년 3월경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金大中 총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연락을 받고 오후 5시경 동교동 金大中 총재 자택 지하실에서 단둘이 면담하면서 金大中 총재로부터 『우리나라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富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듣고, 金大中은 자신에게 유리하면 레닌도 될 수 있고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로 생각했으며, 1988년 5월 밤 11시경 金大中 총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연락을 받고 동교동 자택 식당에서 단둘이 면담하면서 金大中 총재로부터 정치자금 10억원과 부총재 자리를 줄 테니 함께 일하자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자신이 당직이나 정치자금보다는 야권통합에 뜻이 있어 거절했다고 진술한 사실이 있음>
李哲 前 의원은 기자에게 자신이 金大中씨로부터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再확인해 주었다. 한편 金大中씨 측은 『金大中 前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黃長燁: 「金大中-金正日은 결탁관계」 金日成이 야당 시절의 金大中씨에게 돈을 주었다는 것은 『우리에겐 상식이었다』고 말한 黃長燁씨가 그 뒤 金大中 당시 대통령의 對北정책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느냐가 궁금하다. 黃선생은 공개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을 비판한 적은 없으나 2001년 초에 쓴 비공개 문서에선 가차 없이 햇볕정책을 공격했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DJ는 완전 붕괴에 직면한 김정일 정권을 되살리기 위하여 막대한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였으며 미국 측의 지원을 등에 업고 김정일과 그의 독재체제에 대한 최악의 영상을 바꾸기 위하여 구걸외교를 벌였다. 그 결과 金正日과 깊이 결탁되었으며 김정일 정권을 소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김정일을 더욱 오만하게 만들고 남북통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남한 인민들 속에서 反美감정을 조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중략). DJ는 우리 민족의 입장에 선 사람이 아니라 미국을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김정일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입장에 서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 (중략). 햇볕정책을 계승할 민주당 정권이 서지 않고 정권이 야당에 넘어가는 경우에는 김정일과 김 대통령의 연관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이는 부정부패와는 문제가 다른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므로 정권의 재창출을 위하여 결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金日成이 실토한 연방제의 속셈-「남한 민중을 쟁취하라」 黃長燁씨는 6·15 선언 제2항에서 金大中 대통령이 상당 부분을 수용한 北의 연방제 통일방안이란 것이 위험천만한 함정을 지니고 있음을 기고문을 통해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다(月刊朝鮮 2000년 12월호).
<북한 통치자들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은 본질상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통일전선전략을 구현한 전술적 방안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방안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안과 관련하여 한 金日成의 발언 내용을 참고로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金日成은 연방제와 관련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핵심 간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였다.
『연방제는 통일전선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전술적 방안이다. 연방제를 실시하여 北과 南이 자유롭게 내왕하면서 자기 제도와 자기 사상을 선전하게 되면 공화국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된 국가이기 때문에 조금도 영향받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남조선은 사상적으로 분열된 자유주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남조선에 나가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주체사상 선전을 대대적으로 하면 적어도 남조선 주민의 절반은 쟁취할 수 있다. 지금 인구 비례로 보면 남조선은 우리의 2배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실시하여 우리가 남조선 주민의 절반을 쟁취하는 날에는 공화국의 1과 쟁취한 남조선 주민의 1을 합하여 우리 편이 2가 되고 남조선이 1로 된다. 이렇게 되면 총선거를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되고 전쟁을 해도 우리가 이기게 된다. 중국에서도 國共합작이 국민당 지배 지역에 공산당 세력을 확장하는 좋은 기회로 되었다. 군대에서는 격술부대(경보병 부대)를 중요한 전략적 부대로 보고 계속 강화해야 한다. 인민학교 학생 때부터 태권도를 가르쳐 태권도 선수를 대대적으로 양성할 필요가 있다.
연방제를 실시하여 남조선 정세가 복잡하게 될 때 우리 인민군대가 직접 진격하여 남조선의 진보세력을 지원해 주면 남침이라고 하면서 외국이 다시 간섭할 수 있다. 그러나 태권도 부대를 한 100만 명 조직하여 권총이나 한 자루씩 채워 남조선에 내보내면 같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이남 출신이고 누가 이북 출신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남침이라는 구실을 주지 않고도 능히 우리가 남조선의 親北 진보세력과 힘을 합쳐 정권을 잡을 수 있다. 연방제에서는 국가수반을 한 번은 북측에서 담당하고 다음번에는 남측에서 담당하는 식으로 교대할 수 있다.
우리 헌법에는 국가수반이 인민군대 총사령관으로서 일체 국가무력을 장악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연방국가 수반이 남측에서 나올 때에는 우리 무력의 통수권도 남측 출신의 연방국가 수반에게 넘어가게 된다. 연방제를 실시하여도 무력에 대한 통수권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필요할 때에는 우리가 무력을 쓸 수 있다. 이번에 국방위원장이 총사령관을 겸하도록 헌법을 고친 것은 그때문이다.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총비서이기 때문에 국가수반과는 관계가 없다』
보는 바와 같이 북한 통치자들은 연방제를 통하여 남한의 親北세력을 확대강화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정권을 위한 자기들의 정치적 지반을 마련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내란의 형식으로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黃長燁씨는 또 金正日 정권의 對南공작은 한국 사회를 계급적으로 분열시켜 서로 증오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통치자들은 南北간의 경쟁에서 승패는 결국 어느 편이 민족성원들을 더 많이 쟁취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면서 통일전선전략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그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의 각계각층 군중들이 통일단결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서로 싸우도록 하여 남한 정권의 군중적 지반을 약화시키는 한편 남한 체제에 대하여 계급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불만을 가진 층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은 우선 노사 간의 갈등을 조장시키며 反美·反日 감정을 고취하고 있다. 그들은 남한의 모든 反체제운동과 反美·反日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남한에서 親北 세력을 키우고 그들과의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북한 인민들을 수령절대주의 숭배사상으로 교양하는 한편 남한 정권을 계급적으로 증오하고 미국과 일본을 계급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증오하도록 교양하고 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북한이 자본주의 나라들과 교류를 확대하면 소련이나 동구라파 사회주의 나라들처럼 금방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북한 통치자들을 대화의 마당에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이고 북한이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제원조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에로 문을 열어 놓는 시초라고 평가하면서 자체 만족에 빠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북한 통치자들이 군중관리사업에 얼마나 큰 의의를 부여하고 빈틈없이 짜고 들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다>
金日成-연방제-金大中 1974년 8월 金日成은 일본 자민당의 親北의원 우스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와 對談하면서 金大中씨에 대한 매우 우호적인 언급을 했다. 우스노미야 의원의 아버지는 3·1운동 때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다. 金日成은 우스노미야 의원이 金大中씨가 납치될 때 救命운동을 해준 데 대해 감사했다.
金日成은 『우리는 金大中과 만난 적도 없고, 원조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옳다고 생각한다. 슬로건도 좋다. 평화의 슬로건이다. 향토예비군 폐지, 월남에서 철군, 中·蘇와 국교수립, 정보정치 중단 모두 좋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말해 우리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그는 신망을 얻었다. 그의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슬로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남조선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정세는 아니다. 진보적인 사람, 평화통일을 바라는 사람, 군축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것이다. 朴正熙의 성격은 과거의 성격에 따른 것이다. 공산당원을 많이 죽였다. 애국자를 많이 죽였다. 金大中에게는 과거의 죄가 없다. 남조선에는 진보적인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한 인물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 우스노미야 선생과 나는 10년 전부터 친구였다. 선생과 金大中이 또 친구가 되셨다. (그래서) 세 사람의 이러한 관계가 가능해진 것이다』
金日成 부자가 金大中씨의 집권을 바랐던 가장 큰 이유는 연방제 통일방안이 그에게 먹힐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한 측이 199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협박성 편지를 통해서 金大中씨에게 상기시키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도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 통일을 하자』는 것이었을 터이다. 우리 공안기관은 오래 전부터 金大中씨가 주장하는 통일방안은 본질적으로 金日成이 내세운 연방제안과 같다고 보고, 한때는 그에게 중형을 선고하도록 했었다.
1980년 7월31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를 제기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金大中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 온 남북 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 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는 등 각종 기자회견, 時局강연, 책자 출판 등을 통하여 북괴의 통일전선과 선전선동에 同調·찬양하는 주장을 하는 등 反國家 활동을 하여 오다가 (下略)>
金大中씨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그에 따른 그의 對北 언동은 북한의 對南 적화통일에 동조하는 주장이란 공소사실은 그 뒤에 법원 판결에 의해서도 유죄사유로 유지된 우리 법원의 확정된 판단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의 판단: 「북괴연방제와 金大中 연방제는 같다」 1심 재판 때의 검찰 논고문은 이렇게 주장했다.
<피고인은 金日成의 同(편집자 注-1960년 제안) 연방제 주장을 몰랐다고 하나, 피고인은 당시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으로 있었으며, 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당시 민주당 대변인 曺在千이 위 金日成의 연방제 제의를 상투적인 파괴공작이라고 일축한 점으로 보아 피고인의 이 주장은 경험칙상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중앙정보부의 「金大中의 남북연방제 통일주장 내용평가」 및 金大中·金日成의 연설내용 全文(남북연방제 관계)에 의하면 金大中의 연방제 주장은 내용 면에 있어서 북괴의 고려연방공화국제와 동일함은 물론 피고인 스스로 『북한의 통일 주장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한국은 북한의 연방제를 받아들여야 하고 북한은 한국의 유엔 동시 가입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여 북괴의 통일노선에 동조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피고인의 위 변소는 이유 없습니다>
위의 논고문 내용은 그 이후의 재판과정에서 받아들여져 유죄 선고에 있어서 근거가 된 것이다. 위의 논고문에 등장하는 중앙정보부의 金大中 연방제 판단 보고서 요지는 이러했다.
<북괴의 「남북연방제」안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 당시 我國의 불안한 정국과 국내 혁신 정당 및 학생층의 비등한 통일논의에 편승, 최초로 제의한 이래 현재까지도 그들의 핵심적 통일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북괴는 이를 통해 한반도 현상을 인정하는 듯한 공존 인상을 부각시켜 통일문제의 민족 내부화와 주한 미군의 철수를 촉진시키고 한국內 각계 각층 대중과의 광범한 통일 전선을 형성, 聯共 합작 여건을 조성하는 등 對南 폭력 적화혁명 기반을 강화하고자 적극 획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북괴 연방제안과 金大中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표현상 차이를 제외하고는 同 연방제안의 성격·활동(기능) 및 기구 구성면 등에서 쌍방이 일치하고 있다.
金大中의 연방제 통일주장은 북괴의 주장과 동일함은 물론 金大中도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연방제와 함께 「한반도의 外軍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同 연방제를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하려는 북괴의 전략적 기도에 영합하였다.
북괴는 그의 이 같은 태도를 중시, 그를 「민주인사」로 규정하였고, 『민주인사 집권時 연방제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金大中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평화적 통일이 실현되었을 것』(1975년 5월17일 金日成·日 마이니치 신문 기자회견)이라고 피력하였다. 1973년 8월28일에는 「金大中 사건」을 들어 남북대화의 일방적 파탄을 선언(남북조절위 북측 공동위원장 김영주 성명)하는 등 그의 활동을 적극 비호한 바 있다.
이로 볼 때 金大中은 북괴가 對南적화 전략 추진의 여건 조성책으로 제시해 온 「남북연방제」안에 사실상 동조함으로써 북괴를 고무시킴은 물론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 주장으로 적을 이롭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金大中-金正日이 합의한 6·15 선언 제2항은 對南적화통일 방안인 연방제를 상당 부분 인정함으로써 수십 년간 북한 정권이 金大中씨를 상대로 벌인 공작의 결과물이었다는 의심이 든다. 盧武鉉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하였으니 이 음모의 결과물을 이어받겠다고 맹세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金大中의 반역적 對北정책을 이어받은 盧武鉉 정부 시절에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 놓고 대비하는 것이 근거 없는 낙관론보다 안전할 것이다.
金大中의 국가반역혐의 총괄 이제 많은 국민들은 좌익운동가 출신인 金大中씨가 오랫동안 조국에 대한 叛心을 품고서 연방제와 비자금을 매개로 하여 민족반역자 金日成·金正日과 내통해 오면서 조국의 이익과 안전과 富를 敵에게 넘겨 주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1. 좌익운동가로서 활동한 前歷 등으로 해서 여러 차례 대한민국의 공권력에 의해 제재를 당한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국가에 대한 유감과 복수심 같은 것을 심어놓았던 것 같다. 동시에 그는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정의감과 분노를 느낄 수 없는 불감증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2. 북한 정권은 일찍부터
그를 포섭 및 공작대상으로 설정하여 집요하게 접근했다. 1973년에 일본에서 그가 북한 정권 측의 공작원들과 손잡고 만든 韓民統은 드러난 합작 사례일 뿐이다. 金日成은 金大中씨가 정권을 잡아야 對南적화공작이 먹혀들 수 있다고 판단하고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3. 金大中씨는 金日成의 對南적화통일 전략인 연방제를 모방한 자신의 연방제 통일방안으로써 북한 정권과 내통할 수 있는 매개물을 만들었다. 金大中씨의 통일방안에는 헌법 개정 없이도 남북한 지도자의 결단에 따라
「상징적 통일의 제1보」에 들어갈 수 있다는 커다란 함정이 숨어 있다.
4. 이 「상징적 통일의 제1보」에 들어가면 한국에서 주한미군은 철수하든지 중립화되고
金正日 세력의 활동이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음모를 실행에 옮기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은 對北굴욕정책의 지속적인 비판자 조선·동아일보였다. 金大中씨는 권력과 홍위병을 동원하여 이 방어벽을 무너뜨리려 애썼다.
5. 韓民統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金大中씨는 公知의 북한공작원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돈을 받는 사이가 되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국민과 국회를 속이고
主敵의 對南공작기관 계좌 등으로 5억 달러를 불법 송금하도록 했다. 이 정도 돈을 줄 관계이면 북한 정권으로부터도 그 전에 돈을 받는 사이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金大中씨 자신이 韓民統의 핵심인 裵東湖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북한 정권 측과 돈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됨으로써 金大中씨는 金正日 정권한테 약점을 잡혔다고 봐야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굴욕적인 對北행태, 그 비밀은 대통령이 敵將에 약점이 잡힌 바 되어 끌려 다녔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6·15 선언 제2항은
민족반역자이자 통일의 걸림돌인 金正日 정권을 통일의 파트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처벌대상인 연방제 통일방안(낮은 단계)과 남측의 연합제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이 선언은 그 공통점을 살려 그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해 나간다는 반역적 합의에 도달했다. 金大中씨의 국무회의 발언에 따르면 6·15 선언에 언급된 남측의 연합제는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국가의 공식 통일방안 제2단계에 나오는 연합제가 아니고 金씨의 사적인 3단계 통일방안의 1단계에 나오는 연합제이다. 즉, 金正日과 金大中씨는,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와 金大中씨 개인의 1단계 연합제를 연결시켜 「상징적 통일의 제1보」를 선언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金大中씨 측은, 이런 통일개시 선언이 헌법 개정 없이 남북한 지도자 사이의 결단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어마어마한 주장을 이미 해 놓았다.
7. 1997년 大選 당시 북측은
吳益濟·金炳植 명의의 협박 편지를 보내 金大中씨가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를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6·15 선언이 金大中-金正日 사이의 명백한 逆謀인 까닭은 우선 金大中씨가 국가 공식 통일방안을 무시하고 자신의 親北的인 무허가 통일방안을 가지고 가서 金正日의 적화통일방안과 합의한 점이다. 둘째는 남북한의 공식 통일방안에는 공통성이 전혀 없는 데도 있다고 국민들을 속인 점이다. 북측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적화통일이 목적이고, 남측의 통일방안은 자유통일이 목적인데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말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북측의 연방제안과 金大中 개인의 친북적 통일방안 사이에서 있을 뿐이다.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 6·15 선언 자체가 金大中씨의 반역성, 즉 사적인 親北통일방안으로써 국가공식 통일방안을 바꿔치기 했다는 점을 폭로한다.
8. 頂上회담에 배석했던 林東源씨의 국회증언에 따르면 金正日은 「주한미군이 북한에 대한 敵對的 태도를 포기하면 통일 후에까지 있어도 좋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金大中씨는 이런 전제조건을 생략하고 金正日이 지금의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을 용인했다고 말했다. 金大中씨는 金正日에 대해서 미국과
한국인이 가진 경계심을 허물고 「상징적 통일 선언」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그런 말을 만들어서 한 것이 아닌가.
9. 한국의 대통령이, 국회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 헌법 개정을 생략하고 金正日과 함께 통일의 1단계 시작을 선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金正日에 대한 경계심이 약화되어야 한다. 우파애국세력이 약화되어야 한다. 親金正日 세력은 강화되어야 한다.
국군은 金正日 정권을 主敵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강하게 나와야 한다. 소위 민족공조의 열풍이 불어야 한다. 金正日 세력의 도움을 받아 정권의 연장이나 재집권이 이뤄진다는 계산이 생겨야 한다. 金正日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고 있는 黃長燁씨를 미국으로 보내지 않아야 한다. 宋斗律·郭東儀 같은 북한 공작원들을 민주인사로 둔갑시켜 그들이 멋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金大中 정권이 한 일과 盧武鉉 정권이 하고 있는 일을 위의 조건과 비교하여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10. 金大中씨 계열의 좌파정권이 再집권함으로써 金大中-金正日 역모는 현재로는 단죄되지 않고 있다.
이 역모의 기본 구상이 盧武鉉 정권으로 접목될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金大中·盧武鉉-金日成·金正日」의 남북한 2代에 걸친 역모, 즉 대한민국 뒤엎기 음모로 발전한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盧武鉉 대통령이 金大中-金正日의 역모인 6·15 선언을 무시하고 1991년의 실천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북한 정권이 6·15 선언 실천(남북한 연방제 실시)을 요구할 때마다 「남북기본합의서부터 이행하자」고 나와야 한다.
11. 金大中씨는 5억 달러 불법 송금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도 받지 않았다. 한국 애국세력의 무기력에 용기를 얻었는지 그는 反국가단체 韓民統(요사이는 한통련으로 호칭) 간부들을 집으로 불러 만나기도 했다. 韓民統의 핵심간부이자 국가기관이 북한 측 공작원이라고 보고 있는
郭東儀씨를 宋斗律씨처럼 민주인사로 둔갑시켜 귀국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는 또 1980년 「韓民統 조직 및 광주사태 조종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건에 대해 재심 신청을 냈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뿐 아니라 反국가단체 수괴 임무 종사 부분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으려 하고 있는 것 같다. 金大中씨를 對北특사로 쓰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는 金大中-金正日의 음모가 진행형일 가능성을 示唆(시사)해준다. 金大中-金正日의 음모를 대한민국이 엄정하게 밝혀내고 단죄하지 못한 後患이 두렵다. 金大中씨의 실체에 대한 사실 규명작업과 사법처리 요구도 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약: 金大中씨는 연방제와 비자금을 매개로 하여 북한 정권과 내통하면서 대한민국의 국익과 국부와 안전을 主敵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 對南 적화전략의 핵심인 연방제 통일방안을 사실상 수용함으로써 앞으로 북한 정권이 한국 내 親金正日 세력과 손잡고 대한민국을 뒤엎는 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
민주사회에서, 특히 남북무장·이념대치 상황에서 권력자의 이념과 정체를 의심하는 것은 국민들의 권한이고 의무이다. 金大中 세력은 그런 의심을 제기하는 것조차 「색깔론」이라고 주장하면서 막으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의심받던 그대로의 행동을 실천에 옮겨 국가를 내부 분열시켰고, 主敵에게 굴종했다. 국가는 자신의 존립을 고의로 위험에 빠뜨린 행동과 인물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가장 강력한 응징을 가하게 되어 있다.
그런 본능적이고 의무적인 自衛행동을 할 수 없는 조직은 자멸한다. 아니 자살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金大中씨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 생존의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의 심판이 걸려 있다.
남로당 가족의 본격 등장 지금 盧武鉉 정부 안에는 직계 가족이 남로당원이었든지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요직에 많이 진출해 있다. 이들은 공권력과 선전기관을 장악한 핵심 인사들이다. 국회가 與野 합의로써 「親北·사상편향」이라고 하여 국정원장과 기조실장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던 두 사람은 盧대통령에 의하여 임명이 강행되었다.
민주국가에서는 직계 가족에 좌익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인 행동까지 문제삼을 수는 없다. 다만, 그런 가족의 영향이 公的인 면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쳐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 경멸, 적개심으로 드러난다면 문제가 된다. 위에 예로 든 이들의 행태에서 그런 점이 느껴질 때가 많다. 즉, 대한민국과 그 정통 주류세력, 헌법으로 대표되는 핵심 가치에 대한 輕視와 유감과 敵對感이 감지된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거의가 金正日 정권의 동족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한총련·韓民統 등 金正日 추종세력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국가의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이런 태도가 집합되어 세력과 흐름을 형성한다면 그런 국가는 위험하다. 국가공권력을 잡은 사람이 그 조국에 대해서 존경심과 애호심이 없다면 그런 국가는 최악의 경우 자멸하거나 자살하게 된다.
한국에서 親金正日 세력을 가려내기는 간단하다. 동족학살자인 金正日과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지 않고 대한민국과 그 정통 주류세력을 더 많이 비판하는 사람은 金正日 편이다. 노골적으로 金正日 편을 드는 사람은 감옥行을 자원하는 바보이므로 위협이 아니다. 민주인사로 위장한 다음 金正日을 비판하지 않고 대한민국만 공격하는 사람이 바로 파괴적인 親金正日 세력이다. 이런 성향을 보이고 있는 이들이 盧武鉉 정권 안에 강력하게 포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서 살아오면서 같은 생각을 갖게 된 이들을 우리 사회의 상층부 요직에 계속해서 포진시키고 있는 것 같다. 反대한민국적인 정서와 문화를 가진 세력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방향타를 잡았다는 점에서 위기의 근본이 있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對北정책은 金正日을 主敵이 아니라 정치적 동지 내지 파트너로 보려는 방향이다. 이들의 對內정책은 때로 대한민국 정통 세력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이 두 정책이 잘못 결합되면 現 정권 세력이 金正日 정권과 손잡고 대한민국 세력을 협공할 수도 있다. 金大中 정부 시절부터 부분적으로 그런 경향이 나타났다. 조선·동아일보에 대한 金大中 정권의 보복수사 때 남북한의 좌파세력은 한 목소리로 두 민족지를 공격하고 金大中 정권을 편들었다. 북한 핵 문제를 두고도 그런 모습이 되풀이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을 분열정권의 수립으로 보는 盧武鉉 대통령은 제주도 4·3사건을 「남로당 무장 폭동」이 아닌 「남로당 무장봉기」라고 부른다. 폭동으로 보는 세력과 봉기로 보는 세력 사이의 긴장은 적대관계로 깊어져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
金大中-金正日 사이에서 비자금과 연방제 통일방안을 매개로 시작된 逆謀의 관계가 盧武鉉 정권에 의해 계승 발전된다면 한국은 내전적 상황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때 金大中 前 대통령이 우리에게 물려준 6·15 선언 제2항이란 속임수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것이다. 물론 그 木馬 안에는 金正日 세력이 민주개혁 진보세력으로 위장하여 숨어 있다. 예컨대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악몽의 시나리오-內戰상황 <북한 정권은 핵개발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국과 주변국가들이 對北 적대정책을 포기하여 체제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한다. 북한 정권은 그 증거로서 주한미군의 성격을 평화유지군으로 바꾸고 평화협정을 맺자고 미국에 제안한다. 이 제안에 대해 한국內 親金正日 세력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정부가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애국세력의 행동도 거세진다.
북한 정권에 대한 체제보장을 줄기차게 미국 측에 요구해 왔던 한국 정부는 국내의 反美·親北 분위기 확산에 편승하여 북한의 주한미군 성격 변화 요구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다.
金正日 정권은 주한미군이 평화유지군으로 바뀌면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와 東北亞의 안정을 위해서 주둔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한국內 反金正日 세력까지도 안심시키려 든다. 한국內 反美 親北 세력은 6·15 선언 제2항의 의미를 왜곡 해석하면서 남북한이 연방제로 통일할 것을 내놓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민족이 이념보다 앞선다는 논리를 확산시킨다.
이에 반대하는 애국세력은 연방제식 통일선언은 헌법 위반 행위라면서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 국민과 국군이 저항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 정권은 한국 측에 대해 거듭 6·15 공동선언의 실천을 촉구하면서 통일 논의를 위한 남북간 대민족회의를 열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이 대회에는 정부 대표뿐 아니라 여러 사회단체들이 다 참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內 親北세력들이 이 제안에 찬동하고 애국세력은 반대하여 거리에서 매일 충돌사태가 벌어진다. 좌파정권下의 경찰은 인공기를 불태우는 애국세력의 시위를 저지하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불태우는 親金正日 시위를 방치한다. 이런 경찰의 반역적 행동과 검찰의 無力化에 분노한 국군 장교단 일각에선 헌법 5조에 나와 있는 국군의 임무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벌인다.
미국 자본을 비롯한 외국 투자자들이 철수하기 시작한다. 경제가 악화되자 좌파정부는 그 책임을 기업주들에게 轉嫁(전가)하고 국회에선 야당이 제출한 대통령 탄핵안을 놓고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金正日은 「민족의 장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남북한 頂上회담을 평양에서 열자고 전격 제의한다.
애국세력과 야당은 평양행은 굴욕적인 것이라면 반대하고 親北세력은 찬성한다. 대통령은 與小野大(여소야대)의 상황을 反轉시키고 자파 세력이 계속해서 집권할 수 있는 환경조성을 꾀하면서 평양行을 강행한다. 親北·反美 어용언론들이 親金正日 광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나 여당은 폭력으로 표결을 저지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政情불안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주한미군의 지위변경을 위한 美南北 간 논의를 시작할 용의가 있다고 나온다.
평양에서 만난 金正日과 대통령은 6·15 선언 제2항의 연장선상에서 남북한이 연방제와 연합제의 절충에 의한 통일방향에 합의하여 남북 간에 頂上회담의 정례화, 국회 등 諸사회단체 회담의 상설화, 상호 적대적 법률의 폐지를 선언한다. 한국 대통령은 이 조치를 「통일로 가는 제1보」라고 선언한다. 야당은 헌법을 위반한 내란행위라고 주장하면서 검찰에 대통령을 고발한다.
한국 정부는 국가보안법 폐지案을 국회에 제출하고 북한 측은 형법 개정안을 공표한다. 드디어 한국의 애국세력과 야당은 평양 頂上회담의 합의는 헌법 개정을 통하지 않는 국체변경 기도로서 반역행위라고 규정하고 국민 저항권 행사를 선언한다.
모든 한국인들이 내일 아침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디에 줄을 설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그날 새벽, 청와대에서는…?>
對南 지령-「진보단체를 자유화시킨 뒤 무장하라」 위의 시나리오가 헛소리로 드러나야 대한민국은 행복해진다. 그렇게만 낙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북한의 對南공작기관이 남한의 간첩들에게 내려보낸 지령문에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月刊朝鮮은 최근 북한의 對南공작부서가 남파 간첩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조직 요원들에게 내려 보낸 비밀 문건을 입수했다).
28페이지의 소책자인 이 문서의 제목은 「력사적인 6·15 북남공동선언실현을 위한 대중투쟁의 조직과 지도방법」이다. 발간 날짜는 2003년 1월이다. 이 문서를 감정한 북한공작원 출신들과 對北전문가들은 남한 적화사업에 종사하는 북한공작원들에게 내린 「전략전술 지침서」라고 평가했다.
이 문서는 현재의 남한 정권을 전복시키고 親北정권을 수립하려는 투쟁을 「민주화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이 문서는 왜 소위 「민주정권」을 세우려 하는가에 대해 솔직한 고백을 한다.
<그것은 진보적인 정당·단체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됨으로써 인민대중의 의식화·조직화·무장화를 비상히 다그쳐 나갈 수 있다는 사정과 관련된다>
즉, 「민주정권」으로 하여금 한총련 같은 金正日의 전위대를 합법화하도록 하여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親北대중을 의식화·조직화·무장화하여 정권을 親北化시킨 다음 북한의 金正日 정권과 야합하는 식의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의도이다.
「무장화」란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저들이 말하는 민주정권, 즉 親北정권이 들어서면 국군을 견제할 좌익私兵 부대 같은 것이 조직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이는 內戰으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이 간첩 지령문은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행동을 「민주정권 수립」이라고 했다. 公知의 간첩혐의자인 宋斗律씨를 민주인사로 규정하여 초청한 정권 외곽세력도 「民主」를 「대한민국에 대한 반대」라고 해석하고 있고 이런 암호풀이가 바로 코드 맞추기라면, 盧武鉉 정권의 일부 외곽세력은 金正日 정권과도 코드가 맞다는 이야기가 된다.
6·15 선언을 활용한 평화적 赤化통일 노선으로 전환 공안문제 전문가 柳東烈(유동열)씨에 따르면 「북한은 6·15 공동선언 이후 對南전략 수행의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전환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즉, 북한은 종래의 ①非평화적 방도(전쟁 유형)에 의한 赤化통일 ②평화적 방도(연방제 통일)에 의한 赤化통일 순위에서, 변화된 南北정세에 편승하여 ①이른바 평화적 방도(연방제통일)에 의한 赤化통일 ②非평화적 방도에 의한 赤化통일로 우선순위를 변경했다고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6·15 공동선언 제2항의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절충이다. 북한이 종래의 연방제(「높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개념을 분리, 이를 이용해 남한 정세를 활용하여 연방제 통일의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향후 南北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 「평화적 방도에 의한 赤化통일」 달성이 용이하지 않으면, 북한은 과감히 對南전략 수행의 우선순위를 현재의 평화적 방도에서 「非평화적 방도에 의한 赤化통일 달성」으로 전환할 것이다.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이 구사하는 赤化통일유형을 시나리오로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북한은 우리 국민이 감격할 만한 위장 對南유화노선을 적극 구사하여 우리 내부의 反共의식, 對北경계의식을 희석시키고 親北·親共의식과 連北·連共의식을 확산시키며(혁명의 보조역량 강화), 상하층 통일전선을 통해 親北좌익세력의 입지를 강화한다(혁명의 주력군 강화). 반면 保守右翼세력을 反통일세력으로 매도하여 無力化한 다음 민족화해 세력과 連北 세력의 결집을 통해 상하층 통일전선을 강화하여 남한 사회주의 혁명역량을 극대화하고,
② 점증하는 통일지상주의와 감상적 민족주의를 이용, 이른바 민족 大단결의 기치를 들고 이른바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의 절충」이라는 美名下에 느슨한 연방제 통일을 통해 南北合作을 실현(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시키고, 南北연방정부에서 ▲駐韓美軍을 철수시키고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며 ▲공산당 활동을 合法化하는 조치를 취해, 우리 내부의 안보 공백상태를 연출하고, 간첩 및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의 발호를 허용하여 사회교란을 확산시킨 다음,
③ 左翼세력 주도의 남한 내부 혁명이나 아니면, 武力으로 북한지역 정부가 남한지역 정부를 흡수하여 이른바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성사시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이른바 3大(북한, 남한, 국제)혁명역량 강화노선을 설정하고, 기본적으로 對南관련의 모든 사안을 위와 같은 남한 혁명역량의 강화라는 시각에서 계획하며 실행하고 있다. 북한은 남북경협, 학술, 문화, 종교 등 민간차원의 對北접촉도 이를 단순한 민간차원의 접촉으로 보지 않고, 이를 통해 對南전략적 관점에서 어떠한 편익을 도모할 수 있느냐를 충분히 검토하여 대응한다(月刊朝鮮 2003년 10월)>
경쟁과 투쟁이 행동윤리 인간의 생각은 말을 분석하면 거의 파악이 가능하다. 한국의 권력구조를 잡고 있는 盧武鉉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金正日과 그 추종자들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분노, 정의감, 경계심을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金正日 세력을 칭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고 있는 反국가단체에 대한 정권 핵심세력의 非적대적이고 때로는 굴욕적인 태도는 대한민국에 대한 냉담한 태도로 이어지고, 결국은 金正日과 金大中씨가 만든 6·15 선언의 연방제 통일 역모에 찬동하든지 넘어갈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는 金正日 정권과 盧武鉉 정권, 그리고 한국內 親金正日 세력이 한 편으로 정렬하여 대한민국(헌법, 정통 주류 애국세력, 국가의 구성요소 등)을 敵對할 가능성을 말한다. 남북한 무장 대치상황의 본질은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적인 것들을 輕視, 증오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親金正日화된다.
盧武鉉 정권은 公知의 간첩혐의자 宋斗律씨를 민주인사라고 조작한 공영방송의 책임자들에 대한 그 어떤 문책도 하지 않고 있다. 간첩혐의자를 「민주인사」로 둔갑시켜 입국시킴으로써 金正日의 對南공작에 편의를 제공하려고 했던 세력을 우리 사회가 문책할 수 없다면, 이런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金正日과 남한 親北정권의 합작에 의한 적화통일도 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끔찍스런 상황을 직시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자유, 법치, 시장경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려는 행동철학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下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은 경쟁을 행동논리로 받아들여야 하듯이 남북무장 대치상황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은 敵과의 투쟁을 또 다른 행동윤리로 끌어안아야 한다. 경쟁은 생산을 위한 것이고 투쟁은 자신과 가족과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2003년에 한반도에서 살면서 경쟁과 투쟁을 기피하는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라 군중이며 이들은 이민을 가든지 속세를 떠나야 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인간이든, 회사이든, 국가이든 생존할 자격과 가치가 없다.●
첫댓글 헐..... 이럴쑤가.. 충격.. 모르는국민이 태반이 아닌가요? 헐...
네, 김대중 노무현이 황장엽씨 입을 막아 놓았기 때문에 모르는 국민이 태반입니다. 조총련이 <1973년 8월~1975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최성황기인 1976년 1월~1977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퇴조기인 1978년 1월~1979년 7월은 매월 500만~1000만 엔, 再고조기인 1979년 8월~1980년 2월은 매월 1000만 엔 등을 지원>하였는데, 그 자금이 광주사태 당시에는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좌익단체들 활동자금원이었습니다.
헉...그래요? 그시절에 그건거금?기절초풍할일이네요.. 그럼 간첩이구만.. 왜 간첩빨갱이인데 구속이 안되었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손충무 기자, 이도형 기자 등 오히려 그 사실을 밝혀낸 분들이 김대중 정권 시절 갖은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손충무 기자가 구속되어 3년 옥살이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