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도체론의 체용구조 - 강 진 석(외국어대)
1. 이끄는 말 2. 주자가 말한 ‘도체’의 함의 고찰 3. 도체 사상의 계승 4. 체용으로 말하는 도체 이론 1) 도체가 지닌 ‘체’와 ‘용’의 두 면 2) 용은 체가 발현 유행한 것이다. 3) 체는 용 안에 거한다. 5. 맺는 말
1. 이끄는 말
지금까지 주자철학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어져 왔다. 그 연구 방법들은 대략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주자의 생애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주자의 사상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천되어 갔는가를 연구하는 방법이 있었는가 하면, 둘째, 주자의 철학을 여러 범주로 나누어서 범주별로 그 의미와 구조를 분석하는 방법이 있었으며, 셋째, 주자와 당시 사상가들의 논쟁을 비교함으로써 주자철학의 근본 취지를 밝히는 방법도 있었다.
이 중에서 주자 철학을 여러 범주로 나누어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는데, 이들은 대부분 주자의 사상을 천도론과 인도론 또는 리기론, 심성론, 공부론 등으로 크게 나누어서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우주론, 본체론, 형이상학 이론을 논하는 부분에서는, 주자가 말한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리기’의 범주로 한데 묶어서 설명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이 주자의 형이상학 또는 본체론의 원리와 구조를 ‘리기론’이라는 큰 제목으로 설정하고 논술하는 관습은 역사적으로 꽤 오래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남송의 여정덕黎靖德이주자어류朱子語類를 편집할 당시 ‘리기理氣’를 책의 머릿권(卷第一)으로 설정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로 특히 현대의 주자 연구자들 ― 陳來, 大濱晧, 張立文, 한국의 주자학 연구자 등 ― 도 대부분 ‘리’와 ‘기’를 정면에 내세우는 분류 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리’와 ‘기’의 분석틀 속에서, 먼저 ‘리’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 ― 所以, 規律, 常則, 所由, 本源 ― 와 기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 ― 음양, 形而下者, 기질, 형체 ― 에 대한 분석을 하고, 리와 기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 ― 리와 기의 不離不雜性, 리와 기의 先後이론, 리일분수 ― 을 분석하였으며, 또한 태극과 음양의 관계 ― 動靜이론, 人騎馬의 비유 ― 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본체(리)가 지니는 여러 의미와 더불어 리와 기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연구방법이 주자가 말한 본체의 의미와 구조를 완전히 밝혀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필자는 주자가 말한 본체를 단지 ‘리’와 ‘기’의 범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주자가 말한 본체의 의미를 완전하게 밝혀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자는 기와 대립되는 의미의 형이상학적 본체를 말하고 리와 기의 이원적 대전제 하에서 양자의 상호관계를 말한 것 외에도, 본체 자체가 지니는 양면성, 즉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 초월성과 내재성, 은폐성과 발현성, 본원성과 과정성 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와 대립되는 본체로서의 리가 지니는 초월, 근거, 동인動因, 본원 등의 의미나 리와 기의 관계이론에서 파생된 선후, 동정, 불리불잡不離不雜 등의 이론과는 그 성격이나 접근방식이 사뭇 다르다. 주자는 본체가 지니는 이 두 가지 면을 ‘체용體用’의 형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이 표현 방식은 주로 ‘도체道體’의 이론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다.
본 논문의 의도는 주자가 말한 ‘도체’의 의미와 그 내재적 형식인 ‘체용’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주자 본체론에 대한 더욱 균형 잡힌 시각을 이끌어 내자는 데에 있다. 필자는 주자의 도체론을 연구하면서, 주자가 사서의 특정 원문을 해석할 때 언급했던 ‘도체’와 일반적 의미로 사용했던 ‘도체’ 또는 ‘도’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또한 본체론적인 의미로 사용한 ‘도체’사상은 북송유자의 사상과 상호 계승관계를 지님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도체와 체용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주자가 말한 다양한 ‘도체’의 의미 중에서 체용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을 추려내는 연구와 ‘도체’사상의 계승 관계를 밝히는 연구가 먼저 요청된다.
2. 주자가 말한 ‘도체’의 함의 고찰
주자는 淳熙 2년, 주자나이 46세 때에 여조겸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였다. 그는 근사록의 제1권을 ‘도체道體’라고 이름지었다. 이 ‘도체’로 대표되는 제1권에는 북송오자가 말했던 ‘태극’, ‘음양’, ‘리’, ‘성’, ‘태허’, ‘귀신’ 등의 다양한 범주들이 등장한다. 주자는 일찍이 근사록의 제1권(首卷)을 ‘도체’에 관한 내용이 아닌 다른 내용으로 편집하고자 했던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도체’의 내용은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이어서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제1권을 안자론顔子論으로 대체하거나 도체의 일부 내용을 뒤로 돌리려 하였다.1) 그러나 ‘도체’의 중요성으로 인해 처음의 편집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는 여조겸에게 보낸 서신이나 주자어류등에서 근사록의 제 1 권에 수록된 ‘도체’의 내용이 매우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거듭 밝혔을 뿐, ‘도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자문할 수 있다. 주자가 여기서 말한 ‘도체’는 앞서 언급한 ‘태극’, ‘음양’, ‘리’, ‘성’, ‘태허’, ‘귀신’ 등의 범주를 종합하는 포괄적 범주인가? 아니면 ‘도체’만이 지니는 특정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이 부분에서 주자가 설정한 ‘도체’라는 제목이 후대에 여정덕이 주자어류의 제 1 권을 ‘리기理氣’으로 설정한 것과 사뭇 다르다는 점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따라서 주자가 말한 ‘도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자의 문헌 중에서 ‘도체’를 직접 언급한 부분을 찾아내어 그 의미를 추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주자가 ‘도체道體’라고 지칭한 것과 ‘도道’와의 연관성 여부를 살펴보자. 주자가 말한 ‘도’는 ‘리’의 의미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거나 좀 더 광범위한 범주이다. 주자 철학 내에서 ‘도’는 사람이 반드시 따라야 할 ‘길’이나 ‘원칙’2), 또는 형이하자(陰陽) 운동의 ‘소이所以’, 즉 형이상학적 ‘근거’나 ‘규율’3) 등의 의미로 쓰였다. 우리는 주자의 문헌 중에서 이러한 ‘도’의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된 ‘도체’의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논어“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의 주석에서 “사람 외에 도가 없고 도 외에 사람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는 지각이 있고 도체道體는 행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능히 도리를 넓힐 수 있고 도는 사람을 넓히지 못한다”4)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도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때 ‘도체’는 ‘도 자체’라는 의미로서 ‘도’와 그 의미상 차이가 없다. 주자는 또 육구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을 일컬어 도라고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어찌 진실로 음양을 형이상자로 여긴 것이겠습니까?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은 비록 형기刑器에 속하지만 그것이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게끔 하는 것은 곧 도체道體가 행한 것임을 보아야 합니다.”5) 여기서 ‘도체’는 ‘도’의 소이연적 의미, 즉 음양이 순환 운동하게끔 주재하는 소이의 의미로 쓰였다. 이처럼 주자의 문헌 중에서 ‘도체’가 ‘도’의 일반적 의미 ― 근거, 원인, 소이, 규율 ― 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근사록과 관련된 ‘도체’는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도’와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본 ‘도체’의 의미는 ‘도’의 일반적 의미와 구분되는 특정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자가 말한 ‘도체’는 이상의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가? 필자는 주자가 사서四書의 특정 부분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도의 의미와 확연히 구분되는 ‘도체’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주자는 사서중에서도 특히 논어의「자한」편과 중용12장의 주해 중에서 ‘도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에 주자가 말한 ‘도체’는 사상적인 연원淵源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자가 특정한 의미로서 ‘도체’를 말한 내용을 밝히기 위해선 먼저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그 변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도체’ 사상의 계승
주자가 특정한 의미의 ‘도체’를 언급6) 한 것은 논어「자한」편에서 공자가 말한 감탄사에 근거하고 있다. 「자한」편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공자께서 시냇가에서 말씀하시기를, “흘러가는 것이 마치 이와 같도다! 밤낮으로 멈추지 않는구나.”7)
공자의 이 감탄사는 역대로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을 자아내게 하였다. 공자의 이 말에 대해 최초로 해석을 시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맹자였다. 맹자의 제자가 공자께서 왜 자주 물(水)을 칭찬하면서 “물이로다! 물이로다!” 라고 한 이유를 물으니, 맹자가 대답하기를 “뿌리 깊은 샘에서 콸콸 흘러나와 밤낮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가득 차 오른 후에는 앞으로 나아가 바다로 흘러가니, 근본이 있는 자는 마치 이 물과 같다. 이 점을 취했을 뿐이다.”8) 맹자는 공자가 근본이 있는 군자의 모습을 물의 비유로써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서한西漢의 양웅楊雄은 물이 지니는 특성 중에서 “가득 차 오른 후에 나아감”9)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한 대의 사상가들도 공자의 말씀을 양웅처럼 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정도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함包咸은 논어 원문의 주석에서 “‘서逝’는 나아감이다. 무릇 나아가는 것은 마치 시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10)고 말했으며, 동중서도 춘추번로에서 공자가 시냇가에서 감탄사를 연발한 것은 물의 다양한 속성 ― 힘, 균형, 살핌, 앎, 지명知命, 정화淨化, 용기, 무武, 유덕有德 등11) ― 을 말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공자가 물의 속성을 찬미한 것으로 해석했던 경향은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다른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양조梁朝의 황축은 공자의 말을 세월이 유수처럼 빠르게 지나감을 한탄한 것12)으로 이해했다. 북송의 형병邢昺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공자가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을 한탄한 것13)으로 풀이했다. 晉朝의 손작孫綽은 공자의 말속에는 이미 노년이 되어버린 그가 도를 다시 일으킬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는 우환의식이 서려있다14)고 풀이했다.
이와 같이 ‘물의 속성에 대한 이해’, ‘세월의 빠름에 대한 한탄’, ‘시대의 어두움을 한탄하는 우환의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자한」편에 관한 해석은, 북송시대 이정二程형제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정명도는 한대 이후의 유자들은 공자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공자께서 시냇가에서 ‘흘러가는 것이 마치 이와 같도다! 밤낮으로 멈추지 않는구나’ 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한대 이후의 유자들은 모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말은 성인의 마음이 순정純正하여 그침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경에서 ‘하늘의 명은 심원하여 그침이 없다’ 고 말한 것은 하늘이 하늘 됨을 말한 것이고, ‘오호라 드러나지 않음이여, 문왕의 덕의 순정함이여’는 문왕의 문채로움을 말한 것이다. 순정하여 그침이 없는 것이 곧 하늘의 덕이다. 하늘의 덕이 있기에 왕의 덕을 말할 수 있으니, 그 요지는 ‘신독’에 있다.”15) 정명도는 공자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흘러가는 하늘의 덕과 같이 순정하고 끊이지 않는 성인의 덕을 예찬한 것으로 해석했다.
정이천은 정명도가 순정하여 끊이지 않는(純亦不已) 하늘의 덕(天德)이라고 표현한 것을 ‘도체道體’로써 바꾸어 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공자께서 시냇가에서 ‘흘러가는 것이 마치 이와 같도다! ’라고 말한 것은 ‘도의 체’가 이러함을 말한 것이다. 이 부분은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장역이 “그것은 곧 끝이 없음(無窮)입니다” 라고 말하니, 선생께서 말하시기를, “당연히 도는 끝이 없다. 하지만 어찌 끝이 없다는 것 하나로 그것(道體)을 이해했다고 하겠느냐?”16)
정이천은 공자가 시냇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보고 “흘러가는 것이 마치 이와 같도다”고 말했을 때 “이와 같도다”는 곧 ‘도체’(道之體)의 모습이 마치 이와 같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또 “끝이 없다”는 것은 도체를 형용하는 하나의 속성일 뿐, 이로써 도체의 전반적인 면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정이천의 해석은 ‘물의 속성’, ‘성인의 우환의식’, ‘성인의 순정한 덕’으로 해석했던 차원을 벗어나서 본체론적인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정이천은 공자의 말은 결국 ‘도체’를 지칭한 것이라고 더욱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주자의논어집주에는 정자程子의 말이 수록되어 있다.
정자가 말하기를 : “이것은 도체이다. 하늘이 운행하여 그치지 않고, 해가 가고 달이 오며, 추위가 가고 더위가 오며, 물이 흘러서 멈추지 않고, 생성함이 끝이 없는 것은 모두 도와 함께 체를 이룬 것으로서, 밤낮으로 운행하여 멈춘 적이 없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강하게 하며, 그것이 지극함에 이르면 순정하여 쉬임이 없게 된다.”17)
정이천18)은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감탄한 것은 결국 ‘도체’를 말한 것이며,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만물의 순환과 유행은 다름 아닌 이 ‘도’와 함께 체를 이룬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정이천이 여기서 말하는 ‘도체’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여기서 언급된 ‘도체’는 ‘도’가 일반적으로 지니는 의미 ― 규율, 소이, 근거, 본원 ― 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즉 ‘動態的 특성’(流行)과 ‘멈추지 않는 특성’(不已)이다. 시냇물이 콸콸 흘러가는 모습은 곧 도체를 형용한 것이라는 명제는, 바꾸어 말하면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의 비유를 통해서 도체의 세계관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정이천은 ‘이것은 도체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도체’는 정이천이 형이상학적 근거이자 소이연으로서 말한 ‘도’19) 와는 구별된다. 이천이 말한 ‘도’는 형이하자의 운동을 가능케 하는 ‘소이’이자, 형이하자와 대립되는 의미의 ‘형이상자’로서 그 자체로는 정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도체’는 사물과의 대립하지도 않고 또 동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정二程은 노장도 이러한 의미의 ‘도체’를 잘 묘사하였다고 말한다. 이정이 말하기를 “장생이 도체를 형용한 말은 모두 쓸만하다. 노씨가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장에서 말한 것이 가장 훌륭하다.”20) 이정이 지적한 노씨의 말은노자 6장 :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을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있는 듯하여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21) 이다. 이정은 노자 6장이 내용이 ‘도체’가 지니는 끊임없이 생생하는 면(生生不已)과 끝없이 지속되는(無窮不死) 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 듯하다.
주자는 이정이 「자한」편을 해석하면서 제기한 도체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공자께서 시냇가에서 말씀하시기를, ‘흘러가는 것이 마치 이와 같도다! 밤낮으로 멈추지 않는구나’”를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천지의 변화는 지난 것은 가버리고 오는 것은 이어져서 한 순간도 멈추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도체의 본연적인 모습이다. 다만 능히 지적할 수 있고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므로, 이로써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인 것이니,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항시 성찰하여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없도록 해야 한다. 22)
주자에 의하면, 정이천이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고 감탄한 것은 바로 ‘도체’의 유행을 감탄한 것이고, 만물의 순환유행은 바로 이 ‘도’와 함께 체를 이룬 것이라고 말한 것은 천지 만물의 순환과 유행이 곧 ‘도체’의 본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체는 시냇물이 흐르는 비유에만 국한되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천지 만물의 순환과 유행은 모두 도체의 본연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도체의 본연적 모습’이라는 말은 만물의 순환 유행 자체가 곧 도체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만물이 부단히 순환하고 유행하는 것을 통해서 도체의 본래적 모습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도체의 순환 유행은 마치 만물이 순환 유행하는 것처럼 유행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도체의 본연적 모습’이라는 매우 함축적인 명제만으로는 그 뜻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주자는 이정이 말한 동태적 의미의 도체론을 계승하였다는 점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도체’는 적어도 형이상학적 근거로서 형이하자의 운동과 대립되는 의미의 정적인 초월자가 아닌 동태적인 의미와 과정성을 지니고 있는 본체이다.
4. 체용으로 말하는 도체 이론
1) 도체가 지닌 ‘체’와 ‘용’의 두 면
이정으로부터 주자로 이어지는 도체 이론의 계승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남송시대의 유학자들 중에서 주자만이 유일하게 도체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간주되기 쉬우나, 사실은 당시 호상학파의 유학자들도 이정의 도체 이론으로부터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호상학파의 시조인 호오봉胡五峰(1105-1155)은 知言에서 ‘도’와 ‘사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동태적인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도는 사물이 없이 홀로 도일 수 없고 사물도 도가 없이 홀로 사물일 수 없다. 도와 사물이 함께 있는 것은 마치 바람과 그 움직임이 함께 있는 것, 물과 그 흐름이 함께 있는 것과 같으니 무엇이 능히 갈라놓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물을 떠나서 도를 구하는 것은 터무니 없도다! ”23)라고 말했다. 호오봉은 도의 사물의 관계는 마치 바람과 그것이 부는 것, 물과 그것이 흐르는 것과 같은 관계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설명한다. 그의 제자였던 장남헌張南軒(1133-1180)은「자한」편을 주해하면서, “그것은 그침이 없는 체(無息之體)이다. 하늘과 땅, 해와 달로 부터 일개 풀과 나무의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생생하는 도가 어찌 이와 같지 않으리요? 체는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 군자는 쉬지 않고 스스로를 강하게 하여 이것을 체로 삼아야 한다. 성인의 마음은 순정하여 그침이 없으니 이것과 두 몸이 아니다.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은 뚜렸이 보이고 쉽게 관찰할 수 있으니 이를 빌어 밝히신 것이다”24) 라고 말했다. 호오봉이 도와 사물의 관계를 물과 그 흐름의 관계로 파악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한 것과 장남헌이 시냇물의 비유를 ‘그침이 없는 체’(無息之體)의 생생한 도로 해석한 것은, 모두 ‘도’를 아무런 운동이나 조작이 없는 정적인 초월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동적인 본체’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본체의 동태적인 측면을 강조한 점에서 볼 때, 호상학파가 이해한 본체의 의미와 주자가 말한 ‘도체의 본연적 모습’ 은 이론상으로 일맥상통하며 별다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주자는 ‘도체’를 단순히 동적인 의미의 본체로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체가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자는 장역이 일찍이 도체는 곧 ‘끝이 없음’으로 대변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정이천이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대답한 것의 구체적인 배경를 밝히고 있는데, 즉 ‘끝이 없다’는 것은 도체를 구성하는 한 측면이지만 만약 이것만을 강조하면 무엇에 의해 그렇게 끝없이 운동할 수 있는가의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끝이 없음이다. 그러나 무엇에 의해 그렇게 끝없이 운행하게 되었는가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 그것이 끝없이 운행하게끔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하늘은 단지 높고 땅은 단지 두텁다는 것만을 말한다면 할 말이 없게 된다. 반드시 그것들이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25)고 말하고 있다. 사실 정이천과 장역의 대화만으로는 왜 ‘끝이 없음’이 도체를 설명하는 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정이천의 대답이 도체는 ‘끝이 없다’(無窮)는 속성 외에도 수많은 다른 속성을 지닌 본체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자는 정이천의 대답은 사실상 ‘도체’는 ‘끝이 없음’으로 대표되는 한 면과 그것을 끝이 없게끔 해 준 다른 한 면, 이 두 가지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주자는 제자와의 문답 중에 거듭해서 정이천의 이론을 재해석하였다. 그는 정이천이 ‘이것은 도체이다’(此道體也)라고 말한 것과 만물의 순환 유행은 사실상 ‘도와 함께 체를 이룬 것’(與道爲體)이라는 이론26)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형이상자를 일컬어 도라고 하고 형이하자를 일컬어 기器라고 한다. 도는 본래 체(형체)가 없다. (이천이 말한) 이 네 가지는 도의 체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의지해서 도의 체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 곧 도이다. 그러나 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곳을 찾아서야 어찌 도를 볼 수 있겠는가? 이 네 가지의 운행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와 함께 체를 이룬다’고 말한 것이다.27)
주자는 이천이 도체를 설명하면서 만물이 순환하고 유행하는 것을 통해서 도의 체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도가 아니므로, 네 가지 운행 ― 해가 가고 달이 오며, 추위가 가고 더위가 오며, 물이 흘러서 멈추지 않고, 사물이 생성하여 멈추지 않는 것28) ― 을 통해서 도의 운행을 볼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도가 아니며, 도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주자가 ‘도체’가 지니는 두 가지면, 즉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초월적인 면과 천지만물의 순환 유행과 분리되지 않는 동적인 면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자가 원문에서 동적인 면을 말한 부분인 이른바 “그것을 의지해서 도의 체를 볼 수 있을 뿐이다”는 과연 무슨 뜻인가? 이것은 만물의 순환 유행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도의 형체를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만물의 유행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도체의 동적인 면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주자는 ‘도와 함께 체를 이룬다’는 것의 설명을 통해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선생께서 정자의 “도와 함께 체를 이룬다”는 말을 끄집어내 말씀하시기를, “도는 형체를 볼 수가 없다. 단지 해가 가고 달이 오며, 추위가 가고 더위가 오며, 물이 흘러서 멈추지 않고, 사물이 생성하여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밝히 드러나는 것이 곧 ‘도와 함께 체를 이룬다’는 것이다.”29)
주자에 의하면, 도는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본체이지만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순환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이것은 만물이 ‘도와 함께 체를 이루는’ 과정을 통해서 형체가 없는 도는 ‘밝히 드러나는 것’(顯顯者)이 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주자가 말한 도체가 지니는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을,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미세하여 감추어진 면과 만물의 순환 유행과 함께 ‘밝히 드러나는’ 면으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주자는 도체가 지니는 이러한 두 가지 면을 ‘체’와 ‘용’으로써 설명하고 있으며 ‘체’의 영역과 ‘용’의 영역은 구분 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제자가 “무릇 천지를 보면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추위가 가고 더위가 오며,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성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도의 용이 유행 발현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뭉뚱그려 말하면 이것들의 가고 오고 생성하고 화육하여 한시도 끊어짐이 없는 것을 곧 도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주자가 답하기를 “체體와 용用으로 말한 것은 옳다. 그러나 ‘뭉뚱그린다’(總)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뭉뚱그린다고 하면 용用을 겸하여 말한 것이 된다. 단지 그 골자骨子가 곧 체體일 뿐이다. 예를 들면 물이 흐르고 멈추며 격동하고 풍랑이 이는 것은 용用이고, 물의 골자가 있어 능히 흐르게 하고 멈추게 하며 격동케 하고 풍랑이 일게끔 하는 것은 체體이다. 또한 이 몸은 체體이고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손과 발이 운동하는 것은 용用이다. 또한 이 손은 체體이고 손가락을 놀리는 것은 용用이다.” 진순이논어집주論語集注의 “지난 것은 가버리고 오는 것은 이어져서 한시도 멈추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도체의 본연적 모습이다”를 들어 물으니, “바로 이 뜻이다”라고 말씀하셨다.30)
제자는 천지, 해와 달, 사계절 등이 순환하고 운행하는 것은 곧 도의 ‘용’이 ‘유행하고 발현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곧 ‘도체’라고 말할 수 있냐고 주자에게 물었다. 주자는 이에 대해 ‘체’와 ‘용’으로써 설명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만약 체와 용의 구분 없이 뭉뚱그려서 ‘도체’라고 말하게 되면 도체가 지니는 두 영역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므로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천지만물이 순환하고 유행하는 것은 도의 ‘용’이 발현 유행하는 영역에 속한 것이며, 도의 ‘체’는 여전히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본체로서, 마치 몸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 ‘체’로서 있으나 손은 손놀림을 하고 눈은 보며 귀가 듣는 실질적 감관 작용이 곧 ‘용’인 것과 같다.
우리는 주자가 「자한」편을 해석하면서 논한 도체의 이론을 통해서 도체의 내재적 구조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이정은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고 “흘러가는 것이 마치 이와 같도다!”라고 말한 것을 ‘도체’를 말한 것이라고 이해하였으며, 주자는 이정이 말한 ‘도체’는 사실상 두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는 감추인 면과 환히 드러난 면,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 초월적인 면과 형이하자와 함께하는 면 등으로 구분되는 두 영역을 ‘체’와 ‘용’의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2) 용은 체가 발현 유행한 것이다
우리는 주자가 말한 도체가 도의 ‘체’와 도의 ‘용’이라는 두 영역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체와 용이 지니는 특성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체’와 ‘용’의 특성에 관한 고찰에 머물렀을 뿐 양자의 상관 관계에 대한 이해에 까지 미친 것은 아니다. 주자의「자한」편과 관련된 언급에서는 비록 ‘도의 용이 유행 발현’ 한다는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자한」편의 서술구조는 엄연히 끊임없이 순환 유행하는 것(用)을 통해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형이상학적 본체(體)를 인지하는 구조, 즉 인용지체因用指體의 서술형식을 띠고 있다. 주자는 이 서술의 형식을 따라서 설명하면서 만물이 ‘도와 함께 형체를 이룬 것’은 사실상 도가 ‘밝히 드러난 것’이며 또한 ‘도의 용이 유행 발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로부터 도의 체가 주동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낸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았고, 또한 ‘도의 용이 유행 발현’한 것은 도의 체로부터 도의 용이 드러난 것인지(由體顯用), 아니면 도의 체는 영원히 도의 초월적 성격을 유지하고 이와는 구분되는 도의 용이 영역이 있어서 부단히 발현 유행하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만약 체는 단지 용의 모습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인지되는 것일 뿐 체가 직접 용으로 현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체가 지니는 ‘주동적 발현’이 대한 이론과 체에서 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론은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주자는 도체의 이론을 중용 12장의 주해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용 12장의 원문을 보면,
군자의 도는 널리 드러나면서도 감추인다. 그것은 부부의 어리석음이라도 더불어 알 수 있지만 그 ?仄末?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부의 못남으로도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한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늘과 땅의 그 큼에도 사람이 부족감을 느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큼을 말하면 천하도 이를 싣지 못하고 작음을 말하면 천하도 이를 깨뜨리지 못한다. 시경에서 ‘솔개는 날아올라 하늘을 치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노는구나!’라고 했으니, 이것은 도가 위 아래로 밝히 드러남을 말한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발단하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가득히 빛난다.31)
위의 원문은 필자가 주자의 주석에 근거해서 번역한 것이다. 중용의 저자는 12장에서 군자의 도가 지니고 있는 일상적인 면과 지극한 면을 말하고 있다. 주자는 “드러남(費)은 용의 광대함이고, 감추임(隱)은 체의 미세함이다”32)라고 말하면서, 군자의 도를 ‘체용’의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북송의 유자들은 중용에 나오는시경구절 “솔개는 날아올라 하늘을 치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노는구나!” 에 대해 유달리 관심을 가졌다. 정자程子는 이 단락 ―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33) ― 을 “자사가 가장 절실하게 사람되는 요지를 말한 것으로서, ‘반드시 일삼는 바는 있으나 마음을 억지로 바로 잡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며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이것을 체득하면 살아 움직이게되며, 체득하지 못하면 단지 머리 속에서 맴돌 뿐이다”34) 라고 풀이했다. 이정에게 있어서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으나 마음을 억지로 바로 잡아서는 안 된다”는 그들이 강조한 ‘경敬’ 공부의 구체적인 한 방법으로서, 정신은 달아나지 않도록 집중하여 깨어 있으되 억지로 조장해서는 안되며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도록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는 수양 방법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정은 중용의 저자가 말한 솔개와 물고기의 비유는 자연스럽게 몸에서 체현되어 나오는 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정의 제자였던 사량좌謝良佐(1050-1103)는 이 시구가 도체가 사방에 충만한 기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사량좌는 말하기를, “‘솔개는 날아 올라 하늘을 치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노는구나!’는 특정 사물에 관한 뜻이 아니다. ‘위 아래로 살핀다’ 는 (사방이) 도체로 충만한 상태를 설명한 것이지 딱히 솔개와 물고기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만약 단지 솔개와 물고기만을 가리킨 것이라면 그 위로 또 하늘이 있고 그 밑으로 또 땅이 있게 된다.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다’는 뜻을 알면 이 뜻를 알 수 있다. 이 뜻을 알면 부자夫子와 증점의 뜻도 알 수 있다.”35) 이정이 수양을 통하여 체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위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사량좌는 이 시구를 ‘도체’가 사방에 가득찬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 이해했다. 사량좌도 사람들이 경의 공부 ―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 ― 를 통하여 매사에 도와 일체가 되는 자연스러운 경지 ― 공자와 증점의 경계 ― 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량좌는 이 구절을 해석한 학자 중에 처음으로 ‘도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천도와 인도가 어우러진 상태의 충만한 기상을 표현하였다.
주자는 사량좌의 해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해석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량좌가 “言其上下察也”를 “사람이 위 아래로 (도체의 충만함을) 살핀다”로 해석한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기其’는 ‘사람’이 아닌 ‘도체’를 가리키고 ‘찰察’은 ‘관찰觀察’이 아닌 ‘밝히 빛난다’(昭著)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답왕자합答王子合에서 말하기를,
서신 중에 말씀하신 중용의 큰 요지는 대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言其上下察’을 언급한 부분에서, ‘기其’는 도체를 가리킨 말이고 ‘찰察’은 밝히 드러난다는 뜻으로 도체가 유행발현流行發見하여 밝히 드러남이 이와 같다는 뜻입니다. 사량좌와 양시의 해석은 모두 (‘찰察’을) ‘관찰’의 ‘찰’로 간주한 것 같습니다.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기’는 응당 사람을 가리키게 되니, 이 때가 어찌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으며, 또 어찌 위아래 문장의 뜻과 부합하겠습니까? 36)
주자는 중용의 저자가 말한 것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 노는 것처럼 도체로 충만한 세계를 사람이 살핀다는 뜻이 아니라,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 노는 것은 곧 도체가 위 아래로 밝히 드러나는 것을 말한 것으로 풀이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관찰자를 통해서 도체의 충만성이 인식된다는 관점에서 도체가 주체가 되어 사방으로 스스로를 밝히 드러낸다는 관점으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주자는 위의 문장에서 솔개와 물고기의 비유는 곧 ‘도체의 유행 발현’을 말한 것이라고 명백히 말한다. 그리고 시경의 이 비유는 시경저자의 본 뜻과는 거리가 있으며 중용의 저자는 ‘도체’가 수시로 발현하는 것을 잘 묘사하기 위하여 이 시구를 빌어다 쓴 것뿐이라고 말한다37). 또한 그는 이 ‘도체의 유행’을 ‘화육유행化育流行’으로 바꿔 말하면서 이것은 곧 본체의 ‘용’(理之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8) 여기서 우리는 만물이 생성하고 화육하는 작용과 본체의 작용(用)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용’은 도체의 ‘발현’과 ‘유행’이라는 용어로써 설명되는데, 이로부터 ‘용’은 ‘발현’ 즉 드러남(manifest)이라는 의미와 ‘유행’ 즉 과정성(process)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는 이러한 내용성을 지닌 도체의 ‘용’은 형이하자인 만물의 생성과 화육의 운동과정 중에서 피동적으로 현시되는 것이 아니라, 도의 체가 주동적으로 스스로를 현시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체와 용은 서로 의지하므로 치우치거나 막힘이 없으니, 그 이치가 명백합니다. 대전大傳에서 말한 역이 보이지 않으면 건곤도 멈추게 된다는 것은 건곤이 역이고 역이 곧 건곤임을 밝힌 것이므로, 건곤이 훼손되면 역도 멈추게 될 뿐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앞서 인용한 (중용) 마지막 편의 의미, 즉 노씨가 무물無物로 되돌아간다고 운운한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만약 중용의 마지막 편에서 말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 ‘하늘의 일(운동)’에 근본을 두고 말한 것이라면, 소리와 냄새는 비록 없지만 ‘하늘의 일’은 스스로 드러내므로, 지금 ‘건곤’과 병립하여 없는(無)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도체’(의 이해)에 해로운 것으로서, 인의 단서를 구한다는 말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9)
주자는 도의 체는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본체이지만 그것은 노자가 말한 것과 같이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하늘의 일(上天之載)은 스스로를 드러내어(自顯) 운동하는 ‘용’의 면을 지니고 있으며, 도의 체와 용은 서로 의지하고 떨어지지 않으므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막힘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체가 용으로 스스로를 현시顯示하는 면을 무시하고, 도의 감추인 면(無)만을 강조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도체’의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체와 용의 관계를朱子語類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용을 찾으면 그 체를 알 수가 있다. 용은 곧 체로부터 나온 것이다.40) 체와 용은 비록 두 글자이지만 본래 서로 떨어진 적이 없다. 용은 체가 유행한 것이다.41)
도체를 구성하는 두 영역인 체와 용은 구분되어 있어서 그 둘을 뭉뚱그려서(總)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도체가 발현하고 유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도의 체가 발현하고 유행하여 도의 용이 된 것이지, 도의 체는 영원히 감추인 상태를 유지하고 도의 용은 이러한 본체와는 무관하게 발현 유행하는 것은 아니다. 용은 곧 체가 유행 발현한 것이다. 그것은 도체가 만물의 순환과 유행을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며 단순한 상징적인 의미나 인식론적인 체험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주자는 중용의 저자가 인용한 “솔개는 날아올라 하늘을 치고 물고기는 연못가에서 뛰어 논다”는 시구를 이와 같이 이해한 것이다.
3) 체는 용 안에 거한다
주자는 체와 용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먼저 체와 용의 영역은 뒤섞이지 않고 엄밀히 구분(對待)된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둘째로 체와 용의 영역은 구분되지만 용은 바로 체가 스스로를 현시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양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분명히 하였다. 주자가 밝힌 도체의 이론은 이처럼 체와 용의 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결코 용의 동적인 세계만을 논하고 체의 정태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으며, 체의 초월성만을 논하고 용의 구체적인 발현을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성현들이 도체와 관련되어 말한 어구들은 대부분 용의 측면만을 강조한 듯 하며, 주자 또한 만물의 순환 운동과 생성운동을 도체의 본연적 모습이라고 해석하면서 도체의 동적인 세계관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체와 용이 지닌 상이한 두 측면을 골고루 설명하지 않고 용의 동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배경은 무엇인가? 주자는 본체로서의 ‘체’는 새가 날아 오르고 물고기가 뛰어 놀듯이 화육생생하는 도체유행의 세계(用)와 동떨어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모두가 다 드러남(費)이다. 솔개가 나는 것도 역시 드러남이고 물고기가 뛰어 노는 것도 드러남이다. 드러날 수 있게 한 것은 드러난 것을 통해서 본다”. 또 말씀하시기를 “솔개가 나는 것은 볼 수 있다. 물고기가 뛰어 노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면 날 수 있게 하고 뛰어 놀 수 있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중용에서 드러남을 자주 말하고 감추임을 말하지 않은 것은 감추임이 드러남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42)
드러남은 도의 용이고, 감추임은 도의 체이다. 용은 리가 일상세계에 드러나서 볼 수 없는 것이 없는 상태이고, 체는 리가 그 안에 감추인 것으로서 형이상자의 일은 보고 듣는 것으로는 미칠 수 없는 바가 있다.43)
도의 체는 비록 보고 듣는 것으로는 미칠 수 없는 초월적인 본체이지만 그 초월성은 끊임없이 생동하고 유행하는 일상적인 세계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상성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의 용을 말할 때는 도의 체와 분리된 의미의 도의 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도의 체용’을 함께 말한 것이며44), 도의 체는 도의 용 안에 있으므로 체의 감추임은 용의 드러남을 떠나는 적이 없다.45)
그렇기 때문에 도의 체는 도의 용으로 드러난 세계를 통해서, 즉 일상세계 속에서 천지 만물이 생성 화육하고 사람들이 도리에 맞게 생활하는 것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도의 체는 도의 용 안에 거하기 때문에 실제로 ‘도체’는 사람들에게 항상 동태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며 도리에 맞게 운행하는 모든 것은 자연계와 인간세를 막론하고 모두 도체의 유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자는 하늘과 땅과 인간사에 충만한 도체유행의 세계를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도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유행 발현하여 없는 곳이 없다. 위로는 솔개가 날아올라 하늘까지 다다름이 이것이고, 아래로는 물고기가 꿈틀거리며 연못 위로 뛰어오름이 이것이다. 사람들에게서는 일상생활과 인륜질서와 부부가 알고 행할 수 있는 것과 성인도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들이 모두 이것이다. 위 아래로 도가 유행 발현한 것을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46)
주자는 이러한 도체 유행의 세계가 지니는 특성을 크게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자연계의 미세한 것에서부터 거대한 운행에 이르기까지 또 인간세에서 부부가 알 수 있는 평범한 것에서부터 성인도 미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체들의 순환과 유행은 결국 정체整體로서의 도체유행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서, 도체유행의 무소부재성 無所不在性과 총체성總體性을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전체이자 총체로서의 도체유행의 측면, 즉 “도의 전체로서 말하면, 천지 만물과 사람의 마음과 세상 만사를 통틀어서 한 순간도 쉬임이 없는 체(無一息之體)라고 말할 수 있다.”47)
둘째, 수많은 개체의 유행으로 구성된 도체의 유행은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질서와 강령 속에서 구현된다는 점이다. 주자는 공자의 질문에 증점이 “봄옷을 만들어 입고 관을 쓴 벗 대여섯과 아이들 여섯 일곱 명과 더불어 강에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를 드리는 곳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나 읊다가 돌아오겠습니다”48)라고 말한 것은 도체가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기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증점은 “천리가 곳곳에 발현하여 사방이 모두 천리임을 보고 그토록 즐거워했던 것”49)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도체의 유행은 단순히 만물의 운행이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만 체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이룩된 문명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50). 문명 속에서 구현되는 도체의 유행은 만물이 각기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므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51).
셋째, 도의 체에서 도의 용으로 전환되는 도체유행의 과정 속에서, 일관된 체는 만물의 특성에 적합하게 분화되어 작용한다. 주자는 천도의 유행이 사물 위에서 발현되는 과정 속에서 이른바 ‘리일분수’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도의 체와 용으로써 설명 가능한데, 즉 “지극히 진실되고 쉼이 없는 것이 도의 체이니 만물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만물이 각기 그 적합한 바를 받게 하는 것은 도의 용이니 하나의 근본을 만갈래로 나뉘어지게 하는 것이다52)”라고 말할 수 있다.
5. 맺는 말
필자는 주자철학의 본체론을 다루는 데 있어서 ‘리기’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체용’의 관점에서 서술해 보았다. 필자는 주자가 ‘체용’의 구조를 지닌 도체이론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는 주로 논어와중용의 텍스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태극도설해의 이론적 기초 위에서 ‘리’와 ‘기’ 또는 ‘태극’과 ‘음양’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었다. 감추인 본체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작용의 의미를 지닌 체와 용은 도체를 구성하는 두 영역으로서, 형이하자(氣)의 운동과 그 운동의 근거로서의 본체(理)를 설명하는 리기론과는 그 접근방식이 다르다. 리기론에서 드러나는 본체의 무조작성과 정태성 그리고 초월성을 체용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그러한 특성은 도체를 구성하는 한 영역의 특성에 국한될 뿐, 전체로서의 의미가 될 수 없다. 체와 용은 본체가 지닌 두 면을 설명하는 이론이고 리와 기는 형이상자와 형이하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도체 이론에서 전개된 ‘체용’과 리기론에서 말하는 ‘리기’는 동일 범주로 볼 수 없다.
기존에 주자를 연구한 학자들은 리기론의 관점에 서서 주자가 말한 도체 유행의 이론을 허구 ― 劉述先,朱子哲學思想的發展與完成 ― 라고 폄하하거나, 주자의 도체는 결국 ‘존재하지만 활동하지 않는(只存有而不活動)’ 것 ― 牟宗三, 心體與性體1― 으로 단정짓기도 하였다. 또한 주자 사유의 변천사라는 관점에서 , 도체의 체용론은 주자가 리기론을 정립하기 전에 시도했던 과도기적인 사상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주자 후학들의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진순陳淳의 경우, 주자의 리기론적 관점보다는 도체론의 입장을 대폭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자는 새가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뛰어노는 것처럼 생동하고 천지에 충만한 도체유행의 세계를 체용의 형식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 속에서 우리는 정이천이 “이것은 도체로다!”라고 말한 것과 주자가 “만물의 유행은 곧 도체의 본연적 모습이다”라고 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자가 말하는 본체의 의미가 무엇인가 자문할 수 있다. 체용으로 설명되는 도체유행의 세계와 리기로써 설명되는 본체의 세계는 너무도 다른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자철학 내에서 리기론의 입장과 도체론의 입장은 상호 공존하고 있다. 주자는 이 두 이론을 융합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론의 근거로 삼은 텍스트들도 서로 달랐다. 그는 태극도설해에 기초한 태극과 음양의 이론을 충실하에 설명하고 보완하려 하였으며, 논어와중용의 주해에 기초를 둔 도체이론도 계속적으로 보완하였다. 도체이론이 주자가 말한 본체(리, 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듯이, 리기론도 본체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다. 두 이론의 통합은 당대에서는 시도되지 않았고 문인들에게서도 시도되지 않았다. 우리는 도체 이론을 통해서 주자 본체론의 다양성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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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 도체론의 체용구조」에 대한 논평 - 김 미 영(고려대)
강진석 선생님은 「주자 도체론의 체용구조」에서 그간 주희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자의 형이상학 또는 본체론의 원리와 구조를 리기론이라는 큰 제목으로 설정하고 논술하는 관습”(1쪽)에 문제제기하며, “주자가 말한 본체의 의미와 구조를 완전히 밝혀”(2쪽)내기 위해서는 리기의 형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여, 체용의 관점에서 주희철학의 본체론을 서술하고자 한다. 논자는 “체와 용은 본체가 지닌 두 면을 설명하는 이론이고, 리와 기는 형이상자와 형이하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므로 도체론에서 전개된 체용과 리기론에서 말하는 리기는 동일한 범주로 볼 수 없다”(15쪽)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논자는 “주자철학내에서 리기론의 입장과 도체론의 입장은 상호공존하며, 주자는 이 두 이론을 융합하려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론의 근거로 삼은 텍스트들도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태극도설에 기초해서 태극과 음양의 이론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보완하였으며, 논어와 중용의 주해에 기초하여 도체이론을 계속적으로 보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주희철학에서 “도체이론이 주자가 말한 본체(리, 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듯이, 리기론도 본체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다”(16쪽)고 주장하면서, 리기론에 치중한 그간의 학자들의 연구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이에 평자는 논자의 논문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1. 논문을 읽으며 평자가 계속적으로 의구심이 들었던 부분은 주자 도체론의 체용구조라는 논문제목에서 제기된 도체의 의미에 대한 부분이다. 즉 논자는 “주자가 사서의 특정부분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도의 의미와 확연히 구분되는 도체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3쪽)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도체와 도를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도체는 도가 일반적으로 지니는 의미―규율, 소이, 근거, 본원―와는 다른 특성을 지닌....즉 동태적 특성(流行)과 멈추지 않는 특성(不已)”(5쪽)를 들고 있다. 그리고 “도체가 지닌 두 특성을 도의 체와 도의 용이라는 두 영역으로 구성된다”(10쪽)고 하고 있다. 따라서 논자의 논문구성 역시 ‘4. 체용으로 말하는 도체이론’ 부분에서 주희철학에서의 도체론을 설명해 내고 있다.
그러나 평자는 논자의 논문을 읽으며 체용구조를 통해서 도의 모습을 해명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도체의 설명이 있는가, 내지는 주희가 도의 체와 도체를 어떻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풀리지 않는 채 남아있다. 도의 체와 도체를 구분해서 본다면 도체에서 체는 모습의 의미가 아닐까? 그렇다면 도체와 도를 확연히 구분된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라면 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한 논문 속에서 체용구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용한 주38 주49인용문을 보면 천리의 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논자는 도체의 현현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리기론의 입장과 도체론의 입장을 구분해서 보고 있는 논자의 입장과는 상충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천리와 도체는 주희철학 내에서 어떻게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2. 다음으로 ‘3. 도체사상의 계승’을 다루면서 논자는 주로 논어「자한」편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맹자 서한의 양웅, 위진남북조시대의 해석들을 소개하고, 북송시대 이정형제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고 하면서, 주희는 “이정이 자한편을 해석하면서 제기한 도체이론을 계승하였다”(6쪽)고 하였다. 그러다가 ‘4. 체용으로 말하는 도체이론’에서 “남송시대의 유학자들 중에서 주자만이 유일하게 도체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간주되기 쉬우나 사실을 당시 호상학파의 유학자들도 이정의 도체이론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았다”(7쪽)고 하고 있다.
그러나 평자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주희 사상형성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호상학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주희가 이정의 체용론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으므로, 주희 사상 형성에서 도체사상의 계승을 다루려면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마지막으로 논자의 논문성격은 논자가 이해한 주희철학의 틀을 체용구조를 통해서 설명해 내는 형식을 띄고 있다. 그렇다면 논자의 논의틀이 더욱 부각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논의시각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비판하거나 수용하는 방식을 띠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1. 이끄는 말’과 ‘5. 맺는 말’에서 양념처럼 부수적으로 가미한 듯이, 이끄는 말에서는 진래 대빈호 장립문 한국의 주자학 연구자들은 주로 리기분석틀을 정면으로 두고 있는 것에 대해 약간 거론하고 있으며, 맺는 말에서는 유술선과 모종삼이 도체의 체용론 내지는 도체유행이론을 리기론적 입장에서 비판한 부분을 약간 다루면서, 이러한 논의들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주자후학들의 사상은 자세히 살펴보면 진순의 경우 주자의 리기론적 관점보다는 도체론의 입장을 대폭 수용하고 있다”(15쪽)고 하면서, 논자의 도체론 연구의 의의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논의 부족으로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보고 있는지, 내지는 그간 학자들의 논의점에서 비판점은 체용론 구조를 해명하는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개진이 생략됨으로써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비판 수용을 본문 속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었다면 논자의 논점이 좀 더 입체적으로 부각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으로 평자가 논자의 논문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 몇 가지를 들어 보았다. 평자 역시 주자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오늘날 한국에서 주자학을 연구하는 의미에 대해 계속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조성성리학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조선의 학계가 공리공담으로 흘렀다 내지는 주희사상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선성리학자들의 논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당시 주자학을 연구한 학자들의 실천적인 고민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러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주자학에서 조선성리학의 영역이 확보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자학을 연구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논문을 읽는 내내 평자의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주자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주자학자라기 보다는 주자학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주희철학을 연구한 학자라면 주희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를 토대로 주자학을 어떠한 방향으로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자의 고견도 듣고 싶다. 그리고 중국에서 주자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논자가 본 중국의 신진학자들의 주자학 연구 경향은 어떠하다고 느꼈는지도 들어보고 싶은 것이 평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출처(원문):중국철학회(http://www.philoschin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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