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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는 귀화한 학자 박노자 교수가 최근 펴낸 책이다. 합리적인 진보세력들은 이야기 한다. 진보는 특권화될 수 없고, 진보와 보수가 고정적일 수 없다고. 또한, 진보라서 좋은 정책이 되는 게 아니라, 좋은 정책이라야 진보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내가 느끼기에는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좋은 정책이고 진보적이다. 계획은 진보고, 시장은 보수라는 생각이나 분배는 좋고, 성장은 나쁘다는 고정관념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좋은 성장이 있을 수 있고, 나쁜 분배가 있을 수 있다. 우리 시대 진보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바꾸어보아야 한다.
요즘 여야 모두 ‘복지국가’를 건설하자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2012년 양대선거를 통해 우리사회에 만만치 않은 변화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국가에 기대어 각종 사회문제를 해소하자는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국민을 폭력단체나 테러리스트 같이 여기고 행동하는 국가는 과연 우리를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 국가의 폭력에도 우리는 왜 은연중에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 한겨례 신문등 진보적 매체에 꾸준히 진보의 목소리를 내는 저자 박노자 교수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며 국가의 본질을 파헤친다.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과연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걸까? 상식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국가에 대해 드는 의심을 박노자 특유의 삐딱한 시선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붓다를 죽인 부처’ 등 다양한 서적을 저술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썼던 박노자 교수는 이번 4·11 총선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박 교수는 "노동시간 최대, 산재 최대 발생 국가인 대한민국은 아직 사회적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 주창자이다.
님은 진보 세력을 과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진보신당이나 진보통합당에 몸담고 있거나 그 조직을 지지하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 체재를 신봉하는 종북주의자일까 ? 결코 그렇지는 않다. 진보와 보수 세상을 보는 시각은 스펙트럼 처럼 너무도 다양하다. 보수주의자들만 모여있는 사회도 문제가 많고, 진보주의자들만 모여있는 사회 역시 다양성은 없는 출구가 막힌 사회일 뿐이다. 양쪽 이념이 골고루 섞여 조화를 이루고 더불어 사는 사회가 더 아름답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로 근무중인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태생으로 진보적 사회운동가, 언론인,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1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경희대에서 교수 및 저술 활동을 하다가 재임용 탈락하고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 교수 임용되어 간 양반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의 진보적 성향에 경희대가 부담을 느끼고 짤랐다. 그는 우리 시대의 비정규직에 불과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김동춘 교수는 박노자 교수가 쓴 이 책을 한 마디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소개한다. 국가가 합법적 살인자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진보’를 표방하는 남자들에게 더욱 불편한 책이라고 말한다.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서로 얽혀있는 2012년에 이런 류의 책을 한번 읽어본다면 나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보를 욕하기 전에 무엇이 문제인지 한번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이후 10년, 박노자가 말하는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경제위기, 일자리 문제 등 한 개인이 풀어내기 힘든 문제들이 주위에 산적해 있고, 마침 총선과 대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를 ‘복지국가’로 개조하여 우리 사회가 봉착한 문제들을 ‘국가’를 통해 해결해보자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보수적인 정당들마저 복지를 늘리자고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시민사회에서는 야권연대를 통해 현재의 집권세력을 심판하고, 그들이 더 이상 영향력을 넓히지 못하게 하자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야권에 권력을 넘겨주고, 그들이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들이 해결될 것인가? .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국가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국적(또는 미국 국적)의 약탈적 자본과 이들이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생계파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길 원한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입안,추진하고 이명박 정권이 비준, 발효한 한미FTA 사례에서 보듯이, 극우냐 자유주의 우파냐의 구별 없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주류 정치세력은 하나같이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무역’의 장려에 ‘국가’의 힘을 모두 쏟아부어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가에 ‘시장으로부터의 보호’를 주문하고 싶지만, 국가야말로 시장주의적 민생파괴의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따져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는 시장, 즉 대자본의 고도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이상, 자본의 도구가 될 집권 정치인들이 어느 정당 출신이냐보다는, 자본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민중운동의 발전 상태가 어떤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는 누구의 편인가
국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국가의 본질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일찍이 국가란 해당 사회의 유일한 합법적 폭력기구라 했다. 그렇다면 그 폭력이 누구를 향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국가의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국가폭력이 국가의 본질과 꼭 연결돼 있지는 않은 ‘공권력의 남용’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국가폭력이야말로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여실하게 드러낸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계급 관계라는 게 평소에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국가가 폭력 내지 살인을 하는 ‘비정상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시 상황에서 대다수가 중산계층 출신인 장교들과 거의 전부가 하층민 출신인 졸병들의 생존율을 비교해보면 하층민이 총알받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국가의 경찰력이 기업주의 폭력 등에는 ‘솜방망이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급진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조금이라도 ‘반체제적’ 냄새가 나는 운동에 대해서는 툭하면 탄압적 태도로 맞선다.
노동자 파업에 초강경 대응하는 경찰은, 의사나 약사 등 중산층의 집단적인 의사표현에는 절대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대테러부대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은 이미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0년 롯데호텔 파업에서도 목격한 바 있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강경진압은 이어졌고, 농민대회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이 원인이 되어 시위에 참여한 농민이 목숨을 잃은 바도 있다. 현 정부에서 벌어진 용산 참사나 쌍용자동차 노조에 대한 강제진압 등도 현 정부 들어 갑자기 생긴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국가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전쟁하는 기계, 국가
1장에서 국가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 저자는 2장을 통해서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개한다. 전쟁은 국가의 폭력성이 가장 분명하게 들어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2장의 결론을 먼저 얘기하자면, 전쟁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며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건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지배층의 치부(致富)와 무기 개발을 중심으로 한 국가 주도의 기술발전 촉진, 그리고 각종 사회·경제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착취-피착취 관계의 일시적인 순화라는 효과야말로 전쟁을 지탱해온 가장 강력한 근거들이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은 이 전쟁이 지난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오면서 생겨난 논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십자군 운동을 비롯하여 최근 미국의 중동 지역에 대한 침공에서까지 확인할 수 있듯이 늘 선하고 개화된 ‘우리’가 악하고 무지한 ‘적’을 공격하는 게 ‘정의로운’ 전쟁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명분이라 해도 그 명분으로 약한 나라를 구하는 경우는 없었다. 개화기 조선의 식자층에서 큰 주목을 받은 <만국공법>은 국제법적 질서가 조선의 독립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불어넣어주었지만 돌아온 것은 일제에의 강제 병합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국제법적 질서의 무기력함은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모습에서도 재확인된다. 가자 지구에 구호품을 싣고 가던 비정부기구의 구호선이 이스라엘에 의해 나포되고 활동가 9명이 살해당했음에도, 미국은 단지 ‘유감’만 표명했을 뿐이고 유엔은 강경하게 비난하긴 했지만 평소의 무력함을 벗어나진 못했다. 국제법도 결국엔 ‘희망사항’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종교는 당신의 편인가
이 책의 또 하나 특징은 국가, 전쟁과 함께 종교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3장에서는 불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애당초 평화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이들 종교가 어떻게 군사주의와 결탁하게 되었는가를 살피고 있다.
저자의 눈에 의아하게 보이는 것은 군목, 군승 등 군의 사기진작을 담당하고 있는 종교의 모습이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태복음 26:52)는 말씀을 받드는 기독교의 초기 모습을 보면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의 비타협적 평화주의를 지향한다. 전쟁을 멈출 줄 모르는 강대국 로마에 반전을 선언했다가 순교한 이도 많았다. 입영을 거부해 순교하고, 입영했다가도 참전을 거부하고 제대를 요구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지금껏 이런 교리를 받드는 곳은 ‘여호와의 증인’ 등 이단시되는 소수 종파뿐이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 조금씩 무력의 ‘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정의로운 전쟁’의 논리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지향했던 기독교가 어느새 국가가 벌이는 살인의 장(場)인 전쟁을 지원하게 되고, 그 살육의 장에서 흔들리는 개개인에게 힘을 불어넣는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야구선수 출신으로 인기 높은 복음 전도자가 된 미국의 빌리 선데이는 “기독교와 애국은 같은 것이고, 비국민과 지옥도 같은 말이다”, “이 전쟁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성전이다” 등의 말을 즐겨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는 불교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대표적 사례는 주류 불교와 천황제 국가가 혼연일체를 이룬 1870년대 이후 일본이다. “명예의 전사를 당하게 되면 틀림없이 정토왕생한다”는 내용으로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하고, 또한 승려들도 나서서 입대하곤 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불교가 구미권에서 ‘비폭력의 종교’라는 이미지로 급부상하였지만, 이는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 침략까지 무수한 학살에 대한 서구 지식인의 죄책감에 맞추어 포교자들이 공들인 바가 크다.
국민은 어떻게 길들여지는가
전쟁을 주요 사업으로 진행하는 국가, 그 국가에 기생하여 영향력 확대에만 골몰하는 기성 종교에 대해 알아본 다음 드는 생각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온 것일까?”
4장은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전쟁놀이, 전쟁영화,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등에 우리는 둘러쌓여 있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를 보면 ‘싸우는 남성들의 공동체’, ‘의리가 강한 남자’ 등이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또한 전쟁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이 ‘영웅’을 만들어내는데, 이들은 수많은 주검 더미 위에서 살아남아 승리를 거머쥔 자이다.
동아시아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군웅(群雄)이 천하의 패권을 다투며 벌어지는 야심 찬 귀족들의 패기, 의리, 배반 그리고 죽음과 죽임을 그린 작품이다. 귀족 남성의 ‘영웅성’에 초점이 맞춰진 이 작품에서 감춰진 것은 그 ‘영웅’들이 벌인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어가는 병졸들의 삶이다. 알렉산드르 뒤마의 <삼총사>로 대변되는 서양의 모험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귀족의 명예’와 ‘담력’ 등을 키워드로 하는 이 작품에서 결투나 전투에서 상대방을 ‘정당하게’ 죽이는 것은 새로운 명예를 획득하는 쾌거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동물은 동류를 죽이는 데 천부적 거부감을 가졌다. 미국의 군사 연구자 새뮤얼 마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실제로 의식적으로 가시권에 있는 적군 병사를 사살하려 한 미국 군인은 15~20%에 불과했다고 한다. 호전적인 분위기가 전 사회를 휘어잡았을 때인데도 이렇다. 그래서 전쟁을 진행해야 하는 국가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교육을 끊임없이 해가야 한다. 가상의 적과 ‘우리’를 나누고 그 대상에 대한 증오 교육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세계대전은 인종주의에 기반한 증오 교육을 그 힘으로 했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병사들은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인을 ‘말할 줄 아는 원숭이’에 불과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극우 신문들이 펼치는 북한 지도층 악마화 역시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을 버리고 전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명제는 은연중에 우리 뼛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군대의 모습 그대로인 대기업의 신입사원 합숙훈련은 또 어떤가? 모 재벌의 ‘3박 4일 148km 행군’이나 또 다른 재벌의 북한의 매스게임을 연상시키는 ‘일체감 훈련’ 등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리를 몹시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일부 내용들이다. 전쟁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며,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건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지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사무총국’이며,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부의 비국민, 즉 가난한 사람들을 조직적이고 대량으로 살해하는 기계라는 그의 주장도 그만의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은 국가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중적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그는 합리적 조절자로서 국가에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진보세력에 날카롭게 일침을 가한다. 이러한 주장을 교과서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막상 국가라는 힘에 눌려 ‘미워도 다시 한번’을 부르는 진보정치세력에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 그의 글이 주는 불편함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보와 자극을 주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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