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이씨와 학성이씨의 시조 이예의 선조
경주이씨는 알평공에서 시작되어 2천년의 역사가 존재하며 많은 문무대신을 배출하였다.
다만 알평군에서 중시조인 이전의 기록은 없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행히 목은선생의 문집에 익재공 선조의 기록이 남아 휘 거명을 중조로 삼아 현재 까지 계대를 이어 오고 있다.
그중에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이씨가 있으니 합천이씨.재령이씨 아산이씨,원주이씨.차성이씨,우계이시, 울산이씨 등이 있다.
많은 분적종 중에 울산이씨가 있는데 始祖(시조) 李哲(이철)은 高麗(고려) 高宗(고종)때 三重大匡(삼중대광)으로,門下侍中(문하시중)·判典理司事(판전리사사)에 올랐으며,金就礪(김취려)을 도와 寧邊(영변)에서 契丹軍(글란군)의 侵入(침입)을 擊退(격퇴)한 功(공)으로 鶴城君(학성군)에 封(봉)해졌다.
李哲(이철)은 慶州李氏(경주이씨) 중시조-- 1世祖(세조) 李居明(이거명)의 15世孫(세손)이라고 한다.
始祖(시조) 李哲(이철)이 鶴城郡(학성군)(現在의 蔚山)에 封(봉)해짐으로서,後孫(후손)들이 蔚山(울산)을 本貫(본관)으로 하고있다.
지금 울산 박물관에서는 학파 이예 선생 특별전을 하고 있는데 그의 관향은 학성이씨 시조로 하고 있고 그의 선계는 알려지 않았는지 별 말이 없다.
우연히 이만도(진성이씨. 호는 향산) 선생의 문집에서 이예의 선조에 관한 자료를 찾아서 학성이씨의 선조는 울산이씨이고 울산이씨의 선조는 경주이씨 임을 알았으면 한다.
학성이씨의 관향은 조선실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에 학성이씨라는 관향명은 1800년이후에 나타 났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학성이씨 시조인 이예의 졸기에는 관향이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울산의 향리 라고만 적혀 있을뿐이다.
이만도 선생의 문집에는 이예의 선조의 대해서 설명한 자료가 있어 학파의 선조가 경주이씨 임을 알리어 잘못된 정보를 고치어 후세에 전해주었으면 하고 또한 많은 학성이씨 들이 하루 빨리 스스로의 조상을 알았으면 한다.
[향산집]
1--가선대부 행 경성 판관 이공 묘갈명 병서〔嘉善大夫行鏡城判官李公墓碣銘 幷序〕
에 나타난 울산이씨와 이예의흔적
삼가 살피건대, 이씨(李氏)의 관향은 울산이니, 중추원 첨지사(中樞院僉知事) 휘 예(藝)가 공의 5세조이다. 고조 휘 종실(宗實)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이다. 증조 휘 직유(直柔)는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이다. 조부 휘 세형(世衡)은 판결사(判決事)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학(䳽)은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 아산 장씨(牙山蔣氏)는 참봉 수인(守仁)의 따님이다. 부인 흥려 박씨(興麗朴氏)는 원복(元福)의 따님이다.
위의 글을 보면 분명히 학파 이예의 본은 울산이라 하였다.
아들 득해(得垓)는 훈도(訓導)이고, 득오(得塢)는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득해의 아들은 경(藑)이다. 득오의 아들은 기(夔), 시(蓍), 개(葢)이며, 서자는 빈(薲), 진(蓁), 장(萇)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공의 제사를 모시는 종손(宗孫) 극중(極中)은 9세손이며, 나를 찾아와 묘지명을 부탁한 사람은 극중의 족자(族子)인 석선(錫先)이다.
2--절충장군 충무위 대호군 이공 묘갈명 병서〔折衝將軍忠武衛大護軍李公墓碣銘 幷序〕
공의 휘는 광연(光然), 자는 실보(實甫)이다. 울산 이씨(蔚山李氏)는 고려 말 휘 춘년(椿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조선에 복종하지 않아 서리(胥吏)로 강등되었다.
휘 예(藝)는 포로가 되어 왜국(倭國)으로 끌려갔다가 굴복하지 않고 다시 돌아왔으며, 이후 일본과 유구국(琉球國)에 열세 차례나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의 포로들을 쇄환(刷還)하였으므로 황제가 가상히 여겨 칭찬하였다. 관직은 중추원 동지사(中樞院同知事)에까지 이르렀다.
이분이 휘 종실(宗實)을 낳았으니, 경상도 수군절도사로서 대마도(對馬島)를 세 번이나 정벌하였다.
3--무민당 이공 묘갈명 병서〔旡悶堂李公墓碣銘 幷序〕
무민 처사(旡悶處士)는 성은 이씨(李氏), 휘는 여규(汝圭), 자는 군집(君執),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중추원 지사(中樞院知事) 예(藝)가 시조이다.
이 자료를 보았을때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학성이 본관인 이씨는 없었다고 본다.
즉 학성이씨는 새롭게 나타난 관향이며 원 래는 울산 이씨 였다고 본다.
이만도-(진성이씨)--1842(헌종 8) 경북 예안~ 1910.
한말의 학자.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아버지는 대사성 휘준(彙濬)이며, 휘철(彙澈)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이후 홍문관부수찬·장령·지평·병조정랑·교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려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동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했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했다. 다시 복직되어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지낸 후, 그해 가을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었다. 이때 흉년을 당하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관찰사의 가렴주구에 항의하여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했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이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백동(栢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경학을 연구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관군에게 패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을 공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올랐다. 이해 8월 한일합병이 단행되자 유서를 쓰고 단식에 들어가 24일만에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첫댓글 맞아 죽을 각오 하고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