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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본격적으로 [장다리 클라우스와 꺼꾸리 클라우스]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어른들도 동화를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다. [스키너의 심리 상자 열기]란 책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작가인 로렌 슬레이터는 그녀의 책 [루비 레드]에 대해 이 점에 대해 이런 말은 언급했다.
"나는 동화가 이야기 치료에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동화는 때때로 우리들의 자아를 가장 적나라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드러내준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이전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동화는 언제나 상징적이다. 일단 우리가 자신의 상징을 만들고 나면 그것을 수정하고, 그것이 지닌 한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기회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동화는 우리의 생각이 관습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해준다. 또한 동화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대립 구도는 우리 내면의 깊으 곳에서 뭔가를 끌어올리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동화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고, 자신의 문제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돌아감으로써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 동화를 읽거나 써보는 경험을 불꽃 튀는 화학 변화를 경험해 보는 것과 같다." (pp6-8 발췌)
내가 하고자 한 말의 요지를 그녀가 잘 말해주었기 때문에 별도로 내 목소리를 덧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동화를 습작하고 동화를 분석하는 공주를 하는 입장에서 내가 경험하는 동화의 힘이란, 바로 원시심성과의 적다라한 대면에서 생기는 자기치유력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스스로 벌거벗기고 아무런 무기도 없이, 용과도 싸워야하고 마법의 칼을 찾아내야되기도 한다. 누군가 내 옆의 구원자가 나타날 때, 그가 진정한 구원자인지도 가름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켜고 있어야 하기도 하니, 동화를 읽는 작업은 잘 다듬어지고 포장된 소설 읽기보다 힘이 필요하다. 내면에 솔직해지는 힘, 적나라한 원시성의 폭력으로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말이다.
그럼, 이제 시작해보자. 안데르센 초기작에 속하는 [장다리 클라우스와 꺼꾸리 클라우스]를 잘 분석하다 보면, 동화 속에 스며든 작가의 무의식과 희망을 구조화하는 내면 동기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참으로 그의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자기 드러내기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2. 안데르센 삶의 근본적 모순 이해하기
주지하다시피 안데르센은 1805년 덴마크 제2의 도시인 오덴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수선공으로 무척이나 가난했다. 허영심이 어렸을 때 부터 남달리 강한 안데르센은 자신의 진짜 아버지는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인데, 단지 운이 나빠 파멸한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어린 시절을 우울과 몽상 속에서 허덕였다고 그의 평전은 전한다.
안데르센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무려 15살이나 연상이었고, 민간신앙에 깊이 빠져있던 글맹이었다. 한편 안데르센의 할아버지는 정신 이상으로 이런 할아버지를 보고 자란 안데르센은 자신도 언젠가 정신이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나마 구두수선공인 아버지가 안데르센에게 아라비안나이트니 라퐁텐 우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목각 인형을 만들어주면서, 안데르센의 문학적 소양을 부추겨 주어, 현실로 부터 달아나는데 심리적 지원을 해준다.
오덴제의 후원자 덕분에 목소리가 좋았던 안데르센은 코펜하겐 왕립극장에 소개되었지만, 즉석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던 그의 모습은 마치 미친 사람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고 만다. 우여곡절끝에 왕립극장 음악학교에서 연극의 다역을 맡기도 하고, 극복을 써 제출해 보는 등 나름대로의 예술창작 활동에 매진하지만, 후원자가 튼튼하지 못한 가난한 안데르센은 결국 3년만에 쫓겨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 놓인 안데르센에게 행운처럼 다가온 자가 있으니, 그는 왕립극장의 공무원이자 ㅇ운영자였던 요나스 콜린이다. 요나스 콜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안데르세의 두터운 후원자로 활동했는데, 가족구성원 모두가 안데르센의 각별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콜린의 아들 에드바르는 안데르센의 작품이 출판되도록 도왔고, 그의 서툰 맞춤법을 교정해 주었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자신과 동년배인 에드바르에게 묘한 심리적 열패감을 느끼며, 질투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안데르센의 성공 뒤에는, 많은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자면, 신분상승의 욕구가 남달리 강한 성격이 있었다고 본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귀족가문의 여인들이었고, 그가 감행했던 코펜하겐 행에서 그가 맛본 것은 귀족들의 생활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허영심의 추구는 현실 속에서 좌절된 신분 상승의 충격을 문학 속에서 대리 만족시킬 이야기가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장다리 클라우스와 꺼꾸리 클라우스]야 말로, 바로 그의 이런 현실에서 넘어설 수 없는 신분간의 격차에 대한 통쾌한 복수심이 읽혀지는 작품이다. 꽤씸하게도 그는 자신의 실질직 후원자 역할을 오랜 시간동안 곁에서 해준 에드바르를 멍청한 장다리 클라우스로 둔갑시켜 작품 속에서 버번히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당하기만 하는 인물로 그려냈다.
3. 이야기 살펴보기
(1)
말 네 필을 가진 장다리 클라우스와 말 한 필 뿐인 꺼꾸리 클라우스가 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 말 네 필을 가진 장다리 클라우스가 밭을 갈 때는 꺼꾸리 클라우스는 1주일 내내 그에게 단 하나 밖에 없는 말을 빌려줘야했지만, 정작 자신의 밭을 갈 때는 1주일의 딱 하루만 장다리 클라우스의 말 네 필을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허세가 심하고 배짱이 두둑한 꺼꾸리 클라우스는 장다리 클라우스의 말을 부리며서도 늘, 이렇게 말해 장다리 클라우스의 속을 불편하게 했다.
"이랴, 다섯 마리 내 말들아!"
장다리 클라우스는 당연히 합당하지 못한 꺼꾸리 클라우스의 말에 제재를 가해쓴데, 그의 말 속에는 사실을 지적하는 단순함만 내포되어 있음을 독자들은 알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 마. 한 마리만 네 거잖아."
(2)
자신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자기 말 운운에 장다리 클라우스는 그만 꺼꾸리 클라우스의 말을 도끼를 내리쳐 죽이고 만다. 말의 가죽을 자루 속에 넣어 도시로 가던 꺼꾸리 클라우스는 숲 속에서 폭풍우를 만나고 길을 헤매게 된다. 하지만 농가의 불빛을 발견하고 그곳의 헛간에서라도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농가의 덧문 윗쪽의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들여다 본 꺼꾸리 클라우스는 식탁 위에 차려진 포도주와 구운 고기를 보고 군침을 삼킨다. 식탁 주변에는 농부의 아낙과 교회지기가 앉아 있고, 아낙은 교회지기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며 음식을 권했다. 참고로 교회지기는 아낙의 남편인 농부가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 때 농부가 타고온 말의 발굽 소리가 들리자, 농부의 아낙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교회지기를 빈 상자 속에 숨긴다. 그리고 재빨리 포도주를 치우고 음식을 오브 속에 감춘다. 집으로 들어가려다 꺼꾸리 클라우스를 보게 된 농부는 꺼꾸리 클라우스를 하룻밤 묵도록 배려해준다. 집안으로 들어간 꺼꾸리 클라우스와 농부에게 농부의 아낙은 고작 귀리죽만을 식탁 위에 내놓는다. 모든 정황을 눈치 채고 있던 꺼꾸리 클라우스는 특유의 재치를 부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져온 말가죽이 든 자루 속에 마법사가 들어있는데, 오븐을 열면 그 곳에 요리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확인하고 싶은 농부는 아내게에 오븐을 열어보라고 시킨다. 아내는 꼼짝없이 교회지기를 위해 만든 고기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법사가 오븐 옆 구석에 포도주 세 병을 가져다 놓았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당연히 포도주도 식탁 위로 올라오게 된다. 포도주와 고기 음식으로 두둑하게 배를 채운 꺼꾸리 클라우스와 농부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마침내 농부는 꺼꾸리 클라우스가 가져온 자루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에게 마법사가 든 자루를 팔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아직 거래할 것이 더 남아있던 꺼꾸리 클라우스는 흉직한 악마를 불러낼 수도 있는 마법사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아낙이 빈 상자 속에 숨겨둔 교회지기를 악마로 묘사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악마의 생김새는 농부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교회지기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농부는 그가 가르쳐 준대로 빈 상자의 뚜껑을 열고 교회지기(악마)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로서 사실 말가죽이 든 자루는 금 한 뒷박의 가치로 거래가 성립이 되고 끔찍히도 싫어하는 교회지기(악마)까지 가지고 돌아가라는 농부의 요청대로, 농부의 집을 떠날 때는 한 몫 두둑히 챙기게 되었다. 농부의 배려로 수레에 돈과 교회지기가 든 상자를 실고 가던 장다리 클라우스는 또 다시 잔꾀를 써서 겁에 잔뜩 질린 교회지기를 더욱 궁지에 몰고 간다.
"그래, 이 바보 같은 상자를 가져 가서 뭘 하겟어. 이 안엔 돌덩이가 들었나? 굉장히 무겁군. 더 이상 가지고 가단 지쳐 쓰러지겠어. 차라리 강에다 ㄷ던져 버려야겠군."
그러면서 당장이라도 강물에 집어넣을 것처럼 상자를 기울인다. 상자 속에 있던 교회지기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살려만 준다면 돈을 한 됫박 주겠다며 애원을 한다.
(3)
두 됫박의 돈을 챙겨 마을로 돌아온 꺼꾸리 클라우스는 측량용 됫박을 장다리 클라우스로 부터 빌린다. 용도를 궁금하게 생각했던 장다리 클라우스는 뒷박의 바닥면에 끈적한 타르를 묻혀 빌려준다. 덕분에 장다리 클라우스는 돈을 세기 위해 꺼꾸리 클라우스가 됫박을 빌려갔던 사실을 알게 되고, 돈의 출처를 묻는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신의 말가죽 값을 치른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 길로 돌아가 장다리 클라우스는 자신이 갖고 있던 말 네 필을 죽이고, 가죽을 벗겨 자루에 넣어 마을로 나가다. 마을 장터를 돌며 가죽을 사라고 소리소리 치는 장다리 클라우스가 요구한 댓가가 은화 한 됫박이란 소리에 마을 사람들을 장다리 클라우스를 비웃으며 장다리 클라우스의 사기심에 화를 내며 흠씬 두들겨 패준다.
(4)
얼마 후, 꺼꾸리 클라우스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평소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할머니를 자신의 침대에 누위고 자신은 의자에 쭈그려 앉아 잠을 잤다. 마을로 돌아온 장다리 클라우스는 잔뜩 화가 나서 도끼를 가지고 꺼꾸리 클라우스의 집에 잠입해 들어와 침대 위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침대 속에 꺼꾸리 클라우스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용케 죽음을 면한 꺼꾸리 클라우스는 할머니의 시신에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이웃집에서 말을 빌려 마차에 실고 마을로 들어갔다. 주막에 당도한 꺼꾸리 클라우스는 주막 주인에게 자신의 음식을 시키고, 마차에 앉은 할머니께 꿀술 한 잔을 갖다드리라고 부탁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막 주인은 꿀술을 갖고 할머니에게 가지만, 이미 굳어버린 시신이 된 할머니가 입을 열 리가 만무하다. 주막 주인이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할머니에게 권해도 반응이 없자, 성질 급한 주막 주인은 꿀술이 든 통을 할머니의 머리 쪽에 내동댕이친다. 그 때를 놓칠세라 기회만 노리고 있던 꺼꾸리 클라우스는 어느 새 밖으로 나와, 자신의 할머니를 주막 주인이 죽였다며 생떼를 쓰면서 연극을 한다. 입장이 곤란해진 주막 주인은 사건을 은폐해주느 조건을 내걸고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한 됫 박의 돈을 준다.
(5)
할머니 시신을 이용해 또 다시 한 됫박의 돈을 갇고 집으로 돌아온 꺼꾸리 클라우스를 본 장다리 클라우스는 깜짝 놀란다. 자신이 죽였다고 믿은 꺼꾸리 클라우스가 버젓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꺼꾸리 클라우스는 큰 돈까지 벌어 부유해져 있었다. 돈의 출처를 물어본 장다리에게 꺼꾸리 클라우스는 지난 밤에 장다리 클라우스가 내리친 도끼에 맞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할머니였음을 알려준다. 어리석게도 장다리 클라우스는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할머니를 도끼로 내리치고 할머니 시체를 마차에 실로 시내로 간다. 속임수라고는 모르는 장다리 클라우스는 자신의 할머니 시신을 팔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미친 놈으로 몰린다.
(6)
폭발할 듯이 화가 난 장다리 클라우스는 번번히 자신을 속히는 꺼꾸리 클라우스를 제거할 목적으로 커다란 자루를 들고 꺼꾸리 클라우스를 찾아간다. 장다리 클라우스의 완력에 자루 속에 넣어져 강으로 옮겨졌다. 무거운 꺼꾸리 클라우스를 들러메고 가던 장다리 클라우스는 동네 교회에서 찬송가 소리를 듣고 잠시 쉬기 위해 꺼꾸리 클라우스가 든 자루를 교회 앞에 놓아두고 자신은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그 때 자루 속의 꺼꾸리가 소리를 치자, 마침 교회 앞을 지나던 양을 몰던 목자가 지나가며 꺼꾸리 클라우스의 소리를 듣게 된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기 대신 자루 속에 들어가면 천국에 갈 수 있다며 늙은 목자를 꼬시고 자신은 자루에서 빠져나왔다. 늙은 목자는 자신의 소들을 대신 잘 보살피라는 말을 남기고 자루 속에 기꺼이 들어갔으니, 이제 꺼꾸리 클라우스는 그의 소들을 차지한 셈이었다. 잠시 후 교회에서 나온 장다리 클라우스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목자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강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물 속에 자루를 집어 던진 장다리 클라우스 앞에 소을 몰고 유유자적 지나가는 꺼꾸리 크라우스가 보였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다리 클라우스를 향해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신이 든 자루를 장다리 클라우스가 30분 전에 강물에 던졌고, 자신을 강물 밑바닥까지 꼬꾸라져 들어갔고 거기에서 양떼를 만나 양을 인도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7)
순진한 장다리 클라우스는 꺼꾸리의 그럴싸한 거짓말을 또 다시 믿고 만다. 꺼꾸리 클라우스가 물 밑에서 들은 소녀의 말에 의하면, 소떼를 몰고 1마일만 가면 또 다시 소떼가 나오는데, 거기까지만 몰고 가주면 그 양떼도 모두 가져도 된다고 했다는 것인데, 물길로 굽이져 가자니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 뭍위로 올라와 소떼를 몰고 가는 참이란 것이다. 그럴싸한 이야기에 또 다시 속아넘어간 장다리 클라우스는 자신도 물 밑으로 가면 그 소녀와 소떼를 만날 수 있느냐며, 자루 속에 기꺼이 들어간다. 자루가 무거워야 물 밑바닥까지 무사히 내려갈 수 있다는 거짓말을 둘러대며 자루속에 무거운 돌까지 집어넣어 장다리 클라우스를 물 속으로 밀어넣는데 성공한 꺼꾸리 클라우스는 이제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어, 너스레를 던다.
"장다리 클라우스가 바다 소를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군."
잔꾀에 번번이 넘어간 장다리 클라우스가 빠진 강물을 뒤로 하고, 꺼꾸리 클라우스는 소 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4. 분석과 생각해 보기
(1)
과연 이런 이야기를 거름 장치없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읽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어리석음 이 원인이라지만, 시기심으로 자신의 말을 도끼로 내리찍는다거나,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돈을 불리고 싶은 욕심으로 할머니를 살해하는 행위가 등장하는 이런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 동화가 원시심성을 드러내고, 가공이 덜 된 이야기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노골성과 폭력성에 있어서는 가뜩이나 폭력적이 되어가는 현대 사회에 속한 아이들의 심성 교육을 위해서도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내 의견이 그렇다고 꽃과 나비와 요정이 그득한 에쁘 동화가 좋다는 의미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안데르센이 쓴 그대로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느냐의 문제는, 폭력성의 관점에서 그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2)
이 이야기를 보면 안데르센이 처한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도심에서는 물건을 화폐를 매개로 사고 팔 수 있는 장이 들어서 있고, 그 주변부로는 소를 치는 농장이 있는 형태의 봉건 사회가 자동적으로 그려진다. 또한 농부와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을 것으로 유추되는 교회지기가 상징하는 것은 교회지기 역시 교회에 속한 자란 의미에서 당시 알게 모르게 횡행했던 교회의 권력에 대한 간적접인 희화화가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앞서도 이미 언급한 내용이지만, 말 네필을 가진 장다리 클라우스는 말 네필을 가진 에드바르를, 말 한 필뿐인 꺼꾸리 클라우스는 안데르센 본인일 수 있다. 동갑내기이면서도 부유한 시민 계급(혹은 귀족 계급)에 속한 콜린의 아들 에드바르는 안데르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창작 활동을 지원해 주는 후원자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신분을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얄미운 존재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혜택을 베푸는 아량에 오히려 벨이 꼬였을련지도 모른다. 잘 난 놈이 마음씨 까지 좋고 자신보다 학식이 높다면 당연히 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안데르센은 에드바르를 어리석고 한심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번번히 꺼꾸리 클라우스의 잔꾀에 속게 만든다.
(4)
실제로 안데르센은 호감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전형적인 비호감의 못난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이 이야기 속에서 꺼꾸리라고 불리 클라우스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비호감인 외모 덕분에 번번히 여인들로 부터 퇴짜를 맞고 자신은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일찍이 깨달은 안데르센은 여자에 대하 복수심도 컸을 듯 하다. 여기에서는 왜 할머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등장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사랑했던 여자들이 한결같이 자타가 인정하는 미모와 재능이 출중한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추하고 늙고 보잘것 없는 존재인 할머니로 바꿔놓고 조롱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5)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심리분석적으로의 접근을 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내공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특별히 이야기 속의 장치와 화소들이 심리적 접근이나 신화적 접근을 허용할 만큼 상징적인 것 같지도 않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안데르센이 처한 사회적 상황 맥락에서 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알레고리로 읽혀진다.
첫댓글 이 이야기도 역시 안데르센의 순수한 창작은 아닌 거 같습니다. 옛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재구성 또는 변형시킨 작품인 거 같아요. 켈트족 옛이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허든 더든 도널드 오니어리>라는 이야기지요. 그림형제의 옛이야기 가운데도 있었던 듯한데 찾을 수가 없네요. 제가 옛날에 읽었을 때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느낌이었지요. 안데르센의 다른 동화들과 너무나도 다른 느낌에 무척이나 낯설어했더랬지요. 안데르센의 동화도 시기적으로 한번 훑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초기 동화들과 말년의 동화는 다를 거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