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마가복음 2 : 1 - 12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약 400여년간 이스라엘 나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마3:2).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세례 요한을 따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했습니다(요1:29).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말씀을 듣지 못했던 백성들에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조용했던 갈릴리가 갑자기 시끄러워졌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고쳐주신 일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 들므로 예수님은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습니다.
수 일이 지나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은 예수님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떠나 가버나움에 사셨습니다(마4:13). 가버나움을 ‘본 동네’라고 마태는 기록했습니다(마9:1).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이였습니다(눅5:17).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것을 보고 트집 잡으려고 예루살렘에서 온 것입니다.
그때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에까지 들어 갈 수 없어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네 사람들은 비상한 방법으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달아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잔득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한 대로 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병으로부터 일어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을 고치고자 왔는데 병은 고쳐주지 않으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을 때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도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가 모든 고통의 원인입니다. 죄가 세상에 오기 전에는 고통도 질병도 없었습니다. 죄 때문에 병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병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더 원하신 것입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53: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한국 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유의 은사로 속화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범사가 잘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참 복음이 아닌 유사복음입니다. 안수하면 어떤 병이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적을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음이 없습니다. 속죄의 복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기를 원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병고치는 은사가 있다는 교회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분들은 안수하여 병을 고친다고들 합니다.
물론 중풍병자나 그를 메고 온 네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병고쳐주시기를 바라고 예수님께 온 것이지 죄 사함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이 병고침을 받고자 나오고, 사업이 어려워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바라는 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병을 고쳐 주시기보다, 사업을 도와주시기보다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을 주시기를 더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사함 보다는 병 고침이나 세상적인 축복을 더 원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찾은 많은 병든 사람들도 역시 예수님은 병 고치는 분으로 알고 찾아와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역시 중풍병자도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였습니까? 예수님 앞에만 가면 중풍병자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이상의 믿음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많은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은 자신의 병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찾아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지만 그들 모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눅17:19). 그러나 아홉은 병 고침은 받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병중에 있는 사람을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그를 하나님 나라로 데려 가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병고침을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병 고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오늘 말씀에 중요한 것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나 이를 메고 온 네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더 이상의 믿음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그들의 믿음은 그들 마음속에 숨겨진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 믿음은 아직 들어나지 않아서 자신들도 모릅니다. 숨겨진 그들의 믿음은 택함 받은 자에게만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자라지도 않은 숨겨진 그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의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도 그를 메고 온 네 사람들도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보다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기를 더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을 때 크게 좋아하거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언제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까? 중풍병을 고침 받았을 때 그들이 놀라 영광을 돌렸습니다(12).
중풍벙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본 서기관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신학자들입니다. 예수가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을 보고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바른 신학이요 옳은 말입니다. 조금도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은 물론 중풍병자나 그를 메고 온 사람들도 예수님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란 목수의 아들이 해성처럼 나타난 인기 있는 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언약의 메시야이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시므로 서기관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고하시며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
중풍병자는 벌떡 일어나 누었던 침상을 메고 걸어갔습니다. 자기 스스로 걸을 수 없어서 침상에 누운채로 메고 온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 침상을 메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작은 일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하실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사람들은 다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어떠한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도록 이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적’을 ‘표적’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 행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놀랐지만 예수님으로서는 아주 쉬운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는 것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예수님으로서는 그것은 어렵고 힘들 일이 아닙니다. 말씀 한 마디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도록 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드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죄를 사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밤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요18:11). 얼마든지 하늘에 천사를 불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했습니다(마12:38).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표적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어린 양처럼 잡혀 끌려갔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은 머리를 쩔쩔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며 모욕을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느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하며 희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적을 보이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도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죄 사함을 위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표적을 보이라는 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더라면 우리를 구원을 이루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적을 좋아하는 것은 옳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이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축복도 귀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믿음이 더욱 큰 축복입니다. 가장 큰 구원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