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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5일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 끝 날에 있을 징조
마 24 : 48 – 51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4장의 핵심은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 끝 날에 있을 징조'인데
이 세상 끝 날과 주님이 임하심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각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공부하시는 다른 목사님들은
이것을 세상 끝 날에 있을 심판으로 보고 있고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다 심판하고 정리할 것으로 설교를 했고
그렇게 배워왔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겁니다.
사실은 저도 그렇게 말씀을 배워 왔고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한 바탕과 제가 신앙생활한 바탕이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듣고 읽고 배워 왔던 것들을 언제까지 그대로 이야기 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조금만 성경의 관심을 갖고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자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들은 것들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다 보니까,
모든 사람들 통념 속에 마태복음 24장이 세상의 끝이고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완전히 끝내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인 사건이라고 말씀 드리기 위해서는 정확한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습니다.
굳이 근거를 대지 않아도 됩니다.
왜?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에 굳이 성경 몇 장 몇 절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늘은 24장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 드리고 25장을 보겠습니다.
그래야만 25장이 제대로 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차적으로는 주님이 마태복음 24장을 말씀 하시고 있는 그 시점을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상황은 분명히 24장입니다.
이 시점에서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것은 가실 곳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가시지 않고서는 올 수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24장의 시점에서 주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인가?
26장으로 넘어가 보게 되면 주님의 잡히심이 나오면서,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냐고 하면,
바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이 가셨으니까 ‘아! 하나님 나라로 가셨구나.’하시겠지만
성경의 문맥을 잘 보시면 지금 주님이 바라보고, 목표로 하고,
이생에 모든 것을 마감하시면서 내다보는 것은 오직 십자가 사건 밖에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 이후 사건은 주님 생각 속에 없습니다.
왜? 몸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오신다고 이야기할 때에 그 오심이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27장 후반과 28장으로 넘어가면 거기서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오실 때에 그 오시는 상황은 부활하심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가시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시는 것이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부활한 몸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으로 오셨고,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는 것은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다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상식적인 생각은
지구의 종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풀어왔고 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한 모든 생각 자체가 어디에 있느냐면,
일반인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일반 모든 종교 속에 들어가 있는 샤머니즘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샤머니즘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고 이 세상은 끝날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의 생각은
이미 지구의 종말이라는데 넘어가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세상 끝 날’하니까 딱 맞아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 이전에 하신 그 사역과 부활하신 후에 하신 사역을 잘 보시면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드러난다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가심과 오심을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주님은 어디로 가시기 위한 것일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을 너희가 알리라’ 최소한 예수님을 따르고 그 말씀을 사모하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분이 가는 곳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은 ‘너희가 알리라’ 말씀 하셨으니까.
(요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 하리라
여기서 주님은 내가 가는 곳이 있는데 너희는 나를 찾다가 죽는다는 겁니다.
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만져지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저가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하니 ‘저가 자결 하려는가?’ 이겁니다.
당신이 가면 어딜 가느냐 하는 겁니다.
당신이 가는 곳에 우리가 가지 못할 곳이라고 하면 딱 한 가지,
당신 자살하러가는 것인데 거기는 못 따라 가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외에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따라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고, 말씀에 충실하다는 사람들입니다.
(요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 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세상을 떠나 그분이 나온 곳으로 가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고 곧 하늘로 가시는 겁니다.
(요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그러나 일찍 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 도 이르노라
잠시 너희와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갈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디로 가시는가 34절,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 속으로 가시는 겁니다.
그분이 새 계명이 되어 지시면 사랑으로 되어 지시는 것이고,
하나가 되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래서 이것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너희도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 새 언약의 사건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비로소 우리에게 무엇이 되는 겁니까?
새 계명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복음 13장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하면,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는데 후에는 따라 올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과 후에 뭐가 달라진 겁니까? 그 다음에 베드로가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요 13: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것 때문에 못가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지금은 따를 수 없다고 하니까 “왜 내가 따라가지 못합니까.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런데도 못 따라 갑니까? 지금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세상적 의식이 가득 차 있고 자신의 의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왜? 성경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의 맹세는 될지 모르나 주님이 보실 때에는 자격 미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후에는 네가 따라 올 것이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 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나를 따라 오기 전에 무슨 사건이 있어야합니까
?여기서 누구를 부인한다고 그럽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을 해야 따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습니까?
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못 하니까 못 따라가는 겁니다.
부인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언제?
닭이 울기 전에,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면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부인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오직 내가 주님의 수제자인데 내가 왜 못 따라가?
내가 목숨 걸고 따라가는데 못 갈 곳이 어디 있어?
맹목적인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결단코 주님을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때까지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인한다는 단어를 보면 533 (아파르네오마이)이며 여기에 (아포) 전치사가 붙었습니다.
(아포) + (아르네오마이) = ‘거절하다, 부인하다, 단절하다’ = 확실하게 부인하고 단절해야 합니다.
이 (아르네오마이)라는 단어는 4482 (흐레오)에서 왔는데 '넘쳐나다. 흐르다'
그래서 위에서 흐르는 물을 통에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겁니다.
그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나온 단어가 (흐레마) 입니다.
(흐레마)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바로 부인하는 겁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 로 나오는 모든 말씀 (흐레마)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흐레마)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생명으로 흘러넘쳐 나오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살리는 양식이 되니.
그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곧 (흐레마)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 (흐레마)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 그것이 바로 (흐레마)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서 완전히 소화된 겁니다. 엄마가 어린 아이에게 먹이는 젖은 음식을 먹고 완전히 소화를 시킨 것입니다. 그게 (흐레마)입니다. 그래서 그 젖 속에는 아이에게 필요한 요소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분석 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이 들어 있고 생명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유를 먹인 아이와 모유를 먹인 아이가 다르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을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 (흐레마)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 그럴 때 베드로가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영생의 말씀이 (흐레마)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생명의 떡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생명의 양식이라는 겁니다.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 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 (흐레마)에 귀를 기울이라
베드로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체험한 다음에 말씀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확인하고,
그래서 요 13:37절의 주님을 따라 간다고 하는
이 190 (아콜루데오)라고 하는 단어는 같은 길에 동행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로서 따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후에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그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게 주님이 가신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만 그랬느냐,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똑같이 따라갔다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