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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성경 읽어도 태산의 “모퉁이만” 긁었습니다.(박희천 목사)
목회에 크게 성공하신 김창인 목사님(충현교회 원로)께서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 일곱 가지 요소를 꼽습니다. 설교, 교육, 심방, 전도, 구제, 행정, 예식,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저가 한 사사년 되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일곱가지 요소에 저도 공감이 갑니다. 김 목사님은 그 일곱가지의 순서가 중요성에 의한 순서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제일 중요하고, 예삭이 제일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순서가 없다는 말씀도 안했습니다. 제가 알기에도 중요성의 순서로 말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설교’ 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교육’인데, 김창인 목사님의 교육은 유명합니다. 1년 내내 충현교회 교인들을 쉬게 쉬게 하지 않습니다. 밤낮으로 훈련을 시킵니다. 전 그걸 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김창인 목사님은 무슨 훈련, 무슨 훈련, 물ㄹ곤 경제적으로도 다 교회에서 돈 대지만, 밤낮 훈련을 시킵니다. 교육을 잘 시킵니다.
김창인 목사님이 정의하는 ‘심방’ 이란? 참 그분다운 정의입니다. 가정 가정 마다 방문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축복을 나누어 드리는 것’ 을 심방이라고 합니다. 난 심방하면서도 그런 뜻 까지는 몰랐는데, 그렇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축복을 집집마다 다니면서 나누어 드리는 것이 심방입니다.
그 다음은 ‘전도’, ‘구제’, ‘행정’입니다. 여기에서 김창인 목사님의 행정은 유명하지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다른 사람은 백 시간을 들여도 생각해내지 못할 그러한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나옵니다.
김창인 목사님께서 부산 서대신동의 서부교회에 계실 때니까, 1952년도입니다. 교인이 한 200명 정도밖에 안되었을 때인데, 거기에 이맹달이라고 하는 여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나이 많은 분인데, 이 분이 또 여걸입니다.
그런데 한번 저를 보고 말씀하시는데, 목사님이 머리가 좋아서 일을 얼마나 많이 맡기는지 발 벗고 따라가도 미처 못해내겠답니다. 난 부끄럽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칠백오륙십명 모이지만, 난 부목사님께 맡길 일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목회가 되겠습니까? 김창인 목사님은 교인이 200명일 떼에도 부교역자가 발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갈 정도로 일거리를 맡깁니다.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며 일감을 맡기는데 저는 뭐시킬게 있어야지요.
저는 ‘행정’ 이라고는 제로(0)입니다. 제가 목회에 성공 못하는(?) 제일 큰 원인도 행정에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김창인 목사님께서 충현교회 당회장으로 계실 때에 부교역자가 한 50명 되었습니다. 그분은 부교역자에게 앉아있을 틈도 없이 일을 시킵니다. 50명되는 부교역자가 앉아있을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한분 계시는 부목사님에게도 일감이 없어서 무엇을 시킬지 모르는데, 그 목사님은 50명이 앉아있을 틈도없게 해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행정과 저의 행정을 비교하면 꼭 제트 비행기와 달구지 같습니다. 그분은 제트기타고 한 시간에 천키로미터를 달리고, 난 달구지로 한 시간에 10리를 ‘이랴 이랴’ 소 몰고 가니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그분의 행정은 유명합니다.
그 다음에는 ‘예식’입니다. 그분의 예식이라는 것은 장례식과 결혼식입니다. 김창인 목사님의 예식 또한 유명합니다. 그건 특별합니다. 장례식 한 번 하고나면, 그 집에서 안 믿던 사람들이 2,30명씩 다 교회에 나옵니다. 장례식과 겷혼식이 기가막힙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결혼식과 장례식도 그분의 원형을 본따서 배워서 하는 것입입니다. 그분은 예식(결혼식과 장례식)을 목회의 한 요소로 꼽을 정도로 중요시합니다.
목회에는 일곱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번에 우리가 다루는 것은 일곱가지 가운데 하나인 ‘설교’ 만을 다루게 됩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설교와 목회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에는 일곱가지 요소가 있으므로, 설교 하나만 잘해가지고는 목회를 잘한다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잘한다고 목회 잘하는 것 도 아니고, 목회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일곱가지를 다 잘해야 되겠는데, 이번에는 목회의 일곱가지 요소 중 하나인 설교 하나만을 다루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미안한 것이 저는 설교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공의 명색을 따지자면 제 전공은 본래 신약학이고, 또 우리 신학교에서도 귀국 직후에는 신약 방면에서 강의하다가, 76년도부터 학교에서 일이 생겨서 전공은 아니지만 설교학을 좀 맡아서 강의를 해왔습니다.
설교학이 저의 전공은 아니라 해도, 약50년 가까이 제 나름대로 설교를 해 오면서 ‘이렇게 하니까 되는것 같은데...’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간행한 <나의 설교론> 머리말 처음에 썼습니다. 저는 설교학의 이론을 드리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교를 하고 가르쳐 오면서 ‘이렇게 해보니 되니 당신네들도 한 번 해보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영역이 단지 이론에 그친다면 그럴수 없겠지만, 오히려 설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학 전공도 아니고 설학의 대가도 아니면서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설교학의 절대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목회자라면 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배운 분들이고, 또 개중에는 이미 여기 저기서 설교학을 강의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여러분들이 설교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가지신 분들일 겁니다.
저는 다른 과목에 대해서도 이렇게 목사님들 앞에만 서는 일이 심상치않게 많은데, 그럴 때에도 늘 말씀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가르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동역자들인데 동역자끼리 누가 가르치고 누가 가르침을 받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동역자들로서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에 대해서 가슴을 헤쳐놓고 대화의 광장을 가져보자는 뜻에서 제가 나오곤 합니다. 원래 세미나란 말 자체가 서로 연구하는 것 아닙니까?
설교란 목회의 일곱가지 요소 중 하나인데, 여러분도 설교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하실 것입니다. 또 많은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서 설교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좀더 좋은 방법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함입니다.
우선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릴 텐데,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여러분들께서 교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날까지 주로 강의실 안에서만 강의를 했지, 강의실 밖에서 강의를 드린적은 별로 없습니다. 이번 세미나에 우리 교단뿐이 아니라 타 교단에서도 많이 오셔서 제가 좀더 교정받는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설교학 세미나는 제나름대로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교 초점 맞추기 1.
호랑이 잡으려고 바다로 간다?
먼저, 제가 앞으로 여러 시간 동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설교를 잘 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이 주제만으로도 6시간을 강의 했는데, 여기에서는 한 3-4시간 안에 끝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일이 잘되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학기말 시험을 얼마나 잘 치렀는가는, 학기말 시험 준비를 얼마나 잘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그 일을 위해서 준비를 얼마나 잘했느냐에 달린 겁니다. 마찬가지로, 설교도 잘하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그런대 우리가 어떠한 일을 준비한다고 할 때, 고려해야할 것이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초점을 어디에 찍고 준비를 하느냐? 이고, 또 하나는 ’그 초점을 위한 준비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입니다. 이 두 가지가 고려할 만한 문제입니다.
첫 번째, 초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무슨 일을 준비할 때에 초점을 올바로 찍지 못하고 준비하면, 말로야 준비지만, 엄밀한 뜻에서는 준비가 아니라고 봅니다. 내일 산에 호랑이를 잡으러 갈 포수가 밤새도록 준비를 하는데 고기 잡는 그물들을 펴놓고 그물 코 빠진 것을 열심히 깁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준비는 준비지만 초점을 바로 맞춘 것입니까? 호랑이를 잡으러 갈 사람이 고기 잡는 그물코를 꿰어야 되겠습니까? 엽총을 거내놓고 기름으로 잘 닦고 총알이 바로 들어가는지, 방아쇠가 바로 당겨지는지, 가늠쇠가 제대로 되어있는지...이런것을 준비해야지, 산에 호랑이 잡으러 갈 사람이 고기 잡는 그물을 꺼내놓고 그물코 빠진 것 깁고 있는 것은 말이 준비지 엄밀한 의미에서는 준비가 아닙니다.
고등학생이 내일 학기말 시험이 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나 내일 학기말 시험이라서 오늘 밤새도록 시험 준비할 것예요.’ ‘그래, 내 아들 착하다. 공부 잘해라.’ 고등학생은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잡아매고 어머니는 공부 잘하라고 과일도 깎아주고 커피도 끓여줍니다. 게다가 한가지 더 좋은 것은 뭡니까? 여러분 고3경험 다 알지요? 저는 고3네명 치르다가 다 늙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머니가 할 일이 무었입니까? 공부하는 아이 곁에 밤새도록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든가, 잡지를 보든가, 하다 못해 바느질을 하면서라도 그 아이 옆에 같이 앉아 있어주는것.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내일 영어 시험 있는데, 이 학생이 밤새도록 수학만 풉니다. 준비는 준비로되 초점을 맞춘 준비입니까?
아닙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준비를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초점을 못 맞추는 일은 신학생들도 잘합니다. 침례신학대학이 대전에 있습니다. 지난 주간이 학기말 시험이었습니다.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는 선교사 교수님이 한 분 계시는데, 내일은 그 선교사 교수님 과목을 시험 보는 날입니다. 선교사 교수님의 귀에. 어느 학생 하나가 내일 치를 자기 과목을 준비하는데, 밤에 뒷동산에 올라가서 철야기도로 준비한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선교사 교수님이 그 말을 듣고 나서, 그 학생이 너무 핀트가 안 맞게 행동하니까, 밤에 산에 올라가서 그 학생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여! 내일 학기말 시험에 100점 맞게 하여 주소서...’라고 산이 떠나갈듯 큰 소리로 기도를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교수님이 그 학생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학생, 철야기도는 방학 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않소? 내일은 학과 과목인데, 학과 공부를 해야지, 기도하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학생이 선교사를 공박합니다. ‘교수님은 그렇게 믿음이 없습니까? 그렇게 믿음이 없으면서 한국에 어떻게 선교사로 왔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액면 그대로 믿습니다. 내려 가십시오!’ 선교사는 망신만 당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음날 시험을 치릅니다. 시험지를 받고 난 후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원까지 종통된 것 두 가지가 있지요? 번호와 이름을 적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 학생도 다 썼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에 대해서 논하라는 첫 번째 문제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알아야 쓰지요. 밤새도록 철야했으니까 졸리기만 하고,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답안지에 두 줄을 썼습니다.
선교사 교수가 하나하나 채점하다가 한 답안지를 보았는데 이렇게 씌어 있더랍니다. 그 학생은 번호, 이름을 쓰고, 무엇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답니다. 첫줄에는 ‘저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 줄에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선교사 교수는 이 답안지를 보고 ‘어떻게 체점을 해야 할까?’ 골치가 아프더랍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래 공평하게 하면 되겠구나, 그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했으니까 0점을 주고, 전지하신 하나님에게는 100점을 주면 되겠구나, 그렇게 체점을 했답니다. 그 신학생은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는데 초점을 못 맞추었던 것입니다.
초점을 못 맞춘 준비는 엄밀한 뜻에서 준가 아닙니다. 저는 씨름이고 운동이고 간에 철학적으로는 다 같은 맥락으로 보고 교훈으로 삼습니다.
설교, 초점 맞추기 2.
이만기 선수의 초점바로찍기
이만기 장사가 80년대에는 천하장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이만기 장사의 연습 장면이 동아일보에 크게 게재됐습니다. 이만기 장사의 코치가 황경수코치인데 그 기사를 보면서, 씨름이나 설교나 철학적인 면에서는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반기 장사는 마신 사람인데, 하루에 8시간 이상을 훈련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네 가지에 초점을 두고 훈련을합니다. 네 가지만 잘하면 천하장사가 될수밖에 없는, 초점을 바로 찍은 훈련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첫째로, 마산에 무악산이 있는데. 이 산은 올라가는 데만 9킬로미터이니까 왕복은 18킬로미터입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아침마다 무악산 9킬로미터를 뛰어 올라갔다가 9킬로미터를 뛰어내려옵니다. 18킬로미터를 하루도 거르지않고 뜁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경험해 보셔서 아시지요? 다리 힘을 키우는데에는 달리 과학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다리의 힘흘 키우는 왕도는 뛰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도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건강상 탁구를 조금 치는데, 경우에 따라 탁구를 못치는 날에는 뜁니다. 오늘도 한 10킬로미터를 뛰고 왔습니다. 뛰면 다리에 힘이 납니다. 씨름하는 사람ㅇ; 다리에 힘이 없어서 되겠습니가? 날마다 18킬로터를 뛰니까 쇠뭉치 같습니다.
둘째로, 250킬로그램짜리 역도를 서너번씩 듭니다. 왜 하겠스니까? 당시 이만기 장사의 라이벌인 이준희 장사의 몸무게가 110킬로그램입니다. 그러면 씨름할 때 100킬로그램이 넘는 사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날마다 250킬로그램을 서너번씩 들던 사람이 250킬로그램 절반도 안되는 110킬로그램의 이준희장사를 든다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이건 숨도 안쉬고 범쩍듭니다.
셋째로, 황경수 코치는 100미터 토끼뜀을 시킵니다. 토끼뜀을, 이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토끼뜀을 왜 할까? 생각했습니다. 저도 씨름을 좀 해봐서 압니다.씨름하다 보면 내가 그냥 넘어가다가도 벌떡 잡아뒤집는 그런 수가 있습니다. 토끼뜀을 했던 힘이 그때팍 뛰어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경수 코치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선수에게 100미터 토끼뜀을 시키면 원망하고 안할 텐데, 이만기 장사는 아무 원망없이 잘한다고 말입니다.
넷째로, 배드민턴을 한 시간 반 정도 뜁니다. 왜 배드민턴을 칩니까? 순발력 계발에는 제일 이랍니다. 씨름을 할 때는 천태만상이 벌어지는데, 그때를 대비해 순발력을 키우기 위해서 배드민턴을 한시간 반씩 치는 것입니다. 그 훈련받는 것을 보니 ‘옳다, 이만기 장사가 80년대에 천하장사를 독점 하다시피 한 것이 공짜로 된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 듭니다.
네 가지 순서가 전부 초점을 바로 찍은 연습입니다. 그런데 이 초점을 바로 찍는다는 것은 본인보다도 지도자가 바로 찍어줘야 됩니다. 경험이 없는 본인이야 뭐 별로 잘 압니까? 오랜 경험을 가진 지도자가 초점을 바로 찍어서 훈련시켜야 되는것입니다. 초점을 바로 찍는 것은 특히 지도자에게서 달려있습니다.
지도자는 초점을 바로 찍어야...
저는 옛날 동네 축구를 좀 했습니다. 한국사람 치고 동네 축구를 안해본 사람이 없지요. 저도 동네 축구를 했기 때문에 다른 운동은 잘 모릅니다만, 지금도 축구는 종종 봅니다. 그 박종환 감독 말입니다. 저는 그 사람과 상관없지만 여러분도아시는 것처럼, 93년도, 94년도 프로축구에서 2년 우승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박종환 감독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독사’ 감독이죠, 지독하게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박종환 감독은 축구의 가장 큰 초점을 주력, 뛰는 것에 두 s다고 합니다. 박종환 감독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발재주가 아무리 귀신 같아도 뛰지 못하면 축구에서는 앉은뱅이다. 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소위 박종환 사단 멤버들이 동계훈련 때 하는 기초훈련은 날마다 축구장을 서른 바퀴씩 뛰는 것이었습니다.
20대 젊은이가 서른 바퀴 뛰는 것은 별로 큰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탁구 못치는 날에는 축구장을 스물일곱 바퀴를 뛰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러니 29대 젊은이가 그 정도도 못뛰겠습니까? 그런데 불란서의 축구 전문가에 의하면, 축구장의 둘ㄹ게가 한 400미터 되고, 전반전, 후반전 합쳐 선수들이 평균적으로 뛰는 거리가 약 9킬로미터라고 합니다. 그러면 400미터 운동장을 서른 바퀴 뛰면 12킬로미터 이지요. 박종환 사단은 12킬로미터를 뛰는 훈련을 잘 해놓은 것입니다.
한번은 메드카배 쟁탈 국제 축구대회 때, 박종환 사단이 브라질과 결승전이 붙었는데, 국제 경기 답지 않게 전후반에 4대4로 동점이 됐습니다. 이렇게 골이 많이 터지기는 힘든 일입니다. 연장전을 해야 되죠. 연장전을 들어가니까 그 황소 같은 브라질 선수들이 엉기적 엉기적 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박종환 사단은 아직도 몇킬로미터 더 뛸 수 있는 기름(?)이 남아있습니까 3킬로미터가 남아있죠? 그냥 뛰는데, 연장전에서 세 골을 더 넣어 7:4로 이겼습니다. 그때 그것을 보면서 저는 축구도 철학적으로 봅니다. ‘옳거니, 박종환 사단이 평소에 12킬로미터 뛰는데 초점을 두었던 것이 오늘 바로 적중됐구나’ 하는것을 알았습니다. 초점을 바로 찍는 것은 지도자가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50년대에는 한국 축구에 CID(정보기관)팀이라고 제일 잘하는 팀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번은 서울 흑석동 근방에 심방을 가다가 때마침 CID팀이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훈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 이것 봐라, 내 평생에 이런 전문가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을 탠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시간 가량을 가만히 서서 훈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CID팀 감독이 훈련을 시키는데, 전문가라 다르더군요. 시시한 훈련은 안합니다. 전부 대목장이 되는 요긴한 훈련만 합니다.
마지막에는 키퍼 훈련을 시킵니다. 그 키퍼는 20대였지요. 키퍼 훈련을 시키는데, 키퍼는 골대 앞에 서 있고, 감독은 패널티 킥 차는 근방에 공을 한 대여섯 개쯤 갖다놓고, ‘자, 공 들어온다 받아라. 골인, 골인, 골인’ 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대여섯개의 공을 연거푸 차니, 어떤 공은 저구석으로 들어가고, 어떤 공은 땅으로 굴러들어오고, 키퍼는 그것을 연거푸 받아내느라 미칠지경입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옳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키퍼는 평소에 어떤 훈련을 받았습니까? 골인하면 으레 대여섯 개의 공이 제멋대로 들어옵니다. 밤낮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 연습을 했으니, 실전할 때에 어쩌다가 한번 들어오는 공을 못 받겠습니까? 그건 눈감고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하, 저렇게 훈련시켜야 되겠구나.’ 그때 저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초점 바로 찍는 것은 지도자의 일입니다. 지도자가 바로 찍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저는 일제 시대에 상업학교를 갔는데,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라 초등학 때 교장선생님께서 가라고 해서 간 것입니다. 저는 1, 2학년때 주판을 맹훈련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 주판 선생님은 일본 선생님이신데, 지금 보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초점을 올바로 찍어서 훈련 시켰습니다. 저는 그분이 초점을 올바로 찍어 우리에게 주판 훈련을 시켜주신 일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준비한다고 할 때, 고려할 만한 첫 번째 일은 ‘초점을 어디에 두고 훈련하느냐, 준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초점을 어디에 두고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까? 우리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제가 어느 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느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설교를 잘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의 설교집을 되도록 많이 읽는데 초점을을 두리고 했답니다. 물론 그 교수님이 설교학의 대가니까 상당히 귄위 있는 말씀이겠지만, 저는 별로 동감이 안 갑니다. 제가 보기에는 초점을 잘못 찍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그 설교학 교수님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은 아주 불행합니다. 교수님이 초점을 그곳에 두었기 때문에, 그 학생들은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수십권, 수백권의 설교집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입니다.
설교의 초점
본문 말씀을 많이 읽으라
그러면 저는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설교를 잘하고 싶으면 본문 말씀을 한없이 많이 읽자!’
저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런일이 있습니다. 생각을 잘못 해서 사실은 A가 초점이어야 하는데, A가 초점이 되어야 되는 줄 모르고 B를 준비하다가 나중에 깨닫기를 ‘아하, B가 초점인줄 알고 B를 준비해 왔는데, 이제보니 B가 초점이 되어서는 안되고 A가 초점이어야 하는구나’라고 깨닫고, 이날까지 초점으로 잡았던 B를 버리고, 초점을 A로 바꾸는 일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저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운동과는 담을 샇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에 가보니 기숙사 지하실에 탁구대가 있었습니다. ‘무슨 시간이 있어서 탁구를 치는고? 탁구를 칠 시간이 어딨다고 저런 것을 갖다 놓았나? 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저 공부, 공부...그러다가 제가 나중에 병이 나서 혼났습니다. 그대 제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하, 공부만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구나, 건강해야 되겠구나,‘ 그때부터 생각이 달라져 오는 후배들에게 먼저 탁구 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건강 관리를 위해 계속 탁구를 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말씀으,f 많이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몇해 지나 잘못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날까지 지내오면서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말씀 많이 읽는 길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잘못됐다고 바꾸는 것이 아닌라, 날이 갈수록 ‘과연 그렇구나’ 더 강하게 느낄 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이 사실을 부인 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우선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한없이 많이 읽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초점이 어긋나면 돌이킬 수 없다
야마토. 무사시 대한공모함
둘째로, 우리가 어떤 사실을 준비할 때, 그 초점을 위한 준비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려해 볼 만한 둘째번 일입니다. 우리가 비록 초점을 잘못 찍었다 해도, 초점을 바꿀 때 짧은 시간 내에 새로운 초점이 준비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초점을 한번 잘못 잡고 준비해 오다가 나중에 와서 내가 잡았던 초점이 잘못된 줄을 알았고, 새로운 초점을 위하여 다시 준비하려고 하나, 그 새로운 초점을 위한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 그때는 큰 낭패입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손님이 옵니다. 그 집의 주부가 ‘내가 커피를 한 번 맛있게 끓여보리라’ 하고 물을 팔팔 끓이고, 커피잔에 커피가루와 설탕과 크림을 적당히 넣고, 이제 손님이 오셨을 때 물만 부으면 됩니다. ‘내 커피 끓이는 솜씨 한번 보여주자’ 고 마음 먹었습니다. 손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데, 드디어 손님이 왔습니다. ‘커피 한 잔 대접할까요?’ 손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저녁에 커피에 초점을 두고 마시면 잠을 못 잡니다.’ ‘그러면 뭘 드릴까요?’ ‘그냥 자극성 없는 인삼차나 한잔 주십시오.’ 나는 커피에 초점을 두고 준비했는데. 인삼차를 달랍니다. 초점이 어긋낫습니다. 이 문제가 심각합니까? 심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어차피 물은 끓여놨으니 인삼 한봉지를 따서 물만 부으면 인삼차가 되는 것 아닙니까? 한 십초면 됩니다.
초점이 아무리 어긋나도 새로운 초점 준비에 시간이 안걸리면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초점을 한번 잘못 찍었는데,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초점으로 바꾸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면 이것은 문제가 됩니다.
일본 사람이 태평양 전쟁을 하 때 초점을 잘못 찍었다가 그것이 전쟁에 진(실패) 원인까지도 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한번 말씀 들여보겠습니다.
저는 태평양 전젤과 함께 자란 사람입니다. 태평양 전쟁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시작되었지요, 사실은 그 전부터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1937년 7월에 일본이 중국에 선전포고는 안했지만 전쟁을 했습니다.
1937년이면 제가 초등하교 3학년 때인데, 그 전쟁을 일컬어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고 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왜 중국을 ‘지나’ 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중국이라는 말은 해방후에 처음 들었지 계속 지나라고 햇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중국인들을 얕잡아서 지나인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지나사변 때인 1937년 7월부터 일본은 중국 남경 까지도 다 점령했습니다. 그러니 약 4년 반 동안 지나사변을 전개해오다가, 41년 12월 8일 중국에 이어서 영국과 미국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하고 태평양 전쟁을 또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문서상으로 알았지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하기 위하여 극비리에 준비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 해군에서 당시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었던 초대형 전함 두 척을 만든 것입니다. 그 전함의 이름이 하나는 일본말로 ‘야마토 大和’ 하나는 ‘무사시 武勢’인데, 이것은 당시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었던 초대형 전함입니다.
당시 바다에서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전함에 달렸습니다.
구축함은 적국의 잠수함을 따라가서 폭뢰를 던져 잠수함이나 깨버리는 똘마니이고, 바다의 싸움에서 자웅을 가리는 것은 전함입니다. 당시 전함이라 하면 상식적으로 무게가 5만톤급에 대포일은 16인치 대포알은 흔히 대포알의 직경을 가지고 따지지요‘입니다.
야마토, 무사시는 당시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었던 초특대형 전함인데, 마침 동아일보에 그 기사가 나왔기에 제가 이것을 지금까지 잘 간수 놓았습니다. 야마토라는 전함의 길이가 263미터입니다. 굉장하지요? 고정 승무원이 2,498명,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게는 5만톤 정도가 아닌 72800톤, 대포알은 16인치가 아니라 18인치...당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가지지 못했던 초대형 전함을 두 대 만들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후 그때까지 바다의 싸움에서 이기는 절대적인 비결은 ‘거함거포(巨艦巨砲)주의’ 였습니다. 바다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으면 되도록 큰 군함을 만들어서 되도록 큰 대포를 가설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다의 싸움에서 이기는 절대 비결이었습니다. 옳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 해군이 어떻게 일본해군을 꼼작못하게 했습니까? 물론 이순신 장군의 작정도 유명하지만, 문헌에 의하면 우리 해군의 배는 일본 해군에 비해서 크기가 두배였다는 것입니다. 크기가 두 배니까 대포의 사정거리도 두배입니다. 일본 해군에서 대포알을 쏘면 바다 가운데 떨어지는데, 조선 해군에서 대포알을 쏘면 일본해군배의 꼭대기에 가서 부숴버리니 세상에 이 싸움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 해군이 아무리 독하기로서니 자기네가 쏜 대포알은 바다 가운데 떨어지고, 조선 해군이 쏜 대포알은 자신들의 배 꼭대기에서 터지니 이것을 당해낼 재간이 있습니까? 그래서 거함거포주의입니다.
이것이 바다의 싸움에서 이기는 절대 비결이었습니다. 일본이 이를 모를 리가 있습니까? 더구나 섬나라 사람들인데요. 그래서 극비리에 야마토, 무사시 두 전함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세월이 걸렸느냐 하면 만 5년이 걸렸습니다.
이 야마토, 무사시가 완성되어 바다에 나간 것은 1941년 12월입니다. 12월 8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을 보면 무엇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믿고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롷게 1936년 12월부터 1941년 12월 까지 만 5년이 걸려서 군함을 만들었느데, 5년동안 이 군함을 만들 때에 조선소 뒤의 육지에는 사방 나무판자로 가리우고 있어 조선소 안에서 무엇을 만들어지는지 누구도 알수 없게끔 극비리에 진행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초에 아마토, 무사시 두 군함이 바다에 뜨자 일본은 ‘이제 됐다, 거함거포주의인데, 어느 놈이건 덤벼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군함이 아무리 많기로서니 영국과 미국의 군함들은 50,000톤 급에 대포알이 16인치이고, 우리는 72,00톤에 대포알이 18인치인데, 세계의 어떤 전함도 야마토와 무사시를 당해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5년동안의 세월과 물자와 기술과 정성과 노력을 총투자해서 완성한 후, 여기에 운명을 걸고는 ‘됐다, 선전포고해라’ 하고 안심하고 태평양 한복판에 나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초점이 어긋났습니다.
그때까지는 거함거포주의였는데, 이제는 초점이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무슨 시대입니까? 항공모함시대입니다. 일본이 5년동안 시간을 투자하고, 물자를 투자하고, 기술을 투자하고, 정성을 투자하고, 노력을 투자해서 거함을 만드는 동안에 미국은 항공모함을 만들었습니다. 대포알이 아무리 멀리 가도 비행기만큼 멀리 갈 수 있습니까? 일본은 태평양 한 가운데서 ‘아차!’ 했겠지요.
야마토에게 이유 없는 작전 명령이 자꾸 떨어집니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다가 1945년 4월 7일, 오끼나와 전투때 미국의 항공모함에서 날아온 250대의 비행기가 벌때처럼 달려들어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리고, 옆에서 어뢰를 쏘고 하여 결국 야마토는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태평양 한복판에서 ‘아! 초점이 어긋났구나, 아! 항공모함을 만들걸’ 이라고 해 봤자 항공모함이 5분 안에 됩니까? 닷새에 됩니가? 이것이 커피 준비했다가 인삼차를 내놓는 것과 같습니까? 무엇이 문제 입니까? 초점이 어긋난 경우 새로운 초점을 위한 준비에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느냐가 이렇게 심각한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판단을 잘못해서 초점이 어긋났다 할지라도 새로운 초점을 위한 준비 시간이 얼마 안걸리면 백번 이긋나도 괜찮습니다. 10초가 되든 5분이 되든 괜찮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초점으로 시작하고자 할 때에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낭패입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실패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것은 뭘 보여 줍니까? 초점이 어긋난 경우, 그리고 그 새로운 초점을 위한 준빌르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잘하기 위한 준비의 초점인 성경 본문을 읽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까? 2년? 5년? 10년?
좋은 설교를 위한 초점
끊임없이 성경을 읽어라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날가지 개인의 신앙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목회 생활에 있어 귀한 목사님 한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만일 그 어른을 못 만났다면 오늘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그분은 최원초(崔源初) 목사님인데, 한국교회에는 별로 크게 알려진 분은 아니지먄 이 목사님을 아는 사람은 한없이 존경합니다. 제가 쓴 <나의 설교론>에서 잠시 언급을 하기는 헸습니다만, 지금 다 말씀 드리지는 못하고, 최목사님의 특색 몇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30-40년대에 시골에서 목회하면서 혼자 힘으로 헬라어를 공부해서 헬라어 성경을 보신 분입니다. 좀 짐작이 가지요? 그때 모리카와 (森川)라는 일본 사람이 쓴 헬라어 자습서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공부해 헬라어 성경을 보셨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한 6년 동안 가르쳤는데, 지독하게 공부를 시켜도 50명 한 반에서 자신있게 내놓을 사람은 댓사람 정도인데, 최 목사님은 시골에서 목회하면서 자습해서 헬라어성경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성경을 사랑합니다. 그분은 집회에 가시면 빌립보서를 강해하시는데, ‘다른 성경을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제가 강해하는 빌립보서만, 자그마치 약 3천번 읽었습니다.’ 라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47년 전에 1만번 읽었습니다. 날마다 새벽기도 마치고 나오시기 전에 요한 계시록를 GTKS번 암송하고 나옵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20분 동안에 암송하면 옆사람이 알아 들을 정도이고, 18분 동안에 암송하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빨리 나온다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 암송, 그것이 간단하니까? 하여간 대단한 분입니다. 근분이 제 본교회 목사님이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본 교회 목사님은 아니고 같은 시찰안에 계시던 목사님입니다. 최목사님께서 훌륭하시다는 말씀을 듣고 제가 자주 찾아가 그 어른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1947년 5월 어느날입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장차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최 목산;a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21살이었는데, 목사님은 제게 ‘박선생’ 앞으로 목회할 생각이 있으면 우선 성경부터 많이 읽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무선 뜻인지 저는 잘 몰랐습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성경만ㅁ dfr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사로서 누구에게나 다 성경 많이 읽으라고 하지만, 최원초 목사님께서 저에게 성경 많이 읽으라고 하신 말씀은, 대한민국의 어느 목사님도 줄 수 없는 강한 도전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 어른은 6.25 사변 때에 순교당했습니다. 제가 앞으로 강해서를 쓴다면 첫권의 머리말에 이분께 바친다는 서문을 쓰려고 합니다.
그때 최목사님을 통하여 강한 도전을 받고, 저는 95년도까지 48년 동안 제나름대로 여기에 투자 했습니다. 신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러분들이 장차 주일날 강단에서 힘있는 설교를 하고 싶다면, 순전히 성경 본문 읽는 일에만 하루에 네 시간을 투자하십시오’제가 말하는 본문 읽는 시간이라는 것은, 주석 보고 연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성경만 읽는 시간을 말합니다. 구약을 읽는데 2시간 정도, 신약을 읽는데 2시간 정도 이렇게 4시간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은 각자가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시간위주로 하느냐, 성경 장수 위주로 하느냐는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즉, 시간 위주로 하는 분은, 2시간 동안에 구약을 5장 보건 10장 보건 장수에 관계없이 읽고, 신약도 5장이건, 10장이건 2시간 정도 읽습니다. 또 성경 장수를 위주로 보는 분은, 2시간 동안 읽을 만큼의 장수를 정해서 그 분량을 다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하면, 어떤 날에는 2시간 1분 만에 끝나는 수도 있고, 어떤날은 1시간 38분 만에 끝나는 수도 있습니다. 단지 정해놓은 성경장수를 보것에 따라 시간은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 속독이냐, 정독이냐 할 때 제가 경험한 바로는 두 가지다 좋습니다. 속독하면 속독대로의 유익이 있고 정독하면 정독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습니다. 저는 옛날에 구약과 신약을 다 정독해 오다가 75년도부터는 방법을 좀 바꾸어 신약을 속독했더니 정독할 때에는 전혀 예측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신약은 속독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구약은 지금도 정독을 합니다. 저는 구약까지 속독을 권할 마음은 없습니다. 방법은 시간 위주로 하든, 성경 장수 위주로 하든, 속독우로 하든 정독으로 하든 자유인데 그저 네시간 정도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하고 강담에서 힘있는 설교하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합니다. 떡 줄 사람은 없는데 김칫국부터 먼저 마십니까? 누가 떡을 주겠답니까? 저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우리들끼리니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님들께 드리는 말씀이기에 예기하는 것입니다.
평생 성경 읽어도 태산의 모퉁이만 긁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번 예기합니다. ‘나는 성경을 어느 정도 보는가 하니...’ 새벽기도 인도하는 방법이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차례대로 하루에 한 장씩 교인들과 성경을 교독을 하고, 약간의 조언을 하고 새벽기도를 마칩니다. 그것이 하루에 성경을 보는 전부입니다. 우리기리니까 말하지만 그것이 다랍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위안받기를 ‘한 장은 봤으니까 하나님이 과히 노하시지 않겠지’하고 자위 하신답니다.
우리끼리니까 웃고 넘어갔지만, 전 그 얘기를 들을 때 매우 심각했습니다.. ‘아이쿠! 하루에 한 장이라 ...구약과 신약이 1280여 장이라 만 3년 반이 지나야 한 번 볼까 말까인데 그러면 설교는 어디서 나오나?
그렇다면 제가 1947년부터 시작해서 95년도까지 48년 동안 하루에 네 시간씩 성경을 읽었는지 궁금하시겠죠? 그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하루 네 시간씩 성경을 본다면 어덯게 공부합니까? 또 웨스터민스트에서 어떻게 공부합니까? 그러나 고려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도 방학 동안에는 하루 4시간을 투자했고, 1968년 6월에 귀국해서 91년도 6월가지 만25년은 문자 그대로 하루 4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왜 91년도 6월 까지냐? 저는 눈이 좋지 않습니다. 68년도에 백내장 한 쪽을 수술해서 큰텍ㅌ 렌즈를 겨야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백내장이 한 눈에 오면 자동적으로 나머지 한눈도 걸립니다. 91년 8월 9월부터 나머지 한 쪽도 백내장이 걸려 글을 볼 수 없고, 과거에 수술 받은 한 눈에는 렌즈 끼고 한눈으로 보려고 하니 성경 글자도 올바로 보이지 않는 말 못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성경을 못 읽고 고통을 당하다가, 94년 6월 10일, 한 쪽을 다시 수술해서 인공 수정체를 넣고 94년도 6월부터 다시 조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루 4시간 읽는 일을 문자적으로 25년 동안, 사상적으로는 95년도까지 48년 동안 해온다고 해왔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는데, 하루 4시간 동안 문자적으로 23년간, 사상적으로 95년도까지 48년이라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날고 기는 도사가 되었겠지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의 큰 태산에 비한다면 하루 4시간씩, 문자적으로 23년, 사상적으로 95년도까지 48년을 투자했다면, 태산 전체의 5분의 4나 3분의 2 정도는 정도는 정복 했겠다 싶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부끄럽지만 성전체가 하나의 태산이라면, 오늘 제가 깨달았다는 것은 태산의 한 모퉁이를 손가락으로 끄적끄적 긁다가 만 정도로 박에는 성경을 깨달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야, 저 양반 얼굴을 보기에는 꽤 교만해 보이는데 겸손하구나. ’이것이 겸손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도 성경을 보면서 하루에 얼마나 저를 책망하는지요? 이 성경에 무식한 놈아, 너같이 성경에 무식 놈이 어디 있어? 그때마다 ‘하나님, 제가 언제 성경을 안다고 했습니까? 저 성경 안다는 말 한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성경을 깨달으려고 읽는 것 아닙니까? 이것만이 지금 제 생활입니다.
부끄러운(?) 연륜의 고백
저는 성경을 번역까지 했습니다. 표준성서라는 번역이었는데, 이는 지금 성서공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생명의말씀사 주관으로 1974-1977년까지 4년동안 9시에 정상으로 출근해 5시에 퇴근하면서 네 사람이 신약을 번역 했습니다. 우리 합동교단에서 세사람(이순한, 최낙재, 박희천) 침례교단에서 한 사람(조효훈), 넷이 하루 종일 4년 동안 신약을 번역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신약을 번역 할 때, 네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성경을 아는 것 같았는데, 막상 성경을 번역하고자 하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번역하는 우리가 무슨 뜻인지 알고 번역해야 독자가 알지, 번역하는 우리도 모르고 적당히 어물어물 해놓으면 독자가 어떻게 압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네 명이 ‘아, 바울이 여태까지 좀 옆에 살아있으면 좋겠다’ 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말입니다. ‘베드로서가 왜 그렇게 어려워? 베드로는 무식해서 그래, 공하면 얼마나 했겠어, 물고기나 잡았지, 그래서 어려운 거야’ 하고 우리끼리 우스겟소리를 하면서 말입니다. 내 명이 공통적으로 ‘이 세상에 성경 안다는 사람이 누군고? 선 좀 보고 싶다. 어떻게 생겼는가’ 그 말까지 했습니다. 경상도 말로 ‘누고? 성경 안다는 사람이 누고? 라고도 했습니다.
제가 쓴 시편 제1편 강해서 서문에 그런 말이 나왔지요? 전 원래 머리가 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옛날에 시편, 잠언을 볼 때에 구약의 다른 책에 비하여 진리의 농도가 상당히 깊다고 느꼈습니다. 구약을 읽는 순서대로 시편, 잠언을 읽다가는 평생에 몇 번 못 읽겠더라구요, 그래서 1950년 1월 1일부터 하나님께서 저같이 못난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주셨는지, 시편, 잠언의 지점을 하나 차렸습니다.
구약의 다른 책들을 순서대로 읽는 외에, 시편, 잠언은 따로 빼서 읽었습니다. 시편은 하루에 다섯편씩 읽으면 한 달에 한번을 읽고, 잠언도 하루에 항장씩 읽었습니다. 그러면 잠언도 한 달에 한 번씩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고려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시편 다섯편, 잠언 한 장 가지고도 한 2시간 정독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여덟시까지 약 2시간을 얼마나 열성을 가지고 정독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아담의 자손인지라 부끄러운 6년이 있었습니다. 1957, 1962년, 이렇게 6년은 제가 그것을 못했습니다. 그것 빼놓고도 95년도 연말이 되면 만 40년이 됩니다. 금년말이 되면 시편과 잠언을 480번 보게 됩니다. 서문에는 470번 되어있지요?
그래서 시편은 환합니다. 어디에 무슨 말이 있는지 환한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제고백입니다. 그나마 시편은 문맥이 있지요. 잠언은 문맥이 있습니까? 9장까지 문맥이 있다가 10장부터 문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몇편에 무슨말이 있는지 환합니다. 그런데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스스로 위로 받기를, 내 머리가 둔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신약 본문 비평에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라는 두 사람이 나오지요? 이 두 학자는 신약사본 비판에 대해 30년간 연구해서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오늘날까지 신약사본의 학설에 누구, 누구 하지만 웨스트코트와 올트가 세운 그 학설을 기둥으로 가지고 공부합니다. 30년 연구에 그런 업적을 이뤘습니다.
‘야, 나는 95년도까지 48년 해도 금자탑은 커녕 은자탑도 안 나오는구나.’ 한 고향 후배가 의사인데,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김윤범(金允範) 박사라고, 지금 미국에서 면역학을 30년간 연구해서 세계적이 학자가 되었습니다. 한 30년 정도 쌓아올리면 신약사본학에서 금자탑을 세우고, 면역학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는데, 난 이게 뭔가? 95년까지 48년을 하고도 이 모양이니 도대체 이 책이 어떻게 된 책인가? 이것이 제 경험입니다.
여러분, 야마토와 무사시는 5년에 끝났지요? 설교를 잘 하기위한 준비의 초점인 본문 읽는 시간이 5년에 끝날 정도라면 저는 이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점을 잘못 알았다가도 5년 안에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은 5년이 아니거든요. 이제까지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점을 여기에 안 잡고 엉뚱한 데 잡았다가 나중에 와서 초점이 잘못된 줄을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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