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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전쟁 종장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 제1번대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과 동래부성을 잇달아 함락시킨 후 포로로 잡힌 울산군수 이언성으로 하여금 조선조정에 그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서신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측은 이 서신에서 그들이 4월 25일까지 상주에 도착할 것이며 그곳에서 이덕형과 강화를 논의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언성은 일본군에 항복한 자신의 죄상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본군측에서 조선 조정에 보내는 서신을 파기하고 잠적해 버렸다. 따라서 일본군측이 제기한 최초의 화의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일본군은 예정대로 4월 25일 상주에 진출하였고 이곳에서 왜학통사(통역관) 경응순을 통해 두 번째로 화의 교섭을 위한 접촉을 시도하였다.
4월 27일 한성에 도착한 경응순이 조정에 일본군측의 요구 서신을 전달하자 조정에서는 일단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북상을 지연시켜 가면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측에서는 대사헌 이덕형과 경응순을 화의 교섭 사절로 임명하여 충주의 일본군 제1번대 진영으로 급파하였다.
이덕형 일행은 이튿날인 4월 28일에 한성을 떠나 충주로 향하던 중 죽산에서 가토군에 의하여 진로를 차단당하게 되어 고니시와의 충주회담을 포기하고 한성으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측에서 제의한 두 번째의 화의 교섭도 성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 일 양군이 임진강을 사이로 하여 대치하고 있던 1592년 5월 15일 일본군 제1번대의 고니시는 임진강 북안의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 군 진영에 야나가와와 덴케이를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조선군 진영에서는 일본군의 화친 제의를 거부하였다. 야나가와와 덴케이는 이튿날인 5월 16일에도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본군측의 입장을 조선측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수락을 촉구하였다. 이에 조선군측의 도원수 김명원 진영에서는 5월 19일까지 교섭 수락 여부를 회답해 주겠다는 완화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튿날인 5월 17일 평양에서 파견된 제도순찰사 한응인이 임진강 조선군 진영에 도착하면서부터 일본군측의 제의를 거부하고 5월 17일 임진강을 도하 하여 일본군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반격을 가하여 조선군의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5월 27일에 개성에 입성한 후에 그 여세를 몰아 6월 8일에는 대동강 남안으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은 대동강 남안에 진출하였을 무렵부터 군량과 전쟁물자의 부족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전선이 점차 광범화되고 보급로가 연장됨에 따라 이러한 곤란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일본군의 해상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졌으며 조선 의병들의 유격활동에 의하여 병력의 분산을 강요당함으로써 전황은 점차 불투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군측에서는 6월 8일에 또다시 조선군측에 강화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어 ‘양국 대표가 대동강상에서 강화를 논의할 것’을 제의하였고 조선 조정은 일본군측 제의에 대한 수락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측에서 교섭 상대로 지목한 대사헌 이항복이 회담장에 나갈 것을 지원하고 나섬에 따라 일단 화의 교섭에 응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개월여 만인 6월 9일 대동강상에서 조선측 대표 이덕형과 일본군측 대표 야나가와 및 겐소왕의 강화회담이 이루어졌다.
이덕형은 ‘화의를 원한다면 먼저 철군을 한 연후에 화의를 논의할 것’ 을 주장하는 반면, 일본군측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바라도록 길을 열어 달라’ 는 요구를 고집하였다. 결국 양측의 주장이 서로 상충되어 이 대동강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로 결렬되었다.
일본군은 6월 9일 대동강회담이 결렬되자 6월 15일 도원수 김명원군을 격파하고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요동부총병 조승훈군을 격파하여 이를 요동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명군의 본격적인 개입을 우려하는 위기의식이 고조된 결과, 대명 화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편, 명은 임진전쟁 발발 초기에 조승훈군을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그들이 평양에서 패전하자 유격장군 심유경으로 하여금 일본군과의 화의 교섭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일본군의 북진을 지연시키기 위한 명의 책략이기도 하였다.
1592년 8월 17일 명의 유격장군 심유경은 의주에 동당하여 조선 국왕 및 대신들과 회담을 가진 뒤 21일에 평양으로 출발하여 순안에 도착하자 평양의 일본군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강화 교섭을 제의하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러자 일본군 진영에서도 답서를 보내어 명나라측의 제의를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명의 심유경 일행과 일본군측의 고니시, 소오, 야나가와, 겐소 등이 평양 서북쪽 10리의 강복원에서 강화회담을 실행하였다. 이 명·일 간의 강화회담 석상에서 심유경이 ‘일본군이 대동강 이남으로 철수하면, 도요토미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받아들이도록 하겠다’고 제안하였고 일본군측에서는 이를 수락하였다. 이로써 명일 양군 사이에 10월 20일까지 50일간의 잠장적 휴전이 성립되고 일본군의 대륙진출을 지연시키려던 명의 의도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평양회담이 끝난 이튿날이 9월 2일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것은 조선이 조공로를 차단했기 때문이었으며 명이 약속된 기한인 50일 안에 화의조건을 매듭짓지 않을 경우에는 대륙으로 진군하겠다’ 는 위협적인 서신을 보내어 화의조건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였다. 이에 심유경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려 하는 일본의 충정과 조선이 이를 방해한 경위 등을 황제께 보고하여 귀국의 소원이 성사되도록 하겠다’는 답서를 보내어 합의된 약속의 이행을 다짐하였다.
그 후 심유경은 9월 10일 북경으로 귀환하여 황제에게 ‘일본은 다만 봉공을 바랄 뿐이지, 그밖에 다른 뜻은 없는 것 같다’ 는 요지의 보고를 하였다.
심유경의 이와 같은 보고를 접한 명의 조정에서는 설번을 조선에 파견하여 심유경의 복명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10월 16일 설번은 북경에 귀환하여 황제에게 ‘일본이 우호를 내세우는 것은 명군의 출동을 지연시키려는 간계이므로 조속히 정병을 파견하여 이를 소탕해야 한다’ 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에 명은 마침내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조선에 대군을 출병시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명은 조선에 파병할 군을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일본군과의 휴전기간 연장 교섭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명은 심유경, 심가왕, 누국안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군측과의 교섭을 진행토록 하였다.
11월 17일 의주에 도착한 심유경 일행은 조선 국왕에게 명군이 출병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일본과 강화회담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는 명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조선측에서는 조선을 배제한 화의 교섭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이러한 교섭이 강행될 경우에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결의를 천명하였다.
심유경은 조선측의 이와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1월 26일에 평양의 일본군 진영에서 강화회담을 재개하였다. 심유경은 이 회담 석상에서 일본군측에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할 것’ 과 ‘일본군의 즉각적인 철수’ 를 요구하면서 만일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명군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일본군측에서는 명국의 ‘봉공의 허락’과 ‘책봉사의 파견’ 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기 때문에 명·일간의 제2차 화의교섭은 완전한 타결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양측은 ‘봉공의 허락’ 을 조건으로 ‘일본군의 한강 이남으로의 철수’라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이듬해인 1593년 1월 15일까지 휴전기간을 50일간 연장함으로써 일단 전쟁 확대를 막을 수 있었다.
조선측의 주장을 묵살한 채로 제2차 평양회담을 성립시킨 심유경은 교섭의 내용을 은폐한 채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로써 조명 관계가 소원해지고 조선측에서는 조정을 전라도로 옮겨서라도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1592년 12월 심유경은 요양에서 경략 송응창 및 제독 이여송의 조선 출병군과 합류하여 다시 조선에 입국하였다. 바로 이 무렵인 12월 13일에 명군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어서 25일에는 명군 주력부대가 조선에 진군하여 이듬해인 1593년 1월 8일에 평양성에 공세를 가하여 이를 함락시킴으로써 명,일 양측간의 교섭은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수복한 명군은 승세를 타고 일본군을 추격하였으나 1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그 기세가 꺾이었다. 그러자 명군 진영에서는 ‘일본군과의 화의를 성립시켜 전쟁을 종결짓자’ 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한편, 벽제관에서 명군을 격퇴한 일본군도 2월 12일 행주산성 전투에서 참패한 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에 일본군도 전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한성에서 철수할 명분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3일 우키다 히데이에는 서울에 집결한 17장군들과 회합을 하고 그 결과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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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울의 일본군이 아무 때든 축차적으로 철군해도 좋다는 철수허가를 승인하는 명령서를 보내왔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3월 7일에 명의 부총병 사대수는 일본군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명,일 양측간에 화의 교섭 재개의 원칙이 합의되었다. 고니시는 서울의 일본군의 부산까지의 안전 퇴군을 보장받기 위해 히데요시의 철군 명령을 숨긴 채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과 용산에서 강화회담을 벌였다.
이때, 심유경은 일본군측에 다음과 같은 3개 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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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만일 이를 승낙하지 않으면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전멸시키겠다’ 고 위협했다.
일본군측에서는 1593년 3월 7일에 명군측에서 제시한 강화조건에 대응하여 ‘일단 철군을 하여 화의를 진행한다’ 는 방침을 정하고 다음과 같은 4개 항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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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여 4월 8일 한양의 고니시와 명나라 심유경의 강화회담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명의 경략 송응창은 명나라 조정이 이러한 강화조건들을 쉽사리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사용재와 서일관을 강화사로 위장하여 심유경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도요토미의 항복문서를 받아오도록 지시하였다.
4월 17일, 위장 강화사 일행이 일본군 진영에 당도하자 일본군측에서는 이들을 정식 강화사로 오인하고 이튿날인 18일부터 일본군 53,000명과 심유경과 강화사 일행,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 일행 및 조선 백성 1,000여 명(부역자)을 데리고 서울에서 철수하여 강상도 해안지역으로 남하하였다.
19일 명의 선봉 사대수가 파주로 진주했다. 유성룡이 이여송을 만나 퇴각하는 일본군에 대한 추격전을 주장하였으나 이여송은 두 왕자의 신변 안전을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유성룡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순변사 이빈,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 이시언, 정희현 등에게 비밀리에 추격을 지시했다.
이들 중 권율의 행동이 가장 빨랐다. 권율은 20일 휘하의 전군을 동원하여 서울로 진입하여 함락 만 11개월 보름 만에 서울을 수복하는 한편 계속해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뒤따라 온 명군 유격장 척금이 이여송의 명령 없이 추격하지 말라며 가로 막았다. 지휘권이 이미 명군으로 넘어 갔기 때문에 권율은 어쩔 수 없이 추격을 단념해야 했다. 이여송 등 명군 주력도 20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21일 유성룡이 다시 이여송을 찾아가 추격전을 주장하였으나 이여송은 한강의 부교를 일본군이 불태워 배가 없다는 핑계를 대었다. 이에 유성룡은 충청과 경기 수사들을 동원하여 50여 척의 배를 마련했으나 이여송은 다시 경략 송응창의 추격 금지령을 핑계로 추격전에 나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격을 하려고 하는 조선 순변사 이빈군과 방어사 고언백 군사의 도강 역시 사대수의 명군으로 하여금 막게 하였다. 조선군과 명군이 이러고 있을 동안 일본군은 북 치고, 춤추며 유유자적하며 철수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선두는 5월 10일에 경상도 상주, 12일 선산과 인동, 15일 대구와 청도를 통과하여 밀양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철수하면서도 끝내 두 왕자를 송환하지 않자 5월 2일에 경략 송응창은 이여송에게 추격을 명령했고 조·명 연합군 선봉이 6일에야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때는 이미 일본군 선두가 조령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여송도 주력을 이끌고 뒤따라 조령을 넘고 문경에 이르러 영남과 호남의 전략 요충에 명군을 배치하였다.
1593년 5월 중순 명의 위장 강화사인 사용재와 서일관 일행은 나고야에 도착하여 도요토미와 회견하였다. 이 회견 석상에서 도요토미는 ‘일본의 침공 목적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일본에 항복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조선을 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사용재와 서일관은 ‘그 동안의 사정을 명의 조정에 상세히 전달하여 사태가 원만히 수습되도록 주선하겠다’ 고 약속하였다.
한편, 도요토미는 이들에게 속아넘어간 나머지 ‘강화사 파견’ 그 자체만으로 명나라가 그들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해 준 것으로 여기고 이들 위장 강화사 일행에게 호의적인 자세를 보였다. 일본측은 이 나고야 회담을 통하여 명군 측에 다음과 같은 7개 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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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측의 위장강화사 사용재, 서일관 일행은 7월 15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심유경과 함께 8월 6일에 한성으로 귀환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측에서 제시한 조건을 검토한 결과 그 대부분이 명과 조선측에서 수락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들이었으므로 도저히 그 내용을 조선측에 밝힐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유경은 당초에 도요토미가 나고야 회담에서 제시한 강화조건의 내용을 비밀로 한 다음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책봉과 조공의 허락을 희망한다’는 뜻으로 문서 내용을 변조하여 본국 조정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 후, 심유경은 일본군측에 ‘도요토미의 항복 문서가 없으면 봉공을 허락받을 수 없다’ 는 뜻을 전달하고 도요토미의 항복 문서를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군측에서도 ‘명나라가 책봉을 해 준다면 일본은 명의 신하로서 영원히 공물을 바치겠다’ 는 항복문서를 위조하여 명군 측에 전달한다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축의 기만 술책은 당초부터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던 일본군 장수들의 입장을 대변한 고니시가 조기에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서 안출해 낸 임시방편적인 조치였다. 그리하여 1592년 2월에 심유경의 요구에 따라 고니시가 위조한 항복문서가 명군 측에 전달되었다.
그러자 조선측은 심유경에게 이 강화 교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명군 측에서는 군량 조달 문제로 말미암아 조선에 장기 주둔할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그들의 조공을 허락해 주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 지을 수밖에 없다는 자국의 처지를 내세워 조선 조정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명군측에서 조선을 배제하고 일본과 강화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측은 시종 강화 교섭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여 왔다. 그러나 명, 일 강화 교섭이 구체화되어 감에 따라 조선 조정 내부에서도 독자적인 대일 강화 교섭을 통하여 조선의 입장을 확고히 천명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주체적 입장에서 강화 교섭이 추진된 결과 서생포 회담과 함안 회담 등 일련의 대일 강화회담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1594년 4월 초 조선의 도원수 권율은 조선 승병의 총수인 도총섭 유정을 서생포의 가포군 진영에 보내어 강화 교섭의 추진과 아울러 일본군 진영의 동태를 탐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유정은 서생포에서 일본군 제2번대의 대장인 가토와 대좌하였다. 이 회담을 통하여 가토는 도요토미가 지령한 ① 명 · 일 황실의 혼인 ② 조선 4도의 할양 ③ 조 · 일 양국의 교린외교 관계 부활 ④ 조선 왕자 및 대신의 인질 등 강화 조건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정은 가토가 제시한 요구 조건의 부당성을 통렬히 반박하고 절대로 수락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결국 이 회담은 타결점을 찾지 못한 채로 종결되었다.
그 후 7월 12일 유정과 가토는 또다시 서생포에서 회담을 하였다. 이 회담에서 가토는 전번에 제시한 강화조건이 수락되지 않으면 강화가 성립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유정은 이에 대하여 일본 측이 제시한 조건 가운데 ‘조 · 일 양국의 교린 외교 부활’ 이라는 조항은 수락할 수 있으나 기타의 사항들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제2차 회담 서생포 회담도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12월 하순, 유정은 또다시 가토의 일본군 진영에 강화 회담을 재개할 것을 제의하여 12월 21일부터 22일부터 이틀 동안 제 3차 회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 일본군측의 ‘조선이 왕자와 사신을 일본에 보내야 화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는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함으로써 회담이 또다시 결렬되었다.
서생포에서 유정과 가토가 회담을 진행하고 있던 1594년 11월 하순, 함안에서는 진주의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일본군 제1번대 대장 고니시 사이에 또 하나의 강화회담이 추진되고 있었다.
11월 22일 함안의 지곡현에서 김응서와 회동한 고니시는 ‘일본이 명에 대한 봉공을 허락받는데 조선이 협조해 줄 것’ 을 요구하였다. 이에 김응서는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 를 문제 해결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따라서 이 함안회담도 쌍방간의 강경한 주장이 오고 가는 가운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명군측에서는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조기에 강화를 성립시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하여 ‘조선이 이와 같이 강경한 자세를 고수한다면 명군은 모두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할 것’ 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조선측은 대일본 강경자세의 완화를 촉구하는 명군측의 끈질긴 설득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명에 대한 일본의 봉공을 전제조건으로 명·일 간의 강화방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과의 독자적 강화교섭을 추진하지 못하고 대일 강화 교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1953년 5월의 나고야 회담 이후 고니시가 위조해서 명군측에 보낸 항복문서가 명나라 조정에 도달하자 군신들 사이에서는 ‘명나라가 책봉을 해 준다면 일본은 명의 신하로서 영원히 공물을 바치겠다’ 는 내용을 놓고 일본과의 협상 그 자체에 대한 가부를 놓고 찬반 논쟁이 거듭되었다.
바로 이 무렵인 1594년 11월 초 일본의 납관사인 고니시 죠안 일행이 북경에 들어와 12월 13일에 정식으로 항복문서를 접수하였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일본군의 철수를 전제조건으로 책봉사를 파견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1592년 1월 30일에 정사 이종성과 부사 양방형이 요양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측에서는 명의 책봉사가 파견되었다는 확증이 있기 전에는 철군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명군측의 ‘선 철수 후 강화’ 주장과 맞물려 양측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에, 명군측에서 ‘일본군이 철군 준비를 완료하면 책봉사절이 요양에서 한양으로 출발하고 책봉사가 한성에 도착하면 일본군은 즉시 철수한다’ 는 절충안을 내놓자, 일본군측에서 비로써 이 안에 동의하였다.
1595년 3월 하순, 명의 책봉사 일행이 요양을 출발하여 4월 28일에 한성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이로부터 2개월 동안 한성에 머무르면서 일본군의 철수를 촉구하였으나 일본군은 철군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시일을 지연시켰다. 이에, 책봉정사 이종성은 부사 양방형을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보내어 철수를 촉구하도록 하고 자신은 9월 4일에 한양을 출발하여 10월 24일 밀양에 도착하였다.
이종성은 1개월 동안 이곳에 머무르다가 11월 22일에 부산으로 가서 일본군에게 철수를 독촉하였으나 일본군은 끝내 철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도리어 일본군측에서는 책봉사를 연금상태에 둔 뒤에 조속히 일본으로 건너 갈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측과 명군측의 책봉사 사이에는 ‘철군’ 과 ‘도일(渡日)’ 두 가지 안건을 사이에 두고 의견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연금상태에 있던 정사 이종성은 ‘도요토미가 책봉사를 인질로 삼아 조선에 재침할 것’ 이라는 소문을 듣고 4월 3일 야음을 타고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25일 북경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명나라 조정에서는 5월 초에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로 임명하여 강화 교섭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1595년 6월 15일 명의 책봉사 일행이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출발하자 일본군도 그 뒤를 이어 소수 병력만을 남해안 거점에 잔류시키고 대부분의 주력부대들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 책봉사 일행은 ‘조선의 통신사를 대동하고 도일하여 강화교섭을 하라’ 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동행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철수하자 조선 조정에서도 명의 입장과 양국 관계를 고려하여 황신과 박홍장을 정,부사로 하는 3백여 명의 통신사를 8월 8일에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자 도요토미는 ‘일본이 조선의 두 왕자를 보내주었는데도 조선이 그에 따라는 적절한 사례를 하지 않았음’ 과 ‘일본에 세공 및 조빙(朝聘)을 하지 않았음’ 을 트집으로 잡아 접견을 거부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조선의 통신사 일행에게 모욕을 주었다.
1595년 9월 2일, 일본의 오사카성에 당도한 명의 책봉사 일행은 도요토미와 회견하고 명나라 황제의 고명과 유서를 전달하였고 도요토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7명의 원로 장령들과 글을 아는 중(僧) 승태, 영삼, 영철 등 3인을 불러 명나라의 고칙을 들었다.
고니시는 사전에 승태에게 히데요시의 뜻과 어긋나는 부분은 적당히 비껴서 읽으라고 비밀리에 손을 써 두었으나 승태는 곧이곧대로 다 읽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의 유서 가운데에 ‘그대를 봉하여 일본국왕으로 삼는다’ 는 실속 없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나고야 회담에서 내걸었던 요구조건들이 전혀 수용되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이에 도요토미는 즉각 책봉을 거부하고 명의 책봉사와 조선의 통신사 일행에게 퇴거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사태가 악화되자 일본군 내부에서 가토를 비롯한 강경론자들이 조선에 재출병을 주장하고 나섰다.
도요토미가 명의 책봉을 거부하고 강경론자들이 조선에 대한 재출병을 거론하는 가운데 명의 책봉사와 조선의 통신사 일행은 9월 9일에 귀국길에 올랐다. 조선의 통신사 황신은 수행 군관을 우선 귀국시켜 일본군의 재침이 확실하다는 것을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한강 이남지역의 주민과 물자를 각지의 주요 산성으로 옮겨 청야작전(무기나 물자를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전술)을 통한 장기적인 항전을 게속할 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명나라에 급사를 파견하여 화의가 결렬된 사실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명의 책봉사 일행은 10월 25일 쓰시마에서 ‘책봉에 사은한다’ 는 도요토미의 위조표문을 작성하여 조정에 허위 보고를 함으로써 강화 교섭에 실패한 사실 자체를 은폐하려 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국가의 위신을 손상시킨 책봉사 일행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조선의 통보에 의하여 화의가 결렬된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강화 교섭 실무자였던 심유경의 기만적 술책이 폭로되었다. 이에 명은 대일 강화 교섭에 관여되었던 인물들을 엄중 처단하고 전쟁에 적극 개입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1597년 7월에 14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침입을 재개함으로써 1592년 4월부터 4년여 동안 추진되어 오던 강화 교섭이 수포로 돌아가고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 조선군의 붕괴
명 · 일 양국간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1597년 1월부터 조선에 재침을 감행하여 정유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편성된 일본의 조선 침공군은 육군 115,000여 명, 수군 7,200여 명 이외에 조선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명을 포함하여 14만여 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14일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제1군이 부산의 다대포에 상륙한 후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집결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와 같이 제1군과 제2군이 거점을 확보한 이후 근 반년이 지난 7월 8일에 이르러 일본군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 일대로 상륙했다.
1596년 11월 명의 책봉사와 동행했던 통신사 황신은 나고야에서 일본군이 재침을 기도하고 있다는 긴급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조선 조정은 서둘러서 대책 수립에 들어갔다. 조선 조정은 백성들의 가재도구와 곡식 일체를 거주지 인근의 산성으로 옮겨 일본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청야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전국 각도의 수령들에게 긴급명령을 하달하여 실행을 독촉하였다. 이어서 11월 12일에는 명에 사신을 보내어 일본군의 재침기도 사실을 통보하고 남병인 절강병과 수군의 파견 및 군량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비변사는 12월 초순에 일본군이 도성으로 북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좌방어사 변응성으로 하여금 좌영 속오군(3천 명)과 후영 속오군(2천 명)을 지휘하여 여주→양근→광주→한성을 연하는 남한강 일대의 도섭이 가능한 지역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군이 동해안으로부터 진입할 경우에 대비하여 강원도 순찰사로 하여금 영동지역의 평행 - 울진 지역을 연하는 선을 차단하도록 조치를 하였으며 경상도 순찰사에게도 경상좌도의 영주→영월 지역을 연하는 선을 차단하여 동해안을 통한 일본군의 진입을 막을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군의 주력이 부산에 도착할 무렵인 7월 8일 조선에는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잔류하고 있었다. 각 단위 부대별로 5백~1만 명씩 구분하여 서생포성, 부산포성, 죽도성, 안골포성, 가독도성 등 5개 지역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그들은 재침군과 합류하여 전라도 지역에 진출할 준비를 갖추었다.
1593년 8월 3일 일본군의 총대장인 고바야카와는 공격군을 좌·우 2개 군으로 편성하여 우키다와 모리(毛利秀元)에게 이를 지휘하도록 하고, 다음과 같이 전라도의 수부(首府)인 전주로의 진격을 명령하였다.
1.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고성→사천→하동→구례→남원을 연하는 경로를 거쳐 전주로 진군한다.
2. 우군은 낙동강을 건너 거창→안의→진안을 연하는 경로를 거쳐 전주로 향한다.
3. 수군은 하동에서 상륙하여 좌군과 함께 섬진강을 거쳐 구례로 진군한다.
4. 부산포성, 서생포성, 안골포성, 가덕도성, 죽도성 등에는 수성군이 잔류하여 방어를 한다.
일본군 우군의 선두부대인 가토군은 7월 25일에 서생포를 출발, 양산→밀양을 거쳐 창녕으로 진출하여 낙동강을 건너 합천으로 진출하였다. 이 때 죽도성의 나베시마 군이 김해→창원→함안→진주→삼가를 경유하여 합천에서 가토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합천에서 거창으로 진출하여 안의를 거쳐 8월 16일에는 황석산성을 점령하고, 육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들어가 전라도를 침입하였다.
명군은 1594년 9월까지 전병력을 요동지방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명은 조선조정의 출병 요구에 따라 재출병을 결정하고 1597년 3월에 병부좌시랑 형개를 경략어왜겸리양향겸병부상서(經略禦倭兼理糧餉兼兵部尙書), 산동우참정 양호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임명하여 총병력 6만 명 규모의 동정군을 편성했다.
이와 같이 정유재란에 대한 명의 개입이 결정되자 1597년 5월 8일에 부총병 양원이 기병 2천여 기를 이끌고 한성을 거쳐 남원으로 진격한 데 이어서 6월 14일에는 부총병 오유충의 남병 4천 명이 한성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5월 18일에 압록강으로 출발한 제독 마귀는 다음과 같은 4개의 선견부대를 조선에 진출시켜 지정된 지역에 주둔하면서 작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 후 7월 3일에 한성에 도착한 제독 마귀는 이곳에 본영을 설치하고 한성 이남지역의 명군을 총괄 지휘했다. 그 뒤를 이어서 9월 19일에는 명군의 최후미 부대인 부총병 이여매 군 1만 5천 명이 한성에 진입했다.
● 이순신의 투옥과 수군 전멸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전쟁사를 통틀어서 가장 참혹하고 또 어이없는 패배로 기록될 만큼 그 충격의 여파는 조선 전체를 술렁거리게 만든 해전이다. 이 한 번의 패전으로 인해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였으니 새삼 이 전투를 묘사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 수군을 이끌고 전승의 기록을 이어가면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떠오른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 공을 인정받아 전라, 경상, 충청 등의 삼도 수군을 총괄지휘하는 통제사의 직위에 올랐다. 통제사는 임진왜란 기간 중에 새로 신설된 직위로 이른바 수군의 총사령관을 의미한다.
개전이후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연패한 일본군은 서해로의 진출이 막힌 것이 전쟁의 가장 큰 패착으로 인식하였다. 해서 일본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최우선으로 이순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의 충복이던 이중간첩 요시라는 일본군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대병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올 것이니 이를 잡으라는 정보를 흘렸고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바다에서 격파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적에게서 나온 정보를 신뢰할 수 없고, 또한 일본군이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주둔해 있는 마당에 섣불리 부산으로 진격하였다가 앞뒤로 협공을 받으면 크게 위태로워진다는 이유를 들어 출진하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정설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요시라의 말대로 가등청정이 조선출병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이 조선에 전달되고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명을 내렸을 때에는 이미 가토가 조선 상륙을 마친 이후였다. 또한 이순신이 조정의 출동명령에 응하였지만 이미 가토는 상륙한 이후라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의 정확한 정황은 지금으로선 그저 모든 것이 수수께끼일 따름이다.
결국 통제사 이순신은 명을 따르지 않고 임금을 기만했다는 죄명을 받아 도성으로 압송된 후, 투옥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사건이다. 처음 육군이 연패하여 의주까지 쫓겨갔던 선조는 첫 승전보를 올려 조선 전체에 결사항전의 사기를 북돋아준 이순신에게 통제사의 직위까지 내리면서 신뢰를 보내는 듯 하였다. 하지만 민심의 향방이 그에게 쏠리자 선조는 이순신을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해서든 그를 죽일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런 정황은 당시의 실록에 기록된 선조의 언행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튼 이순신이 사라지고 나서 그 자리를 꿰차고 앉은 것은 원균이었다.
원균은 스스로 일본의 주둔지인 부산을 공격하여 단숨에 왜적을 섬멸하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고 도원수가 된 권율 역시 이순신이 싸움을 주저하여 나아가지 않는다는 탄핵을 함에 따라 이순신은 통제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결론적으로 이는 조선과 조선 수군에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정으로부터 계속되는 부산 공략에 대한 압박을 받아 출동을 결심하였다.
6월 18일경 첫 출동을 하여 19일 안골포와 가덕포에서 소규모 해전을 치르며 작전을 계속 수행하다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잠시 회항하였다. 하지만 다시 선조와 조정으로부터 출동 압력이 떨어지자 7월 5일 경 자신은 남고 일부 함선만을 출동시켰다. 이때에도 일본함선과 접전이 있었지만 일본수군이 적극적인 해전을 회피하여 소규모 전투로 끝이 났다. 이후 풍랑으로 인해 함대의 일부 전선들이 표류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5척은 두모포에 다른 7척은 서생포에 표류하였다. 이 중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 수군들은 상륙을 시도하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당하였다.
금방이라도 부산을 절단낼 것 같던 원균이 통제사가 된 이후로 이렇다할 전공은커녕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자 도원수 권율은 그래도 명색이 삼도수군의 수장인 원균에게 곤장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출전명령의 압박에다가 엉덩이 찜질까지 당한 원균은 결국 7월 14일 전함대를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조선 함대는 부산에 도착한 후 일본 함대와 해전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수군은 조선 수군의 수가 많은 것을 꺼려하여 해전을 회피하였다. 당시의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 만나면 일단 도망부터 치고 볼 정도로 조선 수군 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내노라하는 일본의 수군장수들이 모두 이순신에게 절단난 까닭이다. 하지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이 통제사 자리에서 물러나 도성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힘을 빼놓을 작전을 세웠고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며 조선 수군을 기만하는 전술로 일관한다.
연일 강행되는 항해는 조선 수군의 격군들을 급격히 지치게 만들었다. 풍랑에 이리저리 채이고 일본군의 유인술에 예민해져 긴장감이 극도로 쌓인 것이다. 더구나 판옥선의 정원은 원래 164명이었나 이 당시에는 정원에 훨씬 못 미치는 90여 명으로 줄어 있었기 때문에 체력 소모는 더욱 극심했다.
원균은 결국 함대를 수습하여 가덕도에 정박,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이때 일부 병사들이 물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올랐으나 숲속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습격으로 400여 명의 사상자만 남긴 채 다시 황급히 후퇴하여 칠천량 부근까지 이동한다.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자주 정박하던 곳으로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조선 수군의 무덤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자고로 군대라는 집단은 최고 지휘관이 바뀌면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그것이 전시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주던 지휘관이 잘못된 명으로 물러나면서 조선 수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군기는 해이해졌다.
이때 일본의 쾌속선 5, 6척이 기습해와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함대의 이동상황이 파악되자 그날 밤으로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칠천량 주변을 포위했는데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원균은 제대로 된 탐망선 한 척 띄우지 않았다고 하니 죽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적진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대책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16일 새벽 4시 경에 조선 수군의 최후가 오고야 말았다. 이미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했던 도도 다카도라와 한산도에서 역시 얻어터진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이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연패의 치욕을 애꿎은 원균에게 모조리 앙갚음 하고야 만다. 사방으로 포위된 야간 기습의 결과는 세계전쟁사를 살펴보더라도 전멸 밖에는 길이 없다.
조선 수군 함대는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탈출을 시도하여, 하나는 진해만 쪽으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거제도 해안을 타고 한산도를 향해 나아갔다. 진해만 쪽으로 향한 함대 일부는 일본 수군의 추격을 받아 모두 격침되었고, 일부는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균은 칠천량을 겨우 빠져 나와 거제도 해안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배설이 지휘하는 전선들은 견내량을 거쳐 한산도로 먼저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 배들이 훗날 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진 명량대첩의 그 유명한 12척 함대로 남아 나라를 구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한 결정적인 원인이 이순신에게 서해를 차단당하고 곡창지인 전라도를 차지하지 못해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때에 조선 함대가 모두 전멸되었다면 서해를 내준 조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12척이라도 도주에 성공한 것은 참으로 하늘의 보살핌이다.
오밤중에 정신차릴 겨를도 없이 처참하게 도륙된 원균의 함대는 고성 적원포까지 물러난 후 배를 육지에 대고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원균과 이하 대부분의 군사들은 결국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모두 전멸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지휘관, 병사 가릴 것도 없이 대부분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그로 인해 체계적인 지휘나 반격이 불가능했던 것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칠천량 해전에 참가했던 주요 지휘관들은 대부분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얼마간은 육지로 상륙하여 숨어들었다.
이렇게 칠천량 해전은 조선 수군의 존재 자체를 지울 만큼 참혹한 결과를 낳았고 사실상 이순신이 키워놓은 122척의 조선 함대는 달아난 12척을 제외하고는 거북선을 포함하여 모두 수장되었다. 이로서 조선 수군은 사실상 전멸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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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1597년) 7월 8일에 14만여 병력으로 재침을 시작한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하동 방면으로 전라도로 진입하고, 우군은 낙동강을 건너 합천, 거창을 거쳐 전주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8월 7일 일본 우군의 일대인 나베시마 휘하의 1만 2천여 병력은 의령과 삼가를 거쳐 성주 방면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이 때 상주 진관에 속한 9개 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오산성을 지키고 있던 상주 목사 정기룡에게 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정기룡은 급히 군사 3천여 명을 이끌고 고령으로 진출하여 방어진을 쳤다.
8월 15일 밤 정기룡은 척후장 이희춘과 황치원으로 하여금 병력 4백 명을 이끌고 적정을 정찰하게 하였다. 이들은 정찰 도중 일본군 수색대와 조우하였는데, 격전 끝에 백여 명을 사살하고 돌아왔다.
다음 날 새벽 정기룡은 전병력을 출동시켜 일본군 주력부대의 주둔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용담천가에 진을 치고 있어서 강물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정기룡은 일본군을 유인하기로 하고 이동현 양편에 복병을 배치한 다음 퇴각하는 것처럼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러자 일본군이 전력으로 추격해 왔다. 일본군이 이동현 밑에 다다랐을 때 정기룡 군은 일제히 반격을 가했다. 일본군이 당황하여 흩어지자 복병들이 이들을 포위했다. 정기룡 군은 포위망을 압축하며 공격을 계속했다. 달아나는 일본군은 예비대가 추격하여 사살하였다.
이리하여 포위망에 빠진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살아 달아난 일본군은 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 망국의 위기
1597년 8월 일본군 좌군(左軍)은 부산, 웅천, 안골포 등 해안기지에서 남해안을 따라 이동을 개시하여 고성→사천→하동을 거쳐 8월 7일에 구례를 점령함으로써 우군(右軍)보다 앞서 전라도에 진입하였다. 이 때 일본의 수군도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쳐 구례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이 구례를 점령하고 남원으로 북상하고 있을 때 남원성에는 명의 동정군 부총병 양원이 3천여 병력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양원은 6월 중순부터 7월 하순까지 성벽을 증축하고 총안(銃眼)과 포안(砲眼)을 증설하는 등 방어시설 보강에 주력하였다.
8월 들어 일본군 5만여 명이 남원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양원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유격장 진우충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전라병사 이복남에게도 조선군의 증원을 요청하여 이복남과 구레 현감 이원춘 등이 병력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구례에서 북상한 일본 좌군(左軍)은 다시 부대를 2대로 나뉘어 1대는 남원성 서쪽에서, 1대는 남원성 동북쪽으로 진출했다.
8월 12일에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한 일본군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남원성의 방어태세를 확인했다. 8월 13일 일본군은 성 외각을 포위하고 소수 병력으로 조총 사격을 가해 왔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진천뢰 등을 발사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양원은 성 주위에 마름쇠를 대량으로 매설하고 4대문 밖의 석교를 제거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14일부터 일본군은 공성 기구를 제작하고 참호를 메꾸는 등 본격적인 공격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총공세가 임박해짐에 따라 양원은 전주의 진우충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전우충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증원요청을 거부했다. 양원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하지 못한 채, 대규모 병력의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
16일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공격해 왔다. 남원성 동남쪽에 높은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조총 사격을 가하여 방어군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사이에 또 다른 일대는 성 밖의 해자를 메꾸고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올라 왔다. 조명 연합군이 필사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이날 밤 일본군은 명군이 지키고 있던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이어서 동문을 점령하고 북문을 수비하고 있던 조선군을 포위하였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효과적인 방어를 하였으나 성 안에 진입한 일본군에 의해 배후공격을 받게 되었고 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 이하 제장들은 최후의 순간이 되자 스스로 화약고에 불을 질려 자폭함으로써 장렬히 산화했다.
명군은 이 전투에서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모승선이 전사하였으며, 부총병 양원만이 50여 기를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하였을 뿐 3천여 명의 명군과 조선군이 이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남원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8월 19일에 전주로 진격하였다.
이 무렵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주 부윤 박경신과 명의 유격장 진우충은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로 달아나 버렸다. 따라서 일본군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우군(右軍)도 좌군이 남원성을 함락시킬 무렵에는 황석산성을 유린한 뒤에 전주로 들어와 좌군과 합류하였다. 전라도 진출에 성공한 일본군은 전주에서 다시 좌우군의 역할을 재조정하여 우군은 계속 북진하여 충청도 지방을 점령하고 좌군은 전라도 지방의 점령상태를 고착시키면서 해로를 차단하여 조선군 각 부대의 상호 연결을 봉쇄하기로 하였다.
전라도를 석권한 일본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충청도로 진입, 9월 3일에 공주를 무혈 점령한 뒤 연기-청주를 거쳐 천안으로 북상하였다. 그리고 병력의 일부는 진산→금산→옥천→회덕→문의를 거쳐 청주로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9월 중순까지 충청도의 중요한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8월 중순에 남원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자 동정군 총 지휘관 마귀는 부총병 해생과 유격장 마귀, 우백영, 참장 양등산 등으로 하여금 기병 2천 기를 이끌고 9월 5일에 한성을 출발하도록 한 다음 동시에 유격장 파새가 지휘하는 기병 2천 기를 증파하여 이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부총병 해생은 급속 행군으로 9월 7일 새벽에 직산 남쪽 1km 지점의 삼거리에 이르러 부근 야산에 진지를 편성했다.
이 무렵 일본군 우군(右軍) 선봉장인 구로다(黑田長政)군의 선발대가 본대에 앞서 천안을 통과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직산 부근에 이르러 명군을 발견하고 선제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맞서 명군도 포격으로 대항하여 양군 사이에 백병전을 벌어졌다. 구로다는 천안의 본대를 급히 출동시켜 명군에 대응하였다.
오후에는 파새의 기병 2천여 기가 도착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명군은 부대를 삼등분하여 일본군을 협공하였다. 명군 4천 기병과 일본군 5천 보병이 혼전을 벌이는 가운데 일단의 기병부대가 일본군에 증원되어 쌍방의 병력이 증원되어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조총 사격과 함께 장검을 휘두르며 명군 진영으로 돌진하였으며, 명군은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여 좌충우돌하면서 일본군을 사살했다. 6차례의 대접전 끝에 명군의 기병이 일본군이 보병을 격퇴시켰다.
직산 전투의 성패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 편으로 명군이나 일본군 모두 확실하게 승리했다고 말하기 힘든 면이 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 전투 이후 경기도 진입을 포기하고 추풍령과 조령을 거쳐 경상도로 남하하거나 금강을 거쳐 전라도로 남하 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행위로 인해 직산 전투의 승리를 명군이 했다고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정유재란 개시 이전 일본군의 전략은 임진전쟁 때와 달리 조선 전국을 점령하기 보다는 남부 일대만을 전략적 목표안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 주력 부대의 남하가 확인되자 기존 전략대로 남해안 일대를 장기적으로 점령하기 위해 후퇴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 13척의 판옥선, 나라를 구하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조정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쟁이 터진 이후로 조선 수군만큼 가장 확실한 전공을 세운 군대는 없었다. 나섰다 하면 승전보를 울리던 조선 수군이 한 번의 싸움으로 모두 도륙이 났으니 애초에 전란을 극복할 계책이라고는 1할로 가지고 있지 않았던 조정이 암흑으로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조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신들에게 “그대들은 어찌 말이 없는가? 이대로 있으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난단 말인가” 하며 호통을 쳤지만 조정의 그 많은 관리들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나서 전황은 조선쪽에 너무도 불리하게 돌아갔다. 임진난 때에는 각지에서 의병과 승병이 봉기하여 그나마 왜적에게 타격을 주어 진격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정유재란이 발발한 이후로는 아무도 나서 나라를 구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는 백성들 사이에서 용력이 있다고 몸을 일으키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선조가 땅에 떨어진 권위와 권좌에 대한 불안감으로 공을 세운 여러 의병장들에게 역모를 씌워 죽였으며 통제사 이순신 마저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죄목을 붙여 잡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인해 수군이 괴멸되어 전라도가 쑥밭이 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길잡이를 한 것이 조선의 백성들이었다는 이야기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여론이 선조를 비롯한 벼슬아치들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도망다니기 바빴던 간신들이 나라를 구한 공신들을 되려 탄압하는 상황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정신나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정은 그제서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허둥거렸으나 전란중에도 당파싸움만을 일삼던 그들에게 왜적을 물리칠 계책 따위는 없었다.
결국 무능한 조정이 방책이라고 내놓은 것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7월 22일 다시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지를 내린 선조는 “지난날 과인의 묘책이 어질지 못하여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날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은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기 바란다” 고 이순신에게 매달렸다. 임금을 기만했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죽이려던 선조는 결국 스스로의 정당하지 못한 처사를 인정한 꼴이었다.
7년 동안 전쟁을 지휘하면서 얻은 병과 투옥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극도로 몸이 망가진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함도 없고, 병사도 없는 수군 최고사령관이 된 것이다. 당시 교지를 받은 이순신을 따라나선 군관과 장졸이 모두 십수 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쇠약해져 몸을 추스릴 여유도 없던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서 9척의 함선과 120여 명의 수군을 수습하고 진도 동북쪽 벽파진에서 3척을 더 수습하여 모두 12척의 함선을 재정비했다. 다 쓰러져가는 전력을 주워담아 그럭저럭 한 번의 해전을 치를 준비를 하던 이순신은 추석날 저녁 조정으로부터 수군을 폐지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명을 받았다. 칠천량 참패의 충격이 그만큼 큰 탓이다. 이때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도가’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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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시작된 이후로 도움을 주기는커녕 힘들여 모은 기력을 쏙쏙 빼먹기만 했던 조정은 전열을 정비하던 이순신의 기운을 이런식으로 빼놓았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군폐지론을 잠재우는 희대의 명장계를 올리게 된다.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로 싸운다면 능히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하는 것은 적이 오히려 바라는 바로서, 적은 서해를 돌아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인즉,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의 숫자는 적으나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므로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1000여 척이 넘는 일본의 대함대가 서해를 노리고 있는 마당에 고작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싸움에 나서겠다는 이순신의 이런 대담무쌍한 발언은 사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군이 바다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하면 자기 고을 지키기에도 버거운 육군이 왜적을 맞아 싸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싸움이란 동수가 되어도 그 승패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적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전력으로 맞서겠다고 나선 이순신은 결과적으로 이 최악의 상황에서 압도적 열세를 극복하고 아군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일방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도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군신으로 이순신이 추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훗날 조선 후기의 성군으로 대접받는 정조도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조선이 명운을 이어온 것은 온전히 이순신의 공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과 병장기를 모아 세력을 모으는데 전력을 다했다. 적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을 다니며 병사를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줍고 다녔다. 일본군은 임진년 1차 전쟁과 마찬가지로 수륙 병진 전략을 채택하였는데,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량 해협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견내량이 뚫린 상황이었기에 이순신은 도도(藤堂高虎), 가토(加藤嘉明), 와키자카(脇板安治) 등이 지휘하는 일본수군의 산발적인 공격을 받으면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아니, 호응하여 맞서 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군은 함선 330여 척을 거느리고 9월 7일에 해남반도의 어란포에 정박했다. 이들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명량수로를 통과하여 서해안으로 진출, 북상하는 육군을 호응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실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았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가 형성되는 사나운 바다였다. 지금도 웬만한 배가 아니면 이 급류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것이 힘들다 하니 인력으로 가동되는 당시의 전함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울돌목에서 형성되는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로 인해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친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바로 이곳 울돌목에 조선의 운명을 걸었다. 그는 좁은 울돌목을 틀어막고 일본의 대군을 상대할 작전을 세웠다. 이순신이 얼마나 치밀하고 무서운 전략가인지는 이 명량싸움의 절묘한 용병술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그는 적을 울돌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5km 떨어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15일간이나 적과 술래잡기를 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이순신의 12척의 함대가 회령포를 떠난 것은 8월 20일이다. 24일 어란포로 옮겨 4일간 정박하였다. 28일에는 적의 척후선으로 보이는 전함 8척이 공격해 왔다가 이순신이 선두에서 반격하자 도주하였으나 이순신은 애써 나아가 쫓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서쪽으로 점점 이동했다.
9월 2일 칠천량 해전 후로 전쟁 공포증에 시달리던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영하였다.
9월 7일 어란포에 배치되어 있던 척후선으로부터 적함 55척이 집결 중에 있으며 그중 13척이 출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날 오후 13척의 일본전함이 습격해 왔으나 조선 수군의 반격을 받고 도주하였다.
이순신은 벽파진 근해를 유령처럼 떠돌면서 적의 주력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의 패잔선 13척이 명량해협의 울돌목을 방어할 목적임을 알게 되었고 울돌목의 거친 급류를 이용하여 단숨에 조선수군을 밀어부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때에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복귀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수군이 단 13척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어란진에 집결한 적함 300여 척이 16일에 해협으로 진입할 것으로 확신한 조선수군은 14일 밤, 해남 우수영 앞바다로 이동했다. 결전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는 마당에 이순신에게 주어진 것은 판옥선 13척과 협선 32척이었다.
전투를 하루 앞둔 15일 전날 밤, 이순신은 휘하의 모든 장졸들을 모아놓고 결사항전의 뜻을 세웠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를 위한 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울 것인가.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예로부터 병법에 이르기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 하였으며, 한 사람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의 적도 두렵게 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싸움에 앞서 비장한 결의를 밝힌 이순신은 16일 아침 적함 300여 척이 접근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연락이 받고는 13척의 전선을 울돌목으로 이동시켜 일자진을 세웠다. 13척만으로 수백척의 적을 막겠다는 그의 각오가 실천에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12시쯤 일본군 전함 300여 척이 해협에 나타났다. 2백여 척은 입구에 대기하고 전투선 130여 척이 해협 안으로 돌진해 왔다. 이순신은 대장선을 독려하여 선두로 나아가, 일본 수군과 단독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나머지 배들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해 뒤로 물러났다. 이순신의 기함만이 홀로 적함대에 둘러싸여 사생결단으로 싸우고 있던 참이었다.
명량해협을 둘러싼 이 대결에서는 피난을 가던 수많은 백성들이 산어귀로 모여들어 조선수군을 응원했고, 이순신의 대장선이 외롭게 분전하다 적에게 둘러싸이자 통곡이 터졌다. 또한 여인들이 모여 강강술래를 하며 이순신의 조선함대를 응원했다.
일본 수군은 당장이라도 조선 수군을 요절낼 것처럼 덤벼들었으나 이순신 기함의 맹렬한 저항을 받고 주춤거렸다. 어떤 사료에 따르면 이 명량싸움에서 이순신이 수중에 철쇄를 장치하여 일본 전함을 걸리게 했다는 설도 있다.
몇시간 동안 홀로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의 대장선은 뒤로 한참이나 물러나 있는 조선 수군에게 싸움을 독려했고 통제사의 초요기(싸움을 독려하는 명령기)를 본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가 뒤늦게 적진으로 돌격했다. 또한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1km나 물러나 있던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다른 전함들도 그제서야 모두 달려와 공격에 가담했다.
또다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조선의 운명을 건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일본 수군은 선봉에 선 전함들이 하나 둘 깨어지면서 서서히 위축되었다. 그 사이 오후 1시가 넘으면서 조류가 남해안의 일본군 쪽으로 흐리기 시작했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해진 일본 수군은 좁은 해협을 일렬로 가로막고 번갈아 포격을 가하는 조선 수군에게 여지없이 박살났다. 이때에 일본의 돌격장 임무를 맡았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전사했는데 그는 사천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하고 죽은 미치유키의 동생으로 그 역시 이 명량싸움에서 이순신에게 패하여 목이 잘렸다. 결국 두 형제가 모두 이순신에게 참패하여 목없는 귀신이 된 것이다.
선봉을 맡은 적장의 머리까지 대장선에 내걸리게 되자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로 치솟았고 반대로 일본 수군은 겁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여 그 공포심에 젖어있던 일본군은 단 13척으로 자신들의 대함대를 막아서는 이순신의 가공할 전투력에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만 것이다.
급격한 조류의 변화와 조선 전함들의 맹렬한 화포공격을 견디지 못한 일본 수군은 앞을 다투어 퇴각을 시작했지만 급류에 말려 자기들끼리 부딪치면서 서로 깨어졌다. 일본군은 선봉에 섰던 31척의 전함이 수장되었고, 반파되어 전함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배가 100여 척에 이르렀다. 일본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격침된 전함의 사망자만 최소 3,500명으로 추산되며, 그외 달아나다가 부숴진 배의 사망자만 해도 최소 1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이순신의 기함에 탔던 수군 사상자가 전사 2명, 부상 3명으로 총 5명이다.
세계해전사에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을 대결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의 명량대첩은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의 최고 백미로 기록될 만큼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승전보를 울린 명승부로 기억된다. 결국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격파하고 서해진출을 노린 일본군은 이순신으로 인해 또 다시 대륙정벌의 야욕이 꺾이게 되었다. 칠천량 해전이 조선을 공황상태에 빠뜨렸다면 이 명량대첩은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싸움의 참패 소식을 전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만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 장군은 ‘싸움하던 바다에 그대로 머물고 싶었으나 외롭게 있는 것이 득이 될게 없어 당사도로 옮겼다.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명량대첩은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시킨 싸움이었다.
● 철수를 준비하는 일본
진주성과 남원성을 공파함으로써 전라도를 장악하고 충청도로 북상하던 일본군은 직산 전투에서 기세가 꺾여 진로를 남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후퇴한 일본군 우군(右軍)은 양산, 기장, 서생포 등지에서 장기 주둔 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충청도로 진격하다가 전라도로 이동한 좌군(左軍)은 은진, 여산, 금구, 정읍을 거쳐 남하를 거듭하다가, 10월에 남원으로 들어가 장기 주둔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명군이 남원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하고 명랑해전 이후 재건된 조선 수군이 전라도 남해안 지역을 장악함에 따라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되자 조선수군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고 탈출하기 쉬운 순천과 사천, 고성, 창원, 김해 등지로 이동, 분산하여 주둔하였다. 이렇게 전라, 경상도의 해안과 도서지역으로 남하한 일본군은 1597년 10월부터 주둔지를 중심으로 성곽을 신축 혹은 보수하여 장기 주둔할 준비에 들어갔다.
초기 승승장군하던 일본군이 기세가 꺾이고 남해안을 중심으로 방어체제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반대로 조명연합군이 공세로 돌아섰다.
조명 연합군은 1597년 11월에 울산의 도산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12월 4일에 제독 마귀군의 선봉부대에 이어 8일까지 총 36,000여 명의 명군이 울산성으로 진군하였고, 조선군도 11,500여 명이 합류하였다. 전투준비를 끝마친 조명 연합군은 12월 24일 새벽 도산성을 동·서·북 삼면으로 포위한 채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 안의 일본군이 격렬히 저항을 하였고, 태화강 어구에는 일본수군 2~30여 척이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명연합군은 적극적인 공성작전을 하지 못하여 쉽사리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전투가 장기화 됨에 따라 혹한과 함께 27일부터 비까지 내려 야영 중인 조명 연합군을 괴롭게 하였다.
12월 29일 도원수 권율의 화공작전이 실패한 이후 전투는 해를 넘겨 1598년 1월 2일까지 전황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포위가 장기화 됨에 따라 성 안의 일본군은 군량과 식수 등이 바닥나 아사자가 생기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도산성을 지원하기 위해 양산, 부산, 순천 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수륙 양면으로 울산지역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명군의 경리 양호는 이러한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적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도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1월 4일부터 총 공세를 가하였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양측의 사상자만 늘어갔다. 양호는 퇴로가 차단될 우려로 인해 전군을 경주로 철수시킴으로써 도산성에 대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장기간의 포위로 아사직전까지 사태가 발생하였고, 1,20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손실을 입었다.
한편 조명연합군 역시 명군 전사자가 1,000여 명, 부상사 3,000여 명에 달했고, 조선군 역시 전사자만 300여 명, 부상자가 900여 명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도산성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으며, 지휘관들 역시 전쟁의 조속한 종결과 철군을 원하게 되었다.
조명연합군의 중로군은 사천 지역의 시마즈(島津義弘)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주에서 고령을 거쳐 9월 18일에 진주로 향했다.
이 때 일본군은 사천 신성(新城)에 본진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그 외각인 남강 남안의 망진채와 영충재, 그리고 사천 쪽의 곤양채 등에 1천여 명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사천성에는 2천여 병력을 배치하고 1만여 병력으로 사천 신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중로군의 선봉대가 9월 19일에 진주에 도착하여 남강에 배치된 일본군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퇴각하여 곤양채로 들어갔다.
20일에 명군 중로군 본대가 남강을 도하하여 망진채와 영춘재를 점령하고 사천성과 사천신성으로 육박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 받은 시마즈는 곤양채, 망진채, 영춘재의 병력을 철수시켜 사천성에 투입하였다. 동정군이 사천성과 사천 신상에 압박을 가하자 시마즈는 사천성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켜 조명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병력을 사천신성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사천성의 일본군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28일 밤에,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성 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간신히 사천 신성으로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사천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 사천 신성을 공격했다. 연합군은 불량기포와 벽력포 등으로 집중 사격을 한 다음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시마즈 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명군의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다. 명군의 포진에서 불량기포가 오발하여 폭발한 것이다. 명군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본 시마즈는 전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했다.
명군은 와해되어 진주 쪽으로 패주하여 남강을 도하하다가 다수의 익사자를 내고 삼가→합천을 거쳐 성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3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사천신성의 시마즈 군은 철군명령에 따라 그 해 11월 16일에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조 · 명연합군의 공격목표인 왜교성은 여수반도 우측 광양만에 연해 있는 왜성이었다. 여기에는 고니시가 거느리는 1만 4천여 병력 주둔하고 있으면서 남해도의 소오(宗義智)군, 사천의 시마즈 군과 연결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왜교성을 공격하게 된 서로군은 1598년 9월 중순에 조선군 1만여 명을 포함한 3만 6천여 명의 육군과 함선 1천여 척으로 편성된 조명연합함대의 수로군이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9월 19일에 순천에 도착한 명군의 유정은 곧 3면으로 왜교성을 포위하고 이 이튿날부터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수로군은 9월 18일에 조선 수군 진영이 있는 나로도를 출발하여 20일에 광양만의 송도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고니시 군의 해상탈출로를 봉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경상우수군이 노량 수로를 봉쇄하고 있는 동안 조명연합함대의 주력은 광야만을 타고 들어가 왜교성에 접근하여 포격으로 서로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륙 양면의 합동작전으로도 왜교성에 대한 공격은 쉽지 않았다. 유정은 지구전을 계획하고 22일부터 29일까지 공격을 중지시키고 공성 기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운제, 비루, 포차 등 공성기구가 어느정도 마련되어 10월 2일, 서로군은 수로군과 합동작전으로 총공세를 폈다. 그러나 서로군이 공성장비를 운반하여 성벽에 근접시키려하자 일본군은 화력을 집중하여 장비들을 파괴하였다.
수로군도 육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조선 수군이 앞장서서 육전대로 공성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조선 수군의 사도첨사 황세득을 포함하여 다수의 병사들이 사상을 당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이튿날인 3일에도 수군이 합동작전을 위해 왜교성 부근에 상륙하였으나 유정군의 위약으로 인해 명군의 대소 전함 23척이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파괴되는 손실을 당하였다.
수로군은 4일에 또다시 왜교성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유정의 비협조로 인해 실패하였다. 이때 유정은 이미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매수를 당한 상태여서 일본군을 공격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3일과 4일의 공격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서로군은 6일에 조선군을 우선 철수시키고 7일에는 명군 주력부대를 순천 서북방의 부유로 철수시켰다. 수로군도 9일 광양만에서 철수하여 12일에 나로도로 복귀하였다.
왜교성의 고니시 군은 철군명령에 따라 그 해 11월에 부산으로 철수 하였다.
1차 도산성 공격 작전이 실패한 이후 조명 연합군은 전군을 동로(東路), 중로(中路), 서로(西路)의 삼로군(三路軍)으로 재편하여 경상좌,우도 및 전라도에 각각 배치함과 동시에 도독 진린이 지휘하는 수군을 증파하여 조선 수군과 협력하여 일본 수군을 압박하도록 하였다.
1598년 8월까지 전력을 보강한 조명연합군은 총 6개군으로 군을 편성하여 울산, 사천, 순천 지역의 일본군을 동시에 공략한다는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아울러 수군을 동원하여 왜교성을 공격하는 서로군을 지원하는 한편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중 동로군이 저번에 한 차례 실패를 하였던 도산성 탈환하는 임무를 맡고 출정하였다.
조명연합군이 한창 전력 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1598년 8월,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권력구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등 사대로(四大老) 중심의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됨과 동시에 도요토미의 사망을 비밀에 붙인 채 8월 28일과 9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출병군에게 철군 명령을 하달하였다.
1598년 9월 11일 명의 동로군 선봉장인 부총병 해생이 4,000여 명의 군을 이끌고 도산성에 접근하여 일본군 천여 명을 격파하고 도산 서북쪽 1.5Km의 학성산을 점령하는 한편, 김응서가 지휘하는 조선의 동로군이 동래로 진출한 설호신군과 함께 19일에 동래지역의 일본군을 몰아내어 울산-부산을 연결하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선발부대 등이 일본군을 압박해가는 한편, 21일 제독 마귀가 지휘하는 명의 동로군 본대 2만여 명이 도산 북쪽에 도착하여 22일부터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소부대를 미끼로 명군을 성 앞으로 유인한 뒤 대부대가 기습을 가했으나 명군은 기병을 투입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성 주위의 책성들을 소각시켜 버렸다. 기습이 실패한 일본군은 성 안에서 나오지 않고 조총 사격으로 조명연합군의 접근을 견제하였다.
또다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됨을 우려한 조명연합군을 일본군을 유인해 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병력과 사기 모두에서 열세였던 일본군은 성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양군이 대치한 채 시간이 지체됨에 따라 조명연합군 내부에는 ‘부산에서 일본군의 지원병이 곧 도착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에 불안을 느낀 조명연합군은 29일부터 군량 등을 울산 북쪽 50리의 모화로 옮기고 이후 경주를 거쳐 10월 6일 영천으로 이동함으로써 2차 도산성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도산성의 가토군은 도요토미의 사망과 함께 내려진 철군 명령에 따라 그 해 11월 18일에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 마지막 전쟁, 노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비밀리에 내려진 철수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준비를 하며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뇌물을 받치고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았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한 다음 본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철수명령을 받았다. 이에 고니시는 유정과 휴전을 협상하여 고니시가 왜교성의 장비와 물자를 유정에게 인계하는 대신, 유정은 고니시의 철수를 안전하게 보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진린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제보하였다. 이로써 조명 수군은 왜교성에서 해로로 철수하는 고니시 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이를 격멸하기로 하고 선단 규모 500척의 연합 합대를 편성한 다음 11월 9일에 나로도에서 광양만으로 급진하였다.
일본군은 1598년 11월부터 전면적인 본국 철수 준비로 11일까지 거제도와 창선도로 집결하여 순차적으로 철수를 하려 했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11월 13일에 그 선발대로 전함 10여 척을 출발시켰으나 이들은 장도 부근에서 조명연합함대에 쫓겨서 왜교성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고니시는 명군 도독 진린을 매수하여 퇴로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거제도와 창선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 선단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으나 조, 명 연합함대가 탈출로를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고니시는 사천 남쪽의 창선도에 집결하여 고니시군을 기다리고 있던 소오 군과 시마즈 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1월 14일 일본군은 사천의 요시히로 군을 주력으로 한 전함 300여 척으로 구원군 함대를 구성했다. 앞의 적(왜교성)은 바다가 얕고 적이 요새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뒤로부터의 적을 맞아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사천군의 일본수군이 가장 빨리 왜교성으로 올 수 있는 수로는 남해도와 육지 사이 노량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이순신은 경상 우수사 이순신(동명이인)을 노량으로 발포 만호 소계남을 미조항으로 파견하여 일본 구원 함대의 내습을 경계했다.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이순신은 우선 그들의 구원부대를 격멸하기 위해 광양만에서 하동 앞바다로 이동 11월 18일인 밤에 노량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구원부대가 지나갈 길목을 차단하였다. 진린군도 죽도 부근에 진을 치고 이순신 군은 노량 남쪽 남해도의 관음포에 진을 친 다음 일본군 함대를 기다렸다.
18일 밤, 고니시 군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 군과 소오 군은 5백여 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시마즈의 지휘하에 광양만으로 출발하였다.
11월 19일 새벽 4시쯤 어둠 속에서 대규모 일본함대가 노량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조명 연합군함대가 일본군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조선과 일본, 명나라 3국간의 7년 전쟁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 막을 올렸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83척이었다. 2척은 명수군 제독 진린과 부총병 등자룡에게 빌려주었다.
조선 전함들이 새벽의 정적을 깨면서 일제 포격을 시작했고, 일본전함에서도 일제히 조총을 쏘며 응전해 왔다. 선봉인 명의 부총병 등자룡 군이 일본 함대의 좌우측면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등자룡 군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여 등자룡이 조선 수군으로부터 빌려 탄 판옥선에 불이 붙었고, 일본군 수병들이 갑판 위로 뛰어들어 등자룡 이하 명 수병을 전멸시켜 기선을 제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도독 진린의 대장선을 포위하였다. 이에 조선 함대가 명군을 지원하여 진린의 대장선을 구해 내고 화포 사격을 집중하였다.
조선군 전함 쪽의 1,000여 문의 각종 대,소 총통과 신기전 등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 전함들은 불에 휩싸여 격침되었고 바다에 빠진 일본 수병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에 살아남지 못했다. 혼전 중에 시마즈 요시히로(대장)가 탄 기함을 발견한 조선 전함들이 이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일본군 일부가 필사적으로 판옥선으로 뛰어올라 백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수병들은 갑판 아래로 들어간 후 다른 조선 전함쪽으로 접근시키며 화살을 퍼부어 일본수군들을 몰살시켰다.
오전 8시쯤 살아 남은 일본군 전함들이 노량 입구 쪽으로 오던 수로를 따라 필사의 도주를 시도하면서 지금까지 관전만 하던 명 수군이 포진한 죽도 앞으로 몰려 나갔다. 조선 수군 함대의 전 전함들이 패주하는 일본군 전함들을 뒤쫓아 일제히 추격전을 벌렸다. 기함이 선두로 나섰고, 이순신이 추격전을 독려했다. 순간 기함이 바싹 추격한 적함의 선미에 엎드려 있던 적의 조총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적의 총탄에 통제사 이순신이 피격됐다.
피격 사실을 숨긴 채 옆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지휘를 하여 계속 추격했다.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일본함대의 후미가 노량해협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면서 대해전의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등이 전사하였다. 그 외 일본함선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격침시켰으며 5백여 급의 수급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수는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았다.
한편 요시히로의 함대가 조선수군에게 궤멸되고 있는 틈을 타 왜교성의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은 11월 20일 새벽 신성포에 숨겨 둔 500여 척의 전함을 타고 왜교성을 떠나 거제도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고니시군이 왜교성에서 빠져 나와 부산에 합류하자 11월 24일부터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각 부대가 철군을 개시하였다.
24일 : 가토, 구로다, 나베시마군
25일 : 모리. 이토군
26일 : 고니시, 시마즈, 고바야카와 군
이들 일본군은 쓰시마-이카를 거쳐 12월 중에 하카다에 상륙하여 철군을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전후 7년 동안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