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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떠남이 아니라 귀향이었다
― 『오디세이아』에서 하느님이라는 하이마트까지
1. 약 2,750년 전 호메로스가 노래한 『오디세이아』가 영화가되어 오늘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오디세우스의 항해가 낯설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의 이야기가 시대를 넘어 인간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귀향길은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거칠고, 바람은 방향을 바꾸며, 낯선 섬과 유혹이 그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그는 때로 길을 잃고, 때로 머뭇거리며, 거의 모든 것을 잃고서도 다시 배를 띄웁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서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떠납니다. 더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합니다. 재물과 명예와 지식을 좇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무엇인가를 향해 걸어갑니다.
행복은 언제나 지금 여기보다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을 향해 달리고, 지금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긴 세월을 지나고 나면 어느 날 문득 알게 됩니다.
평생 찾아 헤매던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것들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저녁이면 불이 켜지는 집,
함께 밥을 먹는 사람,
말없이 내 곁을 지켜 주는 한 사람,
내가 돌아왔을 때 내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
인간은 세상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지만,
긴 여행 끝에서 비로소 집이 무엇이었는지를 배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아는 모험의 이야기 이전에 귀향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떠남으로 성장하지만, 돌아갈 곳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자기 삶의 방향을 알게 됩니다.
2. 이타카 ―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는 단순한 섬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거나 화려한 나라도 아니었고, 그가 항해 중에 만난 신비로운 섬들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내 페넬로페가 있었고,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타카는 하나의 지명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질문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독일어에 하이마트(Heimat) 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고향’이라고 번역하지만, 그 말에는 단순한 출생지 이상의 울림이 있습니다.
하이마트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굳이 자기를 설명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지는 곳이며, 긴 여행 끝에 신발을 벗고 말없이 앉아 있어도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이마트는 땅이면서 관계이고, 기억이면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존재가 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집은 더 넓어지고, 소유는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커진다고 마음이 반드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정작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더 많은 소유보다 한 가지 확신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다.”
밤길을 걷는 사람에게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가 힘이 되듯, 돌아갈 곳을 가진 사람은 삶의 폭풍 속에서도 완전히 길을 잃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오랜 세월 바다를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타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때때로 우리가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멀리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됩니다.
3. 그러나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는 고향보다 더 깊은 고향이 있습니다.
영혼의 하이마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우연히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려 나와 존재하게 된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도 17,28)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깊은 근원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어떤 물질적 에너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도록 불림 받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깊은 그리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나면 또 다른 것을 원하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더 깊은 사랑을 갈망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다가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에 젖고, 저녁노을 앞에서는 문득 말이 없어집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내가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린 무엇인가를 다시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작은 일에도
감동하며 까닭모를. 그리움에 울컥 눈물을 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마음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기에,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꾸짖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왜 그렇게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한 가지로 온전히 채워지기에는 너무 깊습니다.
우리 안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닿을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의 깊은 그리움은 결핍이 아니라 기억일 수 있습니다.
영혼이 아주 잠시,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순간 말입니다.
4.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향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탕자 비유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갑니다.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삶을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
그 한마디에서 귀향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아버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는 먼저 그를 알아봅니다.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깊은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내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다른 사실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기 훨씬 전부터 하느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인에게 이 은혜로운사실을 깨닫게 됨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됩니다.
기도가 메마를 때가 있습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아무리 불러도 하느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이야기는 말합니다.
아들이 아무리 먼 곳까지 갔어도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회개란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일이 아닙니다.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다시 집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가 있었다면 탕자에게는 아버지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이타카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어쩌면 신앙이라는 긴 여정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돌아감.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5. 인생을 오래 걸어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젊은 날에는 무엇인가를 더 얻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멀리 가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은 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깊어질수록 손에 힘을 주는 일보다 손을 펴는 일이 많아집니다.
가졌던 것을 내려놓고, 사랑했던 것을 떠나보내며,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마저 시간 속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상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세월의 강물을 바라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듭니다.
강은 산에서 시작하여 낮은 곳을 찾아 흐릅니다. 돌에 부딪히고, 골짜기를 돌고, 때로는 범람하면서도 결국 바다를 향합니다.
강물이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라졌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 할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불려 나와 그 사랑 안에서 살다가 마침내 그 사랑께로 돌아간다고 믿는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것이 끊어지는 낯선 절벽이 아니라, 한 생애의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 마지막 하이마트의 문 앞에 서는 순간이됩니다.
우리의 첫 하이마트는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가족이 있는 집이 고향이었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집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향보다 더 오래되고 깊은 고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저는 요즘 자주 동검도 채플에서 부르는 채플 찬트를 되뇌며 살아갑니다.
O Emmanuel,
miserere nobis.
<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짧은 두 줄의 기도이지만, 그 안에는 저의 한 생애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날에는 하느님을 찾아 멀리 걸어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길을 찾아 헤매며 어딘가에 계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조금 다른 진실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내가 길을 잃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놓지 않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웃던 날에도, 울던 밤에도, 기도할 수 없었던 때에도, 믿음마저 희미해졌던 순간에도
그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짧은 애원의 기도는 나의 긴 오디세이가 끝나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남을 기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O Emmanuel, miserere nobis.
그리고 그때 한 가지를 비로소 온전히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한평생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모든 길 위에서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걸어오셨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떠났으나 버림받지 않았고, 헤매었으나 잊히지 않았으며, 돌아오기 전부터 이미 기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떠남으로 시작하지만
사랑은 돌아옴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긴 귀향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될 것입니다.
평생 찾아 헤매던 하이마트는 먼 곳에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 곁에 계셨던
그분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귀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이 나와우리의 영원한 하이마트입니다.
- 글 조광호 신부
1947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1977년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197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과 같은 대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하여 198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여러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드물게 재료와 장르를 넘나들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회화, 판화, 이콘화, 유리화, 조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해왔다.
대표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성당 유리화, 서울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종교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이후 동검도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첫댓글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