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마간산 走馬看山
오늘 아침엔 어렸을 적 생각이 많이 났다!
화성군, 조암이라는 곳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잘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급작스레 가난해졌다.
아버지께서 염전을 하셨는데, 염전 뚝 이, 삼 년을(매해 마다) 계속 무너져 내려
논이랑 밭 데기 랑 모두 팔아 막았는데도 또 무너져 염전을 그냥 남에게 주다시피하고
초등학교 4학년 초에 종로4가 근처 인의동에
먼 친척집 2층 다다미방 한 칸을 빌어 쫒 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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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4녀에 부모님까지 9명이서 칼잠을 자야 했다.
아래층에 어머니께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셨는데
그 수입으로는 아홉 식구가 풀칠하기도 어려운 수입이었다.
그 당시에 17살 많은 큰형은 군대에 나가 계셨고
7살 많은 작은형은 필동에 있는 사대부고 1학년, 차~암 어려웠던 시절 얘기다!
호적이 일 년 줄어 있는데다가, 그 다음해에 전학이 된다.
가물가물 거리는 옛 추억들이 아 슴 거리며 떠 올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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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여 그랬었지!
앞마당엔 우물이 있었고, 우물 옆엔 석류나무가 있었다.
석류나무 둘레엔 분꽃이 만발 했었지........!
석류나무를 타고 올라간 여주도 있었다. 쫘~악 벌려져 있던, 새 뻘건 여주!
마당 둘레 울타리 초가지붕엔, 수세미가 매달려 있었고,
살구나무인지? 복숭아나무 인지? 한 쪽 구석에 있었던 기억도 난다.
앞마당은 꽤 넓었었고, 구석엔 제법 큰 닭장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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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 자로 지어진 초가집에는, 양쪽으로 방들이 두 개씩 있었고,
꺽 어진 중간에 광도 있었고.
끄트머리 쪽 양편엔 부엌이 하나씩 붙어 있고, 꺾어진 부분에도 부엌이 있었다.
방 앞에는 꽤 넓적한 툇마루도 길게 있었고.......
부엌 앞엔 나무로 된 절구도 서 있던 기억도 난다.
부엌 앞을 지나 뒤뜰 로 나가면, 뒤 깐이 본채 부엌 벽에 붙어 있 섰고,
그 옆으로 앵두나무가 무성 했던 기억이 난다.
앵두나무 앞을 지나면 싸리나무 울타리가 쳐진 뒤 터 밭이 있었다. 대략 한 5~60평?
뒤 터와 앞마당이 끝나는 곳부터, 신작로에 붙어있는, 길 죽 한 가게도 네 개가 있었고.
첫 째 칸은 이발소, 둘째 칸은 과자 만드는 가게, 음~ 두 개는 기억이 안 나 네~
본채까지 합하면 500평도 더 되었으리라!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이집을 버리시고
서울로 쫒 껴 올라가셨던 아버지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아~~! 우리 아버지~!"
원래 이집은 할아버지께서 피신 오신 집 이었다고 한다.
조선조 고종 말에 정3품 관직으로 충주군수를 지내셨는데,
일 제 치하에, 개명에 반대 하시고 피신 오신 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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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 초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작은형과 나는 이삿짐 뒤 칸에 짐짝과 함께 실려져 서울로 옮겨졌다.
세 살, 다섯 살짜리 여동생들은 부모님과 앞 칸에서.......!
그 당시 중앙대 3학년 이었던 큰형은 군에 나가 있었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만나게 된 집은 한 마디로 콩 짜가리 만 했다.
일 제 시대 건물로 지은 지도 오래 되어,
비가 오면 여기저기에 양재기를 받쳐 놓아야 했었다.
그래도 한쪽 구석엔 책상 하나 달랑 놓여 져 있었고,
천정엔 수 도 없이 도배를 많이 하여, 비가 오면 여기저기 물이 고여
맹꽁이배처럼 불러지는 천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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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양재기를 받쳐 놓으면,
가뜩이나 잠자기도 좁은데 앉아서 벽에 기대여 자야 했었다.
좁기도 하거니와 물이 튀어나와 다담이 방바닥이 다 젖었다.
이사 오던 그해, 비도 억수로 많이도 왔다.
하늘을 쳐다보며~
"아니~ 도대채, 왠 하늘에 저리 물이 많이 있는가?"
어린 나이에 하늘도 원망해 봤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방구석에 여기저기 양재기를 바쳐 놓으니,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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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부터 득 로의 잔 머리가 회전을 했다.
슬그머니 일어나 의자에 올라서서 실을 젓가락에 묶어 물 떨어지는 구멍에
T자로 끼워 놓고 실 끄트머리에 추를 달아 놨더니 물이 졸졸졸 실을 타고 내려왔다.
최소한 물이 튀어나오질 않았으며 똑 똑 거리며 시끄러운 소리가 나질 않았다.
식구들 모두가 “명현이 머리가 좋다고” 하면서
형이고 누나며 모두가 칭찬이 대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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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실이 조금 휘어져 있어도 물이 실을 타고 내려왔다.
하여, 실을 좀 길게 하여 끌어다가 문 밖에 창문틀에 묶어 놓아 봤더니......!
“히~야~!”
몇 군데를 실을 늘어트려 창문에다 묶어 놨다,
그랬더니 방바닥에 그릇이 없어도 됐다.
이때가 득 로 11살 때 일 이었습니다.
학교도 전학이 바로 안 되어 이럭저럭 몇 달간의 서울 생활이 시작 되었는데,
어느 날, 세 살 먹은 막내 여동생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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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했냐?”
저는 7살 많은 작은 형님한테 두 번 추궁당한 얘기가 있었는데,
이 얘기가 두 번째 얘기 였 습니다.
네 밑에 동생은 네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는 무언의 집안 규율 였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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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정신이 쏙 빠져 있는 상황에서 책임까지 묻는 것이다.
식구 7 명이 종로 4가로 해서 광화문을 돌아 비원과 창경궁 일대를
이 잡듯이 뒤져도 행방이 묘연 했다!
발바닥에 쥐가 났다고 하는 얘기가 이런 얘기다.
그때 신고 다니는 신발이라고는 "왕자 표" 검정 운동화였다. 바닥도 얇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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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은 그런대로 넘어 갔는데,
둘째 날이 지나려니 조바심에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야단치어 울렸던 생각, 먹을 거 더 챙겨 주지 못한 생각, 별아 별 생각이 다 났다.
먹을 것도 없었지만 배도 안 곱았다.
어머니께서 답답하시니 점쟁이한테도 갔다 오셨나보다.
내일 까지 못 찾으면 20년 후에야 찾는다고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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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지난 후, 얘기지만 정말 TV에서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이 있었다.
만나서 껴안고 울고불고 하는 프로를 보면서 그 당시 점쟁이 얘기도 떠올려 졌었다.
“거~! 점쟁이 말도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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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동생 일 만이 아니다.
어머니가 우시다 못해 실성을 하신 것 같아,
삼일 째 되는 날 부터는 어머니가 더 걱정 이었다.
“엄마! 그만 우세요! 우리 형제들 많은데 막내 하나 낳지 않았다고 생각 하세요!”
“제가 막내 몫까지 효도 다 할께 요! 이러다가 엄마 까지 돌아가시면 저희들 어 떻 해요?”
내가 한 얘기지만 그때는 뭐라 했는지 기억도 없었는데,
나중에 어머니께서 이 얘기를 하시면서, 그 와중에도 깜짝 놀라 셨 단다.
마냥 어린애로만 알았는데, 저 소견에 저런 얘기를 하더라고..........!
삼일 되던 저녁때쯤 필동 파출소에서 딴 파출소와 연락이 되어 백차에 실려 왔다.
계속 그리 삼일 동안을 울기만 했었단다.
그리 울지만 않았으면 자식 없는 집에서 벌써 데려 갔을 것이라 한다.
어린 아이가 큰 찻길을 건넜을 리는 만무다 하여,
더 가까운 필동 쪽으로는 가보질 않았다.
말이 좀 늦은 편이라서 떠듬거리고 한 얘기를 종합해보면,
아버지가 가시는 모습을 보고, 그 방향으로 뒤 쫒아 간 모양이다.
건널목에 서 있는데
어느 분이 길 건너려고 하는 줄 알고 손을 잡아주어 건너 주었다 한다.
그래 서, 항상 등잔 밑은 어둡다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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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했냐?”
“야! 너만 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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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라와 전기불이 처음 인가보다. 시골에선 등잔불 생활을 했다.
동생들이 없을 때 얘기이니 5살 정도 때 얘기 인가보다.
작은 형님은 공부도 잘했지만 집안일도 많이 거드셨다.
산에 솔방울 따러 갈 때면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
“얘! 저기 저거(솔잎 삭정이) 주워 오너라!”
여섯 살 될 때 까지, 나오지도 않는 어머니 젓을 물고 살았으니
막내응석을 톡톡히 부리고 살았다.
항상 7살 많은 작은 형님을 졸졸 따라 다녔던 생각이 많이 난다.
형이 구슬치기 할 때도 옆에 있었고 딱지치기 할 때도 쫒아 다녔다.
서울 올라와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시험 점수 형편없이 맞아 왔다고
빗자루로 종아리 몇 번 맞은 기억은 있는데,
그 외에는 형한테 손 지검 한번 받은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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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시골에서 작은형님이 국수를 삶아, 그 위에다 짜장 을 덮어 놓은 뒤,
뒤 텃밭에서 일 하시던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어머니 모셔 올 테니 기다 리 거라!”
깜깜한데서 배는 무지 곱은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짜 장을 한 수저 걷어 먹는다. 맛있다!
형 앞에서 한 수저, 어머니 앞에서 한 수저.........! 몇 순배가 돌았나보다!
한참 후에 돌아들 오셔서 등잔불을 켜보니 국수위에 짜장은 다 걷어 먹었다!
“야~! 너만 입이냐!”
귀퉁배기라도 한 대 때렸을 법한데, 그 얘기가 전부였다!
그 때, 형님 나이가 12살 이나 13살 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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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성묘 갔다 오면서 집근처에서 동태찌개에 소주를 한잔 하면서 이 얘기를 드리니!
“넌, 별 걸 다 기억 하고 있구나!” ㅎㅎ
초등 4년 때, 종아리 맞았던 얘기를 드리니!
“얘! 부끄럽다! 그만 해라!”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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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自手成家
이 글 뜻을 찾아보면, 물려받은 재산 없이 혼자 힘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라고 되어 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서도 고학을 하여 서울대를 나오시고,
박사과정도 마치시고 동생들 뒤 바라지 다 해 주시고,
강원대 교수직을 하시다가 지금은 노후가 편안 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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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한테 평생 신세진 기분이다!”
“아닙니다! 형님!”
“저는 형님, 옆에 계시어 항상 든든 했 습니다!”
- 부모님을 뫼시지 못 했다고 항상 이리 자책이시다.
- 득 로 합장
첫댓글 득로 형님,5월 백일장 하기를 참 잘했습니다. 형님의 자서전이군요.
어린 시절의 일을 어찌 그리도 소상하게 기억 하십니까?
막내 동생 잃고 온 식구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다행히 3일만에 찾았으니 다행이었지만 참으로 아찔한 사건이었어요.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처리하는 요령 기상천외 하군요.
형님은 그 천재성 그대로 살렸더라면 에디슨이 울고 갈뻔했어요.
그러나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남은 30여년간 연구하시면 어떤
대발명품이 나올지 모르니까요.
예~!
쓸대 없는 것들을 기억하고 있습죠~!
어느땐가는 고시공부를 하여, 법관에 길을 걸어 보고 싶었을 때도 있었죠~
안 하길 잘 했지~ㅋㅋ
여러놈 죽었을 테죠~~ㅋㅋㅋ
지나온 과거를 돌아켜보면 누구나다
아련한추억이 몇십짐 되것지만
형님의 맛갈스런 필심이 가슴을 뭉클 하게 합니다
예~! 아우님~!
이리 너줄 거리며 글을 쓰는 것이~
식구 떠나며 횡설 수설 하나 봅니다~! 그 전에는 글 써본 기억이 없습죠~!
필력~? 필심~? ㅋㅋ
삶이란 참 힘들게 사는분들도 많다고 생각 합니다
재미있는 글솜씨 이벤트 장원은 득로님 이십니다
음~ 송이님~ㅋㅋ
송이님이 장수표 ~ 막걸리 한잔 사 주시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