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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묵상 스크랩 욥과 파라오와 나 (출9:27~35)
Timothy Choe 추천 0 조회 52 12.03.23 15:1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주님, 아침부터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비는 내리고 아이들은 제 뜻대로 안되고, 거기에 휘둘린 저는 마음이 곤고합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 앞에 나아올 자격이 뉘라서 있나이까. 마음과 몸을 정갈히 하고 앉아도, 우리 주는 촛불사이 정한수 가운데 강신하는 만물 안의 신이 아니시오니, 우리의 선함과 눈물과 기도와 노력으로는 주를 뵈올 수 없나이다. 오직 주께서 약속하시기를, 나를 찾는 자는 나를 만나리라 하신 그 맹세 때문에 우리가 주를 뵙습니다. 그 약속이 있기에 기도합니다. 그 약속이 있기에 말씀 앞에 나아옵니다.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며, 주님의 말씀이 곧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도록 창조하셨기에 저는 말씀 앞에 나아와 오늘도 생명얻기를 원하나이다. 저의 더러운 것, 자기 의, 선행, 열심, 정죄, 비판, 음행, 불의, 거짓맹세가 가득한 옛사람은 주의 빛된 말씀을 견디지 못하고 십자가의 심판 가운데 사라지며 오늘도 거듭난 생명, 구주의 교회로서 살아가게 되나이다. 주여, 불쌍히 여기사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oftentimes) 행하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욥33:30 / 엘리후의 발언 中)

 

 

 

욥과 세 친구의 허탄한 공격과 변론들이 소강상태에 이르자(~욥32장),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한 채 회개만을 종용하다 입을 다문 세 노인과, 자신의 결백만을 주장하며 길고 긴 변론을 마친 자리에 지금껏 입을 다물고 듣고 있던 젊은 엘리후가 격정을 담아 이들 앞에서 말하기 시작한다(욥32~37장). 엘리후의 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욥 38장~41장까지의 말씀과 흡사하다. 하나님은 엘리후를 위해서는 속죄할 것을 명하시지 않고 있다(욥42:7~9). 이 기록을 통하여 엘리후의 진술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진리에 속한 진술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욥의 인생에 불어닥친 환란과 재앙의 상황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과 주장과 변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다시 잠잠해진, 다시 말해 무의미해진 상태에 이르러서 시작된 엘리후의 말들은 하나님께서 현현하여 38장부터 들려주시는 말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진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 때에만 그것은 욥에게 의미가 되고 존재가 되고 해답이 된다. 엘리후의 진술에 뒤이어 곧장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통하여, 나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앞에 선 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그 자체로 진리의 메세지이다. 그러나 그 기록은 하나님이 존재로 현현하실 때에만 우리에게 의미가 되고 해답이 된다. 존재로 드러나신 하나님은 다른 것들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자신의 현현에 앞서 엘리후의 입술을 먼저 욥에게 보내신 그 분은, 오늘날도 자신의 현현(임재)에 앞서 기록된 말씀 앞에 먼저 나오도록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존재 자체이시며 그분의 존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다. 그분은 말씀 속에 숨겨둔 다른 의미를 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그 말씀과 동일한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엘리후는 욥기 33장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고난과 고통의 삶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엘리후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여러가지 것들을 통하여 동일한 메세지를 듣는 까닭은 "사람으로 그 죄를 버리고, 교만을 막으며, 그 영혼이 구덩이에 빠지거나 그의 생명이 칼에 멸망치 않게 하려 하심"이다(욥33:13~18). 또한 엘리후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고통과 징계(욥33:19)를 거듭 거듭 받는 이유는(욥33:29),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게 하려"하시는 것이다(욥33:30).

 

 

엘리후는 자신이 진술을 하기 시작한 이유와 목적을 설명한 32장 이후, 먼저 욥(사람)에게 일어난 재앙의 이류가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고하심에 의한 은혜의 방편임을 진술하고, 하나님만 참되고 공의로우심과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인지 뒤이어 말한다(33~34장). 엘리후가 보기에 사람은 유한하고 헛되고 티끌같이 미력하며(35장), 오직 하나님만 의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인애로우시다(36장). 그는 36장 26절부터 37장 전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피조세계를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욥에게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선포하고 있다(욥37:2). 그 선포 뒤, 하나님은 실제로 나타나셔서 욥에게 그 음성, 그 존재를 들려주고 계신다(욥38~41장).

 

*******

 

 

말씀은 오늘도 파라오와 같은 내게, 욥과 같은 내게 찾아오신다. 내가 파라오 같고, 욥과 같이 상황적 고통 가운데 있기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고통이 없다 해도 자신의 말씀 없이는 죽은 자에 불과한 자기 백성의 곤고함을 불쌍히 여기시고서 베푸시는 그분의 성실하신 사랑이다. 그러나 자기 의와 결백으로 충만한 욥에게도, 자기 왕국에 대한 욕심과 모든 재앙 때문에 마음이 황폐한 파라오에게도, 그리고 여전히 스스로를 괜찮은 존재라 여기며 내 나라 내 왕국을 세우고 유지해 보려는 나의 옛사람에게도, 이 세 존재에게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그저 문자이며 단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상황의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보다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징계와 말씀을 자기 상황의 고통을 모면하려는 방편으로서 주어진 줄로 착각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회개 - 파라오의 회개(출9:27) - 는 바로 그러한 거짓된 회개이다.

 

 

여전히 스스로 괜찮고 멋지고 의로운 자, 욥과 파라오와 나의 속사람은 혼연일체인양 너무나 닮아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고통의 시간들이 우리의 영혼을 이집트 같은 세상에서 구원해 줄 표적임을 모르며, 우리의 눈이 떠져 욥의 참된 신앙을 얻게 할 은혜의 방편임을 모르고, 내 존재를 십자가에 드려 오늘도 죄인되고 거짓된 내 자아, 나의 실존의 죽음을 선포하며 무덤같은 고요의 겸손함으로 주를 앙망하게 하는 근원됨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는 고통, 상황, 손실, 염려, 욕망 만이 해결되고 해갈되고 종식되기만을 간구한다.

 

 

파라오에게 있어 재앙이 끝나고, 회개하고, 모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일은 없었듯이, 나 역시도 상황이 해결되고 만사가 형통함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던 자였다. 나의 성공을 나의 신앙과 결부시키며, 내 가정의 행복을 내 믿음과 결부시키고, 나의 영적 상승상태를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착각했던 이집트의 파라오이며, 고난 이전의 욥과 같은 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찾아오신 그분의 은혜는, 내 입술로 하여금 "고난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하셨고, 그 기도는 너무도 확실히 응답되어 나는 상황과 가정과 영성 그 무엇하나 숨쉴 곳 없는 골방같은 환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계속되는 고통에는 이유도 없었고, 해답도 없었다. 처음엔 울며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욥처럼 고백하였으나,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나는 결국 분노를 터트리고 등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고통 가운데 두신지 3년 반만의 일이었다. 내 안에 쌓여있던 고름들이 터져나와, 나의 존재가 어떠함을 입증해 주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자신을 계시하시며, 나로 하여금 "하나님만 참되시다"고백하도록 하였다. 그분의 말씀처럼, "그분의 징계는 내 영혼을 구렁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빛으로 나를 인도하는 은혜의 도구"였다(욥33:30). 그리하여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생명의 빛, 그분의 말씀으로 인도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열매, 삶에 피어나는 외적인 열매들에 집착하고 열심내지 않게 되었고, 때를 기다리며 내 안에서 일하시며 나를 익어가게 하시는 그분과 만나고 있다. 열매를 맺던 자, 이제는 열매가 되는 삶을 살고 있다.

 

 

오늘도 말씀은 찾아오신다. 말씀(Logos)은 말씀(Scripture)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계시(Manifest)하신다. 다른 것을 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 자체로 내게 양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 안에서만 주님은 자신의 본질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파라오 앞의 재앙처럼, 상황과 사건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는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할 뿐(출9:29), 상황과 사건과 그 해결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찾아오신 말씀 속의 주님은, 나와 파라오와 욥의 일치를 통하여 오늘 내가 가야 할 길로 인도하신다. 그곳은 십자가, 나의 심판에 아멘하는 자리이다. 나의 존재, 나의 옛사람은 거기서만 처리됨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의 심판을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구주의 십자가 그 위에, 나도 함께 있었다(롬6: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6:3~4)

 

 

 

주님, 주님의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분노하고 슬퍼하고 걱정하는 이유가 온통 만물에 속한 것일 뿐인 저의 옛사람을 오늘도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주와 연합된 십자가의 심판으로, 저를 주님의 무덤으로 이끄시고, 오직 주님 은혜로서 새 생명 -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거듭난 새 생명 - 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 저를 의탁하오니,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I pray in Jesus name. Amen.

 

 

 

 

 

 

 

 

 

 

2012.3.23. Timothy C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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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3.24 12:17

    첫댓글 아멘!
    상황과 사건을 해결받으려는 옛 사람이 온전히 심판받아 십자가에서 죽을 때,
    상황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상황해결에 붙잡혀 있는 한, 죽지 못해 고통당하는 현실만 지속할 뿐입니다.
    자기의 의로 결백한 욥도, 자기왕국을 지키려는 바로도...
    공히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며 그 앞에 돌아오기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피조물,
    그러나 돌아옴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달려 있음을 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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