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Anew – 새로남
어느 미국인 침례교도가 사용하는
단어를 보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거듭남이라는 Born Again 은 똑같이 태어났던
것을 다시 반복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들리므로, 새롭게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가르치는데 적합하지 않아서
Born Anew 를 쓰는 것으로 들립니다.
요한 3장 3절
ἀπεκρίθη ὁ Ἰησοῦ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
ἐὰν
μή
τις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οὐ δύναται
ἰδεῖν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ἄνωθεν :
1. from above, from a higher place
1. of things which come from heaven or God
2. from the first, from the beginning, from the very first
3. anew, over again
요한 3장 7절
μὴ θαυμάσῃς
ὅτι εἶπόν σοι
Δεῖ
ὑμᾶς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
티토서 3장
οὐκ ἐξ ἔργων τῶν ἐν
δικαιοσύνῃ
ὧν ἐποιήσαμεν
ἡμεῖς
ἀλλὰ κατὰ
τὸν
αὐτοῦ ἔλεον
ἔσωσεν ἡμᾶς διὰ λουτροῦ παλιγγενεσίας καὶ ἀνακαινώσεω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παλιγγενεσίας
1.
new birth,
reproduction, renewal, recreation, regeneration
1.
hence renovation,
regeneration, the production of a new life consecrated to God, a radical change
of mind for the better. The word often used to denote the restoration of a
thing to its pristine state, its renovation, as a renewal or restoration of
life after death
2.
the renovation of
the earth after the deluge
3.
the renewal of the
world to take place after its destruction by fire, as the Stoics taught
4.
the signal and
glorious change of all things (in heaven and earth) for the better, that
restoration of the primal and perfect condition of things which existed before
the fall of our first parents, which the Jews looked for in connection with the
advent of the Messiah, and which Christians expected in connection with the
visible return of Jesus from heaven.
5.
other uses
1.
of Cicero's
restoration to rank and fortune on his recall from exile
2.
of the restoration
of the Jewish nation after exile
3.
of the recovery of
knowledge by recollection
이 경우는 다시남(중생), 거듭남이 적합할 것입니다.
반면에 요한 3장에서의 게네쎄 아노쎈은 위로부터남, 새로남, 위로남이 더 적합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구절이 거듭남을 가리킨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두고 설명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같습니다.
번역이란 언어환경에 달려있고, 읽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 때문입니다.
2015. 8. 31 하토브
첫댓글 저 개인적으로는, '거듭남(요3:3, 5)'이나 '중생(딛3:5)'을 말할 때마다 '하나님께로 남(요1:13, 요일3:9, 5:3)'이라는 (한국어) 표현이 간과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남'은 '혈통(정식 결혼)'으로나 '육정(혼외 정사)'으로나 '사람의 뜻(인공 수정)'으로 나는 등의 3 가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1:12)'는 오로지 '하나님께로서 남'이어야만 하니까요...
'느디님'님의 글에 덧붙여 치졸한 제 글을 올립니다.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하나님으로 부터인데
그러한 '확신'을 스스로 자랑하듯 쉽게 토로함에 대하여 더러 불신이 생깁니다.
특히 그 거듭난 시점을 날짜와 시각까지 명시함에 대하여 그러한 경험이 부럽기도 합니다.
이미 자신이 '거듭난 상태'임에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지..
전혀 '거듭나지 않은 상태'임에도 오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거듭나게 해주신 '주님의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역사'가
' 이미 자신은 거듭났다'고 주장한 분들의 내세움에 대하여
은근한 시기심에 가까운 호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우리나라 '무교회주의'의 선구자적인 유영모가 제자인 함석헌에게
자신의 거듭난 시각은 물론 '계시'받은 소천 시각까지 예언하여
정작 소천하는 날 그 시각전에 함석헌은 스승의 그 말을 확신하고
임종을 위해 흰옷을 입고 그 댁을 찾아 가는 길에
맞은 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유영모를 만나 서로 묘한 입장이 되어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스쳐지나갔다는 회고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미 히말라야 설산에 머물러 말씀을 묵상하는 거룩한 분들이나
산상수훈을 듣기위해 찾아갔던 그 시절의 대중같은 수준의 분들이나
산기슭 시궁창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천박한 자들이나
거듭남에 대한 희구는 간절할 것인데..
@베데스다 설산에 계셨던 거룩한 분들의 거듭남에 대한 간증은 드물고
아직 정상을 지향하며 더한층 열심을 내야될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자신의 거듭남을 호언장담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제 글 역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의 대표적인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듭났다고 드러내 보이는 교회당의 목사,중직자들의 '거듭남과는 거리가 먼 행실'이나
'쉐카'에서도 이웃들의 신앙'수준'을 저울질하는 회원들의 강퍅한 표현들을 보면
'거듭남에 대한 자신의 확신'이 안타까운 억측이지 않나 생각될 때도 있어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을 묵상하며 '그러려니~'스스로 돌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