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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리아 신심의 근거들 Ⅵ
에드워드 데니스 오코너 신부
성 십자가 수도회
마리아 신심의 근거들
4. 파티마 ④
하지만 주교들 간의 일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성모님께서는 루치아 수녀(파티마 발현의 목격자)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교황 이전 세계의 모든 주교들과 일치하여 러시아를 나의 원죄 없는 성심에 봉헌하기를 바라신다.”(1929. 6. 13.) 1982년의 봉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모든 목자들과 일치하여" 일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사실은 주교들에게 봉헌에 동참해달라는 신중한 초대의 말일 뿐, 주교들의 봉헌 행위 자체는 아닌 것이다. 1984년에는 러시아를 봉헌하는 데 동참해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이 있었지만,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인 주교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필자가 보기에 당시의 봉헌도 성모님께서 요구하신 전체 주교단의 합의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어떤 특정한 국민들 전체의 회개라는 이 중대한 사안이 그토록 교회법적이고 형식적인 요소 하나로 결정된다는 사실 자체가 부조리하다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반론을 로랑탱은 “동정 마리아께서 정말 이토록 사소한 일에 이렇게까지 까다로운 분이셨단 말인가?” 하고 에둘러서 말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성모님이 요청하신 봉헌은 일종의 마법주문과 같은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Laurentin, “Les coeurs", 34b.) 실제로 이와 유사한 여러 반론이 1988년 초 미국의 마리아 신학 학술대회에서 제기되었다.(학술지 편집자의 주, 미국 마리아 신학학회에서 제창된 이론들의 골자는 러시아 봉헌의 유효성을 판단할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곧, 루치아 수녀가 규정한 봉헌 유효성 판단기준이 보다 명확해야 하며, 그것을 해석하는 데도 정확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주교단의 일치된 봉헌과 교황의 단독 봉헌의 차이는 교회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주교단 차원에서 이루어진 행위는 교회의 모든 사목자들의 동의를 표현한다. 매우 이상적인 경우이지만, 목자들과 양떼들이 완전히 일치하여 전체 주교단의 합의를 통한 봉헌은, 문자 그대로 온 교회가 완전히 일치하여 이루어진 봉헌이 되는 것이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봉헌에 대한 교황의 열정은 지칠 줄 몰랐지만 수많은 신자들의 열정은 말할 나위도 없고 - 그 열정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위기에 직면한 지금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마리아님에게로 돌려놓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고 무신론적 공산주의로 고통받는 러시아 국민들을 어머니 마리아의 성심에 바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 무신론과 공산주의는 러시아를 넘어서 결국에는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기에.
고뇌 끝에 루치아 수녀가 예수님께 여쭈었다. 러시아의 회개를 위해 반드시 교황을 주축으로한 봉헌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나는 그 봉헌이 나의 온 교회에 마리아의 티없는 성심의 승리의 명백한 증거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훗날 나의 성심에 대한 공경과 더불어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공경과 신심이 널리 전파되고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루치아 수녀의 1936년 5월 18 일자 편지. Pelletier, Exciting Fatima News, p.4;Caillon, La Consecration, p.19에 실려 있다.)
필자가 교황의 표현들을 면밀하게 살펴본 바, 교황은 성모님의 요청대로 봉헌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매우 조심스럽게 인정하고 있다. 1981년 6월 7일 제멜리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즉 파티마 문서들을 읽고 있었던 당시, 병실에서 녹음한 강론에서 교황은 이렇게 기도했다. "성모님, 당신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시는 그 사람들과, 특별한 방식을 통해 당신께 의탁하기를 기다리시는 그 사람들을 주님 여종의 사랑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으로 끌어 안아주소서."
"당신이 기다리시는 you are awaiting"이라는 현재시제 표현은 성모님께서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다는 점을 암시한다.
필자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in a particular way" 라는 표현이 성모님께서 일러주신 러시아 봉헌의 그 특정한 방식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싶다. 문법적 구조에서 “특별한 방식을 통해" 는 “당신이 기다리시는"의 의미를 제한하므로, 그러한 봉헌을 바라는 성모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방식을 통해"는 간절함이나 마음속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표현은 아니다. 게다가 이 표현은 단순히 문장 내의 어떤 특정 단어와의 의미상 닫힌 종속관계를 드러내거나, 그저 수사학적인 의도에서 수식어를 사용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언어 습관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견들이 나름의 타당성을 갖더라도, 성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현재 시제"로 분명히 서술한 것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반론이 되지는 않는다.
아서 캘킨스 신부에 따르면, 교황은 성모님께서 봉헌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서술하면서 대체로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교황의 일곱 번의 봉헌기도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로마 스페인 광장에서의 교황의 기도는 "그들" 대신 "그 사람들"이라는 표현 말고는 6월 7일의 기도문과 완전히 동일하다.
앞서 인용한, 파티마의 마리아 대성전에서의 강론에서 교황은 비오 12세 교황의 봉헌을 언급하고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봉헌은 또한 온갖 위협을 당하는 중에도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고 싶은 희망의 표징이 기도합니다. 표징을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봉헌하기를 기다리시는 바로 그 민족들에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봉헌(또는 의탁)예식에서는 스페인 광장에서 사용된 표현들이 그대로 나타난다. 1982년 5월 9일, 파티마로 떠나기 전의 부활삼종기도에서도 "그 민족들" 대신 "그 사람들과 민족들"이라 말한 점을 제외하면 또다시 동일한 문장들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차례 공식적인 봉헌이 있은 다음 1984년 3월 25일, 베드로 대성당에 아직 파티마 성모상이 현시되어 있을 적에 교황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저희는 구원의 성년 1984년 사순 제3주일이 일요일을 세상과 온 인류와 모든 민족들을, 특히 이러한 봉헌이 절실히 필요한 민족들, 곧 저희가 봉헌하고 의탁하기를 기다리시는 그 민족을 봉헌하며 당신께 의탁하는 날로 정하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 저희는 나약한 인간의 힘이 닿는 대로, 인간적 연약함의 한계 내에서, 하지만 어머니 당신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어머니 당신께서 보살펴주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은 1985년 12월 8일 특별 주교 시노드 폐막식에서는 이렇게 기도했다. “특별히 당신께 의탁해야 하는 사람들과 민족들을 기억하며, 그리고 당신께 의탁하고 봉헌하기를 당신이 절실히 바라시는 그 사람들과 민족들을 기억하며 저희는 당신께 온 교회와 온 인류를 맡깁니다."
동일한 형식의 문장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그 문장들이 임의가 아니라 특정한 의도에서 사용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되면서 문장이 약간씩 변경되는 것은 교황이 이 문장들을 계속해서 반추하고 숙고하여 다듬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제시된 사례들에서 교황이 사용한 언어는 동정 마리아께서 여전히 봉헌과 의탁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곧, 교황은 “할 수 있는 한”(다시 말해,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의탁하고 봉헌하였다고 말하는 점으로 볼 때 그러하다.
성모님께서 파티마에서 요청하신 봉헌에 대해 열성을 가진 이들은, 과감하고 능동적인 방법으로써 전 세계의 주교들의 협력을 구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임하는 교황의 태도에 종종 크게 실망하곤 한다. 그런데 교황의 행보를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필자의 생각에는 성모님 요청의 주요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강압적이고 과격한 방법을 써서 다그치는 것은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목자들이 참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믿음의 표현이자 신심의 자발적 행위로 봉헌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오히려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신중하게 또한 고도로 전략적으로, 성모님의 요청을 성취하기 위한 올바른 길을 꾸준히 가고 있다고 본다.
또한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비단 주교들만이 아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기워 갚는 속죄 그리고 원죄 없는 성심에 대한 공경을 전신자들에게 촉구하셨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로서의 책임을 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보고 싶으신 회개의 모습과 뜨거운 신심의 대상은 이 교회 전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요구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면 결국 그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성모님의 요청에 부응해야지, 사목자들의 태만함을 놓고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교황의 어떤 행동에 대해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더욱 적극적일 것을 압박할 것이 아니라, 그의 노력을 신뢰하고 그가 교회를 끌고 가는 길을 함께 걸으며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맺는말
필자는 본 논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리아 신심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을 네 가지로 나누어 분석해보았다. 물론 그의 신심의 뿌리들은 본 논문에서 제시된 것들 이상으로 많을 것이다. 다만 명백한 문헌적 자료에 근거하면, 여기서 다룬 네 가지야말로 교황의 마리아 신심을 본질적으로 형성한 요소들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카롤 보이티와는 체스토코바의 성모님으로 대표되는 마리아 신심으로 양육되었다. 청년기에는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을 통해서 마리아 신심을 강화하였고, 그 신심은 주교직을 수행할 당시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으로 다듬어졌다. 교황으로서의 주된 행보에서는 파티마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사안이 복잡한 만큼 본 논문에서는 네 번째 요인을 다루는 데 상대적으로 많은 양을 할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의 마리아 신심의 본질에 파티마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교황의 마리아 신심은 분명히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체스토코바는 카롤 보이티와에게 어린아이처럼 소박하고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마리아를 대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의 이성이 눈을 뜨고 학문적인 해답을 구할 때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은 그에게 마리아 신심의 교의적인 근본 원리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가 루도비코 성인에게서 신학적인 것만을 배운 것은 아니다. 루도비코 성인을 통해 카롤 보이티와는 자유의지로 마리아에게 온전히 의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에게 마리아를 교회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 공의회를 통해 얻은 교회적 관점으로 인해 그는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을 인도하는 마리아를 두고 “믿음으로 순례하다 pilgrimage of faith”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파티마는 공산주의와의 목숨을 건 사투에서 특별히 교황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 시대에, 또는 영원으로부터 계속되었던 여인과 뱀의 적대감이 극에 달하게 될 마지막 시대에, 또는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예언처럼(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51-54항 참조.) 마리아의 자녀들과 루치펠의 자녀들의 싸움이 정점에 다다른 시기에, 마리아가 교회의 보호자로서 숙명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을 파티마에서 인식했던 것이다.
우연히도, 몽포르의 루도비코 이 마지막 시대의 "사도들"에 관해 서술한 내용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따라서 루도비코 성인의 그 서술을 인용하며 본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러면 마리아의 자녀, 마리아의 봉사자, 마리아의 종은 어떤 사람들이겠는가? 그들은 하느님의 종들로서 활활 타는 불꽃처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의 불을 곳곳마다 점화시키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의 원수를 쏘기 위한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마리아의 강한 손에 쥐어질 것이다. 또 그들은 크나큰 시련의 불로써 깨끗하게 정화되고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여 하나가 된 레위의 자손들이 될 것이다. 마음속에는 사랑의 황금을 가지고 정신에는 기도의 유향을 지니고 몸에는 고행의 몰약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향기가 되지만, 세상의 부유하고 권력 있고 교만한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죽음의 악취만을 맡을 것이다.
마리아의 사도들은 성령의 아주 작은 입김에도 천둥치며 대기를 흐르는 구름이 되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놀라는 일도 걱정하는 일도 없이 하느님 말씀과 영원한 생명의 비를 내릴 것이 다. 그들은 죄악에는 벼락을 치고 세속의 것에는 폭풍을 몰아오며, 악마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번개를 내리꽂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의 쌍날칼을 손에 쥐고 모든 사람들을 찔러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고, 적에게서 전리품을 빼앗아 오기 위하여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유창한 언변과 능력을 받을 세말의 참된 사도들이다. 세상의 근심 걱정 없이 다른 목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편히 쉴 수 있으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도록 그들은 비둘기의 은빛 찬란한 날개를 받을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도하는 곳마다 모든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황금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리아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겸손과 사랑의 발자취를 따르며 세상을 업신여기는 참된 제자들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오직 복음 말씀에 담긴 진리를 믿으며 하늘 나라로 향하는 좁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애착을 가지는 일이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라도 그들을 유혹할 수 없으니, 그들은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 말씀의 쌍날칼을 가지고 어깨에는 피로 물든 십자가 깃발을 메고, 오른손에는 십자고상을, 왼손에는 묵주를 쥐고, 또 가슴에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새길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청빈한 삶은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이들이 바로 장차 다가올 위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리아가 아직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하느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과 회교도들을 회개시키셔서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불러일으킬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 질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아베마리아출판사, 56-59항.) E 박규희 옮김
(마리아지 2021년 9•10월호 통권 22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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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처 : 아베마리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