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사(進士) 이병(李炳) 묘갈명( 墓碣銘) 병서(幷序) / 26世
[생졸년] 1646년(인조 24)~1694년(숙종 20) / 향년 48
권상하(權尙夏) 지음
지난 광해조(光海朝) 때에 간옹(艮翁) 이공(李公)이 직언(直言)을 했다가 해도(海島)로 쫓겨났는데, 그의 맑은 명성과 곧은 절조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다. 그런데 간옹의 손자인 진사 병(炳)이 기사년의 화(禍)를 당하여 화색(火色)이 매우 치성한 가운데 서울 지역의 선비 수백 인을 거느리고 대궐에 엎드려 상소하여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이 무함 받은 것을 극력 변호했다가 죄에 걸려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으니, 사문(斯文)을 보위하고 세도(世道)를 다행스럽게 한 것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사대부(士大夫)들이 공을 아는 이건 모르는 이건 간에 모두 훌륭하게 여겨 감탄하면서 “명망 높은 할아버지의 기풍이 있다”고들 하였다. 나는 항상 공의 의리를 사모하면서 한 번도 공의 얼굴을 친히 접해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왔는데, 지금 공의 아들 중협(重協)이 공의 묘도문(墓道文)을 나에게 부탁하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행장(行狀)을 상고하건대, 공의 자(字)는 문보(文甫)이며,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드러난 성씨로서 신라(新羅)의 개국 공신(開國功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시호가 정순(靖順)인 휘 성중(誠中)이란 분이 백형(伯兄)인 정승(政丞) 경중(敬中), 중형(仲兄)인 제정(霽亭) 달충(達衷), 종숙(從叔)인 익재(益齋) 제현(齊賢)과 함께 모두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후 대대로 관록(官祿)이 끊이지 않았는데, 휘 난(鸞)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휘 유일(惟一)은 판관(判官)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이분들이 바로 공의 고조와 증조 양세(兩世)이다.
간옹의 휘는 익(瀷)인데,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지평(持平)ㆍ헌납(獻納)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장령(掌令)으로 벼슬을 마쳤으며, 고(考) 휘 인실(仁實)은 진사(進士)로 벼슬하기 시작하여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로 벼슬을 마쳤다. 비(妣) 숙인(淑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지평을 지내고 호조판서에 추증된 월성군(月城君) 원량(元亮)의 딸인데, 병술년(1646) 8월 1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번거롭게 가르치고 감독하지 않았고, 학업이 날로 진취되었으며, 시(詩)에 더욱 뛰어나서 한때에 동류들에게 추앙(推仰)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현종 9)과 을묘년(乙卯年, 1675년/숙종 원년)에 두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각각 예(禮)대로 상사(喪事)를 치렀다.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에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가 되었으나,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서 광릉(廣陵)의 갈피(葛陂)에 땅을 가려 집을 짓고는 날마다 그 안에서 시(詩)를 읊조리며 지냈다. 그 집 앞에 회(檜)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므로 그 밑을 깨끗이 손질하여 단(壇)을 쌓고 자리를 베푼 뒤 손님이 오면 함께 앉아 이야기하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 해를 마칠 뿐이었다.
그 뒤 기사년(己巳年, 1689/숙종 15)에 죄에 걸려 유배될 적에는 마치 운명인양 편안하게 여겨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해 가을에 마침 큰 가뭄으로 인해 석방되어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벼슬길에 자취를 끊고 문을 닫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세상에 나가 일할 뜻이 더욱 없었다.
그후 마침내 충주(忠州)의 선영(先塋) 아래로 옮겨가 살면서 오직 여러 자식들에게 학문을 강수(講授)하는 것만을 일삼았고,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서 왔다갔다 배회하며, 도를 즐기면서 자신이 늙는 줄도 모르는 뜻이 있었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숙종 20) 1월 26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는데, 향년이 49세였다.
배(配) 공인(恭人) 광주김씨(光州金氏)는 좌랑(佐郞) 진원(振元)의 딸로 정숙하고 조용하고 인자하여 매우 부인(婦人)의 행검이 있었는데, 공의 초상 때 지나치게 슬퍼하여 몹시 야윈 것이 병이 되어 3년 뒤인 병자년(丙子年, 1696년/숙종 22) 7월 5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5세였다.
공은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중국(重國)은 원명세(元鳴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의 백형인 통덕랑(通德郞) 휘 정(炡)의 후사로 출계하였는데, 공보다 1년 앞서 요절하였고, 딸은 계년(笄年: 비녀 꽂을 나이, 즉 15세임)도 못 되어 공보다 1년 뒤에 요절하였으며, 차남은 곧 알문(謁文)이란 사람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금 수찬(修撰)으로 있는데, 대사간(大司諫) 홍우령(洪禹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공을 처음에는 충주(忠州)의 선영 아래 장사 지내고 부인의 묘를 왼쪽에 합장했다가 뒤에 모군(某郡) 모향(某向)의 언덕에 옮겨 장사 지냈다. 공은 자품이 온화하고 후중하며 인품이 화평하고 순수하였는데, 친척들을 지성으로 구제하였고 친구 간에 신의가 있었으며, 사람을 접대하는 데에도 성의가 넘쳐 흘렀다.
공이 단천(端川)에 귀양 가 있을 적에는 북쪽 지방 인사(人士)들이 많이 공을 종유하여 배웠는데, 공의 상을 당해서는 그들 중에 최복(縗服)을 입고 삼년상을 마친 자도 있었다. 공이 평소에는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이 많지 않고 말수도 드물며 겸손하고 유순함이 마치 문을 반쯤 여는 처자(處子)와 같았으나, 대절(大節)에 임하여 대의(大義)를 지키는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맹분(孟賁)ㆍ하육(夏育) 같은 역사(力士)라도 그의 지조를 빼앗을 수 없었으니, 기사년의 일에서 보면 그 일단(一端)을 알 수 있다.
아! 공의 수립한 것이 이미 내력이 있고, 또 훌륭한 아들이 가학(家學)을 잘 이어서 젊은 나이로 벼슬에 올라 선비들의 기대가 대단하니, 공이 복을 다 누리지 않은 보답이 반드시 장차 후일의 경사에서 크게 발휘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손자가 할아버지 공적 이어 의리가 추상 같으니 / 孫繩祖武義秋霜
사류들이 흠송하여 그 성명 향기롭고 / 士流欽誦姓名香
대대로 바른 학문 전해서 옥서의 낭관 나왔기에 / 家傳正學玉署郞
내가 그 대강 간추리니 그 광채 무궁하리라 / 我撮其槩昭無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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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進士 李公墓碣銘 幷序) - 權尙夏 撰
往在光海朝, 艮翁李公以直言黜海島, 其淸名亮節, 至今耀人耳目。 艮翁有孫曰進士炳, 當己巳禍作, 火色炎炎之中, 率畿輔士數百人, 伏闕抗疏, 力辨栗、牛兩先生之受誣, 坐謫端川, 其衛斯文、幸世道者大矣。 士大夫知與不知, 莫不咨嗟歎息, 以爲: “有名祖風。” 余常慕其義, 而恨不得一接顔範, 今公之胤重協, 以公墓道之文見托, 余何敢以不文辭按狀公字文甫, 鷄林著姓, 新羅開國功臣謁平之後也。 入我朝, 有曰誠中, 諡靖順, 與伯兄政丞敬中、仲兄霽亭達衷、從叔益齋齊賢, 俱以文章德業名。 厥後世祿不替, 有諱鸞, 贈領議政、月城府院君; 諱惟一, 判官、贈左贊成, 寔公高、曾兩世也。 艮翁諱瀷, 仁廟改玉, 授持平、獻納, 不就, 卒官掌令。 考諱仁實, 以進士筮仕, 卒官翊衛司司禦。 妣淑人慶州金氏, 靖社功臣、持平、贈戶曹判書、月城君元亮之女, 以丙戌八月十七日, 生公。 幼穎悟好學, 不煩敎督而業日進, 尤長於詩, 甚爲一時儕流所推。 戊申、乙卯, 遭內外艱, 執喪如禮。 丁卯, 補上庠, 自是懶治時文。 卜築廣陵之葛陂, 日吟哦其中。 屋前有雙檜, 除其下築壇設席, 客至與坐, 話詩終晷而已。 己巳, 被謫, 安之若命, 略無幾微見於色。 秋, 適大旱遇赦, 歸則謝迹公車, 杜戶家居, 益無當世意。 遂搬移居忠州先壟下, 惟以講授諸子爲事。 良辰美景, 杖屨徜佯, 有樂而忘老之意。 甲戌正月二十六日, 卒于正寢, 得年四十九。 配恭人光州金氏, 佐郞振元之女。 貞靜淑惠, 甚有婦行。 公喪, 毁羸成疾, 後三年丙子七月五日卒, 壽五十五。 有二男一女: 男長重國, 娶元鳴世女, 出後公伯兄通德郞諱炡, 先公一年夭。 女未笄, 後公一年夭。 次男卽謁文者, 文科, 方爲修撰, 娶大司諫洪禹寧女, 有二男二女, 俱幼。 公初葬于忠州先塋下, 夫人墓祔左, 後改卜于某郡某向之原。 公資稟溫厚, 德宇和粹。 恤姻親, 信朋友, 接人誠意藹如。 其在端川, 北土人士多從之學, 及喪有服縗終三年者。 平居簡交遊, 罕言語, 退然若䦱戶之處子, 而至其臨大節仗大義, 雖賁、育不能奪, 觀於己巳事, 可知其一端矣。 嗚呼! 源遠者流長, 理之常也。 公之樹立, 旣有來歷, 而又有賢子克紹家學, 妙年通籍, 士望蔚然, 公之不食之報, 必將大發於後。 休哉休哉! 銘曰,
孫繩祖武義秋霜, 士流欽誦姓名香。 家傳正學玉署郞, 我撮其槪昭無央。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