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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인+간)] 히말라야 14좌 등정 부산 출신 산악인 김재수
김재수 대장은 코오롱스포츠 측에 최고급 카메라를 요구할 정도로 사진에도 조예가 깊다. 사진은 K2 등반 당시 정상을 앞둔 모습.김재수 제공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돌아와 있었다. 수차례 접촉을 했지만 평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한의 탐험가는 곧잘 국경을 넘어 히말라야 고산지역에 있곤 했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만나기를 청하자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로 오라고 했다. 부산 강서구 강동동의 중견 신발 안창 제조업체 '백산실업'. 사장실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 히말라야 8,000m 14좌를 오른 탐험가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김재수(50)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 대장. 그가 등산복이라도 입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은 취재진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캐주얼한 차림이지만 깔끔한 풍모를 풍기는 그에게서는 중견 사업가의 아우라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김 대장은 스스로도 사업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올 가을 히말라야 초오유 등반을 끝으로 연속 고산등반은 끝난 겁니다. 4년 5개월간의 장정이 끝난 것이죠. 지금은 백산실업 사장입니다."
목발로 겨우 걷던 아이
산동네 신문배달하며 체력 키워
누나 따라 나선 산행 매력 푹
부채바위서 등반기술 익혀
산 타기 위해 사업가로 변신
당찬 여자 고미영과 운명적 만남
매니저로 히말라야 10좌 함께 등반
#도전의 끝에서 비극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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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장은 지난 2009년 낭가파르바트에서 숨진 고미영 씨의 등반 매니저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고 씨가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에 봉우리 3개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하자 그는 혼자서라도 14좌를 완등하겠다고 약속하고는 히말라야에 머물렀다.
지난 4월 26일 그는 마침내 14좌의 마지막 봉우리인 안나푸르나에 오르며 약속을 지켰다. 그러고도 히말라야를 떠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등반에 남은 '멍에'를 걷어내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1993년 그는 14좌의 하나인 초오유를 오르면서 티베트 정부의 허가 없이 네팔에서 중국으로, 다시 네팔로 넘어가는 방식의 무단 단독등정을 한 바 있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시비는 그다지 없었지만 무허가 등반이라는 점이 두고두고 멍에로 남았다. 그는 지난 9월 다시 정식으로 초오유 등반에 도전, 정상에 발자국을 남김으로써 마지막 남은 멍에를 스스로 벗고 14좌 도전사를 끝냈다.
그가 도전을 끝내고 국내로 발길을 돌리려 할 때 한국 산악계에서는 잇따라 비극이 발생했다. 지난달 박영석 원정대가 안나푸르나에서 사고를 당한 데 이어 이달 들어 촐라체에서 김형일 원정대가 또 비보를 전했다.
김 대장은 박영석 원정대의 구조대 일원으로 현장을 누비고 김형일 원정대의 장례식장을 지키느라 취재진을 만나는 날에도 서울에서 겨우 시간에 맞춰 내려왔다.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후배들을 붙잡고 함께 울면서 "술 많이 먹지 말고 몸을 더 챙겨라. 체력을 아껴야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되뇌었다는 그. 그는 이번 사고로 한국 산악계가 침체를 겪지나 않을지 서글픔이 앞선다고 했다. 그도 한때 비극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그가 체감하는 슬픔의 크기는 더 커 보였다.
#목발로 겨우 걷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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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장은 영화 '친구'의 배경이 된 부산 서구 남부민동 산동네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부산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에 앞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들보다 먼저 14좌 완등을 이룰 수 있는 후보로 꼽혔다. 고산에서도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르는 체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강인함에 산악인들은 너도나도 혀를 내둘렀다.
강인한 체력은 어린 시절 겪은 사고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면서 1년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때 당한 사고로 인해 지금까지도 오른 다리가 왼 다리보다 길어 바지 기장을 달리해야 할 정도라니 당시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을 터.
겨우 목발로 걸음마를 떼던 그는 "이대로 다리를 절고 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내 목발을 던지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불편하나마 조금씩 달리기가 될 무렵부터는 오전 오후로 조석간 신문 배달까지 나섰다. 산동네를 누비며 하루 종일 신문배달을 하자 그의 다리는 어느새 철각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신문배달은 가계에도 보탬이 됐다"면서 "몇 년간 모은 돈으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운해에서 갈 길을 찾다
산에 인생을 건 산사나이 김재수 대장의 산행 입문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네 살 위 누나가 가입한 산악회를 따라 3월에 경남 밀양의 종남산을 오른 것이 첫 등반이었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장시간 쓰다 보니 무척 힘들다는 기억만 생생하게 남았다는 첫 등반.
그 일주일 뒤 다시 누나와 함께 산을 찾았다. 이번엔 경남 양산의 백운산 8푼 능선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야 하는 1박2일 산행. 산행의 피곤함으로 잠에 곯아 떨어졌다가 새벽녘에 일어난 그는 산에서 바다를 보고 말았다.
운해. 골짜기 사이로 파도처럼 굽이치는 새벽 운해 위로 마치 섬처럼 떠 있는 봉우리들을 보는 순간 그는 가야할 길을 찾았다고 했다.
일단 등산에 재미를 들이자 전문등반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암벽강습회가 있을 때마다 기웃거리며 청강을 하고는 독학으로 '바위꾼'의 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때부터 부산 금정산 부채바위는 그가 가장 즐겨찾는 등반 코스가 됐다. 그곳에서 산꾼들과 교류하며 실전 감각을 더욱 가다듬었다.
그러나 '악우(岳友)'와 약속 지키려 오르고 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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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이후 입대하기 전에는 5개월을 아예 부채바위 밑에서 살기도 했다. 그만큼 바위가 타고 싶었던 그였다.
그녀가 못다 이룬 3개봉
올 초 2전3기 끝 완등 성공
원정대 잇단 사고 구조대 활약
"한국 산악계 침체 걱정되지만
젊은이들 도전 계속될 것
모든 등반 힘들고 위험
훌륭하지 않은 도전은 없습니다"
#산을 타려고 사업을 하다
제대 이후 그는 23세의 나이로 신발부품 제조업체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25세에는 남들보다 일찍 결혼도 했다. 안정을 찾아가야 마땅한 이 시기에 그는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 오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었지만 원하는 때에 산을 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1987년 말 그는 회사를 나와 백산실업을 차리고 신발 안창 제조를 직접 시작했다.
다른 업체의 남은 일거리를 떼 와 처리하는 임가공까지 하면서 온 가족이 매달린 끝에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그는 다시 자유롭게 산을 찾았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가 되자 곧바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겸한 여행을 한 달간 다녀왔다. 세계 최고봉이라는 에베레스트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생긴 산인가 했더니 이렇게 생긴 놈이었구나."
이듬해 그는 오사카와 부산이 한·일 합동으로 꾸린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몸을 실었다. 8,000m 이상 봉우리 첫 등반. 현지에서 매일 마라톤 풀코스에 육박하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체력을 다진 끝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다른 대원들보다 한참 먼저 정상에 오르는 바람에 동료를 2시간 넘도록 기다린 일화는 산악계의 전설로 남았다. 그렇게 그는 1995년까지 시샤팡마와 초오유까지 8,000m 이상 봉우리를 세 차례나 올랐다.
#그리고, 고미영…
1995년을 기점으로 그의 대규모 고산등반은 휴지기를 맞았다. 수 개월이 걸리는 고산등반을 위해 해외로 나돌다 보니 가정과 사업 모두에 소홀히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07년이 돼서야 후배들에게 길을 터 준다는 심정으로 다시 후배들을 모아 대규모 고산원정대를 꾸렸다. 목표는 또 에베레스트.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산을 오름으로써 후배 산악인들에게 등반 스펙을 쌓게 해 주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때 운명처럼 그를 찾아온 산악인이 고 고미영 씨였다.
고 씨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마치고 난 뒤 그에게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밝히고 등반 매니저가 돼 달라고 부탁했다. 사업체를 가진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다 브로드피크에 한 번만 더 동행하기로 하고 파키스탄행 비행기에 올랐다.
브로드피크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시샤팡마에 한 번만 더 같이 가 달라는 고 씨의 간절한 부탁에 그는 또다시 동행을 허락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가 저절로 등반 매니저가 된 거지요."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도전은 이듬해 로체, K2, 마나슬루로 이어졌다. 2009년엔 마칼루, 칸첸중가, 다울라기리, 낭가파르바트 등 4개 봉우리를 단기간에 정복했다. 무리한 일정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의 속도였지만 그는 "고산적응이 돼 있는 상태에서 단기간에 여러 봉우리를 도전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며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고 씨는 낭가파르바트 등반 성공 이후 하산길에 추락사를 하고 말았다. 고 씨가 별도로 오른 초오유를 제외하고 10개 봉우리를 함께 올랐던 그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한 번만 산에 같이 올라도 '악우'라 부르며 끈끈한 동지애를 자랑하는 것이 산악인들의 정입니다. 하물며 히말라야 10좌를 함께 올랐는데…. 매니저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감에 눈물이 절로 났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처를 뒤로 하고 그는 다시 자일에 몸을 실었다. 고 씨가 못 이룬 14좌 완등을 자신이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차례의 도전에서 잇따라 등정에 실패하는 등 히말라야는 거푸 그에게 시련을 안겼다. 그 사이 코오롱스포츠와 함께 사재를 털어 고 씨를 기리는 화보집을 발간하면서 도전의지를 다졌다.
"늘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막상 산 정상에선 고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어요."
연속된 실패에도 그는 끝없는 도전을 감행했다. 결국 지난해 가셔브룸 2봉과 1봉, 올해 안나푸르나를 잇따라 오르며 고 씨와의 약속을 지켰다.
#왜 목숨을 걸고 오르는가?
고 씨의 사고를 비롯해 최근 잇따르고 있는 원정대 사고에서 보듯 고산등반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항상 죽음을 곁에 둔 '무모한 모험'에 가깝다.
김 대장은 모든 산악인이 죽을 각오로 산에 오르지만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막상 산사태 구간이나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긴 틈)를 지날 때는 살고 싶은 생각에 두려움에 떤다고 했다.
"산에 가면 가진 것만큼 떤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돈이나 가족 등 지켜야 할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위험에 더 떨기 마련이지요."
번듯한 사업체를 지니고 슬하에 3자녀까지 둔 그는 두려움이 그만큼 많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정상을 오르고 난 뒤 느끼는 만족감과 성취감은 다른 도전으로만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도전을 멈추기 힘들다고 했다. 일종의 '중독'이라고 그는 말했다.
14좌 완등을 이루고 사업가로 돌아온 이 시점에서도 그는 도전만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고산등반 뒤의 체력회복 속도가 느려지는 등 분명히 예전과 같은 몸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에 걸맞은 도전을 하겠다고 했다.
"모든 등반은 다 힘들고 위험합니다. 따라서 어떤 등반이든지 훌륭하지 않은 도전은 없습니다."
이상윤 기자 nurumi@busan.com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란 산소통과 고정로프, 고용인 등을 사용하지 않고 등반하는 방식을 이른다. 고산등반 시 고도를 오르내리며 흔히 이뤄지는 고산 적응과정조차 생략한다. 이른바 등반의 순수성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어떤 방식을 쓰더라도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등정주의와 다른 개념이다. 어떤 방법으로, 혹은 어떤 루트를 통해 올랐는지를 따지는 등로주의의 일환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산조차 해발 2,000m가 채 되지 않습니다. 만년설이나 거대 빙벽 따위를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자라며 적응해 온 외국의 산악인들과 우리 산악인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는 만약 등로주의나 알파인 스타일 등반이 중요하다면 모든 등반은 실패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고도 했다. 과정이 중요하므로 정상을 오르지 못한다고 해도 오른 만큼 성공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상을 오르지 못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실패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등정주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김 대장은 이런 등반철학을 바탕으로 내년께 히말라야를 등반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비용 자부담 방식으로 기획 등반을 실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체력과 능력이 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사정으로 갈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상업등반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김 대장은 "돈을 벌려면 사업만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왜 이런 일을 하겠느냐"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누구나 등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장애인들이 산에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 자연스럽듯이 히말라야에 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등반 순수주의의 잣대로만 볼 것은 아니지요." 이상윤 기자
첫댓글 김재수 대장~! 정말 자랑스러운 산악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