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산대놀이[松坡山臺-]
정의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전승되는 탈춤의 한 종류. 서울, 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양주와 송파 두 지역의 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주는 관원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송파는 장터의 장꾼들과 마을주민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주로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송파 장터에서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펼치던 놀이이다.
어원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으며, 거기서 가무백희가 열렸고 신라 진흥왕 이래 팔관회와 고려시대의 연등회에서도 펼쳐졌다.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이같은 국가적 행사를 담당하여 산대도감놀이가 성행하였다. 따라서 산대(山臺)는 ‘산과 같이 큰 무대’, ‘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송파(松坡)라는 지명은 송파나루 지역이 한강줄기의 굴곡이 심한 침식구간이어서 소나무숲이 우거졌던 송파 언덕이 점차 무너져 사람들이 언덕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생겨 붙여졌다고 전한다.
유래
산대놀이는 조선시대의 산대도감놀이와 산희(山戱)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산대놀이가 현실적 삶을 소재로 한 집단 놀이로 변한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종교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조의 산대도감놀이는 임진, 병자 양란 후 쇠퇴기로 접어들어 인조 이후에는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나례(儺禮) 규모도 작아지고,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조와 함께 청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의 산대 잡희도 열기가 식었으며, 영조 이후에는 결국 폐지되고 말았다. 그 후 산대도감의 창우광대(倡優廣大)들이 각기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본래 지방에서 전승되던 탈춤과 습합되어 산대도감 계통의 민속 탈춤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현존하는 산대놀이의 왜장녀와 소무 배역이 거론되고, 먹중과 파계승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산대도감놀이에서 오늘날 전승되는 산대놀이로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산대도감 폐지 후 산대놀이패들이 처음에는 애오개(현재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였으나, 점차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직골, 녹번, 구파발, 노들(노량진)에서 전승되다가 지금은 본산대의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이는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만이 전승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노들산대놀이에서 한강 뱃길을 따라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양주별산대놀이는 구파발산대놀이의 초청 연희에서 자체 놀이로 재구성하여 별산대놀이란 명칭이 생겨났다. 송파는 지리적으로 서울 근교 5대 한강 나루터(송파,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의 하나로, 수운(水運)으로는 강원도까지 배가 내왕하였고, 육운(陸運)으로는 보부상과 마행상들이 전국을 돌던 상업 지역이었다. 송파장은 을축년(1925) 대홍수 때까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었다. 이렇게 시장이 번창할 즈음 장판에는 되쟁이, 마쟁이(되나 말로 곡식을 되어주는 직업), 임방꾼(배에 화물은 싣고 푸는 직업), 잡심부름꾼, 술집, 운송점(마루하치: 화물창고와 주문처), 선원, 연초가공, 신탄상, 우시장 같은 갖가지 직업과 거상(巨商), 거부(巨富) 가 많아 그들이 추렴하는 기부금으로 매년 대소 명절과 장날에 산대놀이판을 벌일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자연히 기부금 또는 주점상들의 성금으로 매년 큰 명절 때 산대놀이를 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송파산대놀이가 상업적인 도시 가면극의 성격을 짙게 풍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송파산대놀이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의 뒷받침 아래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경인, 경부 철도가 생기고(1900년 전후) 천호동 광진교가 건설되어 교통수단이 원활해지자 송파진의 경기는 차차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과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신송파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송파산대놀이가 시들해졌다.
그 후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송파 옛 장터에서 전수하다가, 1985년 잠실 석촌호수 공원 안에 전수회관과 서울놀이마당을 건립하여 전승되고 있다. 지정 당시 연희자는 허호영, 김윤택, 이범만, 한유성, 이충선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작고하고 대를 이어 김학석, 함완식, 이병옥, 안병인이 전수하고 있다.
내용
송파산대놀이는 정월 초,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한가위 같은 명절과 장날에 주로 탈춤판을 벌였으며, 특히 5월 단오와 7월 백중에는 7일씩 춤판을 벌인다. 낮에는 줄 걸고(줄타기) 씨름붙이고 소리판을 벌이다가 산대놀이가 시작되면 먼저 길놀이로 송파장을 중심으로 송파산대기를 앞세우고 마을을 돌며 쌍호적, 징, 제금, 장고 반주에 산대패들이 춤을 추며 산대마당에 돌아와 탈을 늘어놓고 고사를 지낸다. 저녁이 되면 횃불과 모닥불을 밝히고 개복청(탈막)에 들어가 열두 마당 순서에 따라 배역들이 등장하여 춤판을 벌였다. 놀이 형태는 다른 탈춤과 같이 춤이 주가 되면서 재담과 창(唱), 몸짓으로 마당별로 각 배역이 탈을 쓰고 등장하여 판을 흥겹게 이끌어 간다. 반주악기는 삼현육각(장구, 피리 2, 대금, 해금, 북)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쓰지 않는 고형의 염불 12박 장단을 사용하고 있으며, 타령장단이 주가 되고, 굿거리와 당악장단으로 배역별로 춤을 반주한다. 탈은 바가지탈로 소나무 껍질로 요철(凹凸)부위를 붙이고 한지조각으로 여러 겹 붙여 말린 다음 단청으로 채색하여 보자기를 붙여 머리에 쓰고 묶는다.
송파산대놀이의 열두 마당과 배역별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당은 상좌춤놀이, 둘째 마당은 옴중, 먹중놀이, 셋째 마당은 연잎, 눈끔적이놀이, 넷째 마당은 애사당 북놀이, 다섯째 마당은 팔먹중 곤장놀이, 여섯째 마당은 신주부 침놀이, 일곱째 마당은 노장놀이, 여덟째 마당은 신장수놀이, 아홉째 마당은 취발이놀이, 열 번째 마당은 샌님말뚝이놀이, 열한 번째 마당은 샌님, 미얄할미, 포도부장놀이, 열두 번째 마당은 신할애비, 신할미놀이이다. 탈춤마당 진행은 먼저 길놀이로 용두기와 영기를 앞세우고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탈춤 배역 순으로 탈과 의상을 갖춰 입고 출연 배역 순서대로 줄을 지어 동네와 장터를 돌아 탈춤판에 도착하면 탈을 벗어 고사상 앞에, 양반 및 상좌탈은 맨 윗줄에, 팔먹중은 중간줄에, 여성탈은 아랫줄에 놓고 떡과 과일과 술을 진설하여 고사를 지낸다. 초헌과 아헌과 종헌을 하고 연희자 모두 절을 하고 축문을 읽고 소지한 다음, 떡과 술은 관객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개복청으로 옮겨 탈춤판을 정비하여 첫 상좌부터 춤판을 벌인다. 첫 상좌는 먼저 염불장단에 합장재배와 사방재배하며 천신께 춤판의 시작을 알리고 연희자와 구경꾼 모두 안녕을 빌고 탈춤판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춤을 춘다. 마당별로 전개하여 마지막 열두 마당에서 무당이 등장하여 신할미의 지노귀굿을 하며 막을 내린다.
춤사위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굿거리장단에 건드렁춤, 타령장단에 깨끼춤을 추는데, 깨끼춤에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닫이, 긴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지자춤, 양반까치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이 있다. 타령장단의 깨끼춤은 송파산대놀이의 기본이 되며 흥과 신을 풀어내는 춤이다. 집단적이며 민중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춤이기 때문에 주로 팔먹중, 취발이, 말뚝이와 같은 민중성을 띤 인물들이 춤을 춘다. 염불장단은 특수배역만이 추는 장단으로 첫 상좌의 합장재배와 사방재배춤, 옴중의 용트림춤, 노장의 복무(伏舞)가 있다.
의의
송파산대놀이는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의 세시풍습과 관련하여 농번기를 지나 며칠간의 농한기를 맞이할 때, 송파장에서 상인들이 추렴하여 상업적 번성을 목적으로 펼치던 서울지방의 탈춤이다. 송파산대놀이 열두 마당의 내용에 담긴 주제는 종교적 의식무와 양반에 대한 풍자, 파계승에 대한 조롱, 서민들의 애환, 처첩간의 갈등 같은 당시 사회상을 담고 있어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면서 교훈적인 내용을 탈춤으로 풀어내어 관객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여 즐거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趙東一. 韓國假面劇의 美學. 한국일보社, 1975년
李炳玉. 송파산대놀이 연구. 集文堂, 1982년
徐淵昊. 山臺탈놀이. 열화당, 1987년
출처:(한국세시풍속사전)
2024-12-1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