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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2:11-16절) 오직 믿음
사람들이 한번 나쁜 조직(組織)의 사람들에게 걸려들었다가 풀려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깡패 조직원이 되었다면,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친다고 해서 그 조직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그가 세상 끝까지 도망가더라도 누군가가 따라와서 다시 그를 잡아가든지, 아니면 죽이든지,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질(人質)로 잡힌 사람들이나, 노예(奴隸)가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자유(自由)를 얻기 위해서 도망치려고 하겠지만, 그를 아예 노치지 못하도록 늘 발을 쇠사슬로 묶어 놓든지, 아니면 쇠창살로 된 방에 가두어서 굶기거나, 고통을 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해적(海賊)들에게 노예(奴隸)가 되어서 자살(自殺)의 위기를 느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안(不安)이고 우울증(憂鬱症)이라는 병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크리스천과 소망이라는 사람이 허영(虛榮)의 도시를 벗어나서 천성(天城)을 향해서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의심(疑心)의 성(城)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은 거기서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절망(切望)의 거인(巨人)에게 붙들려서 지하 감옥(監獄)에 갇히게 되는데, 이 절망(切望)의 거인(巨人)은 일주일 내내 먹을 것이나, 마시는 것도 주지 않으면서 매일 몽둥이로 때립니다.
그런데 이 절망(切望)의 거인(巨人)에게 부인(婦人)이 있는데, 그 이름은 “자포자기(自暴自棄)”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이 두 사람을 자살(自殺)시키라고, 매일 더 때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완벽(完璧)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받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완전하게 초인적(超人的)으로 모든 것을 해낼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시하든지, 업신여기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초인적(超人的)으로 어떤 일을 해낸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 사람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결국 이런 사람에게는 뇌신경(腦神經)에 이상이 생겨서 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옛날에는 약(藥)도 없었고, 이것이 병(病)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물도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걸려 있는 완벽주의(完壁主義)라는 병(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노예(奴隸)나 완벽주의(完壁主義)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음란(淫亂)의 노예(奴隸)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적(性的)인 욕망(慾望)이나, 호기심(好奇心)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이런 욕망(慾望)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남녀(男女)가 칠 세만 되면, 같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 가나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에서 포르노를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어른들의 영화는 거의 다 이런 부류의 영화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미가 없는 줄 알고, 유익이 없는 줄 알면서도 음란(淫亂)의 노예(奴隸)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약(藥)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어떤 약(藥)들은 중독성(中毒性)이 있어서 그런 약(藥)을 끊으려고 안 먹으면, 너무 고통이 크고, 꼭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서 다시 약(藥)을 먹게 됩니다.
옛날에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엄청난 몸값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즉 죽도록 두들겨 맞든지, 아니면 칼에 찔리든지, 다리가 잘리든지,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보다 더 무서운 완벽주의(完壁主義)라는 노예(奴隸)는 매일 채찍으로 때리면서 더 완전해야 하고, 더 뛰어나야 하고, 더 늘씬해야 하고, 더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노예상태에서 우리를 해방(解放)시키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보혈(寶血)을 믿으면, 노예(奴隸)상태에서 해방(解放)되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보혈(寶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정글이나, 원시림(原始林)마을 같은 곳에 있는 사나운 표범은 나무 위에 있다가 누군가가 우물가에 오면, 덮쳐서 목을 물어 죽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에서는 개(犬)가 표범 냄새를 먼저 맡고는 주인에게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짖기도 하고, 옷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주인의 목숨을 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난 후에 다시 우리를 물어서 죄(罪)의 종으로 만드는 맹수(猛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맹수(猛獸)인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것이 유대교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마르틴 루터 때에는 천주교(天主敎)가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개신교(改新敎)가 얼마든지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시 할례(割禮)를 받거나, 우상숭배(偶像崇拜)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헌금(獻金)이나, 기도하는 것이나 세상에 성공(成功)한 것으로 자신의 공로(功勞)를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천년 전 기독교인들이 할례(割禮)를 받아야 진짜 신자냐? 아니면 할례(割禮)를 받지 않아도 진짜 신자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오백년 전에는 무조건 교황(敎皇)의 칙령(勅令)에 복종해서 면죄부(免罪符)를 사야 구원(救援)을 얻느냐? 아니면 성경에 없는 것은 믿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므로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과연 어떻게 믿는 것이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이냐? 하는 문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Ⅰ.복음을 노리고 있었던 적들
우리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면, 작은 함정(陷穽)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宗敎)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종교(宗敎)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은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宗敎)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종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버림받은 악인(惡人)중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엄청난 특권(特權)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어마어마한 계획(計畫)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메시야(Messiah)를 믿으면, 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인(罪人)들이 아무 공로(功勞)도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엄청난 일을 이렇게 선포(宣布)하셨습니다.
요1:12절)영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거짓말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約束)의 말씀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자기 주인(主人)으로 영접(迎接)하는 자는 인종(人種)이나 신분(身分)이나 남녀차별(男女差別)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權勢)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역시 전통(傳統)이나, 관습(慣習)이나,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관습(慣習)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은 하나님을 수천 년간 믿어오고, 할례(割禮)를 받아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수천 년의 전통(傳統)과 약속(約束)과 신앙을 다 버리고 마구잡이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을까? 이때 유대인들의 가장 표적(標的)의 대상이 된 사람이 곧 사도 바울과 디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니는 디도는 할례(割禮)를 받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 당시 할례(割禮)를 받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의 처지에서 보면, 완전히 동물원(動物園)의 원숭이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마 예루살렘 사람들은 할례(割禮)도 받지 않은 자를 구경하려고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유대인은 다 할례(割禮)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도만 할례(割禮)를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은 눈으로 사도 바울과 디도에게 무언(無言)의 압력을 넣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려면, 정식(定式)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이것이 정식(定式)이었던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로 영접(迎接)하기만 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主)님으로 영접(迎接)하기만 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즉 우리는 방언(方言)을 하지 않고, 할례(割禮)를 받지 않았고, 헌금(獻金)을 많이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에게 또 부담 스러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계시(啓示)보다 더 권위 있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절)...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9절)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시고 안 계시니까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권위 있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啓示)가 계속 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때 유력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더 권위가 있느냐? 아니면 계속 임하고 있는 계시(啓示)의 말씀이 더 권위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인간적으로는 이 사람들보다 부족하고, 한참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유명한 사람의 말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무리 중요한 사람이 뭐라고 말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아닌 이상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2:3절)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서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안디옥 교회에서 생긴 일로 베드로를 책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충돌이 아니고, 완전한 책망(責望)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적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공격이었습니다. 보통 어느 나라든지,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대개 스파이든지, 무국적자(無國籍者)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자신들이 가만히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보고, 새로운 것이 좋아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른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님을 영접(迎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유대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을 더 배운 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올바른 신자와 중요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더라면,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옛날 사도 바울이 변하기 전의 열심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할례(割禮)받지 않은 자들을 잡아서 전부 할례(割禮)를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2:4-5절)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 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에 들어와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면, 제대로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할례(割禮)를 받아야 하고, 율법(律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들을 종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즉 작은 그림을 보면, 잘 믿는 것 같은데, 큰 그림을 보면,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잠시라도 이들의 말을 듣지 않게 했습니다.
복음(福音)은 이론(理論)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福音)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迎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혹 넘어지면, 또 일어서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宗敎)의식의 프로그램을 배워서 신앙이 성숙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사람들을 종으로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상(思想)을 가르쳐도 안 되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도 안 됩니다. 오직 성경에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그대로 살게 해야 합니다.
Ⅱ.베드로가 넘지 못했던 벽
유대인들에게 가장 넘기 어려웠던 벽(壁)은 이방인이라는 벽(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수천 년 전부터 할례(割禮)와 율법(律法)으로 벽(壁)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아예 이방인과 결혼(結婚)은 물론이고, 접촉조차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壁)은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 벽(壁)을 뛰어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비교적 이방인의 벽(壁)을 넘기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이방인 지방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자라고,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방인들이 이웃이었고,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독한 유대주의의 분위기에서 자란 베드로나, 예루살렘 출신 제자나, 사람들에게 이방인은 넘기 어려운 벽(壁)이었습니다.
수리아의 안디옥은 세계 선교의 중심지였고, 수많은 인종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 안디옥 교회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보내어서 폭발적인 이방인 선교를 일으켰습니다(행13:2-3).
그런데 드디어 이 안디옥에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중심인물인 베드로가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안디옥 교인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고,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큰 격려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터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사탄(詐誕)이 틈타지 못하도록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베드로 즉 게바는 안디옥에 방문해서 이방인 교인들과 서슴치 않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면서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또 이렇게 할 만한 체험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넬료 가족을 방문한 경험이었습니다.
원래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교제에 아주 심한 거부(拒否)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욥바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환상(幻想) 중에 부정(不淨)한 것을 먹으라는 말씀이 나오고, 베드로는 이 명령을 거부(拒否)했습니다.
그리고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찾아와서“천사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있는 게바라는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고 하며, 그의 집에 갈 것을 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영감(靈感)으로“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해서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중에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성령(聖靈)이 임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가서 설교도 하고, 세례도 주었다는 것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문제가 되면서 베드로가 이를 해명(解明)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음식도 먹고 교제한다는 정보(情報)를 접하고는 그 자리에 기습적으로 방문을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 자리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유대인들도 두려워서 이 자리를 피하면서 이방인 신자들은 완전히 불신자(不信者)취급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2:11-12절)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레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아마 그들이 먹던 음식은 유대인들은 먹지 않는 음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한 상에서 먹는 것 자체가 부정(不淨)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인지도 모르는데, 이들이 갑자기 들어오면서 고발(告發)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베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딴 방으로 피했고, 다른 유대인들은 줄줄이 도망을 치고, 바나바 조차도 자기가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 신자들은 모두 이방인들이고, 부정(不淨)한 자들이고, 흉악(凶惡)한 죄인(罪人)취급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단 베드로부터 그들을 피하고, 유대인 신자들도 부끄러워서 숨어버리고, 바나바도 변명하니까 그들은 신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정면으로 책망(責望)했습니다. 유대인이 겁이 나서 함께 먹을 수 없거든, 아예 처음부터 양해를 구하고, 식사를 따로 하든지 해야지, 이방인들에게 왜 유대인들의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야단치고, 도망을 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책망(責望)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감하게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문화적(文化的)인 차이인데, 사실은 유대인들이 외식(外式)한 것이라고 책망(責望)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自由)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나중에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그것에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
Ⅲ.오직 믿음으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15절)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이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차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義人)이라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은 죄인(罪人)들이었고,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유대인들이 갑자기 쳐들어왔을 때, 옆방으로 도망을 쳤거나, 혹은 음식을 먹지 않는 체했던 것은 유대인의 처지에서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신사(紳士)나 숙녀(淑女)가 거지같은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다가 다른 사람들이 왔을 때, 사람들 앞에서 금방 그 아이를 모르는 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義人)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에 비하여 하나님을 알고, 비교적 깨끗하다는 것이지, 진짜 의(義)로운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깨끗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사람의 속을 보느냐? 겉을 보느냐?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즉 사람은 타락(墮落)하고 난후부터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타락(墮落)한 정욕(情慾)이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품고 유대인들은 몰래 죄(罪)를 지을 뿐이고, 이방인들은 아예 내놓고 죄(罪)를 짓는다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죄(罪)를 짓고 난 뒤에도 죄(罪)를 지었다고 말을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방인들은 죄(罪)를 지였다고 자랑하고 떠들어대는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목사(牧師)가 있었는데 그는<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군가 보는 사람이 있을 때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완전히 행동이 달 라 지게 됩니다.
즉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정욕(情慾)이 슬그머니 나와서 거침없이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목사가 이런 제목의 책을 썼다는 것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떳떳하게 행동을 한다는 뜻일까? 그래서 이 책은 많은 젊은이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그는 무려 15년 동안이나 어떤 여성과 적절하지 못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보는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행동이 달랐던 것입니다.
이 저자(著者)가 쓴 책이 또 있는데<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입니다. 자신도 너무 바쁘지만, 그래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죄인(罪人)입니다. 단지 이방인들이 오물통에서 뒹굴고 나왔다면, 유대인들은 옷 안에서만 오물이 들어있다는 차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다 죄인(罪人)이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의롭다”하시는 계획(計畫)을 선포(宣布)하셨습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죄인(罪人)중에 괴수(魁首)라고 고백하던 사도 바울을 통해서 발표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곧 인간은 공덕(功德)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의(義)로워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義人)이 되려고 하면, 공덕(功德)이라는 것은 전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즉 전에 나는 이렇게 믿었다거나, 기도를 얼마나 했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덕(功德)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유리한 것이 아니라, 절대로 천국(天國)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單獨)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과 일대일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쇠가 열쇠 구멍에 맞는 이유는 모든 것이 딱 맞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잘 맞았기 때문에 열쇠가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공덕(功德)이 전혀 없어야 하고, 다른 아무것도 믿는 것이 없어야 하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믿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 믿는 것 외(外)에는 일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자(養子)의 영(靈)을 주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물론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작은 계획(計畫)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計畫)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자꾸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즉 열심히 살다가 보니까 사업(事業)을 잘할 수도 있고, 교수(敎授)가 될 수도 있고, 목사(牧師)가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전부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2: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마르틴 루터는 처음에 의(義)로워진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罪)가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수도사(修道寺)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금식(禁食)하고, 철야(徹夜)를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연옥(煉獄)에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성인들의 뼈를 모았고, 구경을 했으며, 거기에 열심히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성물(聖物)중에는 예수님을 못 박은 못도 있었고, 죽은 성인들의 뼈도 있었고, 예수님을 누였던 여물통 조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이런 것으로는 양심(良心)이 깨끗해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과 갈라디아서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보다가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는 이 말씀이 비수(匕首)같이 그의 가슴에 와서 박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위하여 못 박히심으로 모든 죄를 다 치우셨습니다. 우리는 공로(功勞)나 공덕(功德)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고, 예수님 외(外)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救援)받는 것이 겸손(謙遜)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자랑을 모두 다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모든 자랑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진리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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