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의 얼굴이며, 한국인의 얼이 담긴 민족 스포츠, 마라톤! 그러기에 마라톤은 오랜 세월을 두고 국민의 열화 같은 사랑과 성원을 받아왔고
최고의 스포츠로, 또 최강의 스포츠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해 있는 것이 아닐까? 1930년대의 올림픽 스타 김은배, 손기정시대로부터
오늘의 황영조, 이봉주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마라톤 영웅이 탄생하여 불명의 위업을 달성할 때마다 겨레가 환호하고 강토가 진동해 왔다. 강인한
정신력의 소산일까, 아니면 체질적인 우수성 때문일까? 어쨌든 과학적인 이론으로는 풀기 어려운 무한한 저력을 한국 마라톤에선 찾아볼 수 있는데
마치 불가사의한 전설처럼 한국마라톤의 출발은 그 서막에서부터 열정이 흘러 넘쳤다. 파란만장했던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 속에 언제나 빛이 되었던
민족 스포츠마라톤! 그 빛나는 한국마라톤의 행보를 되돌아 보자!
한국 마라톤의 시작과 시련
1919년
2월 18일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체육협회가 발족되고, 1920년 5월 16일에 15종목의 육상경기 대회를 용산 신 연병장에서 개최하였는데, 경성
일주 마라톤(10마일)에서 최 홍석 선수가 우승하고 그 뒤로 경인 마라톤(25마일)에선 임일학 선수가 2시간 4분 11초로 우승하여 한국인의
기세를 올리며, 한국마라톤이 시작 되었다. 1920년 5월에는 종로의 중앙기독교 청년회 운동부주최로 경성 사립중등학교 육상 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는 우리나라 기관이 주최한 최초의 대회였으며, 체육 열기가 싹트기 시작한 당시 사회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정규 마라톤 풀코스에서 공인기록이
작성 되기는 1927년 제2회 조선 신궁경기 대회부터이다. 경성운동장에서 동대문, 청량리로 해서 망우리 고개 밑에서 되돌아 동대문에서 종로,
의주로를 거쳐 신 용산 전차 종점에서 반환하여 서울역을 지나 한국은행 앞을 통과, 을지로 입구에서 광희문을 거쳐 왕십리국민학교 앞에서 다시
되돌아 또 다시 광희문을 통과, 경성 운동장에 귀환함으로써 26리 4분의 1의 풀코스를 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 우리나라 최고기록이
공인되었는데, 바로 마 봉옥 선수가 세운 3시간 29분 39초였다. 풀코스 대회가 시작한 뒤로 많은 공식 대회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중앙일보사후원으로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풀 마라톤 대회는 34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중앙일보사 앞을 출발하여 경원가도를 달리는 코스로
시작되었다 다음 해는 4월 22일 경수가도에서 15명의 선수가 참가한 제2회 대회를 가졌는데, 양정고보의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4분51초 2로
우승하였다. 특히 이 해는 양종보고가 일본 신 자원에서 열린 전 일본 중등학교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한 해이며, 손기정 선수가 각종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때로, 1935년 제2회 대회에선 손기정 선수가 각종대회를 모조리 석권하였다. 그리고 일년 후, 민족의 영웅이 되었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손기정 선수는 2시간29분 19초 2로 우승하였고, 남 승룡 선수가 2시간 31분 42초로 3위로 입상하여 마라톤
왕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종합대회 이외의 마라톤 경기를 총독부에서 금지해 버림으로써 마라톤 대회도 4월 26일 제4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이후 한국 마라톤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과 괸련, 각 신문사가 폐간되면서 해마다 열어오던 마라톤대회를
열지 못했고, 광복을 전후한 국내 정국도 뒤숭숭해 마라톤에 미처 신경쓰지 못함으로써 22년간 기록 경신의 꿈이 좌절되는 마라톤암흑기가 이어졌다.
온 국민의 관심을 모으며 일찍이 민족스포츠로 자리 잡아온 한국의 마라톤은, 고난을 이겨낸 불굴의 민족혼을 상징하듯 줄기찬 전진, 전진을 거듭하여
일본의 기를 꺾은 것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장기와 금메달
나는 조선인 마라토너이다!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의 성화가
점화되었고, 대회 하이라이트를 이룬 마라톤 경기는 9일에 벌어졌으며, 선수단은 약 50일간 현지에서 전지 훈련을 하였다. '보다 높게, 보다
빠르게, 보다강하게'를 기원하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성화는 한층 더 열기를 뿜어내며 축제 무드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고, 1936년 8월9일
오후 2시 59분 (현지시간) 결전의 시각 또한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비스마르크 언덕을 넘어10kin 지점에
이르렀을 때 영국의 하버 선수를 따라붙었다. 아르헨티나의 자바라가 4년 간 독점해 온 월계관을 뺏기 위해 결정적인 순간을 노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 체력을 저축해야 했기에 차분한 출발로 10km 지점에서 하버를 잡고 15km에서 5위권에 들어서 반환점을 돌아나온 뒤, 자바라를 제친
손기정은 30km지점을 향해 내달렸다. 1시간 30분의 피나는 사투 끝에 29km지점을 분수령으로 손기정은 외로운 선두를 지켜 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력을 다해 골인점을 향해 달린 손기정! 그는 10만 관중의함성을 받으며 결국 결승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2시간 29분 19초" 이것은
손기정 생애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 숫자였고 세계 신기록 수립이었다. 그리고 약 2분 후에 영국의 하버, 그리고 수십 초 후 한국의 남 승룡이
우뢰와 같은 박수 속에 들어왔다. 1936년 8월 9일, 기나긴 자신과의 사투가 끝이 나고, 손기정의 머리에 승리의 월계관이 씌워지는 순간
스타디움 본부석 단상에 앉아있던 히틀러와 10만 관중들의 열화 같은 축하 박수 갈채가 다시 한번 베를린 하늘을 뒤덮었다. 두 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이긴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손기정과 남승룡이 세계 마라톤을 휩쓴 것에 대해 겉으로는 일본 체육의 개가라고 흥분해서 떠들었지만 내심으로는
시기와 질투로 못 마땅해 하였고, 일본 측은 손기정이 우승소감에 대해 매스컴과 인터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일본 대회본부는 올림픽 개최국인 독일
관영 라디오와 인터뷰를 단 한 번 허용했을 뿐, 그 밖의 서구지역 방송이나 신문들과 접촉하는 것을 일체 막았는데 이는 최고 영예의 월계관을 쓴
선수가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사실이 알려질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세계를 축제 분위기에 들뜨게 했던 올림픽 성화가 꺼지고
난 수일 후, 손기정 등 조선인 10여명이 베를린에 거주하던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봉근씨 댁에 초대되었을 때 '손 선수나 남 선수가 저
태극기를 달고 뛰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소'하며 안동근씨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는 여담도 전해진다. 손기정 선수는 우승 후, 독일 싸인 북에
'Seoul Korea 손긔정 KEE G SON'이라고 사인하여 추후 말썽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손기정이 비록 일장기를 달고 우승을 하였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이 조선인임을 알리고 싶어 했던 애국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또한 올럼픽 마라톤 우승은 손기정 개인에게는 경기인의 최고
영광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24세의 조선 청년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정신을 크게 일깨워주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