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 遼 王 朝 世 家
大遼(대요), 契丹(거란) AD, 1124(1132)∼AD, 1218 위치: 중앙아시아 種族(종족): 거란족 성: 耶律(야율)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AD, 1124∼AD, 1143 | 武烈皇帝(무열황제) | 耶律大石(야율대석) |
| 호사알로타 | 키르키스탄 |
섭정 | AD, 1143∼AD, 1150 | 感天太后(감천태후) | 蕭塔不煙(소탑불연) | 무열황제의 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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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대 | AD, 1150∼AD, 1163 | 景皇帝(경황제) | 耶律夷列(야율이열) | 무열황제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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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 | AD, 1163∼AD, 1177 | 承天太后(승천태후) | 耶律普速完(보속완) | 경황제의 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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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대 | AD, 1177∼AD, 1211 | 末皇帝(말황제) | 耶律直魯古(직로고) | 경황제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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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대 | AD, 1211∼AD, 1218 | 缺皇帝(결황제) | 쿠츨루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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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가 멸망한 직후 요왕조의 황족이었던 야율대석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거란 유민들을 이끌고 서역으로 이 주하여 건국한 나라이다. 실크로드의 무역로를 바탕으로 중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고국을 멸망시킨 원수의 국가인 금나라와 대립하였다.
제 1대 무열황제(AD, 1087∼AD, 1143)
야율대석은 요나라 건국자 야율아보기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AD, 1115년, 28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해 한린승지 라는 고위 문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당시 요나라는 금나라와 북송의 협공을 받아 국가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 문에 절도사에 임명되어 변경 수비대에 지휘를 맏게 되었다. AD, 1122년에는 천조제가 망명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소간 등 주요 장수들과 함께 연경(베이징)으로 이동, 北遼(북요)세력에 가담하였다가 북요가 무너지자 7천 명의 군대 를 이끌고 내몽골 지역으로 피신한 천조제와 다시 합류한다. 그 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혔지만 반년만에 도망치고, 전쟁을 주장하는 천조제와도 헤어지고 이후 철기병 2백여 명을 이끌고 오르혼 강으로 피난하였다.
야율대석은 이후 중앙 아시아 방면으로 서진하는 와중에 서요를 건국했다. 또한 AD, 1132년에 요나라 왕조 재건을 천명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연경으로 하였다. 고창화골을 속국화했다. AD, 1134년에는 동카라한 왕조를 속국 화하고 그들의 수도 발라사군을 서요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AD, 114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과 함께 서요는 짦은 전성기를 지나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섭정 소탑불연(AD, ?∼AD, ?)
서요의 섭정이자, 야율대석의 황후이자, 야율이열의 황태후다. 남편 야율대석이 사망 후 태자인 아들이 서요의 황제로 즉위했으나 아들의 나이가 어려서 蕭搭不煙(소탑불연)이 수렴청정을 하여 연호를 함청으로 바꾸고 7년 동안 섭정을 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재위 7년차에 아들 야율이열이 친정을 시작한다. 소탑불연이 언제 사망한지 기록이 남지 않아서 소탑불연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수렴청정을 거둔 것인지 이니면 소탑불연이 죽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사망할 때 感天太后(감 천태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제 2대 경황제(AD, ?∼AD, 1163)
야율대석과 감천태후의 아들이며, 승천태후의 오빠이고, 야율직로고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야율대석이 사망하자, 본인이 즉위해야 하지만 당시 나이가 어려 어머니 감천태후가 대신 7년 동안 섭정을 하 였고 나서야 정식으로 즉위했다, 동시에 연호를 소흥으로 바꾸고 18세 이상 백성들을 호적에 올려 84,500호를 확보 했다. 재위 13년차에 죽으면서 아들 야율직로고가 아직 어리다고 누이 승천태후가 대신토록 유언했다.
섭정 야율보속완(AD, ?∼AD, 1177)
서요의 태후이자, 섭정이며 감천태후의 딸이고 야율이열의 여동생이며, 야율직로고의 고모이다.
서요의 제 2대 황제 야율이열이 일찍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야율직로고가 아직 어려서 고모인 야율보속완이 야율직로 고를 대신하여 태후의 자리에 올라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러니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 지만, 아마도 야율이열의 황후가 요절해서 야율보속완이 대신해서 태후로 추대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권신 蕭斡里剌(소알리날)의 아들 蕭朵魯不(소탑로불)과 혼인했으나, 그의 동생인 蕭朴古只沙里(소박고지사리)와 사통하고 남편을 살해했다, 이에 AD, 1177년 아들의 죽음에 격분한 시아버지 소알리알이 거병함으로써 간통남인 소 박고지사리와 함께 반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시호는 승천태후이다.
제 3대 말황제(AD, ?∼AD, 1213)
서요의 제 3대 황제이며, 야율대석의 손자이자 야율이열의 아들겸, 야율보속완의 큰아들이다.
아버지 야율이열이 사망하자, AD 1177년에 즉위하였다. 잘 지배하고 있던 도중 칭키즈 칸의 몽골 제국에서 도망친 나이만족의 쿠츨루크가 서요로 망명해온다. 그는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그를 부마로 삼을 맘큼 우대했으나 점점 세력 이 크진 그는 급기야 황제의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결국 AD, 1211년 그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지만 곧 바로 죽진 않았고 2년 동안 명목상 태상황으로 대접을 받고 살다가 AD, 1213년 사망했다. 그가 퇴위하게 되면서, 거란족 야율 씨에 의한 지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제 4대 결황제(AD, 1156∼AD, 1218)
칭키즈 칸의 몽골 제국이 성장하자 몰골 초원의 패권을 둘러싸고, 그들과 다투지만 차카르마우트 전투에서 참패하고 아버지 타이양 칸 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쿠츨루크는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도주했는데 서요에서 그를 받아주어 서요의 망명객 신세가 된다. 서요의 황제였던 야율직로고는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을 정도로 우대해 줬지만 도리어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를 폐위시키고는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한편 그는 원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지만 서요에 망명한 후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요의 국교였던 불교 로 개종했다. 하지만 그는 이슬람교를 끔찍이도 싫어했고 황제가 된 후 이슬람교를 탄압하고 이슬람교 신자들을 무자 비하게 학살하면서 인심을 잃은데다가 그가 불교로 개종하자 그와 함께 서요로 귀환했던 나이만들까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이때 제배가 이끄는 몽골군이 서요로 쳐들어오자 그의 폭정에 불만이 폭발한 서요의 백성들이 수도 발라사군의 성문 을 열어버렸고, 몽골군은 손쉽게 발라사군을 접수하면서 결국 거란족 최후의 국가였던 서요는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쿠츨루크는 간신히 탈출해 파미르 고원쪽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바흐산 주에서 몽골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 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과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