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주곡은 1903년 가을에 완성되었고, 초연은 이듬해 2월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초연은 독주자의 능력 부족 탓에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어느 유력한 비평가의 지적처럼 곡 자체에 문제가 있기도 했다. 낙담한 시벨리우스는 악보(초판)를 거둬들이고 ‘연주 불가’를 선언했다. 그리고 1905년 여름에 작품을 대폭 손질하여 ‘개정판’을 마련했다.
보다 간결한 구성에 교향악적 색채를 강화한 개정판은 동년 10월 베를린에서 공개되었다. 카렐 할리르의 독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휘로 이루어진 이 또 한 번의 초연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후 시벨리우스와 친분이 있었던 러시아의 위대한 바이올린 스승 레오폴드 아우어와 그의 제자들, 특히 야샤 하이페츠와 같은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지지 덕분에 작품은 차츰 그 진가를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이 곡은 고금의 바이올린 협주곡들 중에서도 특히 바이올린다운 기능과 미감을 잘 살린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한때 바이올리니스트를 지망했던 시벨리우스였기에, 악기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다각적인 고찰을 토대로 오직 바이올린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음악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북유럽의 음산한 기운, 신비로운 마력의 협주곡
이 곡은 바이올린이 아니면 불가능한 여러 표현들과 다채로운 기교적 패시지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양단 악장들에서 약음기와 하모닉스의 효과적인 사용을 바탕으로 빚어낸 인상적인 음향들, 중간 악장에서 절묘하게 부각되는 바이올린 특유의 끈질긴 선율선 등은 특히 돋보인다. 비록 구성적⋅내용적인 면에서의 불균형, 부자연스러운 전조 등 일부 약점도 발견되지만, 북유럽 작곡가다운 개성적인 표현과 논리적인 어법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특유의 오묘한 분위기와 강력한 마력으로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제1악장 : 알레그로 모데라토, d단조, 2/2박자
내용적으로 가장 심오할 뿐 아니라 전곡의 절반을 점유하는 장대한 규모로도 돋보이는 악장. 독주 바이올린과 관현악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구축해가는 이 교향악적 악장의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다. 전체의 구도는 일종의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특히 제시부 직후에 놓인 대규모의 카덴차(독주 바이올린의 기량 과시를 위한 무반주 부분)가 마치 발전부와도 같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그밖에도 도입부에서 관현악의 신비로운 속삭임과 독주악기의 서정적 선율의 절묘한 어울림, 전편에 걸친 긴장감 넘치는 흐름, 그리고 재현부와 코다에서의 거대한 극적⋅교향악적 움직임 등등…. 이 첫 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주악기와 관현악의 섬세하고 긴밀한 짜임새와 인상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다. 치열하고 격정적인 몸짓으로 가득하면서도 기저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악장을 '북구의 빙산 속에서 타오르는 백열의 불꽃'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제2악장 : 아다지오 디 몰토, B♭장조, 4/4박자
마치 '숲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의 울창한 침엽수림을 펼쳐 보이는 듯한 목관 파트의 앙상블로 시작되는 아다지오 악장. 전편에 걸쳐 면면히 흐르는 바이올린 독주의 서정적 선율선에는 인간 영혼의 진솔한 고백과 깊숙한 내면의 토로가 서려있는 듯하다. 그리고 중간부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이제까지의 응어리를 일거에 터트리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
제3악장 :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D장조, 3/4박자
기묘한 느낌으로 가득한 스케르초 풍의 춤곡 악장. 다소 묵직한 리듬 위에서 사뭇 정열적인 춤곡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베버나 멘델스존의 요정음악을 연상시키는 독주 바이올린의 경묘한 움직임 위로 북유럽의 환상이 아련히 떠오르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북유럽적인 음산한 기운이 서려 있어 신비롭고 마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글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 교양강좌 전문강사
클래식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 역임.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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