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원소의 집안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했다. 조조는 원소의 부인 유씨와 원상의 처자를 안전하게 보호했고, 장졸들이 혹시라도 원소의 집안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재산과 보물이 있으면 다 돌려주게 했을 뿐더러 비단과 솜을 하사하고 쌀을 내려주어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지원했다. 고간이 병주를 들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오자 조조는 그를 다시 병주자사에 임명했다.
조조가 원상의 집안을 후대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의 맏아들 조비(曺丕)와 관련된 사건이었다. 조비는 자를 자환(子桓)이라 했는데 조조를 따라 업성 공략에 종군했다. 조비는 조조가 초현에서 낙향생활을 하던 시절 첩으로 맞아들인 변씨와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평4년(187년) 생이니까 업성이 함락될 당시 나이가 불과 열여덟 살이었다. 조비는 제법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나이 여덟에 문장을 지었고 장성함에 따라 고금의 경전과 제자백가의 글들을 읽고 그 뜻을 제대로 꿰고 있었으며 검술을 좋아했다. 다재다능하다는 점 이외에 또 다른 면에서도 조조를 빼닮았다.
업성이 함락되었을 때 조비가 제일 먼저 원상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조조의 맏아들답게 원상의 저택을 접수할 요량이었다. 성중에 난입한 조조의 병사들이 난리를 치고 있었으므로 집안에 있는 원씨의 처 유씨와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의 처 견씨는 대청마루에 앉아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 때 조비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들어왔다.
원희의 처 견씨는 깜짝 놀라 유씨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원소의 처 유씨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비비면서 살려 달라 애걸했다.
조비가 제법 위엄을 갖추고 꾸짖었다.
“유부인은 어찌 이같이 말하시오? 신부에게 명하니 고개를 들라!”
유씨가 떨며 곧 원희의 처에게 영을 받들어 머리를 들게 했다. 조비가 바라보니 천하의 절색이었다. 저도 몰래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한 눈에 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유씨가 말했다고 한다.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조비는 조조에게 간청해 원희의 처를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 이후 조비는 원희의 처 견씨를 맞이해 부인으로 삼고 매우 총애했다.
견씨(甄氏)는 중산(中山) 국 무극(無極) 현 출신으로 상채(上蔡) 현령을 지냈던 견일(甄逸)의 막내딸이었다. 견일은 한나라 태보(太保)를 지낸 견감(甄邯)의 후손으로 대대로 이천석(二千石)의 벼슬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다. 건안 연간에 견씨는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의 처로 간택되었다. 업성 함락 시 원희는 유주자사가 되어 외방에 나가 있었고 견씨는 업성에 머물면서 시어머니 유씨를 봉양하던 중이었다.
광화5년(182년)에 태어났으니 업성이 함락될 당시에는 이십 삼세였다. 조비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던 셈이다.
조조가 업성에서 뒷수습을 마쳤을 때 공융이 편지를 한 통 보내와 원씨 집안에 대한 그의 관대한 처분을 칭송했다.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후, 달기(妲己)를 주공(周公)에게 하사했습니다.”
조조는 공융의 박학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근거 있는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후일 공융을 만났을 때 그 내용의 출전을 물어보니 공융의 대답이 걸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