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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508호 | |
| 포덕 157년 |
5월 셋째주 화요시일 | |
발행처:천도교 동천교구 / 발행인:강병로 / 편집인:배영진 / 주소:부산남구못골번영로105(대연동) / 전화 (051) 628-1300 FAX : 624-0519 |
시 일 식 순
집례 : 중암 김대석 교화부장
▶ 청 수 봉 전
▶ 개 식 심 고
▶ 주 문 3 회 병 송
▶ 경 전 봉 독 -- 해월신사법설 ‘허와 실’(270~273쪽) ---- 허규태 학생동덕(2)
▶ 천 덕 송 합 창 -----------제16장 오관가(천덕송 36쪽, 1~2절)
▶ 설 교 신앙의 뿌리, 나의 아버지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 천 덕 송 합 창 -------송가, 고치강의 노래(천덕송 93쪽, 1~2절)
▶ 폐 식 심 고
* 음악준비 : 강수윤 학생동덕(2)
시 일
덕암 성강현 종학실장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5월도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많은 행사들이 있는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가족과 같이 행복한 시간을 가지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그 속에서 나의 자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이번 어버이날이 아버님이 환원하신지 꼭 한 달 만에 맞이하는지라 이전과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직도 시골집에 가면 아버님께서 문을 열어주시며 환하게 맞아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을 저의 아버님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나름 천도교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버님의 영향입니다. 저의 천도교 신앙의 출발점이 바로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성실히 천도교를 신앙하셨고 자식들에게 귀감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저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천도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도 아버님이 하는 천도교를 공부하고 싶다는 작은 효심에서 비롯되었고 먼 타향인 부산의 동천고등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버님으로부터 연유합니다. 자식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영향을 받지만 저의 아버님은 저를 포함한 자식들에게 특별했습니다. 그리고 천도교 신앙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며 자식들에게 전해 주신 분이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은 1932년 황해도 금천군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제법 유복한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고 합니다. 위로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 계셨는데 큰 형님과는 나이가 17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여서 누나들이 업어서 키웠다고 합니다. 아버님의 아버님, 그러니까 저의 할아버님이 부지런해서 일제강점기에 제법 많은 땅을 모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있었던 토지개혁 때 몰수된 땅이 있었다고 하니 중소지주쯤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을 지키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에 천도교에 입교했습니다. 천도교 입교의 요인은 해방이 되고 우리나라에 우리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나라를 세워야 된다는 바람이 황해도 시골 구석까지 불었던 것도 한 요인이 되었고 북한에 들어온 공산당이 인민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인민을 괴롭히는 것을 보지 못한 동네 분들이 대거 천도교로 입교하자 아버님의 큰 형님께서도 천도교를 택하자 아버님도 같이 천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천도교청우당의 군당강습회를 갔다 와서 금천군 좌면의 천도교종리원(지금의 교구) 총무를 맡아 6.25전쟁이 나기 얼마 전까지 근무를 했습니다. 전쟁 직전에 황해도 수안의 홀동광산에서 차출되어 광산일을 배우던 중 전쟁이 났다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형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8월 초에 마을에서 인민군으로 4명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해서 가족을 대표해 입대를 하셨는데 그 길로 어머님과 형제자매와 헤어져 돌아가실 때까지 결국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환원하셨습니다.
인민군으로 전쟁에 동원된 아버님은 충북 보은까지 내려와 후방경계 활동을 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자 후퇴명령을 받고 퇴각하던 중 속리산에서 국군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산으로 피신해 며칠 뒤 보니 국군이 그 지역을 접수해 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수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길로 부산 동래포로수용소를 거쳐 거제도포로수용소, 다시 군산의 포로수용소에서 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남한에 정착합니다. 아버님이 고향으로 가지 않고 남한을 택한 이유는 북에서 겪었던 공산치하는 사람을 구속하여 자유를 주지 않고 공산당원과 그 외의 사람을 차별하는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천도교의 인내천 진리를 익힌 아버님께서는 부모형제와 떨어져 살 수 있어도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채로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남한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아버님의 남한에서의 삶 또한 고단했습니다. 반공포로로 석방된 후 생계가 막막하자 국군에 입대하여 4년을 마치고 제대한 후 군대 동기의 도움으로 어머님을 만나 결혼했지만 처가의 구박에 전라도에서 혼자 길을 떠나 경상북도 문경의 탄광촌까지 돈을 벌기 위해 갔습니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 어머님께 연락해서 가정을 이룬 아버님은 얼마 후 지인을 따라 강원도 삼척의 탄광촌인 도계로 이주하십니다.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광부를 하면서 저희 5남매를 키웠는데 힘은 들었지만 자식들이 잘 자라서 행복했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하고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천도교 신앙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서울 파고다공원 뒤에 천도교총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쉬는 날 무작정 서울로 가서 수소문 끝에 총부를 찾아 신앙을 하고자 문의하여 지금의 동해시에 있는 천도교인을 소개받고 그 다음 주에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도계지역의 천도교인 몇 분을 소개 받아 다시 천도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저는 아버님 손을 잡고 교인들 집으로 가서 시일식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렇게 시작한 천도교 신앙은 이후 아버님의 제일 중요한 사업이 되었습니다. 척박한 탄광촌에서 제법 많은 포덕을 해서 도계에 교구를 세우고 교구장의 직책을 맡을 정도로 열정이었습니다. 당시 어머님은 집에 돈이 조금 모이면 교회 사업에 다 내다쓴다고 하면서 아버님에게 싫은 소리도 했지만 아버님을 천도교 포덕에 힘썼습니다. 결국에는 저희 집의 일부를 교당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저희 집에 총부의 간부들이 내려와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후 저희들이 강릉으로 진학하자 강릉으로 이사해서도 꾸준히 신앙 생활을 하시면서 강릉교구장을 맡아 교회를 발전시키셨고 저희들이 서울로 대학에 진학하자 서울로 이사해서는 관의교구로 이적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관의교구장으로도 봉직했습니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교인을 대하던 아버님을 교인들이 많이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김천의 복호동수도원이 비어있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는 아버님께서는 내가 마지막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아무도 없는 그곳까지 내려갔습니다. 저와 형제들은 아버님이 고생한다고 말렸지만 아버님께서는 내가 힘이 있을 때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싶다고 오히려 저희들을 타일렀습니다. 그렇게 복호동수도원에 내려가 5년간 교회를 위해 봉사하시고는 어머니 고향인 전라남도 구례로 이사해 소일하시며 보냈습니다. 작년에 아버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거뜬하게 일어나시어 가족들은 한울님의 감응이라고 다들 기뻐했고 의사도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건강하게 일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 기력이 없어진다고 걱정은 하셨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별달리 증상이 없어 자식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형제들이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여러 병원에서 수차 검사를 했지만 특별한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혈액암이라는 진단이 내려 항암치료를 받던 중 아버님이 회복하지 못하고 환원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시작하지 회복하지 못하겠다고 아시고 구례로 내려가자고 했지만 자식들은 미련이 남아서 마지막까지 병원에 의지하다 결국 병원에서 환원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들의 불찰이지만 아버님께서는 그 또한 순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버님은 평생 천도교를 몸으로 실천해 보여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저희들을 매로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해서 한번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지만 자식들을 매로 다스리기 보다는 잘 타일러 천도교적인 인간으로 자라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고 천도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어서인지 저의 형님과 저는 천도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가 되고 교회의 직책도 맡아 어느 정도 아버님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버님이 환원하고 보니 어쩌면 저의 삶을 아버님께서 설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아 다들 가족에 대한 감정이 있을 겁니다. 아버님께서 환원하시고 맞는 5월이 침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의 성령이 항상 저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버님의 성령이 한울님의 성령과 융합해 가족과 교회와 세상을 위해 좋은 기운으로 작용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도교의 성령출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항상 아버님을 교훈 삼아 천도교 신앙을 열심히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버님의 뜻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다들 부모님의 뜻을 잘 받들어 나가는 개벽군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4] 제508호 |
사계명(四誡命)
1. 번복지심(飜覆之心) 두게 되면 이는 역시 역리자(逆理者)요,
2. 물욕교폐(物慾交蔽) 되게 되면 이는 역시 비루자(鄙陋者)요,
3. 헛말로 유인(誘引)하면 이는 역시 혹세자(惑世者)요,
4. 안으로 불량(不良)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이는 역시 기천자(欺天者)라.
임사실천 십개조(臨事實踐 十個條)
1. 윤리를 밝히라. 2. 신의를 지키라. 3. 업무에 부지런 하라. 4.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 5. 빈궁한 사람을 서로 생각하라. | 6. 남녀를 엄하게 분별하라. 7. 예법을 중히 여기라. 8. 연원을 바르게 하라. 9. 진리를 익히고 연구하라. 10.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금하라. |
☞ 포덕157년도 동학사상논술대회 시상(5/24) : 지난 4월 5일 천일기념일에 실시되었던 포덕157년도 동학사상논술대회 수상자가 결정되었다. 1,2,3학년 각 학년별로 최우수상 1명, 우수상 4명, 장려상 10명 등 모두 45명은 오는 5월 24일 개교기념식 때 수상하게 된다. 참고로 각 학년별 최우수상은 3-9반 정유빈, 2-8반 김준우, 1-8반 문대윤 학생 등이다.
☞ 대남교구 야외시일식 실시(5/15) : 천도교 흥신포연원회 소속인 대남교구가 지난 5월 15일(일) 오륜대에서 야외시일식을 봉행하였다. 22명의 동덕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날 야외시일식은 안동한 대남교구 교화부장의 집례로 성강현 흥신포 직접도훈의 설교말씀으로 진행되었다. 시일식을 마친 천포형제들은 다함께 모여 점심식사를 한 후 근처 오륜대를 산책하며 따뜻한 봄기운을 만끽하였다. 이날 대남교구 야외시일식에는 우리교구에서 성강현 직접도훈을 비롯하여 강병로 교구장 내외, 김대석 교화부장 등이 참석하였다.
☞ 다음 화요시일식 순연(5/24, 5/31) : 다음 주 화요시일식(5/24)과 다다음주 화요시일식(5/31)은 개교기념식 및 체육대회와 교구 사정으로 순연키로 하였다. 따라서 다음 화요시일식은 6월 7일 봉행될 예정이다. 양해바랍니다.
■ 다음 화요시일 안내 ■
집 례 | 경전봉독 | 천덕송 합창 | 설 교 | |
봉독자 | 내용 | |||
기암 신원기교무부장 | 정원빈 학생동덕(2) | 해월신사법설 ‘心靈之靈’(274~277쪽) | 제17장 공락가(천덕송 38쪽, 1~2절) | 노암 강병로 교구장 |
송가, 포덕행진곡(천덕송 95쪽, 1~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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