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7일
어떤 사람이 콧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을 홀연히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줄 몰록 깨달았네.
유월의 연암산 아래 길에서
야인들이 하릴없이 태평가를 부르도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吾家
홀 문 인 어 무 비 공 돈 각 삼 천 시 오 가
六月燕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유 월 연 암 산 하 로 야 인 무 사 태 평 가
-경허 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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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경허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한국불교에서는 경허 스님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불교뿐만 아니고 식자층에서는 다 아는 고승이다. 그만큼 근대 한국의 불교,
한국의 선문화(禪文化)에 끼친 영향은 크기 때문이다. 5백여 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배불(排佛) 정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라와 고려를 내려오면서 그 화려하던 불교가 거의
멸절의 위기에 처했을 때 희대의 고승 경허 스님이 나타나서 선불교를 중흥시킨 것이다.
만공(滿空) 스님, 혜월(慧月) 스님, 수월(水月) 스님, 용성(龍城) 스님, 한암(漢巖) 스님,
혜봉(慧峰) 스님, 침운(枕雲) 스님 등이 모두 근세 한국 불교의 기둥들이었는데 그들이 역시
다 경허 스님의 법제자이거나 경허 스님에게서 수학하여 눈을 뜬 이들이기 때문이다.
스님의 속성은 송(宋)씨며 전주 출신이다. 9세에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여
계허(桂虛) 스님 밑에서 5년을 보냈다. 1862년 (철종 13)에 마을의 박 처사라는 선비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기초 불교 경론을 배웠다. 다시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萬化) 스님에게서
불교 경론을 배우면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였다. 만화 스님은 경허 스님에게 법을
전한 전법사다. 그리고 1871년 23세에 동학사의 강사가 되었다.
1879년 옛 스승 계허 스님을 찾아가던 중 천안 인근에서 폭우를 만났으나, 마침
돌림병의 유행으로 인가(人家)에 유숙할 수 없어 빗속에서 나무 아래 앉아 밤을 새우다가
생사의 일이 크고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시킨 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문 밑으로 주먹밥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서 밥만 얻어먹었다.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받쳐 놓고 졸음을 쫓으며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3개월이 되던 11월 15일, 곡식을 싣고 온 사람들이 벼 가마니를 내리면서
"중은 시줏밥만 축낸 관계로 죽어서 소가 된단다." "그러나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만
되면 되지."라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때 스님의 제자 원규(元奎)라는 사미(沙彌)가
이 말을 듣고는 전하면서 "시주의 은혜만 지고 죽어서 소로 태어나되 콧구멍 없는 소만 되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말에 경허 스님은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호서 연암산 천장사로 옮겨 와서 보림(保任)에 들어갔다. 그다음 해
33세가 되던 6월에 비로소 일대사를 마치고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위에 소개한 오도송을
읊었다.
깨달음의 순간이란 종잡을 수 없다. 일기(一機), 즉 어떤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의 기틀이
격발되는 경우가 있다. 할이나 방이나 꽃을 들어 보이거나 손가락을 들어 보이거나 하는
경우이다. 또 일경(一境), 즉 돌이 굴러가서 대나무에 닿는 것을 보거나 꽃이 핀 것을 보거나
바람 소리, 물소리를 듣거나 하는 경우에도 깨닫는다. 또 일언(一言)이라 하여 경허 스님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다가 깨닫기도 한다. 또 일구(一句)에서도
깨닫는데 경전이나 조사들의 어록에서 글을 보다가 깨닫는 경우도 많다. 육조 혜능 스님이나
영가 스님 같은 경우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인연으로 잠자던 마음이 격발한다.
깨닫고 나면 세상과 인생은 달리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를 뿐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허 스님은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깨쳤다. 깨닫고 나니 삼천대천
세계가 온통 나의 집이었다. 그전에는 나의 집은 절에 있는 작은 방 하나였다. 그렇다고
온 세계를 모두 자신 앞으로 등기이전을 한 것도 아니다. 털끝만 한 작은 변화도 없었는데
세상천지가 모두 나의 집이었다. 6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야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비로소
태평가였다. 자신이 부르거나 남이 부르거나 모두가 태평세월의 태평가이더라는 것이다.
장부가 할 일을 능히 다 마친 것이다. 이제 마음 놓고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