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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난 화가, 혹은 그림
이승하
이번 달에는 이영식의 「물랭루주에서 춤을」, 정재학의 「사진에 담긴 편지」, 고두현의 「바보 산수―운보와의 대화 1」, 이지엽의 「나무」, 박남준의 「나무, 폭포, 그리고 숲」, 김춘수의 「뭉크의 두 폭의 그림」, 박정식의 「에드바르드 뭉크의 여행」을 중심으로 논의해본다.
1. 툴루즈 로트레크와 파울 클레
고전주의ㆍ낭만주의ㆍ사실주의ㆍ표현주의ㆍ아방가르드ㆍ초현실주의……. 시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 회화의 역사는 문예사조사와 그 궤를 같이해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특히 시는 고전주의 태동기부터 회화와 부단히 영향을 주고받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괴테의 첫 번째 저서는 『독일의 건축 예술에 관하여』였고, 특히 『색채론』은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심혈을 기울여 쓴 역작이었다. 극작가와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실러는 『칼리마스, 혹은 미에 대하여』『인류의 미적 교육에 대하여』 등 예술론 관련 저서를 여러 권 펴냈다. 루오와 마티스는 보들레르와 동시대인으로, 『악의 꽃』의 삽화를 그려 우정을 표현하였다. 시인 장 콕토가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 모델 중의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였다는 것, 시인 막스 자코브가 모딜리아니와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로 삼각관계식의 우정을 나누었다는 것, 그리고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라울 뒤피ㆍ파블로 피카소ㆍ마르크 샤갈 등 화가들과의 우정은 유명하다. 게다가 로트레아몽의 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는 20세기 초반의 많은 시인과 화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초현실주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하였다. 서구 사회에서 문학과 회화는 이처럼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다. 얼마나 많은 시가 그림의 소재가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그림이 시의 소재가 되었던가!
우리나라의 경우, 마르크 샤갈ㆍ에드바르드 뭉크ㆍ파블로 피카소ㆍ빈센트 반 고흐ㆍ조르주 루오 등의 그림에서 시적 영감을 얻은 시인들이 여러 명 있다. 이중섭은 친구인 구상 시인의 가족을 그리기도 했지만 역으로,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을 소재로 삼은 시도 적지 않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번에 읽은 10여 권 문예지에는 화가의 이름이 종종 나와 시와 회화와의 관계를 탐색하며 월평을 써볼까 한다.
고층빌딩 사이 뛰어내린 눈발
착지할 곳 몰라 골목길 기웃거린다
이력서 내는 짓도 이력이 난 우리는
어깨 위 분분한 눈송이를 내몰고
포장마차 꼼장어 연기 속으로 들어섰다
물랭루주에서 서울 먹자골목까지 흘러온
금발머리 여자, 한 해의 마지막 장
달력 안에서 춤추고 있다
이영식의 「물랭루주에서 춤을」(『시안』, 봄호)의 제1연이다.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르를 주름잡았던 절름발이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살롱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기 연예인과 어릿광대들을 많이 그렸다. 후기에는 포스터와 석판화를 주로 그려 순수회화의 개념을 뛰어넘은 화가로 특히 유명하다. 그런데 이영식이 그린 세계는 19세기 프랑스의 화려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서울 강남의 먹자골목, 포장마차 안에 걸려 있는 달력에 나온 금발의 여자가 마치 로트레크의 그림에서 본 그 금발머리 여자 같을 뿐이다. 이 시의 화자는 ‘우리’라는 복수로, 모두 고학력 실업자이다. 이력서 내는 짓에 이력이 난 우리는 소주 몇 병과 씨름을 해도 도무지 취하지 않는다. 달력 속 금발은 로트레크 그림 속의 여인처럼 빨간 스타킹을 신고 있고, 반라의 어깨를 내보이며 춤추고 있다. 그 세계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면 인공의 세계이다. 현실세계에서는 폭설이 퍼부어 가락국수처럼 길이 뚝뚝 끊기고, 덜미 잡힌 차량들이 주저앉아 있다. 물랭루주의 춤과 대비되는 ‘우리의 꿈들’은 다시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 아닐까.
물랭루주에서 강남 포장마차까지 흘러온
춤, 착지하지 못한 우리의 꿈들이
건너편 암소갈비집 겨울나무 가지에
한 움큼씩 알전구를 물고 있다
폭설 속에서도 포장마차 건너편 암소갈비집 앞의 전구는 여전히 불을 환히 밝히고 있다. 양지와 응달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공존하고 있게 마련이다. 해외여행 증가의 이면에는 대량실업 사태라는 응달이 있다고 독자에게 말해주기 위해 로트레크의 그림 한 폭을 끌어온 시인의 미적 감각이 무척 참신하게 느껴진다.
정재학의 「사진에 담긴 편지」(『창작과 비평』, 봄호)에는 화가의 이름이 나오지만 시와는 별 관련이 없는 듯하다. 체험과 상상력, 혹은 영상과 활자의 교직이 절묘하다고 여겨져 유심히 읽어보았을 뿐,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의 이름이 나와 있어 다루게 된 시는 아니다.
당신이 찍은 사진을 현상했어요
기억나시죠? 같이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말이에요
당신이 찍은 바구니 오브제마다 노란 비옷을 입은 여자가 한 명씩 들어가 있지 뭐예요 얼굴이 명확히 찍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눈 속에 있는 고장난 버스를 볼 수 있었어요 지금도 덜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답니다 사진을 서랍 속에 넣어두어도 계속 소리가 들려요
시의 제1연만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편지투의 시라는 것, 같이 미술관에 갔던 날 당신이 찍어서 준 필름을 현상했더니 묘한 사진이 몇 장 나왔다는 것 정도만을 알 수 있다. 시의 제2연이 무척 재미있다. 당신은 사진사이지만 시적 화자는 결혼식장 비디오 촬영기사이다. 편지에 쓰기를, 오늘 내가 찍은 신랑 신부는 떨려서 표정을 잡지 못하겠다며 미안해했고 나는 무척 좋으니 염려 말라며 열심히 찍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랑 신부는 장님이기 때문에 내가 찍은 건 그들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짐짓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쓴 뒤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마무리한다.
파울 클레의 그림 ‘지저귀는 기계’ 앞에서
저 찍어준 것 기억나세요?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말이에요
현상한 사진에 저는 없고 당신의 시선만이 있더군요
그래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클레의 그림 「지저귀는 기계」는 기계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화로 알려져 있는데, 그 그림의 의미는 시에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편지에는 이별의 슬픔과 안타까움, 혹은 나를 버린 당신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담겨 있다. 클레의 그림 앞에서 찍은 그 사진은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현상한 사진에 나는 없고 “당신의 시선”만이 있다. 이미 내게서 마음이 떠난 당신이 나를 사진의 중심에 놓지 않아 화가 난 것이고, 그래서 편지에 그 사진을 동봉하여 당신에게로 보낸다고 하니 이 시는 일종의 절교장이다.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는데, 철사로 만든 듯한 네 마리 새가 각자 딴 곳을 보며 우는 클레의 그림 「지저귀는 기계」를 떠올려보니 이 시가 그림과 완전히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관계의 불연속 내지 사랑의 쌍곡선이 이 시의 내용이라면 「지저귀는 기계」는 상징성을 충분히 지닌다. 시의 제목이 ‘편지에 담긴 사진’이 아니고 ‘사진에 담긴 편지’인 것이 또한 흥미롭다. 내가 쓰는 편지도 절교장이지만 사진에 담긴 편지(즉, 사진 바로 그것)는 혹시 나에게서 마음이 떠난 당신의 절교 메시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사진 속, 얼굴이 명확히 찍히지 않은 여자는 시적 화자일까, 당신의 관심이 옮겨간 여자일까? 의문이 증폭되니 시가 더 재미있다.
2. 김기창과 남궁산
고두현의 「바보 산수―운보와의 대화 1」(『작가세계』, 봄호)은 최근에 작고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듬고 있다. 김기창은 일곱 살 때 장티푸스로 농아와 귀머거리가 된 화가이다. 그러나 완전한 농아는 아니어서 어눌하게나마 의사 표현을 하며 살았다. 제1연 2행에는 20세기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동양화가 김기창의 한스런 생애와 죽음이 응축되어 있다.
20세기 말 둥근 유리 지구, 흑백 진공관 속으로
무성영화 돌리며 빨간 양말 한 켤레 걸어가네.
당장, 구화(口話)를, 배워야 해. 네, 미래는 저,
하늘…만큼 크지만, 네, 장애는 바늘…구멍보담
작은걸, 말을… 할 줄…알면, 내가, 이, 다음에
꼭…취직, 시켜, 줄게.
충북농아복지회 유리창 밖으로 깃 하나 떨구고
호르르 날아가는 멧세, 저 귀먹고 눈 총총한!
시는 제2연에 이르러 방향을 완전히 틀고서 김기창의 말을 받아 적고 있다. 아마도 화가는 충북농아복지회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모양이고, 시인은 그 현장에 있었던 모양이다. 구화를 열심히 배워 장애를 극복하기 바란다는 격려사의 내용 일부를 적은 것이 제2연이다. 너의 미래는 저 하늘만큼 크지만 너의 장애는 바늘구멍보다 작다는 말을 화가는 직접 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김기창이 지독한 노력형의 화가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화가의 끊임없는 변모는 ‘천부적 재능’의 소산이 아니라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의 결과물임도 두 번째 연에서 아울러 알게 된다. 그리고 화가는 농아들에게 구화를 열심히 익혀서 찾아오면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 가서 멧세 한 마리에 빗대어 인간 김기창을 다시 한번 예찬한다. “귀먹고 눈 총총한” 화가 김기창, 그는 충북농아복지회 유리창 밖으로 깃 하나 떨구고 호르르 날아가 버렸다.
이지엽의 「나무」(『시와 사람』, 봄호)는 부제가 ‘운보 김기창(1914∼2001)’이고, 마지막 제4연이 “오늘, 바보가 무척 그립다”이다. 김기창의 수많은 그림과 한 많은 생애가 단 4연에 그대로 압축되어 있다. 시는 이래서 놀라운 축소 지향의 예술이다.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 죽은 것
그림도 진짜 그림은 말하는 거
아니 칡덩굴 엉킨 걸레 같은 삶이라도
농주 같은 웃음 한 사발로 넘길 수 있는 거
웃다가 웃다가, 웃는 눈가 찔끔 눈물 나는 거
시의 제1연은 김기창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도 ‘天衣無縫’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지엽은 어린이처럼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하고, 감정을 드러낼 줄 알고, 무엇에 구애됨이 없는 화풍을 위 6행으로 표현한다.
할 말 다 쌓아 붓끝으로 풀어내며
수묵 짙은 한국 산하 울리고 가는 저 사람
두벅두벅 황소 걸음으로만
우먹우먹 황소 눈빛으로만
말하는 사람
웅장한 산맥과 폭포들의 소리
저 신(神)의 소리 들을 수 없어도 그 소리 죄다 받아내어
한쪽은 새떼들 불러와 한나절 놀고
한쪽은 떼내 우향의 처마에 걸어두고
북녘 땅 동생을 향해 웃는 저 어린이
제2연에는 농아와 귀머거리로 살아가면서 겪었을 불편함과,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을 그림을 그리면서 극복한 김기창의 초월의지가 잘 담겨 있다. 여기다 용모와 성격 같은 것도 아울러 그리고 있는 일종의 인상기이다. 김기창의 아내 박래현은 호가 우향(雨鄕)으로, 1976년 연초에 작고하였다. ‘바보 산수’ 연작은 아내의 죽음 이후에 봇물 터지듯 나온 작품이므로 그리움이 솟구쳐 탄생한 그림들일 것이다. 김기창의 회한은 장애인이라는 것과 노년의 상처(喪妻)에 그치지 않는다. 북녘의 동생을 평생을 두고 보고 싶어하다 남북이산가족 단체 상봉단의 일원으로 남에 온 동생을 의식이 혼미한 중환자 상태로 만나는데, 반갑다는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화가는 동생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던가 보다. “북녘 땅 동생을 향해 웃는 저 어린이”라는 표현에는 김기창이 동생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생애를 완성하였고, 그래서 천진하게 웃으며 저승길로 갔으리라는 시인의 생각이 담겨 있다. 김기창이 가고 없는 세상에서 이지엽이 정작 그리워한 것은 재물욕 명예욕 다 버리고 오로지 바보같이 그림만 그렸던 화가의 순수한 예술혼, 그것이 아니었을까.
미루나무가 서 있는 강 길을 걷는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 둘 흔들리며 내걸리는 불빛들,
흔들리는 것들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구나. 그래 별빛, 흘러온 길들은 늘 그렇게 아득하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이렇게 시작되는 시가 있다. ‘남궁산의 판화를 보고 쓰다’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 「나무, 폭포, 그리고 숲」(『실천문학』, 봄호)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몇 폭의 그림이다. 시의 화자는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세상 밖의 외돌토리이다. 고립된 삶을 즐기고 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내심 사람과의 관계에 목말라한다. 고개 끄덕이며 얘기 듣는 일, 들뜬 마음으로 고백하는 일, 체온을 나누는 일, 상처를 주고 상처받는 "세상의 일"을 몹시도 그리워한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숲으로 가는 길을 내달리다 쓰러진다. 무릎을 꿇고 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며 손짓하는 그 나무들의 숲에 다가갔다. 숲을 건너기에는 내 몸은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나간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면들.
무릎을 꿇었다. 꺾여진 것은 내 무릎만이 아니다. 울컥울컥 울컥울컥 너도 어느 산천의 하늘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냐. 산비둘기의 울음이 숲을 멀리 가로지른다.
극적 전환은 방금 인용한 2번보다는 3번에서 보다 선명하게 이루어진다. 길이 끝나는 곳에 폭포가 있다. 화자는 그 밤에 폭포를 본 것이다. 아니, 판화 속 폭포를 본 것이다.
구비구비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구비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 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폭포를 보고 나서 화자는 타인과의 관계 부재에 대해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게 된다. 스스로 깊어져 수직의 삶을 이룬 저 나무와 폭포의 정신에 깊이 공감하며 일체를 이룬다. 내가 누구와 만나 사랑하고 증오하지 않아도, 살 섞은 뒤 이별하지 않아도 모든 관계로부터 초월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모든 관계를 이룰 수 있다.
내 안의 그대, 산다는 것은 가까이 혹은 멀리 마주보고 있는 것.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것. 말없는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주는 것. 변함없는 것. 나뉘지 않는 것. 눈을 감을수록 밀려오는 것. 밀려와 따뜻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며 오래오래 잊지 않는 것. 함께 가는 것.
그러면 되는 것이다.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며” 오래오래 잊지 않고 함께 가면 “비로소 숲을 이루는 것이다”. 진정한 관계는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부박한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온전한 자아를 갖춘 이후에야 그대 앞에 서서 ‘우리’를 이룰 수 있다. 바르틴 부버의 여러 권 철학서가 이 한 편의 시에 압축되어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아무튼 「나무, 폭포, 그리고 숲」은 읽으면 읽을수록 뜻이 깊어져 감동의 강을 이루고 깨달음의 숲을 이루는 시이다. 시가 주는 이런 감동과 깨달음에 나는 얼마나 목말라했던가. 남궁산의 판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제 떠올릴 수 있다. 강 저편의 푸른 미루나무들을,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꽂힌 뒤 깊은 물을 이루는 폭포를, 그리고 함께 걸어감으로써 이루는 관계의 숲을.
3. 에드바르드 뭉크
원로 시인 김춘수의 신작과 신인의 등단작에 모두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이름이 등장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연세 여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젊은 시인 못지않게 활발히 시를 쓰고 계신 김춘수의 신작은 「뭉크의 두 폭의 그림」(『문학과 사회』, 봄호)이다.
그의 기차의 煙氣라는 그림에는
기차도 연기도 없다.
산비탈 아스름히 길이 나 있다.
그의 소리라는 그림에는
소리가 없다. 그
넓고 넓은 벌판을
한 무더기 억새가 흔들어댄다.
바람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데
바람 때문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 시가 너무 난해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뭉크의 그림을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의 그림 「소리」에는 넓고 넓은 벌판도 없고 바람에 흔들리는 한 무더기 억새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소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 기둥과 여인, 소나무 아홉 그루가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뭉크가 한 말을 전한다는 뜻으로 쓴 "바람 때문이라고 한다"도 시인이 그렇게 상상했을 뿐, 직접적인 인용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김춘수의 이 작품은 뭉크 같은 화가도 그러했지만, 이 땅의 시인이라면 가시적인 세계를 초극해서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닐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면 신은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현대의 회화 작품을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만 그려서 성공작이 된 것은 거의 없다. 자연과 초자연, 현상과 상상, 사물과 사상, 가시적인 세계와 불가시적인 세계와의 관계를 논했다고 여겨지는 김춘수의 이 작품은 독자를 위한 다소간의 배려가 곁들여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에드바르드 뭉크의 여행」(『시안』, 봄호)은 박정식의 등단작 5편 중 제일 앞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알기로 뭉크의 「여행」이라는 그림은 없으므로 뭉크의 화집을 감상한 결과 이런 제목이 탄생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시인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화가, 아니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화가 뭉크의 화집이 준 인상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동안 내가 머물렀던 집은 헐리고 내 이름도 잊어버렸다 나는 화산을 지나 빙하에 이르렀다 나를 지켜준 체온계는 빈혈을 앓고 심장에서 외출 나간 핏줄은 돌아오지 않았다 멈춰진 시계가 발걸음을 붙잡고 나침반은 약속을 저버렸다 소실된 바다 위로 하얀 얼굴만이 증표로 떠 있었다 나는 빙산의 모서리에 귀를 대고 내 주소를 물었다 (하략)
두 개 연으로 되어 있는 시의 앞 연에서 시인은 이렇듯 암담하기만 한 자신의 내면세계를 해부하고 있다. 나는 기억상실증의 행려병자로, 공포감에 전율하고 있다. 분열된 자아는 "가늠할 수 없이 커버린 내 몸의 틈새로 어둠이 스며들어 나는 나를 지웠다"고 전면 부정하기에 이른다. 시의 제2연은 뭉크의 「절규」를 연상케 한다. 육교 위에서 귀를 틀어막고 있는 깡마른 사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은 딱 벌리고 있는 사람. 시는 그러나 그 겁에 질린 사람이 육교를 내려온 뒤의 얘기를 하고 있다. 「절규」의 주인공은 그 뒤 어떻게 된 것일까.
육교를 내려오자 세상의 날카로운 기울기는 비틀거리는 무릎을 잘랐다 보이지 않는 사슬에 이끌려 밖으로만 치달았던 그들에게 저 육교는 한 발자국도 오르지 못한 구름다리였거나 까마득한 날 거대한 공룡으로 새겨졌다 핏빛나무 아래 작은 사람들은 제 키보다 큰 손으로 실족한 햇살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처럼 시는 서서히 밝아져 간다. 뭉크는 전 생애를 통해 시종일관 고통과 죽음과 불안을 테마로 하여 그림을 그렸지만 시인은 그 세계를 답습하지 않고 재편한다. 어떻게? “무너질 듯 지워지지 않은 얼굴들이 제 길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과 “등 뒤로 부석거리는 뼈를 적시는 빛의 소리가 들렸다”는 마지막 두 문장은 희망에 대한 암시임에 틀림없다. 뭉크는 고통스런 세계를 고통 그 자체로만 그린 화가이지만 시인은 실존적 성찰의 길로 타인과 더불어 나선다. 그랬더니 놀라워라, 갱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듯이 빛의 소리가 들리는 세계이기에 인간은 또 내일을 향한 길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길 것이다.
지금껏 다룬 일곱 편의 시는 모두 화가나 그의 작품을 소재적 측면에서 다룬 것들이다. 이런 작품들도 더 많이 나와서 나의 심미안을 높여 주기를 바라지만, 화가의 예술혼과의 만남에서 스파크가 일어나 새로운 빛깔과 모양의 혼불을 지피는 시가 더욱 많이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시는 결국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시인을 자극시키고 시를 쓰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킨 것이 꼭 타인의 시일 필요는 없다. 영화와 연극, 회화와 건축, 공예품과 상업 포스터, 가수의 공연과 클래식 심포니, 무용과 사진 등 인접 예술과 시와의 만남이 지금보다 더욱 활발히 일어나 새로운 문예사조가 21세기의 이 땅에서 태동하기를 소망해본다.
ㅡ월평(『문학사상』 200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