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나 지음
한 사람의 부재(不在)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책을 읽기 전, 마주한 질문에서 나는 어느 정도 답을 정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가난한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아프고 불행할지, 그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은 또 얼마나 힘겹고 어두울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문제를 들여다볼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쉬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집단이 아닌 개개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빈곤의 참담함보다는 한 가지 질문에 머물렀다. ‘가난은 무엇인가?’
책에 등장하는 8명의 청(소)년은 가난한 가정 환경을,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 없이 오히려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가난을 인정하고 부모를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성숙한 내면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망가지고 비뚤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가난해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발견하고 돌보며 자신감과 자존감을 쌓아가는 과정을 해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런 아이들에게 ‘가난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유독 와닿았던 부분은 ‘한 사람’이다. 나의 밑바닥까지 이해하고 나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33쪽), 기댈 수 있는 한 사람(90쪽),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212쪽),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235쪽). 아이들이 감당하기 힘겨운 가난은 바로 그 한 사람의 부재가 아닐까. 아이들은 그런 존재의 부재 혹은 결핍으로 인해, 거기에 더해지는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혹독한 절망을 만나고 힘에 부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둔 2006년, 우리집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서울살이를 시작하시고 20년 가까이 빠듯한 살림을 이어오셨기에 넉넉한 적이라곤 없었지만 그때는 정말 가난이 절망처럼 느껴지던 시기였다. 아빠가 10년 넘게 다니시던 동네 공장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식당에서 밤 10시까지 서빙을 했다. 아빠에게 새로운 일자리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고 엄마는 나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그런 엄마에게 꽤 오래 같이 일했던 동료의 말은 솔깃했다. 조금만 투자해도 수익이 크게 남는다는 말이 진짜임을 맛본 엄마는 수중에 없는 돈을 여기저기서 빌려 가난을 면하고자 했다. 아빠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빤한 사기였다. 엄마는 몇백만 원을 빌렸을 뿐이라는데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 빚은 수천만 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의 전세금보다 많은 액수였다.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걸까. 혼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왜 말하지 않았을까.’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니 따지고 싶은 게 많았지만 자기의 잘못을 괴로워하며 늦은 밤까지 일하는 엄마에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푼이라도 절박했던 상황이 엄마를 몰고 갔으리라 짐작만 했다.
나중에 듣기로 신용카드 돌려막기, 소액 대출, 낮아진 신용 등급으로 인한 2금융권 대출, 사채까지. 급한 대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엄마가 선택한 방법은 감당하지 못할 이자가 더해지는 악순환일 뿐이었다. 나는 학자금과 생활비 지원금까지 학생으로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대출을 다 받아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빨리 돈을 벌어야 했고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빚을 갚는 것 외에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때는 문득 몸 파는 일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며 울기도 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이렇다 할 취업 준비도 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은 더 요원했기 때문이다.
나의 20대는 참 가난했다. 빚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는 절망을 느낀 날도 있었고, 삶이 싫어진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음을 나는 안다. 제대로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아빠가, 매일 같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밥을 짓는 엄마가 한없이 나약하지만 끝없이 성실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숨기고만 싶은 가난을 마음 놓고 보이고 말할 수 있는, 나의 형편을 아는 교회 선생님이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장 필요한 돈을 선뜻 빌려주는 친구가 있었다. 집의 어려운 상황을 다 얘기했을 때 같이 해결해 보자며 묵묵하게 도움을 주고 손을 잡아주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다. ‘이 가난 때문에 내가 불행하기만 하겠구나’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부모, 형제자매, 같이 사는 가족이 나를 이해하고 때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학교,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마을 공동체, 아르바이트 업체… 어디든 그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가난하든 가난하지 않든 아이들이 있는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 중 누구 하나라도 아이들의 삶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면 ‘가난은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은폐되고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는 검은 그림자’(258쪽)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아이들의 삶은 더 이상 일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 만난 8명의 청(소)년은 삶의 곳곳에서 희미하게 혹은 또렷하게 그런 사람을 만난 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가난하지만, 가난하지만은 않은 삶인 것 같다. 나의 삶에, 그들의 삶에 한 사람으로 있어 준 어른들에게 고맙다.
첫댓글 맞아요. 가난 자체보다 함께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죠. 저도 아이들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시길 늘 기도해요.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쌤의 부모님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힘이 될 것 같아요. 저도 부모로써 무엇을 지키고 버텨 낼 것인가 질문이 생겨요.
새삼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혜화쌤의 이 글을 이끌어냈으므로...! 혜화쌤의 용기와 필력에 감탄에 감탄을 하고 갑니다.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삶. 우리 서로에게 한 사람으로 있어주어요!
"매일 같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밥을 짓는 엄마가 한없이 나약하지만 끝없이 성실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문장이 혜화쌤의 글쓰기 실력을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도 따뜻하구요. 사랑스러운 혜화샘 뒤에 그런 분들이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