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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애향 에세이】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흥미로운 처가 마을 ‘낙지리(樂只里)’
- 청양군 장평면 ‘樂只里’ 지명 유래를 살펴보니…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칠갑산 호랑이’ 별명의 장모님
- 낙지리가 왜 ‘농촌 장수마을’인가요?
▲ 조선일보 윤승원 에세이 - 낙지리에 사셨던 장모님 모습(삽화=이철원 기자)
[ESSAY] 九旬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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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향(同鄕)이다. 필자는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아내는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중추리와 낙지리는 바로 인접한 가까운 동네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처가에 꼭 들른다. 처가 동네 입구에 이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길가에 세워진 ‘마을 안내 간판’이다.
▲ '농촌 장수마을'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 마을 입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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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건강 장수마을’ 『기통 찬 마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도 좋은 데다가 ‘기통 찬 마을’이라는 별칭이 붙으니 더욱 흥미롭다.
‘기통 차다’라는 표현은 유년시절부터 익숙하게 써온 말이지만 국립국어원 표준어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고향 사람들은 ‘썩 좋다’, ‘잘됐다’, ‘모양이 아주 좋다’, ‘훌륭하다’라는 뜻으로 쓴다. 어떤 사물의 기기묘묘한 형태나 사람의 멋진 행위를 일컫는 긍정적인 말로도 쓰인다. 그야말로 최상급 뉘앙스의 수식어인 셈이다.
실제로 동의보감에서도 ‘기통(氣通’)이란 ‘기운이 잘 통하는 상태’를 뜻하니, 건강 장수마을 표지판으로는 적절하고 재미있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필자의 장모님도 이곳 낙지리에서 97세까지 사셨으니, ‘장수마을’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한다.
칠갑산에서 불어오는 청정바람 덕분인가. 주민들도 건강하지만, 논밭의 각종 작물도 매년 풍성하다.
▲ 청양 낙지리 고구마밭 – 누님 가족과 함께 처가 밭에서 고구마를 캔 적도 있다. 아내도 내게 시집 오기 전에는 '콩밭 매는 아낙네'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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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낙지리 찬가(讚歌)’
- ‘올사모’ 카페에서 만난 복진한 선생의 ‘애향가’
그런데 최근에 더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났다. 낙지리에 대한 노랫말이다. 이른바 ‘낙지리 찬가’라고나 할까? 애향가라고 할까?
이곳 낙지리 출신 사업가인 복진한 선생이 정구복 교수(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운영하는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에 올린 영상이다.
노래 제목은
『왔니? 고맙다! 사랑한다!! (내 고향 청양 대사천 마을)』
『왔니? 고맙다! 사랑한다!! - 내 고향 청양 대사천 마을』 지천을 따라/ 까치내 계곡/ 낙지터널 지나면/ 칠갑산/ 기가 통하는/ 기통찬마을이 반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망월산 미풍을 뒤로하고/ 대사천 석티골에서 불어오는/ 무공해 청정바람 나를 아련한다/ 아/ 내 고향 땅/ 대사천 마을이다/ 새터말/ 우람말/ 석티골/동막골/ 백토고개/ 나에게 정겹게 말을 걸어온다./ 왔니/ 고맙다/사랑한다/ 씨알 좋은/ 속살 노오란 메론/ 토실토실 삼정승 아알밤/ 주렁주렁 모과가 흔들흔들 춤을 추고/ 붉디붉은 청양고추 나를 일으켜 세우네/ 사랑가득 행복가득/ 무공해 청정마을 대사천/ 나는야/ 큰 모래와 내천이 있는/ 대사천이 좋아/ 큰골/ 장파골 홍골 진골/ 길게 뻗은 능선 나를 오라 손짓하네/ 나는야/ 대사천이 좋아/ 큰 모래와 내천이 있는/ 대사천이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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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동향(同鄕)인 정구복 교수가 소감을 달았다.
“고향 예찬입니다. 마치 서울 찬가처럼. 여기에 상거리, 삼거리 느티나무가 대사천을 지켜주지 않나요. 공동묘지가 없어지기 전에 소사천을 제친 대사천의 그 이름. 칠갑산에서 망월산에 이르는 지세의 위력 아닐까요. 시적 예능이 멋지게 나타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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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천’에 대한 필자의 ‘두 가지 추억’
- 깊은 산골동네 지명에 대한 궁금증
필자 역시 댓글 공간에 남달리 인상 깊게 느낀 소감을 적었다.
“복진한 선생님이 ‘대사천 예찬’을 하시니 감개무량합니다. 그 옛날 제가 사는 중추리에서는 ‘대사천(大沙川)’에 대한 두 가지 추억이 있습니다. ①머슴들은(당시 우리 집에도 머슴이 2명이나 있었음. ‘머슴’이라 하지 않고 ‘일꾼 아저씨’라고 존칭했지요.) ‘대사천’으로 이른바 ‘먼 산 나무’하러 다녔고, ②청년들은 ‘대사천’에 있는 ‘서당’으로 한문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면 소재지와 학교가 있는 우리 동네 중추리 가래울에서 바라보는 ‘대사천’은 그야말로 ‘깊은 산골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지명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낙지리와 적곡리에 걸쳐 있는 마을’이 ‘사천(沙川)’이고, ‘사천의 큰 마을’이 ‘대사천(大沙川: 모래가 많은 내)인데, 깊은 산골짜기 동네에 ‘모래가 많은 냇가’가 어디에 있는지 ‘지명 유래’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 궁금합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 깊은 산골 동네를 ‘소사천, 대사천’이라 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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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천’과 ‘소사천’에 대하여
- 정구복 교수 추가 해설
필자의 궁금증을 정구복 교수는 이렇게 해설해 주었다.
1. 대사천과 소사천의 지명 유래
백토고개를 중심으로 대사천은 낙지리이고 소사천은 적곡리입니다.
이 두 마을은 백토고개로 인해 부락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낙지리는 임진왜란 당시에 있었던 마을이므로 대사천, 소사천 두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 현지에 살고 있는 이응선 옹에게 물어본 결과 다음과 같습니다. 칠갑산의 서쪽으로 중턱에 형제봉이 있는데 그 지맥이 두 갈래로 내려오는 큰 산줄기의 정점이 낙지리 대사천이고, 작은 산줄기가 내려온 종점이 소사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사천, 소사천은 원래 모래 사(沙) 자가 아니라 뱀 사(蛇)자를 썼는데 이를 음이 같은 모래 사(沙)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산줄기가 곧게 뻗치지 않고 뱀처럼 구부렁하게 흘러내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내 천(川)가 함께 붙여진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 시작되는 시내는 각자 달리 흐릅니다.
낙지리 대사천에 발원하는 시내는 낙지리의 삼거리에서 점촌으로부터 흐르는 시내와 합쳐져 아랫동네인 중추리의 진여울을 지나 가래울의 윤승원 씨가 살았던 곳을 지나 금강천으로 합쳐져 부여의 금강으로 흐릅니다.
2.대사천과 소사천의 지명 유래
소사천에서 발원하는 시내는 돌말 앞에서 저수지로 담겨져 농지의 젖줄이 되었다가 미당리를 거쳐 청남면 청소리의 냇물에 합쳐져 공주에서 내려오는 금강에 합류합니다.
요컨대 대사천에서 발원하는 시내와 소사천에서 발원하는 시내는 각자 방향을 달리하여 금강으로 들어가 부여의 금강에서 만납니다.
이는 형제 바위에서 갈린 두 시내의 흐름의 운명은 이렇게 다르면서도 대, 소의 이름에서 그 태생의 연고를 지금까지 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 이야기는 이응선 옹이 60년 앞선 태어나신 이용복 씨(신사생, 1881년생)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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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을 통해 다시 세밀하게 살펴본 지명
- 책장의 《靑陽郡誌》와 《地名과 傳說》을 펼쳐보다
정구복 교수의 자상한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궁금증은 해소되었으나 처가 동네의 특이한 지명을 좀 더 알고 싶어 필자가 수집한 문헌을 살펴보았다.
《靑陽郡誌》(1965, 청양군지편찬위위원회 刊)와 《地名과 傳說》(1981, 청양군 刊)에 따르면 낙지리 각 마을에 대한 명칭 유래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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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陽郡誌》(1965, 청양군지편찬위위원회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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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평면 낙지리(樂只) <낙지, 낙기, 낙계-樂溪>리 :
본래 정산군 적면의 지역으로서 낙지재 밑이 되므로 낙기, 또는 낙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사천리, 상추리 일부를 병합하여 낙지리라 해서 청양군 적곡면에 편입됨. 1987년 1월 1일 면명 개칭으로 장평면 낙지리로 되었음.
▲ 낙지-재<낙지고개, 낙지티, 낙기티, 까치내고개>[고개]: 낙지리와 지천리 까치내 사이에 있는 고개. 현지에서는 낙계재로 부르고 있음.
▲ 담안-발<점촌>[밭]: 낙지리에 있는 밭. 돌담이 있었는데 그 안 쪽이 됨. 옛 무덤의 흔적이 곳곳에 있음. 제보자에 의하면 돌담은 없어졌고 무덤도 없다고 합. 점촌이라 하면 집이 점점이 있다는 의미라고 함.
▲ 대-사천(大沙川)[마을]: 사천의 큰 마을,
▲ 부처-모랭이[모롱이]: 삼거리와 사천 사이에 있는 산모롱이. 부처가 있었음.
▲ 四堂-골<서당곡>[마을]: 삼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서당이 있었음. 현지에서는 서당골로 부름. 건너편의 강촌(講村)과 대응. 현재 4가구가 있어서 사당골(四堂)이라 부르기도 함.
▲ 사천(沙川)[마을]: 낙지리와 적곡리에 걸쳐 있는 마을. 내에 모래가 많음
▲ 삼-거리(三거리)[마을]: 낙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 세 갈래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면사무소가 있는 중추리로 통하는 네 갈림길로 되어 있음. 낙계재와 같은 곳이라 함.
▲ 석티-골 : 석티재 옆에 있는 골짜기
▲ 적타재(적티기고개]: 낙지리에서 적곡리, 도림리로 통하는 고개. 들이 많음. 돌고개로 부르며 위의 골짜기는 없다 합.
▲ 소자뭇골[골]: 낙지리에 있는 골짜기, 서당골에서 난 효자가 있었던 곳이라 함.
▲ 점촌(店村)[ 마을]: 대사천 동북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음. 답안 밭과 같다 함.
▲ 질-고개[고개] : 화산리로 통하는 긴 고개. 후미진 곳으로 강도가 있었다고 함.
▲ 큰골[골]: 낙지리에서 제일 큰 골짜기
▲ 큰절터[터]: 담안밭에 있는 절터. 고려 때 큰 절이 있었다 함.
▲ 조가골(조개골): 점촌 아래 골짜기. 조씨가 부유하게 살았다고 함.
▲ 턱골(텃골, 박가골): 중추리와 낙지리의 경계로 박씨가 살았다 함, 또한 터가 좋아서 턱 골, 덧골이라 한다고 함.
▲ 골뜸: 삼거리 남쪽 마을로 조금만 골짜기라서 붙은 이름이라 합
▲ 말바위: 삼거리 북동쪽에 있는 바위, 크기가 커서 <말> 바위라 부른다 함
▲ 홍가-골(홍개골): 조가골 아래의 골짜기, 홍씨가 많이 살았다고 합
(===이상 ‘靑陽의 地名’ 233~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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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동네 특이한 이름도 많아
- 새롭게 공부하는 처가 동네 이색 명칭과 전설
▲ 목빈-고개[고개]: 돌말에서 소사천으로 넘어가는 고개. 조선 선조 때 이몽학의 조상의 묘가 이곳에 있는데, 이몽학이 잡혀 죽은 후 이 묘의 목이 되는 이곳을 잘랐다 함. 도장고개 아래의 움푹 들어간 부분으로 목통 고개라고도 함
▲ 백토-고개<백토개>[고개]: 소사천에서 낙지리의 대사천으로 넘어가는 고개. 백토가 났음. 낙지리에서는 미륵당 고개로 부르며 큰 서낭당이 있었고, 흰 호랑이가 살았다고 해서 백호 고개라고도 함.
▲ 봉지-다리[산]: 소사천 남쪽에 뾰족하고 높다랑게 솟아 있는 산. 이 봉우리에 은하수가 걸리는 때가 햇곡이 나오는 시기라는 이야기가 있음. 제보자는 달이 걸리는 산이므로 봉지달(다리)이라 한다고 설명.
▲ 북-바위[바위]: 북실 뒷산에 있는 큰 바위. 모양이 북과 같이 생겼음
▲ 북-실[마을]: 도림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북바위가 있음.
▲ 사천-저수지[저수지]: 소사천에 있는 저수지. 1947년에 만듬.
▲ 삼경-재<三卿宰>:[고개]: 북실에서 돌말로 통하는 고개. 삼정승이 날 명당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함. 돌재로도 불리움.
▲ 새-터[마을]: 돌말 동쪽 냇가에 새로 생긴 마을.
▲ 소-사천(小沙川)|)[마을]: 사천의 작은 마을. 봉지 다리 밑 마을
▲ 일산-바우[바위]: 사천 저수지 옆에 있는 바위. 모양이 일산처럼 생겼음
▲ 질마-고개[고개]: 소사천에서 중추리로 통하는 고개. 모양이 길마처럼 생겼음. 이곳으로 짐을 말[馬]에 싣고 다녀서 붙은 이름이라 함
▲ 탑-산[산]: 돌말 뒤에 있는 산. 탑이 있었음
▲ 배나미 고개: 소사천에서 은곡리 안말로 통하는 고개. 천지 개벽시 배[舟]가 넘는다는 전설이 있음.
(===이상 ‘靑陽의 地名’ 437~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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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모랭이 : 삼거리와 <사천> 사이에 있는 산 모롱이를 <부처모랭이 >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부처가 있는 모롱이라 하여 <부처모랭이>라고 부르는 산모롱이다.
▲ 형제봉<兄弟峯> : 소사천 뒷산으로 봉우리 두 개가 나란히 있음. <낙지리>, <은곡리>, <적곡리>에 걸쳐 있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을 형제봉이라고 부른다, 산 높이가 240m 되는 산으로 산에 봉우리가 두 개로 되어있는데 옛날 효성이 지극한 형제 두 사람이 죽어서 그 넋이 산봉우리가 되었다 해서 형제봉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이상 ‘地名과 傳說’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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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신문’ 탐방 기사도 검색해 보다
- '대사촌(大寺村)'이 어떤가?
□ 청양신문 기사(1997.02.04.) 중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실천하는 동네』 /김명숙 기자
- 장평면 낙지리 편
[前略]
대사천(大沙川)보다
대사촌(大寺村)이 옳을 듯
[中略]
마을 중심되는 곳을 3거리라 하는데 50집이 사는 가장 큰 동네이고 대사천(大沙川) 마을은 20집이 살고 있는데 장평면 적곡리 소사천과 이웃해 있다. 동네 사람들에 의하면 예전에 큰절과 작은 암자들이 많이 있어 대사촌(大寺村)이었던 것이 잘못 전해진 듯하다며 실제로 큰 절터와 아기 부처, 기왓장 등이 출토되었다.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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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장모님에게 띄우는 편지
-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가르침 잊지 못해
장모님께서는 칠갑산 정기가 내리는 이곳 낙지리에서 한평생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일찍이 혼자 되시어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올곧은 성품으로 어려움도 잘 극복하시고, 깊은 불심으로 이웃에게 덕을 베푸셨습니다.
장모님이 생시에 보여주신 훌륭한 가르침에 감동하여 사위가 글을 써서 중앙의 유력 일간지와 문예 전문지에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이 글은 대전문학관에도 전시됐고, 장모님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작품은 저명 시조시인인 권갑하 서예가가 손수 붓으로 써서 기념으로 보내주기도 했지요.
▲ 조선일보 윤승원 에세이 ‘구순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선물’(위), 대전문학관에서 전시된 작품(아래) - 장모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쓴 수필이다. (201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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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윤승원 수필 ‘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위), 권갑하 시인(서예가)이 친히 써 보내준 작품 일부(아래) - 장모님의 생활 철학을 수필로 썼다.(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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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장모님께서는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면서 낙지리 출신 학자로서 크게 성공한 정구복 박사를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뛰어난 두뇌로 학문 연구에 매진하여 타의 귀감이 되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분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칭찬하셨습니다.
그 후 제가 정구복 박사와 글로 맺은 인연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남다른 인연의 근원에는 '낙지리'가 있고, '순수한 애향심'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출신 저명 역사학자 정구복 교수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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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인가요. 장모님께서는 초파일이 되면 절에 가셔서 몸을 아낄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위를 위해 '무사기원(無事祈願) 연등'을 다셨습니다.
오늘의 우리 가정 모든 행복이 그와 같은 장모님의 지극하신 기원 덕분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연에는 부처님 가피가 있습니다.
▲ 초파일에 장모님이 절에 다신 가족 무사 기원 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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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시절, 제가 낙지리로 장가를 간다고 하니까 주변에 많은 분이 장모님의 대쪽같은 올곧은 성품을 언급하면서 “힘들 거야”라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모두가 '사랑'이었음을 저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장모님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위가 용돈을 드리면 한 번도 덥석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손사래를 치시면서 달아나셨습니다. 그러면 쫓아가서 치마 주머니에 찔러 드리곤 했지요.
‘염치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분, ‘분수를 지키라’고 하시면서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신 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視聽言動 四勿 :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논어)]’라고 가르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고장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어르신들이 모두 그런 인품과 생활 철학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런 반듯한 정신을 자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제가 오늘 뜻하지 않게 ‘낙지리’ 구석구석에 관해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책장에서 오래된 책자도 다시 꺼내어 살펴보았습니다.
출향인이 객지에서 고향의 지명 유래와 그에 얽힌 일화, 그리고 전설을 살펴보면 애향심이 절로 생깁니다.
장모님이 저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저 높은 곳에서 다 지켜보시지요?
어떤 삶을 살면서 사랑하는 자식 손자에게 이야기해 주는지, 다 지켜보신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조심스럽고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
2026.1.31.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출신 사위 윤승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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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성공이다.
낙지리 출신 아내가 꼼꼼하게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공이다.
그동안 남편의 글에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던 아내가
이 글 만큼은 정밀하게, 흥미로운 시선으로 읽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탈자까지 지적해 주면서
잊고 살았던 동네 지명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 주었기에
감히 성공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손자도 읽었다는 사실이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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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카페 댓글
◇ 복진한(청양 출신 사업가. 낙지리 찬가 작사)낙지리의 역사는 오지의 결핍을 단순히 견디는 것을 넘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개척의 역사입니다.
척박함에서 피어난 생명력으로 농사짓기 힘들었던 산골짜기를 옥토로 바꾸고, 마을의 기틀을 잡은 것은 '지독할 정도의 성실함'이었습니다.
고립된 지형은 역설적으로 고유의 전통과 전설을 보존하는 울타리가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수많은 인문학적 소재를 제공하는 '스토리텔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답글 / 필자 윤승원
그렇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개척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입니다. 각 동네마다 고유의 특성을 지닌 지명을 살펴보면 산골 오지의 척박함이 묻어 납니다만, 오히려 그런 지역적 고유한 특징이 골짜기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 숨어 있는 신비스러운 마을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링은 과거의 전설을 흥미롭게 되살리는일뿐만 아니라 복진한 선생님처럼 신지식인의 감각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면서 사람 냄새나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이어가는데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글은 성공이다.
낙지리 출신 아내가 꼼꼼하게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공이다.
그동안 남편의 글에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던 아내가
이 글 만큼은 정밀하게, 흥미로운 시선으로 읽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탈자까지 지적해 주면서
잊고 살았던 동네 지명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 주었기에
감히 성공이라는 말을 자신있게 하는 것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손자도 읽었다는 사실이다. [필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