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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4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올해 상반기 성찬식을 행할 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절 이하 8절의 내용을 살핀 바 있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합니다(살전4:3).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결코 부정하게 하려고 하심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실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고(살전4:7), 그런 목적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살전4:8). 그러므로 거룩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권면과 함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앞서 형제 사랑에 관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관해서, 주의 심판 날에 관해서 등 권면해야 할 것들과 알아야 할 것들을 언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서신을 마치게 되는데, 마치는 인사를 하기에 앞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3-24)
일단 전체적인 구조를 정리하면서 보자면, 데살로니가전서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저들의 신앙에 대한 감사와 저들에 대한 요구와 권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들에 대한 요구와 권면이 4장부터 시작되는데, 그 내용에 있어 핵심은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저들에 대한 요구와 권면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주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지만, 주의 심판에 대한 말씀 안에서도 거룩과 관련하여 요청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이런 권면은 마지막 인사에 앞선 내용에서도 나오는데, 14절과 15절에 보시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21절과 22절에도 보시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런 내용들이 어떤 면에서 거룩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권면의 내용만 보면 결국 거룩이라는 요청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물론 거룩이라는 요청 앞에 우리는 거룩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결코 게으르거나 나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거룩이라는 요청 앞에 서 있는 성도가 거룩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의 주체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즉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이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미쁘신 하나님께서 그가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신학이 아닌 자들은 이런 분명한 말씀에 대해서도 성화만큼은 인간의 몫인 것처럼 말합니다.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것도 하나님 몫이요, 그로 인해 양자가 되는 것조차 하나님의 몫이지만, 성화에 있어서는 철저히 인간의 몫이든가 아니면 하나님과 인간의 몫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돌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이런 내용 가운데는 개혁신학, 다시 말해 철저히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돌리는 신학이 인간으로 하여금 게으르게 만들고 나타하게 만든다는 이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돌리게 되면 결국 인간은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강조가 인간의 몫을 마련하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철저히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돌리는 신학은 저들의 우려처럼 게으르게 만들고 나타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모든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 개혁신학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4장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고백 2항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말씀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 때문에 말씀 안에서 계신된 바는 무엇이든지 참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각 개별 구절이 담고 있는 바에 대해 다양하게 행하는데, 명령이 있을 때는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위협하시는 바에 대해서는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생과 내생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는 소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의 가르침과 그런 가르침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린다는 것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율법의 제3사용으로서 율법이 삶의 규범으로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면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이러한 의무들을 가르치면서도 하나님의 주체인 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그것조차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처럼(고전15:10) 내 수고와 노력, 애씀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입니다.
지금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5장이 저들을 향한 바울의 요청과 권면이라고 할 때, 그리고 이 요청과 권면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대부분이 명령의 형식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거룩하라고 권면합니다. 너희가 거룩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권면과 함께 사도 바울은 끝 인사를 전하기에 앞서 저들을 위하여 기원하는 바를 23절에서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거룩하라는 주의 말씀을 따라 권면하고 있지만, 너희를 거룩하게 하실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또한 온 영과 혼과 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이런 소망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너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고,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일단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를 위한 기원에 있어 하나님을 부를 때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어지는 내용과 함께 이해하게 될 때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23절을 보시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지금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흠이 있다, 혹은 흠이 많다는 것입니다. 비록 신자이지만,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로 있지만, 성화와 관련해서는 거룩을 위한 싸움을, 또한 흠이 없는 자가 되기 위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지상에 있는 모든 성도는 전투하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투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거기에는 참된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평강이 없다는 것은 참된 안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된 거기에는 평강이 있고, 안식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완성 이전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런 측면에서 평강 가운데 있다, 안식을 누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평강이, 그런 안식이 완성된 형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완성된 형태로 주어질 때는 언제인가? 오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서 평강을 맛보고, 안식을 맛본 자들로 있지만, 완전한 형태로 맛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으로서 평강을 맛보게도 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강을 맛보게 하시되 완전한 형태로서도 맛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란 겁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평강을 맛보게 하셨다면 완전한 형태로서도 맛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란 겁니다. 다만 완전한 형태로 맛보게 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할 때 그 선하심을 택한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평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택한 모든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참된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참된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그때 맛보게 됩니다. 지금도 맛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하는 교회로 있다고 할 때 승리의 교회가 맛보는 것처럼 맛보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너희를 흠이 없게 보전하시도록 기원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참된 평강은 거룩 없이는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룩을 위해 싸우는 것 없이는 평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투하는 교회로서 이 땅에서 죄와 싸우고, 그래서 결국 승리하게 됨으로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룩과 상관없이 평강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강을 맛보고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이 아닌 죄악 된 길을 가면서도 평강을 말한다면 그 평강은 결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을 때 그것이 곧 평강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또 다른 부분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데,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1)
물론 시편 73편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73:1-3)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이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시73:4-5) 그래서 의인조차, 참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조차 악인들을 부러워합니다. 성경 표현처럼 질투합니다. 이것이 평강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21:4)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만, 그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잠24:1)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악인의 형통을 결코 평강이 아닙니다. 악인의 형통은 그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결코 평강일 수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 일이 없다고 할 때 아무 없는 것으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평강은 어디에 있는가? 거룩함에 있습니다. 때문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고 하신 말씀에 따라 거룩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싸우되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하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점과 흠이 없게 보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할 때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보이는 육체(몸)와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 입장입니다. 이것이 이분설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는데, 흙으로 된 육체만이 아니라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뭔가를 넣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성경은 영혼이 떠나시는 것을 말씀하는데(막27:50), 삶과 죽음은 우리 육체 안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요, 영혼이 몸 안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산 자요, 죽은 자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이런 이분설이 아닌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들은 오늘 본문 23절로 인간이 영과 혼과 몸(육체)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영혼을 영과 혼으로 말하고 있을 뿐, 결코 개별적이라는 의미에서 ‘영과 혼’, ‘영 그리고 혼’으로 나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칼빈의 해석을 가지고 오자면 인간은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혼에는 이해와 의지라는 두 가지 특수한 기능이 있어서 이렇게 나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열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인에 대한 표현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인간, 그런 인간의 영혼이 이해와 의지라는 모든 기능에 있어 하나님께서 흠 없이 보전해 주시도록 기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 그리고 혼’을 개별적으로 보기 때문인데,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는 말씀에서 ‘물 그리고 성령’이 ‘물 곧 성령’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가톨릭에서는 물과 성령이라고 할 때 물을 세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성령께서 물처럼 정화시키셔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경우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3:11)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불로 비유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불처럼 임하여 그들의 모든 죄를 태우신다는 것입니다. ‘물 그리고 성령’, ‘성령 그리고 불’로 되어 있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실은 물이, 불이 성령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영과 혼과 몸이라고 할 때 ‘영과 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과 혼은 영혼이고, 거기에 몸까지 말함으로 전인을 강조한 것입니다. 너희 전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롬12:1),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서 영혼 없는 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몸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전체를 말하기도 하는 것처럼, 반대로 전체를 표현하면서 강조할 때 영과 혼과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삼분설은 거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삼분설을 주장한다고 할 때 저들은 인간에게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와 혼은 타락했지만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워치만 니의 경우 보이는 몸과 몸 안에 영과 혼의 두 실체가 있어서 영은 혼을 대적하고 혼은 영을 대적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혼은 자아로, 영의 소욕과 생각을 거스려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은 이런 혼 안에 거하지 않고 영 안에 거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영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영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에게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의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누구도 예외 없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이라고 칭해지는 자가 되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주심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 되었다고 해서 늘 의만 행하는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늘 의만 행한다면 거룩하라는 명령도 필요치 않습니다. 또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의가 아닌 죄와 악을 짓는 자로 있기 때문에 거룩하라고 명령하시고, 명령으로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겠다고 까지 말씀하시는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신자라 할지라도 그 스스로는 의를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거룩을 명하시지만 명하신 그가 거룩을 이루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레위기 20장 7절과 8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분명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그러면 신자는 이 말씀에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고 있는가? 특히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거룩은 오직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타납니다. 때문에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 앞에 합당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을 가지면서도 결국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무엇인가?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는 이 말씀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가지고 오자면 열심을 냈지만 그 열심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결과라는 것은 결국 그 모든 것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내가 가진 열심조차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이끌어내신 역사로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24절에 보시면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미쁘시다는 것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그가 약속하시면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시간 안에 나타난 것인데, 그런 약속은 시간이 있기 전 작정의 내용으로도 있었습니다. 즉 그가 작정하시면 작정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가운데 어떤 자들을 선택하셨다고 할 때 그들을 향해 가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향한 목적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것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가 없는 상태, 점과 흠이 없는 상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그렇게 만드신 존재로부터 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순종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상태의 인간이 이러하다면 죄 가운데 태어나는 인간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 스스로는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택하신 자들을 향한 목적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미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는 겁니다.
이러한 미쁘심이 실제로 부르시는 것을 통해 나타납니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있게 되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실하심은 단지 시간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바가 실행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면 그 말씀 역시 미쁘신 하나님은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23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 전인을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원하는 바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기도, 그의 소원은 단지 바라는 정도로만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이루실 것에 대한 확신이 담긴 기도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걸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는 거룩의 완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걸음걸음마다 점과 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미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가 부르셨다면, 그것도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불러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게 하셨다면, 부르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천국을 보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보장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참여하게 됩니다. 그를 먹고 마시되, 믿음으로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과 함께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은혜 가운데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성찬 자체가 우리를 자라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을 통해 알리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하십니다.
가톨릭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3장 21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물 자체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로 씻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십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떡을 먹는다고 해서, 포도주를 마신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자라게 하지 않습니다. 성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완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가 친히 거룩하게 하시고, 그가 친히 흠이 없게 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면, 성찬에 참여하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늘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들을 수 있는 말씀을 주시고, 보이는 말씀으로서 성례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으로 하자면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하신 하나님을 더욱 주목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하나님을 주목할 때 성찬도 성찬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거룩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거룩의 주체를 알고 주의 명령을 따라 거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헛되지 않는 것처럼, 성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참여하게 될 때 그 성례가 헛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례의 효력은 바로 여기에 나타나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거룩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하게 하시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그가 친히 이루십니다. 성찬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성찬을 통해 뜻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주체이신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체이신 하나님을 주목한다고 해서, 그가 이루신다고 해서 게을러도 좋다, 나태해도 좋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거룩을 위하여 방편으로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또한 우리를 자라가게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주신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열심, 우리의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것임을 고백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