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이래 그가 다양한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물어온 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다. 이동욱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벌거벗은 몸을 통해 ‘인간’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몸(body)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고,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의 산물로서 해석된다. 현대사회란 영혼과 정신의 안정도 몸을 경유하는 웰빙 시대 아닌가. 소위 ‘웰빙’이란 바로 육체적인 평온과 조화를 통해서 정신적인 만족을 극대화하는 몸의 시대를 말한다.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키워드 ‘몸’이라는 단어로 그는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동욱의 인물상에는 인종이 없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중간 정도 얼굴형으로 일종의 보편형이다. 동서양을 떠나서 그저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를 끄집어낸다.
벌거벗은 무방비 상태로 인물들은 상황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때로 인간의 동그란 머리는 추파춥스 사탕이 되기도 하고, 활성 비타민 알약이 되어 포장되기도 하며, 흔히 먹는 소시지나 앤초비 통조림 속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든 바로 그 발명품과 포장 속에 결박되어 있는 모습들이다. 충격적인 첫인상을 거두어내면 그의 작품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있다. 등에 재활용 마크가 그려진 노인을 형상화한 조그만 작품의 제목은 <부활>이다.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물건은 모두 다시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는데, 인간에겐 이런 재활이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존재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나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한다. 사람은, 특히 개개인은 모두 약한 존재다. 혼자 있는 하나하나의 인간에 주목한다. 인간이 사악해지는 것도 약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 모두 비슷비슷한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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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ss_ 혼합재료 / 페데스탈, 18×12.5×5.6cm, 120×40×40cm, 2012 |
이런 생각 때문에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무언가 상처를 받은 듯한, 약간은 공허한 듯한 무표정을 갖게 된다. 일부러 충격을 주거나 무서움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가 바라본 인간의 상황일 뿐이다. 이런 인간의 조건에 대해 작가는 함부로 재단하거나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그저 덤덤히 바라볼 뿐이다. 사람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그의 작품은 다양하게 보여준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무라이는 갑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갑옷은 피부로 된 것이다. 우아한 차림을 한 여성의 드레스 역시 그녀의 피부다. 그는 이 작품들에 대해 “피부가 옷으로 바뀐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갑옷이건 드레스건 방어와 위장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옷들이다.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약한, 똑같은 사람들의 연약한 위장을 이렇게 인상 깊은 형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작가 이동욱의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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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_ 혼합재료, 20×19×16cm, 2008 |
약하기 때문에 또 쾌락과 보상을 탐닉하는지도 모른다. 트로피의 일부를 옆에 두고 벌집에서 쏟아지는 꿀을 뒤집어쓰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불교의 아함경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아함경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 코끼리의 습격을 피해 웅덩이로 피했는데, 바닥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렸다. 겨우 나무뿌리에 매달렸는데, 이번에는 두 마리 쥐가 그 뿌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 위험 속에서도 나무뿌리에서 떨어지는 꿀물을 핥기 시작했다는 인간 조건의 불합리함과 어리석음에 관한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가 《참회록》에 가져다 써서 서구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상으로 받는 트로피 역시 그런 꿀들 중 하나다. 〈기념〉이라는 작품은 트로피 상단에 이동욱의 조각이 올라가 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해야 할 트로피의 주인공은 상처투성이 얼굴이다. 승리란 그런 것이다. 힘겨움과 회환이 있기 마련일 것이다. 트로피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게 준 것이다. 외적인 평가이고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꿀은 그래서 달콤하고, 그래서 허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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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or_ 혼합재료, 28.5×45.5×24.5cm, 2008 |
그는 세계를 작게 만든다. 파도가 세게 치는 해안가 삼각뿔 모양의 방파제를 분홍색의 작은 크기로 모아서 쌓아놓았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사물들이지만 크기가 달라지니까 이야기가 달라진다. 방파제의 방어적인 성격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진다. 실제로는 사람의 크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물건들이지만, 이렇게 작은 물건으로 만들어보니까 그것들이 약한 존재, 사나운 파도 앞에서 똘똘 뭉쳐 있지 않으면 속절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작아진 것을 본다는 것은 보는 사람에게도 작게 볼 것, 더 섬세하게 볼 것, 더 수그리고 들여다보는 자세를 요구한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보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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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_ 혼합재료, 14×5×4cm, 2004 |
아이러니하게 최근 두 전시의 제목은 〈러브 미 텐더〉와 〈러브 미 스윗〉이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가사에서 따왔다. 다시 아함경의 설화로 돌아가보자. 백척간두에 처한 한 사람이 있다. 이제 거꾸로 말해보자. 그런 위기 상황에서 한 방울의 꿀이라도 없다면 또 어떻게 살겠는가. 인간의 나약함, 어리석음 그리고 그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다시 느껴진다. 그는 쉽게 답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 섣불리 치유나 대안제시를 시도하지 않는다. 당분간 문제를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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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inky_ 혼합재료, 2012 02. Untitled_ 혼합재료, 70×30×95cm, 35.5×41×36cm, 2012 |
비행기를 어깨에 메고 있는 특이한 작품이 있다. 9·11 테러 혹은 십자가형의 현대적 번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물으니 전혀 색다른 답이 돌아온다.
“그건 목 주위에 난 종양이다. 부서진 비행기 모양으로 난 것이다. 종양이란 외부에서 붙여준 게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떼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커지게 방치할 수도 있다.”
이런 말을 그는 어떻게 이다지도 담담히 할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본다. 그리고 문득 내 어깨에 난 종양을 한번 생각해본다. 자존심, 자격지심 혹은 어떤 이유에서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어떤 콤플렉스 덩어리를 나 스스로 떼어내지 못하고 오늘도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이 그를 좋은 작가로 만드는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