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근 惠勤
나옹선사(懶翁禪師1320~1376) 나옹화상
혜근
신륵사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 보물 제228호
법명은 혜근(慧勤)이다. 속성(俗姓)은 아씨(牙氏). 초명은 원혜(元惠). 아호는 나옹·강월헌(江月軒).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온다.
아버지는 선관서령(膳官署令) 서구(瑞具)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 출가했다.
그뒤 여러 사찰을 순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慈禪寺)로 가서 처림(處林)의 법을 받았다. 그뒤 명주(溟州)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의 관음보살을 참례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했다.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1355년 연경으로 돌아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명으로 광제사(廣濟寺) 주지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여니 순제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상아불자를 하사했다.
순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법원사로 지공을 찾아가 그의 부촉을 받고 1358년(공민왕 7) 귀국했다.
귀국 후 평양·동해 등지로 다니며 설법하다가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을 관장했으며,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사에 봉해지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그뒤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길이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왕명에 의해 밀성(密城: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했다.
보우와 함께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특색 있는 것은 〈나옹삼가 懶翁三歌〉로 통칭된 〈백납가 百納歌〉·〈고루가 枯髏歌 〉·〈영주가 靈珠歌〉의 3편이다.
누더기, 해골 같은 몸, 보배스러운 구슬을 노래하고 삶에 집착하지 말고 불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제이다.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있고, 비석과 부도가 회암사에 남아 있다.
저서로 〈나옹화상어록〉 1권과 〈가송 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