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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시를 쓰고 있다. 감동적인 시를 ]
# 수용자들의 시 #
숨바꼭질
아무개
퇴근하고 집에 들어섰는데 딸이 달려와 안기면서 숨바꼭질을 하자고 한다.
아빠가 술래라고 하며 백까지 세라고 한다. 나는 벽에다 이마를 붙인 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열 번 외친다.
그 사이 어디론가 향하는 딸의 발자국 소리. 어디에 숨은 줄 알면서도 모른 척해준다. 딸은 아빠가 진짜로 못 찾는 줄 알고 기뻐하면서 잘도 숨어 있다.
지금은 딸이 술래다. 많이 찾고 있는데 눈에 안 보이나 보다. 아빠가 너무 꼭꼭 숨었나?
법흥사 버들치
김용주
영월 법흥사 절터 앞에는
작은 개울 하나 있지요.
이른 봄 발 시리게 찬 그 물에
버들치들 마을 이루고 살지요.
가만히 두 손 내밀면
바윗돌인 줄 알고 달려드는 버들치
아무나 손 내민다고 그놈들
모여드는 것 아니지요.
돌아가신 어머니
젊었을 때 다니던 절터
버들치들 내게 모여든 건
내 손끝에 남은
어머니에 대한 옛 기억 때문이었겠지요.
산길 넘어가던 고갯마루에서
어머니 몸에 배었던
뽕나무, 함박꽃, 개불알꽃
그 꽃들 향기 때문이겠지요.
감
박혜진
가을에 오는 사람이라
단감
양볼에 홍시 연시
붙이고 설레는
감
너무 빨리 따먹어서
떫은 감
너무 좋은 가을인데
서둘러 빨리 가니까
싫은 감
근데
가을도 겨울 싫어서
절대 안 감
그래도 내 얼굴
주름은 빨리 감
그거 보고 웃는
네 얼굴도 곶감
또 이렇게
하루가
감
천사가 되신 어머님께
무명씨
이 죄인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고
아들이라 부르시는 어머님은
천사가 맞으시죠
늦었지만 불러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지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죄인이 아닌 어머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운 어머님!
어머니
불효자
행복으로 열 달 동안
인간 꼴을 품으시고
산고를 더없이 기뻐하며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나를 탄생시키셨다
밤낮으로 지구는 돌았고
순하디순한 아기였을 땐
내가 어머니의 햇살이었다
아버지
고니
어릴 적부터
놀기만 좋아했던 나
아버지한테 대들기도 했던 나
중학생이 되어서
사고를 쳐버린 나
평생 안 울 것같이
당당하신 아버지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걸 보았다
사고를 친 아들
우시는 아버지
세상이 꺼지듯
내 마음도 찢어졌다
그 사랑에 정신차려
바르게 살려고 하는 나
이제 더 이상
울지 말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나의 사랑, 아버지
괜찮아
고니
괜찮아, 너는 잠깐 아픈 거야
괜찮아, 지금만 잘 넘기면 돼
괜찮아, 잘 참아내자
지금 이 시련만 넘기면
엄마와 아빠와 기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잘 참을 수 있어
항상 웃자
엄마가 사다주던 따뜻한 빵
거실에서 텔레비전 보는
아빠의 등이 넉넉하고
나를 기다리는
먼지 묻은 기타가 있는 집으로
웃으며 갈 수 있어
괜찮아, 집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잖아
엄마
영원한 준
엄마는 늘 내게 아버지 같은 분
다른 애들은 아버지랑 주말에 놀러 가는데
난 가지 못해 늘 서운했다
면회 오신 어머니가
내 모습을 보곤 함박웃음을 지어 주셨다
뒤돌아서서는 몰래 눈물 훔치셨다
처음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들을 소년원에 두고 돌아가는 엄마의 가슴도
무너지고 있었나 보다
두 개의 별
아담
어릴 적 엄마한테
별을 따 달라 하였다
엄마는
저기 곱게 뜬 별이
엄마와 아빠의 별이라고
내 키가 크면
따 달라 하였다
창살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두 별이 슬피 울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불효 아들 키도 훌쩍 자란 만큼
슬픈 별을 따다
기쁨으로 바꿔 드릴게요
뭘 드시고 싶은가요?
이승하
파란 쪽파를 뿌리고 소금과 후추를 조금 넣지요
국물이 끓기 시작하면 쑥갓, 배추, 표고버섯을 차례로 넣어야 해요
그리고는 굵게 썬 흰 파를 넣고, 거기다가……
긴 시간이 걸리는 이런 요리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저는 짜장면, 저는 김밥, 저는 물냉면요
농심신라면요 계란 하나 꼭 깨뜨려 넣고요
저는 칼국수요 바지락 들어간 걸로
음식 이름을 하나씩 말하며 그들은 미소 지었다
음식마다 깃든 추억과 그리움
시인 양반! 저는 소보루빵이 먹고 싶소이다
어릴 때 제일 맛있게 먹었던 거라서……
소보루빵 단팥빵 크림빵을 잔뜩 샀다
그들은 그날 저녁밥 반도 못 먹었으리라
아무도 맛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맛있나요?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런 말 앞에서
우아 이런 빵 십 년 만에 처음 먹어보네
난 십오 년, 난 이십이 년……
눈을 감은 채, 다들 꿈꾸는 표정으로,
아주 천천히, 소처럼, 오래오래, 씹었다
#탈북자들의 시#
씨앗
오은정
봄철,
씨앗 한 줌 놓고
농민은 고민한다.
심을까 먹을까
연장전 외 6편
이명애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한 민족 두 나라의 대결
남북한 축구가 시작된다
남한 선수가 중거리 슛을 날린다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함성
역시 대한민국이야
또다시 터지는 함성과 탄성
틈새를 노린 북한의 공이 골대를 살짝 빗나간다
조금만 더 안쪽으로 차지……
이어지는 연장전
마지막 일 분을 남겨두고
남한 선수의 공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두 손 들고 환호한다
긴 휘슬이 울리고
털썩털썩 주저앉는 북한 선수들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다
내 손이 갈 곳을 잃는다
금메달은 중요치 않다
남한과 맞대결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저들은 사상투쟁의 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
전면적인 검토를 다시 받아야 할 것이다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어쩌나
축구단에서 쫓겨나진 않을까!
얼싸안고 돌아가는
남한 선수들이 미워진다
우리 마을 뒷산
내 어릴 적 범 나올라
근처도 못 가던 뒷산
산림보호원 눈 피해
걸리면 뇌물 찔러주고
잘려나간 나무그루터기들
심심찮게 보이더니
초록색 밤송이
다닥다닥 맺힌 밤나무 가지들
뽀얀 물 튕기는 연한 껍질의 하얀 밤
곯은 배 채우기 위해
도끼날에 무참히 찍혀 나간다
배급소 문마저 닫히고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던
드문드문 아담한 소나무들
허연 속살을 드러낸다
삭정이 하나 안 남기고
여기저기 부대기 밭들 생겨나더니
산이란 이름 무색하게
한해살이 풀숲으로 변신한다
강성대국의 징표
단오가 한참 지나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쑥
몇 번을 삶아내고 우려내도
소태처럼 쓰다
강냉이 가루 한 줌 얼버무려
온 가족이 봄내 여름내 먹으니
쑥독이 온몸에 퍼져
열에 떠서 앓던 딸
티 하나 없던
스무 살 처녀의 고운 얼굴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거멓고 우툴두툴한
커다란 흉터가 생겼다
외래어
다이어트는 식단 조절
즉 살을 뺀다는 뜻이라네
불룩 나온 배는 부유함의 상징
삐쩍 마른 사람들 천지인 북쪽엔
이런 말 생겨날 리 없지
디저트는 식후의 간식
쌀밥 먹으면 됐지
과일이나 과자를 꼭 먹는다?
엘리베이터
아르바이트
터미널
터널
카드
카트
카센터
카세트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고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홈에버 달라고 말했다가
온몸에 쏟아지는 눈길에 당황한다
외운다고 외워지지도 않고
선뜻 물어볼 용기도 없는
두렵기만 한 외래어
10호 초소
저 멀리 무산광산이 보이고
흙먼지 뒤집어쓴 버스
10호 초소 앞에 선다
사람들 모두 내리자
차단봉이 올라가고 빈 버스만 통과한다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한 사람씩 증명서 검열을 받는 모습
독립운동가 잡으려고 혈안이 된
검문소를 방불케 한다
국경지역 공민증은 손에 들려줬지만
브로커의 도움은 여기까지다
간단한 북쪽 말투 연습은 했어도
진정시킬 수 없는 가슴
말을 시키면 어떡하지?
드디어 내 차례가 되고
공민증을 받아든 군인
공민증 사진과 내 얼굴을 대조해 보더니
군말 없이 돌려준다
후~~
긴 숨 가만히 뿜어내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들킬라
저만치 서 있는 버스에
빨리 뛰어가 타고 싶은데
꼿꼿이 앞만 바라보고
다리에 힘을 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선군의 기수
허리띠 졸라가며 키워낸
영글지 못한 어린 씨앗
사람이 되려고
의무제가 아닌 군에 입대한다
신병대대에서 받은
새 군복 새 신발 새 배낭
제대를 앞둔 고참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규칙 아닌 원칙
고스란히 싹쓸이 당하고
낡아빠진 복장으로 단장한다
상관들이 빼돌린 군량미
장마당 쌀장사들 앞에 놓여 있고
봄날의 청춘들 시들시들 말라간다
앞 코숭이를 뚫고 나온 엄지발가락
툭 불거진 광대뼈
움푹 꺼진 눈
흉측하게 솟아오른 어깻죽지
총 한 자루나 건사할는지
그러나 비웃지 마시라
이들이 바로
위대한 선군의 기수들이다
경계선
가게 앞은 2차선 도로
가게 뒤는 100평 남짓 텃밭
앞문 열면
폭염에 달아오른 열기 확확
숨이 턱턱 막힌다
뒷문 열면
옥수수 잎사귀 춤추는 소리
옷깃을 파고든다
가게 면적에 비교할 수 없는
남과 북의 한 줄 경계선
두 정상이 한 발씩 넘어갔다 넘어오듯
언제면 그 선 너머에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을까!
위로
봉순이
때론
괜찮냐는 말조차
미안해질 때가 있다
힘을 내라고 하기엔
너는 너무 지쳐 있고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
더 이상 널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그저
작은 나무 그루터기가
되기로 했다
지친 가슴 움켜잡고
벼랑 끝을 톺아 오를 네게
내 몸을 내밀어 본다
잠시만 여기 앉아.
침묵도 공범이다 외 1편
이길원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굶주리는 아프리카 어린이
내전 휘말린 중동 난민 행렬
수시로 보도하며 기부하라는 방송도
2천5백만 노예의 주인에게
용비어천가 부르는 정치인이 넘치고 넘치는
남한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북한 주민
삶을
인권을
침묵
그도 공범이다.
남조선 TV
뭐 그리 먹는 이야기가 많은지
TV마다
혈압에 좋은 것
당뇨에 좋은 것
음식 경연 대회
먹고 마시고
여행 가고
놀고
데모하며 경찰 때리고
인권 운운하는 목소리 높기도 한데
아무도 걱정하지 않네요
북한 주민
인권
함께 울다
―에이스 반 아담 군에게*
저 길 어디쯤에는 사람들 발에 밟혀 자라다 만 풀이 있을 거야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가지 집 밖으로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가, 소통이, 관계가 이루어지지
때때로 상처를 받고 때로는 상처를 주고
그것 중 어떤 건 흉터가 되고
어떤 때는 덧나 진물이 흐르고
혹간 생이 참 가혹하다고 너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훈아의 ‘테스형’을 흥얼거릴 때도 있겠지
아버지가 미워질 때 너는 어떡하니?
어머니가 미워질 때 너는 어떡하니?
술을 배웠겠구나 테라를 마시니? 골 때리게 하는 참이슬?
소년원에서 너는 한 시절을 났다 그 시절을
‘지옥의 계절’이었다고 말하고도 싶겠지
웬 아이를 때려 그곳으로 갔는데 너는
거기서 누구한테 제대로 맞았지 더 센 놈한테
세상엔 어딜 가나 ‘더 센 놈’이 있는 법이지
시를 가르쳤다 시는 가르치는 게 아닌데 나는
너희들한테 시란 마음을 글로 전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 길지 않은 글, 정성을 다해 쓴 글
울고 싶을 때, 죽고 싶을 때 쓰는 글
미쳐버리고 싶을 때 발작적으로 쓰는 글
너는 시를 썼다
“어릴 적 엄마한테
별을 따 달라 하였다“고 시작되는 시를
네가 쓴 시 앞에서 나는 못 참고서 돌아서서 울고
너의 낭독은 우리 모두를 울리고
울음으로 정화되는 우리의 혼
저 길 어디쯤에는 사람들 발에 밟혀도 일어서는 풀이 있을 거야
# 장애인들의 시 #
개밥그릇 외 2편
하상욱
깨끗이 핥아도 개가 먹던 것이라고 했다
여름 한 철 의미 없는 빗물이 고이고
가끔씩 일그러진 주둥이로
훌쩍! 뒤집어지는 소리를 냈다
끼니마다 수신인 없는 날것들
누구보다 먼저 날아와 새카만 무리를 짓기도 했다
참말 같은 새들 몇 마리 찾아와
내 어설픈 발치를 쪼아대기도 했다
심장까지 관통한 공복을 향해
흰 이빨을 날카롭게 드러내기도 했다
적절한 굴복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나를 챙겨 주는 일용할 그릇이었으므로
말에 베인 혀가 쓰라린 밤
젖은 코를 킁킁 맡아 본 적 있다
핥을수록 갈증이 더해 가는 이 비운 때문에
짓지 않으면 더 고파지는 이 운명 때문에
핥아도 다 핥아지지 않는 밥알 하나가
까만 손톱자국처럼 남기도 했다
보잘것없어도 내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내어 줄 수 없다
착시
덜컹덜컹 흔들리는 지하철
노약석에 세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데
젊은 한 사람은 자고 있고 두 사람은 깨어 있다
깨어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은 노인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젊다
시청역쯤에서 노인 한 사람 이들 앞에 다가와서는
깨어 있는 젊은이를 향해 버럭 호통을 치는데
“이봐! 젊은이, 거 나이 먹은 사람이 서 있으면 냉큼 자리를 양보해야지.
왜 눈만 장님처럼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게야? 엉?”
날카롭게 뻗는 손끝이 맵다
순간, 젊은이 품속에서 하얀 막대기 다발을 꺼내는데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는데
“어이쿠 어르신!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안 보여서…….”
라고 말하며 불쑥 일어서는데
묶여 있던 막대 다발이 촤르르! 지팡이로 요술같이 변하는 거다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통로 저편으로 물 흐르듯 가서 섰는 거다
품속에 그걸 착착착! 다시 접어 넣는데
귀에 이어폰을 슬그머니 끌어당겨서 넣는데
머리 위 손잡이도 능숙하게 찾아서 잡는 거다
보시라,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 부산점자도서관 시 공모 대상 수상작
환청 분별법
옆집 TV 볼륨이 너무 커서
이쪽 화면을 꺼버려요
앓다와 잃다를 구별 못하는 소리들 때문에
나직나직 목소리를 낮춘 거예요
둔감한 청력이 시력을 자극했으므로 꺼버려요
누군가 함부로 말하는 TV 아나운서에게
절차를 생략하는 방법을 알려준 걸까요
출근길 스르르 닫히는 스크린도어가 생각을 꺼버려요
뒤에서 비켜달라는 할머니 소리를 못 들은 척해요
앓다의 대기 순번을 새로 세운 걸까요
앓다와 잃다를 바꾸어 말한 건 그들만 알아요
소실과 상실은 다른 거였거든요
많이 먹어 배부른 사람이 앓는 신음처럼요
몸살 앓는 가로수의 묵계를 적용하면 안 돼요
청각 환자가 병상에 오래 남아 있는 것같이 어색해요
귀가 밝은 맹인들은
더 시끄러워서 꺼버린 거거든요
“어제 오후 네 시경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지 않은 시청역 플랫폼에서
시각장애를 앓고 있는 김모 씨가 1135mm 높이의 선로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도시철도공사 측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어 꺼버려요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안 보이는 안쪽 세상을 열기로 해요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외 3편
손병걸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빈 칸
눈을 뜨고는 알 수 없는 말
단연코 들을 수 없는 말
시각장애인용 컴퓨터 화면 낭독 프로그램 이야기다
꺼진 모니터에 펼쳐진 텍스트
검은 여백이 내어준
활자와 활자 사이
행과 행 사이
두 눈을 크게 떠도
아무리 두 눈을 부릅떠도
아무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캄캄한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빈칸 혹은, 빈 줄이라는 말
비어 있어서 명백히
비어 있지 않다는 드넓은 소리
밤하늘에 빛나는 시공의 소리
언제나 꽉 찬 공명
먹먹하게 환한
저 빈칸 혹은, 빈 줄이라는 말
물이 끓는 시간
틈이란 틈을 다 비집고 날아오르는
커피포트 속 물소리처럼
모든 날갯짓은 다 뜨거운 걸까
시력을 잃고 엎질러진 물처럼
내 생이 밑바닥 밑바닥으로 스미는 동안
오래전 몸속에서 식은 시간이 끓어오른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하늘과 땅 사이
그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고
투명한 벽은 점점 더 두께를 키웠을까
뜨겁고 서늘함이 한바탕 뒤엉키며
고인 시간이 비등점에 이를 즈음
커다란 날개 한 쌍이 활짝 펴진다
적절한 온도의 바람이 불고
모든 틈이 사라진 여기가 바로
내가 간절히 원한 절정
그러나 지금은 잠시
펼쳐진 날개를 접어야 할 때
괜찮다 커피포트의 전원을 끄고
한껏 벌어진 생각을 메우듯
스물네 시간 쉬지 않을 내 몸에 전원을 켠다
빗방울 점자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떨어뜨린 점자책
책갈피마다 알알이 박힌
무수한 점자들이
와르르 쏟아진 걸까
으깨진 머리를 감싸 쥐며
방바닥을 뒹구는
점자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땅바닥을 치는 빗방울 소리 따라
가빠 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반지하 방바닥을 더듬을 때
내 생각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
두두두두, 빗소리는
꽉 닫힌 창문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다시 펼친 책갈피마다
하얀 여백을 딛고 오뚝한
점자들의 목소리 들려온다
뇌성마비 외 1편
차강석
눈은 강낭콩
코는 조롱박 반
입은 안 깐 콩집
손바닥 거울로
이지적인 얼굴을
기대하며 봤다
눈은 라면 한 가락
코는 마늘 한 쪽
입은 우동 한 가락
바위틈에서
자란 감자 같은 얼굴은
방금 캐낸 것처럼 낯설다
ICBM을 탔으나
홀로 우주를 지고 다니는
달팽이
게릴라
내 목에는 게릴라들이 산다
비트를 만들고
목구멍에 숨어 있다가
하품을 하면 나오려 한다
통신병이 지원군을 부르면
그들은 일시적으로 후퇴를 한다
지원군이 물러가고
기지개를 켜면 그들은 다시 요동을 친다
아버지는 그런 게릴라들을
초기에 진압 못하시고
반란군이 되도록 방치하셨다
그 반란군 때문에
늘 지원군이 필요하시고
그들의 군자금을 대느라
출혈이 심하시다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언젠가 지원군 때문에 망하게 될 거여……”
나도 누군가의 게릴라일까?
어떤 대화 외 2편
최명숙
소나기 내리는 날 버스에서 내려
찻집의 처마 밑에 섰다
지나가는 비라 하지만
머리도 젖고 신발도 젖었다
어깨 위에 비를 툭툭 터는데 말이 들렸다
“많이 젖었지?”
“네. 갑자기 내려 놀랐네요.”
손에 판촉물을 든 허리 구부정한 노인 곁에
어린 청년이 서 있었다
“곧 비가 그칠 테니 괜찮아, 저쪽 하늘을 봐.”
“애호, 타야 하는 버스가 가버렸네요”
“살다 보면 만나는 게 어디 소나기뿐인가.
그러면서 사는 거지.”
“네…….”
“놓친 버스도 곧 늦지 않게 올 거야.”
소나기는 곧 그졌다
그리고 하늘이 파랗게 드러났다
노인은 판촉물을 다시 나눠주고
청년은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갔다
곧
저쪽에서
올 것들도 보였다
내 혜안의 비를 찾아
그대 영혼의 대지에 비를 내리게 하라
생명을 품은 흙이 두루 젖도록
마른 가슴의 밭에는
쿵쿵거리는 생명을 자라게 할 수 없으니
웅크렸던 추위는 모두 내던지고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처럼
희망의 진리처럼 설레는
그 생명의 대지에 비가 충만하게 하라
그대 두 손으로
처음 열리는 생명의 비상에
성장의 감로수를 받고
그대 가슴의 항아리에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울
진리의 물이 고이게 하라
보이지 않는 대지의 흙들이
숭숭숭 일어나
성장의 문을 열고
풍요의 땅
혜안의 대지에서
수천수만의 손을 잡고
비를 내리리라
증심사에서
산사의 밤은 비가 부슬거리며
새벽 세 시를 향해 간다
어두운 방의 구석마다
비 젖은 고독이 곰팡이처럼 피어났다
익숙지 않은 고요 속 고독은
세상의 고립이 무서웠거나
맘 둘 곳 없는 나로부터의
회피를 위한 슬픔이었다
근거 없는 집착과 거리를 두고 서니
비를 맞고 서 있는 배롱나무꽃이
진홍빛으로 더 붉은 것은
꽃이 붉어진 것이 아니다
나의 시선이 비에 젖은 까닭이다
어둠 속에서 고독이 피어난 까닭이다
고독이 있어 슬픈 것은 아니다
비 젖은 내가 비 젖은 어둠 속에 앉아
밝아올 아침을 잊은 데서 슬픔은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