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여기까지다 세 번째 소절의 노랫말이 반복해 봐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는 끝 소절인 “그 속에서 살던때가 그립습니다.”만 생각이 난다.
2017년 9월 7일 목요일
오늘은 아무날도 아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 특별한 날도 아니다
다만 서울에 사는 전고 34회 동창들이 매달 첫째주 목요일을 일목회라고 이름짖고 동창회관에서
만나 같이 점심식사를 나누고 나서 환담도 하고 바둑도 두고 고스톱도 치는 날이다
우리 34회 동창들이 1957년에 졸업했으니 올해가 졸업 횟수로 환갑이 지나고 어언 나이가 고롱 80세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오늘 이 일목회에 참석하려고 전주에서 새벽차를 타고 서울에 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로부터 일 주전 나는 서울에 왔었다
한양대학교 교수였던 오랜 친구 윤태훈군이 죽었다
그의 부음을 받고 삼성병원 영안실에 조문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나 종표야” 너 지금 전주에 있지. 건강하지?
태훈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가 조문을 갈수가 없는 형편이야
나도 지금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처지야“
그러면서 “우리 죽기전에 한번 만나 봐야지”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동안 전화한번 하지 못했었다, 그래 죽기전에 한번만이라도 만나 봐야지, 그래서 일주일이 지난
오늘 모처럼 서울 친구들도 만나고 문병도 할겸 고속버스를 탄 것이다
일목회에서 서울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했다 모처럼 상경한 촌놈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친구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종표 문병길에 오른 것이다. 현장에서 위문단이 구성되었고 우용이차로 태수, 병주, 경일이 그리고 나까지 다섯명 출발했다
종표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은 용인시내에 있었다00사랑병원 요양병동이었다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는 노인들 늙어가고 고독하고 아름답지도 않은 삶을 만나는 것이 좋을 것도
없었다 우리 친구들이 병원 정문을 들어섰을 때 넓은 홀이 나타났고 30여명의 남녀 노인환자들이
식탁주변에 나란히 둘러 앉아서 간호사의 손발구호에 맞춰 손벽을 치며 노래하고 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아아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는 오늘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후회스러웠다
그 맨 앞자리에 앙상하게 매말라 보이는 노인. 굽은 허리 튀어나온 광대뼈에 깊이 파인 눈을 한
친구가 손벽을 치고 있었다
박종표. 너 아니더냐?
설마 네 모습이 이렇게 초라하고 꼴사나워 보일줄은 몰랐다
호기롭고 술 잘 마시고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친구가 이렇게 피폐한 꼴을 보이다니.
나를 아프게 했다
마침내 그는 우리 친구들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친구
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으며 악수를 했다 그의 손은 깡마른 나무 막대와 같이 차가웠다.
그는 친구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의 아내 유여사를 만난 것이다
“집사람도 나와 같이 여기있어-”
휠체어에 몸을 실은 그의 아내 유남옥 여사가 어리둥절 한 표정으로 우리친구들을 둘러 보고 있다. 설마 했는데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머리가 하얗게 희어진 곱게 늙은 할머니. 그녀는 이미
치매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들었다. 충격이다.
그들 부부는 이미 고3 때부터 연애를 했었다
집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때부터 그들과 서로 친하게 지내 왔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알아볼 것 같았는데.
그리고 또 그들 부부는 전주 풍남초등학교 동창생이기도 했는데 마침 이 자리에는 태수, 병주,
우용이 까지 합치면 풍남초등학교 동창생이 다섯 명이나 되는 셈이다
“우리 초등학교 동창회라도 해야 되겠네”
태수가 한마디 거들었는데 유여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초점을 잃은 눈으로 둘러보며 어설프게
웃기 만 했다
이런 모습이 나를 더 가슴 아프게 했다
우리는 세월을 따라 잡지 못한다 그 수많은 나날을 보냈으면서도 아쉬움과 연민 후회만 남는다
육체의 고통보다도 살아온 날들의 아픔이 더 큰 것인가 보다
오늘 이 병동에서는 합동 생일잔치를 벌인 것이다 이번달에 생일날을 맞은 환자들을 위해 다과와
음료수를 차려놓고 합동으로 잔치를 벌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고향의 봄” 노래가락이 합창으로 크게 울린 것이다
무슨 불편한 점이 없느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종표는 뜻밖에 “다른 것은 다 견딜만한데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야 ”라며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새끼 손가락에 겹치면서 “밥이라고 주는 것이 고작
한숟가락 뿐이다”라고 하소연 했다 외부에서 보호자들이 찾아와야 겨우 허기를 면할수 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위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한터. 죽는시늉을 하는 것을 보니 안쓰러워 보였다.
경일이가 밖에 나갔다 오면서 과자 부스러기와 사탕만 사들고 왔다 이 병원 방침이 빵 과일 등 식품사입을 금하고 있어 병원에 갈거라면 아예 가게에서 물건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종표는 아주 좋아했다.
배가 고프다 정말 배가 고픈 것이다 외롭고 허전해 아마 배고픈 것 이상으로 마음이 고픈 것이다
이렇게 늙어가야만 하는가
우리가 젊었을 적 얼마나 찬란한 나날들을 보냈던가 무슨 꿈들을 꾸었으며 어떻게 살아왔던가
올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는데 9월의 햇살은 아직도 따가왔다
60년전 고 3때 친구 다섯 명이 삼림(森林)클럽을 만들었다 다섯 나무라는 뜻이었다 종표,태수,영근,재용 그리고 나였다 그해 대학시험에서 종표 태수 재용이는 서울대생이 되었고 영근이는 고대에
합격했으며 그중에 나만 재수생이 되었다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재용이는 일찍 죽고 미국에 이민간 영근이는 몇 년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세 명만 살아남아 있는셈이다 그 때문에 태수와
연락이되고 우리 한번 만나자고 한 것이다
정말 우리의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이제 황혼에 접어들었다
그것이 인생인가 보다
우리 친구들이 병원문을 나선 것은 오후 다섯 시쯤 돼서다
종표는 친구들 하나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이제 미련이나 두려울 것은 없지만 사실은 저사람 때문이라도 내가 좀 더 오래
살아야 할 것 같다”며 자기 아내 유여사를 가르켰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용인을 벗어나 서울까지 오는 동안 우리 친구들이 탄 차안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친구들은 할말을 잃은 듯 했다
그러더니 태수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건 완전히 병원이 아니라 감옥이구만 저 친구도 죽어서나 저 병원을 나올것이 아닌가”
“그래 우리 어느 누구도 장담 못해. 이제 여기저기 아픈곳만 생겨나고 내일이라도 어떻게 될지 아나?
우용이가 받아 넘기자“사실 나도 혈당이 700을 넘나들어 서너 달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다가 오늘 친구들이 보고 싶어 나온거야”
병주는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인데 몹시 야위어서 체중이 50kg도 못되는 것 같았다
그래 우리 나이쯤 되면 건강이 제일이야
다시 한동안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들로 말문이 닫히고 무더운 시간이 흘러갔다
다른 친구들은 잠실쪽에서 내려주고 나는 강남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앞에서 내렸다
호남고속버스터미널이 이곳에서 5분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주행 고속버스는 저녁에도 많아 여유가 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빼곡이 들어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 사람들. 멋쟁이 젊은 친구들과 여인들 찾잔을 부딪는 작은
소음들. 이 모든 것들이 삶의 현실이다.
나는 지금 메리어트호텔 커피숍에 앉아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메리카노.
그런데 몇시간 전부터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가삿 말.
용인병원에 들어설 때 환자들이 쭉 둘러 앉아서 부르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아직도 세 번째 소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숫자다 지금 이 시간은 4월4일 수요일 오후 7시 288명의 클릭 숫자를 보고 기가 막히고 놀라울 따름이다 박종표 친구의 실명을 주저하며 송호당에 올릴까 말까하는 공엽이 원고를 받고 그냥 올리자고했더니 우리네 인생을 뒤돌아보는 독자들이 이렇게....놀랍다,
어제 여의클럽에서 박종표 친구의 얘기가 나와 장성원 최병석 친구가 종표한테 다녀 왔데요 명석하고 활달하던 친구가 뼈와 가죽만 남아있는 모습을 보자니 인생이 허무하고 마음속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데요 장성원친구는 종표 손에 20만원을 쥐어주고 뒤돌아 서서 한참을 울더니 내가 줬다고 말고 여의클럽에서 줬다고 하더래요
첫댓글 벌써 이 나이가 됐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감사하지
작년 다르고 올 달라 점점 시들어가는 풀잎처럼
참으로 놀라운 숫자다 지금 이 시간은 4월4일 수요일 오후 7시 288명의 클릭 숫자를 보고
기가 막히고 놀라울 따름이다 박종표 친구의 실명을 주저하며 송호당에 올릴까 말까하는 공엽이
원고를 받고 그냥 올리자고했더니 우리네 인생을 뒤돌아보는 독자들이 이렇게....놀랍다,
가슴이 아파요~.
슬퍼져요!
잊으려 해도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 사랍
동창일 뿐 나의 친구(?)는 아닌데도~
자꾸만 생각이 나서 정말 괴로워~
人生 無常 함을 실감케 합니다.
*** 용인을 한번 다녀와야 하지 않을까?
어제 여의클럽에서 박종표 친구의 얘기가 나와 장성원 최병석 친구가 종표한테 다녀 왔데요 명석하고 활달하던 친구가
뼈와 가죽만 남아있는 모습을 보자니 인생이 허무하고 마음속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데요
장성원친구는 종표 손에 20만원을 쥐어주고 뒤돌아 서서 한참을 울더니 내가 줬다고 말고 여의클럽에서 줬다고 하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