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죽은 남편
증 언 자 : 김갑진(남)/정정희(아내)
생년월일 : 1950.(당시 나이 30세)
직 업 : 운전기사(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12
개 요
김갑진 씨는 1980년 당시 광주고속의 운전기사였다. 그는 공수부대의 잔학한 만행이 한창이던 5월 20일 밤, 차를 몰고 시위대와 함께 하던 중 공수부대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 뒤 6년 동안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가며 투병생활을 했지만 1986년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경찰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함평군 학교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남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음식점을 운영하시는 홀어머님 밑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학다리 종합고등학교의 스쿨버스 운전기사로 일했으나 운이 없게도 교통사고를 내어 교도소 신세를 진 일도 있었다. 10개월형을 살고 교도소에서 나온 남편은 농협 빚을 내어 산 4톤 복사로 사업을 하던 중 1975년도에 나와 결혼했다.
사업이 잘 안 되어 그만두고 1979년 1월 광주고속에 입사하여 월 28-29만 원을 받으며 광주에서 따로 생활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함평에 들르곤 했다.
매월 14일이 되기 전까지는 월급을 가지고 집에 들르던 남편이 1980년 5월에는 18일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 19일 광주로 올라온 나는 남편이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을 태우고 3박 4일간 설악산에 가 있다가 그날 돌아오기로 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늦더라도 저녁에는 남편을 만나볼까 했으나 공장으로 바로 가버렸으므로 만나지 못하다가 20일 오후가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경리부에서 월급을 받아왔다.
우리는 함평으로 내려가기 위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으나 시외로 나가는 차가 끊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있는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과 내가 여관 아래층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동료기사가 남편을 찾아와 "시위대가 와서 광주고속 차를 내달라고 하는데 다른 운수회사들은 차를 내줬다고 한다. 우리는 차를 몰고 도청을 지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못 가게 말리는 내 말을 뿌리치 고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여관 앞에서 서성이던 나는 그때는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았지만 MBC 방송국이 불타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뜬눈으로 지새고 난 다음날 새벽 6시경, 나에게 전화가 왔다.
"김갑진 씨 보호자 되세요? 조선대학교 부속병원 응급실이에요. 빨리 오세요."
간호원의 목소리였다. 정신없이 뛰어간 나는 흰천에 덮여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죽은 줄 알았으나 숨은 남아 있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나에게 의사는, "응급처치를 마친 상태이니까 수속을 밟아 입원시키세요." 경황없이 입원을 시킨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남편에게 그간의 일을 물어보았다.
그날 밤 그는 버스를 타고 도청을 지나 노동청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버스에는 동료기사인 운전수 배용주 씨 외에 몇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그들이 탄 차가 노동청에 가까워질 무렵 최루탄을 쏘며 경찰들이 쫓아왔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도망갔는데 유난히 큰 체구(80kg 178cm)를 가진 남편은 잡히고 말았다.
몇 명의 경찰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누군가 빼내려고 했다. 순간 깨어난 남편은 반지를 빼내려 한 사람이 평소 안면이 있던 함평군 소속 경찰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경찰의 도움으로 그는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입원해 있는 남편을 경찰 두 명이 와서 감시했다. 치료를 해주던 의사는, "당신 혹시 간첩이 아니요?"고 그에게 물었고 그를 감시하고 있던 경찰들도 그랬다. 남편이 사건을 당하던 그날 밤 그곳에서 경찰 4명이 죽었는데 경찰들은 남편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노동청 부근에 배치되어 있는 경찰들은 함평군에서 차출되어 온 사람들이었는데 같은 지역 사람이 같은 지역의 경찰을 죽였다는 누명을 썼기 때문에 간첩으로까지 오인되었던 것이다.
일주일 후 수술한 곳에서 실을 빼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해진 듯 남편은 동료들이 입원해 있는 서석병원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뜻을 회사에 전하기 위해 내가 전화하고 나간 사이에 남편은 광주경찰서로 끌려가고 말았다.
나는 회사에 쫓아가 빨리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다. 회사 과장과 함께 경찰서에 가니까 경찰들이 남편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등 야단이었다.
"저놈이 사람 새끼냐? 죽어도 몇 번 죽어야 마땅하다."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 나는 저녁 내내 울며 생각해 보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경찰서에서 이틀 있다가 남편은 상무대로 끌려갔다. 상무대로 간 사실을 모르고 경찰서에 들렀던 나는 그가 사형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정신을 잃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에게 학다리에 있는 남편의 선배들이 찾아왔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어떻게 수습을 해봐야 한다."
서울에 있는 애들 큰아버지께 우리 사정을 알렸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경찰서 조사계에 가서 어떻게 하면 남편이 나올 수 있냐고 물었더니 주동자가 밝혀져야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주동자로 그날 밤 버스를 운전했던 배용주 씨가 지목되어 도망갔던 그도 상무대로 잡혀갔다. 배용주 씨가 그날 밤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으므로 확실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취조하는 과정에서 남편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너희들 둘 다 사형이다."
수사관은 계속해서 협박을 했다. 그러자 남편은, "자네가 운전했지 않느냐?"고 배용주 씨에게 말했는데 그 이야기를 수사관이 듣게 되어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 주동자로 분류된 배용주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복역하다가 김대중 씨가 석방될 무렵에 석방되었고, 남편은 A급으로 분류되어 한 달 만에 나오게 되었다. 그가 나올 무렵 내가 보호자로서 상무대에 불려가 교육을 받았다.
"그간의 일을 밖에서 얘기하지 말라."
그는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회사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을 줄 알았으나 살아 돌아온 그에게 잘 대해 주었다. 회사 간부진들이 의사와 간호원을 자가용에 태우고 와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남편을 치료해 주었다.
"이 사람을 이렇게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빨리 수술을 받아야겠어요." 의사가 경찰에게 말해 1980년 6월말 풀려나올 수 있었다.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다
집으로 돌아온 뒤 서석병원에서 2달 동안 치료를 했는데 치료비는 회사에서 부담했다. 퇴원 후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다시 운전을 하곤 했는데 1달 정도 운전을 하고 나면 2달은 병원신세를 져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병 간호를 위해 함평에 내려가지 않고 광주에 가까스로 전셋방을 얻어 남편과 함께 생활했다.
자꾸만 약해지는 남편에게 몸에 좋다는 약이면 뭐든지 해주려고 노력했고, 1985년에는 남편과 기도원에서 3달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간염, 폐렴,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86년, 끝내 돌아가시고야 말았다.
"살아야 하는데, 살아야 하는데.... 그 녀석들 때문에 걱정이다."며 애들을 걱정하던 그는, "자네, 애들 혼자 키우면서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살아야 자네에게도 좋을 텐데."라고 말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어디라도 들어가 일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데가 없어 1986년 광주고속에서 남편의 퇴직금으로 나온 500만 원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애들 큰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신고를 못 하다가 1987년 11월에야 하게 되었다. 남편의 묘는 애들 고모가 살고 있는 나주 동강에 있어 부상자회에서 망월동으로 이장을 하라고 했으나 광주의 명예가 회복되면 그때 해도 된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들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사람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을 앉아서 기다린다고 해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싸워 우리 손으로 이룩해야만 할 것이다. 어서 광주문제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고 그 다음에 보상을 받았으면 한다. 지금 중학교 2학년인 큰아들은 학교에서 친구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하면 아무 할 말이 없어진다고 한다. 어서 민주화가 되어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5·18과 같은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참된 세상이기를 바랄 뿐이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