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원부 설원기에서 있는 고려시대 연안차씨 계보와 혼인관계 (국역원문)
차효전 이하 안팎의 자손은 다 손꼽기도 어려우나 차중규 이후 좌우의 조상은 계통이 모두 같았다.
위를 근본으로 하여 아래를 접하고 이 족보를 따라 세계(世系])를 더듬어 보면 효전의 아들 태보 수비는 광평시랑(廣評侍郞) 계린의 아버지이고 계린의 아들 내사 용기는 시어중승(侍御中丞) 백소의 아버지다. 백소의 손자 서평백 계한 은 평장사 부강의 아들이고 계한의 아들 유주백(孺州佰)의 아들 삼한대장(三韓大將) 차중규는 창원인 평장사 최유청의 사위이고 차중규의 아들 (태복시사(太僕時事) 차거수는 남평인 평장사 문극겸의 사위이다. 파평인 승상 윤인첨은 차거수의 아들 병부시랑(兵部侍郞) 차약춘의 장인이고 양천인 중찬 허승은 차약춘의 아들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차덕위의 장인이다.
차덕위의 아들 참정(參政) 차척은 언양인 시중 김취려의 사위이고 차척의 장자 낭장(郎將) 차수하는 영가인(永嘉人)추밀 권준의 사위이다. 아래로부터 위로 연하고 이 세계를 하나 살피며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차원부의 아버지 지방어사(地方御使) 차종로는 능성인 부사 구위의 사위이며 차종로의 아버지 좌승상 차포은은 단양인 중찬 우탁의 사위이다. 차포은의 아버지 도총제(都總制) 차득규는 왕중규의 사위이고 차득규의 아버지 중흥백 차송우는 차수하의 아들이다. 이름의 밑에다 일명 이라고 한 것은 한결 같이 왕씨의 계통을 따른 것이다. 고려조의 사람들이 개명하기를 좋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더욱 좋아 하였으므로 개명하여 복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차송우의 둘째 아들 차덕규의 자손을 선산으로 귀양 가 살면서 선산을 관향으로 삼았다.
이 기록의 체재는 오로지 설원을 위해 만들어졌고 또 조상 계통이 흐트러진 것을 민망히 여겨 차원부의 호걸 가문과 큰 문벌의 근원을 잇댄 것이다.
차수하 이하와 차종로 이상은 일시에 드러났던 명현이였는데 그의 자손들이 정몽주와 같은 당류라 하여 임견미 염흥방과 같이 연달아 화를 당하였다.
차송우는 고려 고종조의 훈구(勳舊) 노신이다. 전일에 권신 최충헌 자손 4대가 국권을 계속 잡아 조정의 기강을 어지렵혔는데 역적의 싹이 이미 중국에서 드러났었다. 공이 류경(柳瓊) 등 10여 명과 같이 임금을 도와 대계를 결정하여 최의 등 뭇 흉측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옛날 정사를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위사(衛士)의 호칭을 받았다.
차송우는 왕씨의 지친으로 벼슬이 내시윤에 이르렀는데 내시는 내시윤(內侍尹)으로서 1품이나 2품등이 있어 겸직하였다. 궁중의 환관을 거느려 임금의 행동에 따라 지휘를 하는데 매우 가까운 종친이나 외척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공이 왕씨의 사직을 호위한 훈신(勳臣)으로 원나라 조정에 이름이 드러나 금은제기(金銀祭器)를 하사 받았는데 그의 아내 구씨가 꽃(妓女)을 질투하여 깨트리였으므로 물의가 생겨 임금을 움직여 그의 아내 지기(之己)가 영원히 부모의 은혜를 끊고 오로지 여자의 행실에만 고민한다고 벌을 주었다. 공이 또 부끄러워하고 송구(悚懼)하여 10여 년 간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질투하는 아내 성질의 어려움을 경계하였다.(공에게 아내 다섯 명이 있었다. 구씨가 아들 넷을 낳았다.
그 뒤에 두 집의 권신 딸에게 장가를 갔는데 끝이 좋지 않아 결국 내서 강윤소에게 참소를 입어 간신 임연에게 해를 입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혹은 공이 1백7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신라 본계에 있어서는 고려조 서희가 찬집한 찬집여사(撰集餘史)와 정시상의 서경잡지(西京雜記 ) 김방경의 초당일기(草堂日記)에 드러나 있다.
그 뿌리는 세은지관(世恩之觀)에서 태동하였고 신(신발)은 귀봉지계(龜封之階)에다 놓았다. 세은(世恩)이라는 것은 왕씨의 지친으로 대대로 왕씨의 국은을 입었다는 것을 일컫는다. 귀봉이라는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계단을 꾸미는 것이다. 종족(宗族)이 아니면 할 수 없다.
몸은 비록 귀하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람이 비록 천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궁핍한 외딴 마을에서 평범한 신분일 적의 뜻을 변치 않았다. 위포(韋布한색한 의복)의 뜻을 변치 않는 것은 귀해져도 평범할 때의 뜻을 변치 않고 외딴 마을에서 살 때의 은혜와 친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인 구예도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전에는 공이 차송우의 첩 손서였는데 뒤에는 공이 도리어 차송우의 장인이 되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비난 하였다. 왕씨의 외척으로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으나 임금이 능원(陵園)에다 연회를 하사할 때 몸소 술을 노인에게 먼저 올렸다. 밥상에 무김치를 대하면 북쪽으로 간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려 충선왕이 북쪽 원나라에 가 입조(入朝)했을 때이다.) 충선왕이 무김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공이 밥을 먹을 때에 반드시 무김치를 놓았는데 북쪽으로 간 임금을 사모하기 때문이었다.
아문(衙門관청)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平床)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리며 가난하게 살던 조상이 고초를 읊었던 생각을 늦추지 않았으니 공(具藝)의 윗대 조상은 능성의 아전이였다. 아문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소라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이다.
전일에 권신 임연 임유무 부자를 죽였으니 잔당을 섬멸하지 못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교만과 사치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공은 가세가 너무 성대한 것을 경계하여 외람된 생각을 하지 않고 조상이 미천한 사람에게 굽혔던 뜻으로 공손히 기를 낮추어 자신의 귀한 티를 내지 않았는가 하면 그의 사위 송우가 해를 입은 것을 더욱 두려워하여 더더욱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었다. 비록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이 있었으나 공의 이름이 큰 문벌에 속해 있으므로 화를 면치 못할까 의심하여 날마다 시종(始終) 경선(慶善)을 유지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구민첨도 근신하고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미천한 조상을 잊지 않았다. 공이 할아버지를 이어 효도하고 문채를 갖추어 일신을 편안이 보존하였고 남을 이길까? 두려워하는 등 세심히 생각한 것은 신명(神明)스럽고 덕이 있었다.
2. 차원부 설원기에 있는 고려시대 연안차씨 계보와 혼인관계 검토 (정리본)
첫댓글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조리있게 정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차천로는 족보조작의 귀재였습니다.
차천로는 족보기록의 귀재 였는가 봅니다.
연안차씨에서 신주단지 모시고 있는 차원부 설원기의 실체입니다. 역사적 사실의 조작과 혼인관계 날조, 기타등등 어찌 이런 글이 1456년에 왕명에 의하여 당대 석학들에게 쓰여졌다고 누가 믿겠습니까? 결국 차원부 설원기 및 응제시에 근거한 류-차 동원설은 허구일 뿐입니다. 이런 글을 국역하고 더 나아가 조선중기이후 자신의 뿌리를 문화류씨에 의지해 투탁한 사람들이 이제와서는 오히려 류차달을 차달이라고 하고 류씨를 가성이라고 하는 만행을 저질른 것은 연안차씨 스스로가 족보사에 큰 수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선조들이 할 일 명명백백하게 잘못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은 것이 후손의 도리입니다.
문화류씨 가정보(1562년, 류희잠 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윤환(?-1387, 고려사 열전에 나옴)은 처가 류씨이므로 가정보에 나오고 무후(無后)라고 기록하면서 사위로 남좌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주를 달아 남좌시는 윤환의 부실(副室)의 사위이므로 류간(진주류씨)의 (외)후손들이 아니므로 응당삭거(應當削去), 즉 기록을 삭제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윤환은 류씨의 사위이므로 가정보에 등재하고 남좌시의 후손들은 류씨하고는 혈연관계가 없고 윤환의 부실(副室)과 혈연관계가 있으므로 차후에는 남좌시의 후손들의 기록을 족보에서 삭제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화류씨 족보는 혼이 살아 있는 족보입니다.
고려사 열전에 윤환은 류씨와 결혼을 하였고 얼녀(孼女, 첩)가 있었는데 류씨사이에서는 무후하고 얼녀사이에 딸이 하나 있고 있었습니다. 고려사 열전 남좌시 편을 보면 남좌시는 윤환의 얼녀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가정보의 표현을 얼녀를 부실(副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같은 표현이겠지만 얼녀보다는 존칭의 표현으로 어머니가 정부인이던 첩이던 간에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 입장에서 어머니이므로 가정보에서는 얼녀로 하지 않고 부실로 표현하여 예를 갖추었습니다. 가정보에는 신분을 떠난 인간존중 사상이 있었고 류씨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가정보에 등재하여 내외손을 포함한 만성보가 된 것입니다
차원부설원기 관련하여 여러가지 위작설이 나오고 있지만 어찌 되었던 연안차씨 주장처럼 1456년 왕명에 쓰여졌다고 하니 박팽년,신숙주,하위지, 최항등은 왕명에 의하여 한 씨족의 역사의 계보 및 혼인관계등을 서술함에 있어 함부로 붓끝으로 조작과 날조를 일삼아 누더기 같은 연안차씨 씨족사를 기록했단 말인가? 차원부 설원기 관련하여 연안차씨는 본인 스스로가 큰 잘못이 없니 하루빨리 누더기 같은 족보를 바로잡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일을 했던 가문의 후손들에게 사과를 받아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