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덕(懷德) 송촌(宋村) 동춘당(同春堂)에서 송준길(宋浚吉1607~1689) 선생을 만나다)
2006-08-16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대전 나들목이 가까워 오면 <선비마을 아파트>란 고층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저 선비마을이란 이름이 분명 송촌(宋村) 즉 송씨마을을 이름할 것이며 그렇다면 조선 중기
한시대를 풍미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선생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906~1672)
선생 즉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두 분이 사시던 곳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을 하며 지났다.
1960년대 초 초등학교 쩍 읽을거리가 없던 그 땐 눈에 띄는 것이 독서의 대상이었다.
제 가형(家兄 8년 년상)은 운이 좋게 대전 B고를 다니셨는데 그 학교의 교지(校誌)가 빈한한
우리 사랑방 책꽂이를 장식하고 있어 자주 들춰보면 그 속에 글쓴이들과 학생 이름 중에 왜 그리
송씨들이 많은지... 그게 다 이곳 회덕의 송촌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은진송씨들의 후손임을
그 후에야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의 지명이 회덕(懷德)임에랴.
늘 덕을 품고 살고픈 옛사람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아파트 단지 가운데의 동춘당사적공원에서 본 송촌 마을)
수년전 한국체육대학교 김익환 교수님이 한국사상문화학회를 이끄시며 답사를 주관하셨는데
그 때 몇 번 함께 했을 때 비래동의 남간정사가 있는 우암사적공원과 이곳 동춘당을 다녀
선비박물관을 둘러본적이 있었다. 그러니 연례행사로 친구들과 만나기로 하여 대전을 찾는 참에
동춘당에 들러 송준길 선생을 뵙고 싶었다.
대전엔 처가가 있어 자주 들르지만 서쪽 치우친 곳에 있기에 대개 유성을 거쳐 서울을 오곤했는데
오늘은 내심 동춘당을 둘러보고 싶어 일찍 집을 나와 대전 시가지를 관통한다.
더워선지 시내의 교통흐름은 원만하여 쉽게 대전고속버스터미날을 지난다.
교차로에서 신탄진행 길로 좌회전하니 송촌마을 이정표가 보여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변엔 고층 아파트군과 송촌초등학교와 중학교 등 학교가 둘러서 있고 그 가운데
이 동춘당사적공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 송촌은 이젠 전통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첨단 아파트 단지의 한 가운데에 고가 한옥의 선생댁을 그대로 살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동춘당 옆으로 난 동춘 선생 고택의 입구)
주차장엔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있는데 화강암 말뚝을 박아 따로 출입구가 있겠거니 하며
주변을 돌아도 없다 그 돌말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공원을 찾는 사람에 비해
자동차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인근 주민들과 사무실 차들일까?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땀이 흐르고 햇볕이 따갑지만 그래도 갓가지 큰 나무들과 연못으로 조성된 도심 속
큰 공원이기에 한줄기 바람은 시원하다. 그래도 전에 들러 눈에 익은 동춘당 건물이 반갑게 우릴 맞는다.
우선 보물 209호로 지정 보호하는 동춘당 건물의 설명을 읽어본다.
이곳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192번지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아버지<송이창1561~1627>가
처음 세웠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춘(同春)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
는 뜻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독서를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회덕향약(懷德鄕約)을 만들었다.
대전 지방의 조선시대 별당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단아하면서도 간소한 건물로
작은 규모나 낮은 굴뚝 등에서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여 유학적 덕목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동춘당(同春堂)이란 현판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썼다.>
‘본능적 행위를 억제한다’란 설명이 유학과 큰 상관관계를 이룬다는 건지...
그리고 동춘 선생 고택(同春 先生 古宅)은 대전유형문화재 제3호로 송촌동 192번지에 있는데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관직을 물러나 살던 곳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넉넉한 대지위에
안채와 사랑채, 가묘, 별묘(동춘당 선생 한 분만 모시는 사당)등이 여유있는 배치를 하고있다.
동춘당과 함께 건축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건축양식이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로 설명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겠으나 건축 뿐 아니라
이곳에서 터잡아 사신 동춘당 송준길 선생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춘선생 고택의 사랑채)
아직 이른 아침이라 대문은 열려 있지 않아 고택으로 연결된 길이 있어 솟을 대문이 있는
고택부터 살피기로 하고 고택을 찾았다. 앞의 정면이 사랑채로 팔작지붕에 정면 5간에
측면 3칸의 소략한 규모로 정면엔 좁은 툇마루가 나 있다. 기둥엔 주련도 있었으나
색이 탈색되어 약간의 도들새김으로 된 글씨의 흔적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다시 보수를 했으면 좋겠다. 일자 건물 뒤쪽에 몇채의 살림집이 보였으나 출임금지구역이라
눈으로 살피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참고로 다른 답사팀의 설명을 보충하면 동춘고택은 앞에
사랑채를 배치하고 뒤에 안채를 배치한 튼 입 구(口)자 형태의 집이다. 사랑채 끝에 있는
중문을 통해 안채를 들어갈 수있게 했다한다. 그시절 내외법도가 엄격했기에 사랑채와
구별하기 위해 안채 마당에 내외담을 낮게 설치하여 답답하지 않게 하고 사랑채에
손님 수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란다.
고택 오른쪽엔 별묘(別廟)와 송씨가묘(宋氏家廟) 등 가묘(家廟) 두 채가 있어 이채로웠다.
뒤에 들으니 왼쪽에 있는 별묘(別廟)는 송준길 선생을 모시는 가묘(家廟)이고 오른쪽의
가묘는 송씨집안의 가묘(家廟)이다. 송준길 선생은 문묘(文廟)에 배향된 큰 어른이기에
불천위(不遷位)로 사대봉사(父-祖-曾祖-高祖의 제사) 후에도 폐위되지 않고 계속 제사를
모시려고 설치한 것이다.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상당한 크기로 조성되었으나 어째 윤기가
없는 듯 하다. 옛집은 그 후손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윤이 나기도 하고 허물어 져
가기도 하는 것이다. 보호받는 고가이기에 잘 관리되리라 믿는다. 묘당을 멀리서 살펴보고
동춘당 뒷문을 통해 주답사처인 동춘당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본 동춘당)
마침 40대의 여자 한 분이 동춘당 안을 정리하고 계셔서 방안으로 들어가 살필 수 있느냐까
좋다고한다. 바로 이곳 동춘당을 담당한 문화유적해설사라 하신다.
그러면 먼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은 뉘신지 살펴보자. 내가 알고 있는 동춘당 선생은 조선 효종년간
우암 선생과 북벌(北伐)을 함께 추진하고 글씨를 잘 써 우암선생과 함께 양송체(兩宋體)란
필체명을 부여받기도 했던 분이란 것은 아마 국사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알지 않을까한다.
자료를 통해 그분의 면면을 살펴보면 1606년 선조 39년에 서울 정릉 외가에서 출생한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本貫)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名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의 한사람으로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의 아들이다.
부친의 서울 관직 생활로 지금의 덕수궁 근처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는 1살 연상 11촌 숙질(叔姪) 사이의 먼 친척간으로 8살 때부터
송준길 선생 집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율곡 이이(李珥) 선생을 사숙(私塾)하면서
20세 때 논산의 연산에서 사시는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니 훗날 양송(兩宋)이라 불리고 사계의 같은 문하로 동창이며 벗이라 할 수 있다.

(동춘당 안내판)
1924년(인조 2년) 진사가 된 후 학행으로 천거받아 세마(洗馬)에 임명된 이후, 내시교관(內侍敎官),
동몽교관(童蒙敎官), 대군사부(大君師傅), 예안현감, 형조좌랑(刑曹佐郞), 지평, 한성부 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장인인 상주의 남인 학자 우복 정경세
(愚伏 鄭經世 : 이황→유성룡의 제자) 선생의 죽음으로 관직을 사퇴한 이후 20여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 회덕에서 머물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문화해설사가 동춘당이 우복선생
사위가 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재야산림(在野山林)들을 대거
등용할 때 송시열과 발탁되어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북벌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뒤 1658년(효종 9년)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祭酒) 1659년 병조판서, 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복상문제를 둘러싼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여 관철시켰고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이후 우참찬 등 여러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회덕으로 물러나와 살면서 1672년(현종 12년 3월)여생을 마쳤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그 후 그가 속한 서인이 남인과의 예송에서 패해 관작이
삭탈되기도 했으나 다시 재집권으로 복구되기도 하였다.
선생은 율곡 이이의 충실한 후계자로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형성한 정통 성리학자이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스승인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동방예가(東方禮家)의 종장이 될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기론에서는 율곡 이이 선생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했다한다.
또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곳곳에 많은 유품이 있으니 <충렬사 비문>, 동암서원묘정비,
숭현서원비, 박팽년유허비 등 많은 유적(遺蹟)이 있으며 저서로 <동춘당집>과 <어록해> 등이
있는데 대개 예설(禮說)에 관한 질문과 문답인 편지글이 많다고 한다.
시호(諡號)는 문정공(文正公)이다.

(고택 오른쪽의 송씨 가묘)
특히 양송이란 칭호를 받는 송시열과 관계를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한 후 노론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학문경향이나 정치적 입장에서 나라일을 처리함에 있어 의견을 같이 하였다.
다만 송시열의 꼭 이겨야 하겠다는 강경한 성격에 비해 인품이 원만하여 다른 당파로부터
비교적 비판이 적었다. 그의 장인인 우복 정경세의 영향을 받아 평생토록 퇴계 이황 선생을
흠모하여 사숙했다고 하여 남인과도 원만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선생은 이황선생의 경철학(敬哲學)에 영향을 받은 듯 '경(敬)을 수양의 가장 중요한
근본으로 삼고, 또 가치의 근거로 인식하였다' 한다.
그러나 사후에 후학과 후손들간에 위패를 두는 순서 문제로 분란이 일기도 했으며(春-尤 是非)
이 위패 서열문제는 두 집안과 후학 사이에 고질적인 다툼으로 계속 이어졌고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수제자인 유성룡-김성일 위패순서문제의 싸움인 屛-虎 是非와 비슷)
송준길 선생 사후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을 지지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상소문이 발견되어
그 손자 송병문이 조정에 받쳤는데 강경한 송시열에 비해 관대한 송준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사례로 이로 인해 두 집안간이 멀어지기도 했다한다.

(송준길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별묘)
송시열과 송준길 선생은 인조이래 숙종 때까지 충청도 지역(대전-논산) 지식인들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일세를 풍미하게 만든 음양관계 비슷한 최고의 파트너의 장본인들이다.
그러나 송시열 사후 충청도 노론 지식인들은 점차 중앙정계에서 밀려나고 서울 노론이 독점하며
급기야 후손들의 위패 순서 문제로 두 집안간에 틈이 생기기도 하고 그 후 화양동서원이
권력화 하여 묵패(墨牌 : 명령서)를 발행하여 양민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부작용은
우암-동춘당 두 분의 덕이 쇠하게 되는 요인이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