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화의 벗님들! 2019년이 가고 2020년이 밝아오는 세모의 시간에 2019 잘 마무리하시고 2020 경자년 쥐띠해를 맞이하여, 삶의 여정에 행복과 행운이 따르기를 간절히 빕니다. 2019년도 저물어가고 2020년 새로운 한해의 시작이 얼마 않남았네요. 나의 벗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12월을 멋지게 장식하시고 2020년 새해에는 행운의 여신이 찾아오기를 빕니다. 새로 오는 2020년! 더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짐해 봅니다. 우리모두 2020년을 맞이해 더 기쁘고 즐겁게 살도록 합시다. 2020년 쥐띠해 낙관적인 마음으로 희망을 쏘아 올리며 장엄한 출발을 해 봅시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각해본다.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자유인 인생 나그네의 현업시절 지도운용과장 직무를 수행하던 조동화사진이다.> 전북김제 내가 태어난곳 이야기 대산배달(한국명 최영의) 내가 태어나서 자라던곳 김제! 작은 간이역 와룡역 기차길옆 내가 살던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북김제군용지면와룡리1구 와룡마을 이곳이 내가 태어나서 소년시절 보낸곳이랍니다. 나의집에서 50여m 떨어진곳에 대산배달 최영의가 태어나서 자란곳이지요. 대산배달 최영의! 그는 고향어른들로부터 그의 소년시절 말듣기로는 용지면 와룡의 작은산 와룡산에 올라가 불량배 부슷하게 주먹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있지요. 최영의는 유복한 가정으로 아버지가 용지면장을 했으며 최승현과 김부영의 6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지요. 최영의는 내가 국민학교 5-6학년 시절에 그의 집을 그의 아내와 방문하여 감회어린 표정으로 고향사람들한테 감동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제요. 동네애들 모두가 보았제요. 육중한 체구 아마 보통사람 세배 크기는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그것이 내가 직접 본 대산배달 최영의 모습이여. 아마도 금의환향하여 감회어리게 자기가 태어난곳 고향사람한테 최영의가 고향 찾아 고향어른들 다시만나 빕게 되어 밥갑다 하는 얘기였겠지요. 인간이란 자기고향은 어머님의 품안같은것이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니까? 최영의는 어려서부터 무도에 관심을 가졌다. 1932년 아버지가 세운 김제의 용지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택견·씨름 같은 고유 무술을 알게 되었다. 5년 뒤인 1937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거기서도 계속 무술을 연마했다. 그의 일생에서 큰 전기는 1939년이었다. 그 해 3월, 16세의 소년 최영의는 홀로 군산에서 나가사키로 도일했다. 그 뒤 그의 삶의 주된 무대를 선택한 중대한 결단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통신 때문에 무척 멀고 외로웠을 여정을 어린 나이에 홀로 떠났다는 사실은 그의 견고한 마음을 보여준다. 최영의는 야마나시(山梨) 소년항공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앞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할 가라테(空手道)를 처음으로 배웠다. 원래 가라대(당수)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해방전 1939년 3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가라데(당수, 唐手)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우선 어쩔수 없이 편의를 위해 일본에 귀화하면서 만든 대산배달(오오야마 마츠다스)에 대해 알아보자. 배달의 의미는 바로 백두산의 민족이란 뜻이다. 귀화하면서 까지 그는 끝까지 그의 정체성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한번도 일본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오야마 마츠다스라는 일본이름의 어감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면서도 끝까지 최후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신 최배달. 그가 71세에 폐암으로 일찍 세상을 작고하여 자기가 태어난 고향 김제 와룡을 위해 이루고자 했던 업적이 실행되지 못해 아쉬운 생각을 금할수 없지만 그의 고귀한 고향을 사랑했던 가슴속의 정신은 후대의 몫으로 남겨지다. 1994년 6월 26일, 일본 황족과 고위층에게만 특별히 허용되는 아오아마 장례식장에는 한국계 일본인 최배달의 추모 행사가 열렸다. 최배달은 이미 두 달 전에 운명을 달리한 터였다.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은 하나같이 최배달의 죽음을 ‘일본 최고 영웅의 영면’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날 아오야마 장례식장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된 조사가 낭독됐다. “매일 아침 최배달 선생님의 위패와 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합니다” 일본의 미디어 회사 ‘미디어 8’의 대표 마에다 씨는 최배달 사후 매일 아침 조의를 표했다. 일본 전통의 가라테를 변형한 극진 가라테를 창시해 평생 목숨을 건 치열한 싸움을 계속해온 최배달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외심음 대단했다. 한국명 최영의, 일본명 오오야마 마쓰다스(大山倍達)는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신화가 됐다. 극진공수도의 역사는 실로 김제용지와룡이 고향인 대산배달(한국명 최영의)의 역사이다. 전세계에서 한다하는 싸움꾼을 거의 꺾고 실전 공수도인 극진 가라테를 보급한 재일 한국인이다 극진공수도를 창립한 대산배달(한국명 최영의)이력를 소개하면 1923년 7월 대산배달(大山倍達:최배달, 최영의) 김제용지와룡에서 탄생. 1939년 3월 16세때 일본으로 밀항 1944년 학도병 차출(일본태평양전쟁) 1946년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체육학과 입학. 1947년 9월 교토(京都) 마루야마(丸山) 공회당에서의 전국 일본 공수도 선수권에 출전하고 우승. 1948년 4월 생애를 공수에 걸치는 결의를 하고, 입산하여 18개월의 수행을 행한다. 1952년 3월 시카고의 공수 협회로부터 초대받고 도미.11개월에 걸친 전미 연무와 공수의 지도를 행한다. 1954년 4월 도쿄(東京), 메구로시의 노천에 정식으로 대산도장(大山道場)의 간판을 건다. 1954년 4월, 최배달은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가라테 경기장에서 들이대는 카메라 플래시에는 익숙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내는 카메라는 처음이었다. 맨손으로 황소의 뿔을 잘라낸다는 그의 괴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소와 싸운 가라테’를 위해 최배달은 황소와 맞서고 있었다. “신장 175cm, 체중 70kg, 상당히 강한 몸을 가진 일본 가라테의 일인자 오오야마 6단이 700kg이 넘는 황소와 싸워 뿔을 잘라냈습니다” 소의 뿔을 두 동강 내는 광경이 펼쳐지자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흥분에 들떴다. 같은 해 최배달은 황소 47마리와 싸워 4마리를 즉사시키고 나머지 43마리의 뿔을 잘라내 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왜 황소와 싸워야만 했을까? 최배달에게는 더 이상 싸울 ‘사람’이 없었다. 1954년6월 미국을 방문. 시카고에서 소와 격투. 手刀로 소의 뿔을 부러뜨리고 맹우를 쓰러뜨림 1960년 수십여 차례에 걸친 해외 원정을 통해, 드디어 아메리카,유럽등 16개국에 합계 72의 지부가 발족. 1965년 6월 극진 회관총 본부 준공.국제 공수도 연맹 극진 회관을 정식으로 발족. 1969년 9월 제1 회 오픈 토너먼트 전국 일본 공수도 선수권대회를 동경체육관에서 개최.7,000인의 관중을 모은다. 1971.6 미 합중국 본부도장을 뉴욕. 맨하탄에 개설. 뉴욕시장 참석 1972년 10월 당시,황태자였던 스페인의 카르로스 국왕이 내관.명예 삼단을 준다. 1984년 4월 다나카(田中) 가쿠에이(角榮) 전직수상과 대담. 1985년 11월 제 3회 전유럽 공수도 선수권대회 개최 시,스페인,바르셀로나에 사마란치 IOC 회장과 대면 . 1988년 9월 일본의 모든 도도 부현에 극진 회관 조직이 확립. 1988년 12월 사마란치 IOC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고,공수,쿵후,태권도 의(것) 올림픽 공개 경기 참가 문제에 관하여 제안. 1991년 5월 몽골에 정식적인 극진 회관 조직 발족. 1994년 4월26일 대산배달(大山倍達) 성노가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 향년71세. 그는 1964년, 실전무예를 근간으로 한 ‘극진회관’을 설립했고 현재까지 그의 제자는 전세계 140개국 2,000만 명에 이른다. 최배달 최영의의 생애 1923년7월 27일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최승현(부), 김부영(모)의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승현은 일제시대 당시 용지면 면장을 했으며 지방의 유지였다. 최영의라는 이름보다는 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라는 일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1970년대 어린이잡지 ‘새소년’에 연재된 고우영의 ‘대야망’과 1990년대 스포스서울에 연재된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그리고 2004년 개봉된 양윤호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진 武人이다. 최영의는 9세 때 누나가 사는 만주에 갔다가 그곳 농장에서 중국무술인 남권을 배웠다. 16세 때 파일럿이 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가라테를 익히면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일본 지바현 남부의 기요즈미 산으로 들어가 14개월 동안 뼈를 깎는 훈련을 한다. 속세가 그리워질 때마다 한쪽 눈썹을 번갈아 밀며 하루 종일 심신을 갈고 닦았다고 한다. 그는 입산수도를 마치고 하산, 전일본공수도대회에서 우승하고 전국 각지의 고수들과 대결을 펼친다. 3일 동안 매일 100명씩 대결해서 이기기도 하고, 가라테 고수 30명과의 무사시노 혈전에서 살아남기도 했다. 1957년 극진가라테를 창시하고 64년 국제극진가라테협회를 만들어 실전(實戰) 가라테를 세계에 보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배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만화가 고우영이 처음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최영의는 일본에 귀화하면서 배달민족임을 잊지 않으려고 이름을 배달로 지었고 끝내 한국 국적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333원칙을 통해 자신을 최고수의 자리에 올렸다. 첫째 어떤 기술에 대해 3백번 연습하면 흉내를 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그 기술을 보여줄 수 있다, 둘째 3천 번 연습하면 실전에 쓸 수 있는 정도가 되고 평범한 무술인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3만 번 연습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술로 상대방을 제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happiness)이란 무엇인가? 안병욱 교수는 행복이란 첫째는 낙천적 인생관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생활 태도다. 인생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렸다. 극락과 지옥은 내 마음 속에 있다. 감사와 기쁨의 눈으로 인생을 보면 모두 즐겁고 기쁘다. 둘째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생의 주성분이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으로 되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허무주의와 고독감과 절망감에 빠져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고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셋째는 보람있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요, 일 하는 것은 사는 것이다. 일을 하되,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보람을 못 느낄 때, 인생은 참을 수 없는 고역으로 변한다. 건강, 돈, 명예, 성공, 신앙,지혜,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아니다. 부자의 대부분은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낙천적 인생관, 사랑, 보람있는 일. 3가지 행복관을 가지고 살면 행복하다. 중국속담에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가지다. 할 일이 없다는 것,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는 것,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만큼 비참한 사실은 없을 것 같다. 죽을때까지 일을 놓지 않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은 행복의 필수조건 중 하나다. 존 록펠러 3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 단순한 원칙이 있다. 먼저, 당신이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 일을 찾았다면 당신이 가진 에너지, 야망, 능력 등 모든 영혼을 쏟아 부어라." 행복( happiness)은 어디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4.22-1804.2.12)는 " 인간 행복의 3가지 조건으로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그 세 가지를 충족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일생을 보낸 대철학자가 제시한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이 범인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게 되고,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 세가지 조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노동뒤의 휴식은 순수한 기쁨 행복의 원천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칸트 근로는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휴식은 피곤한 나날을 더욱 값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근로 뒤의 휴식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보들레르 휴식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충전의 기회가 바로 휴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휴식과 행복은 그대가 바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근로의 결과에서 얻을 수 있다'- 토마스 A. 캠피스 - 건강글 소금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마음 안에 있는 3%의 좋은 생각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향기롭고 맛깔스러운 산해진미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지 모르겠지만 건강에는 아주 해롭다. ● 남을 미워하지 마세요. 미움은 피에 독성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 웃으세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