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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제사장 직분
로마서 15:14~21
507장( 저북방 얼음산과), 505장( 온 세상 위하여)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초반부에 구원론적 교리를 주로 가르쳐왔으며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윤리적인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편지를 써왔습니다. 이제 그러한 가르침들은 마무리를 짓고서, 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기의 일정에 대하여 알려주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앞으로 있을 자기의 로마의 방문 계획, 서바나를 향하여 가는 선교 계획 등에 대하여 로마의 성도들에게 알리면서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부분은 그러한 사도의 사적이고 친밀한 교제 부분의 첫 부분입니다. 이 말씀의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기를 늘 힘써야 하겠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15:14,5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지금까지 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로마의 성도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이 복음을 어떠한 경로로 듣게 되었는지, 그들 중에 유대인 성도들의 수와 이방인 성도들의 수와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16장에 보면 당시 로마 시에 거주하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도 숫자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그 당시 로마 시내에 거주하는 총 인구가 약 백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기독교인의 총 수는 백명이나 수백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사도 바울과 접촉하여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겠고, 혹은 일부는 예루살렘에 순례하면서 기독교인들과 접촉하여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대다수는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성도들이 대부분인 로마의 성도들에게 갑작스럽게 이 편지를 써보냈을 때 그들이 혹시라도 당혹해하고 사도 바울의 권위에 대하여 인정하지 안할 수 있다는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을 형제로서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들이 선한 신앙적 열매도 많이 맺고 있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도 충분히 성장하여서 서로 가르치며 권할 정도로 성숙한 성도들임을 확신한다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는 그들이 비록 도덕적으로도 선하며 지식적으로도 남을 가르칠 만한 성숙한 신자일지라도 사도가 이 긴 편지를 써 보낸 이유는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하게 하려고 담대히 섰노라”는 고백처럼, 알고 있더라도 그들로 아는 것을 다시 되새기고 생각나게 하여 신앙의 기초를 더욱 든든히 해주기 위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더 이상 서로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더 이상 서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완전한 자는 없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진리를 배우고자 힘씁시다. 알고 있는 진리라도 다시 생각나도록 또 다시 듣는 것을 즐거워합시다. 전도서 12:11 말씀에,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과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나 동료 성도님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복음의 진리 말씀과 경건의 교훈들은 모두 한 목자 우리 구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바 말씀이며, 그 말씀들은 우리 마음에 박히는 못과 같습니다. 보통 못을 벽에다가 칠 때 망치로 한번 박아서 잘 박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못을 나무나 콘크리트에 박을 때에 망치로 여러번 계속 쳐야 깊숙이 들어가서 흔들리지 않고 그 못에 많은 것을 걸거나 고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말씀들을 한번 듣고는 마음에 박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들을 여러번 듣고 또 들을 때에, 벽에 망치로 여러번을 두들긴 못처럼, 우리 마음에 깊게 박혀서 잊혀지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 말씀이 다스리고 인도하고 지켜내고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함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과 경건의 교훈 말씀들을 듣고 또 듣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혼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 특히 대다수가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인 그들에게 긴 로마서의 편지를 써 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목적이 무엇이냐면 그 로마의 이방인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져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워졌다는 확고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1:13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라고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2:8 말씀에서도 이기를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방인의 사도로 주님께서 불러주셨다는 이 확고한 확신이 있기에 사도는 비록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직접 얼굴을 만난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렇게 기꺼이 편지를 써 보낼 자격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편지를 써 보내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어서 그들 이방인 성도들로 하여금 향기로운 제물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지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을 전도하고 잘 양육하고 잘 이끌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가장 귀한 제물이요 제사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사를 올려드리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우리가 드릴 가장 귀한 제사는 한 영혼을 전도하고 그들을 몸된 교회로 이끌며 그들을 위하여 성령으로 기도하여서 그들이 은혜 가운데 잘 성장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3에서는 중매 놓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또한 이러한 사역을 사도는 아기 낳는 여인의 해산의 수고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19 말씀에 이르기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때로는 우리들이 최고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최고의 신부감을 찾아내어 예수님께 아름답게 어울리도록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세상 유혹자들을 다 끊어내어 오직 순수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워지도록 끝까지 거룩한 중매쟁이 노릇을 잘 해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아 길러가는 산모와 같은 모습이, 영혼을 마음에 품고 오랫동안 기도와 전도로 잉태했다가 해산의 수고와 같은 애씀과 희생으로 영혼을 낳은 다음에도 계속하여 사랑의 젖을 먹이고 애지중지 길러야 혼자서라도 말씀의 밥을 떠먹고 고기도 먹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장성한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스승, 영적인 아비, 영적인 어미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고의 사역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신의 영혼 구원 사역에 대한 남다른 열심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얻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린도전서 9:22~25)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가장 늦게 부르심을 받았지만 다른 사도들보다 더 영혼 구원 사역에 열심을 낸 것은 그만큼 이 영혼 구원이 귀하고 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르신 말씀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 cf. 누가복음 15:10,32)
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도 훗날에 가장 큰 영광과 축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서 12:3 말씀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고 하였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 예배와 증거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진리와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이 귀한 사역에 헌신할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이 복음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도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 참 예배자로 서게 되고 그들이 또 나아가서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 또 다른 많은 영혼들을 예배자로 불러들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배와 더불어 복음 증거의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 영혼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복된 영혼의 제사장 사역에 귀하게 헌신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복음의 영역을 넓히는 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17절로부터 2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당시 복음을 전파하려고 얼마나 광대한 지역을 누볐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약 십년 동안 전도 여행을 통하여 수천 킬로 미터를 다니면서 주요 도시 거점들을 집중적으로 전도하였음을 여기서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 회심한 다메섹에서 즉시 전도하였고 아라바 사막에서 삼년 동안 기도한 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하고 전도하다가 고향 다소에서 잠시 칩거하다가 안디옥 교회에 와서 교사로서 사역하다가 바나바와 함께 유명한 이방 지역 전도 여행을 세 차례에 걸쳐 다니면서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기 전에 이미 19절에 나오는 일루리곤까지 전도 여행을 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일루리곤은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북서쪽 지역으로서 지금의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유고와 체코슬라비아와 같은 나라들이 있는 지역입니다. 아마 사도행전 20장 1절과 2절에 보면, 에베소에서 아데미 우상 숭배자들에 의하여 폭동이 일어났을 때 사도 바울이 그곳 에베소 교회를 떠나 바다 건너 마게도냐로 건너갔다고 나오는데, 그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사도는 북쪽 지역으로 더 올라가서 이렇게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전하고 내려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광대한 지역에 복음 전도를 행한 것은 그를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장차 다시 오시는 이 위대한 왕의 복음의 선포자로서,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곳에 가서 복음의 나팔을 크게 울려 이방 지역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모두가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는 이렇게 불모지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명을 받았기에 이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아볼로 같은 경우는 물을 주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효력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그에게 넘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그렇게 광대한 지역에 복음을 효력 있게 전하고 단기간에 교회 가운데 확고한 증인들을 세워서 그 토착 지역의 성도들이 남아서 계속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교회의 장로들과 집사들을 세우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곤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의 선교 원칙은 이것이었는데, 20절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우리나라에서도 초창기 오셨던 선교사님들도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선교 방침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1885년 어간에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님 부부들이 인천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미국의 교단에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교파와 선교 단체들에서 선교사님들이 속속 도착하자 혹시라도 선교사님들의 불화와 대립이 발생할까하여 선교사님들의 협정을 체결하려고 1890년에 선교사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습니다. 일명 ‘교계예양’이라고 불리는 이 선교지 분할 협정에 의하여 미국의 남장로회는 충청도 전라도 호남 지역을 선교하고, 미국의 북장로회는 이미 선교를 개시하는 모든 지역의 선교 기득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는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가 함께 선교하기로 약정하고, 경상도 남부는 호주 장로회가 경상도 북부는 북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전 지역의 인구 오천 명 이상의 도시에서는 함께 선교 사업을 진행하고 그 미만에서는 먼저 선교를 개시한 선교회의 담당 구역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08년에는 평안 북도 영변 중심으로 한 지역은 북 감리교에서 하고, 그 외에 강계와 선천 등지는 북장로회 선교 구역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러한 협정으로 복음이 효과적으로 마찰없이 넓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조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상호 협조 아래 순조롭게 선교의 실적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신과 태도를 가지고 지금도 세계 각처에서 선교를 진행하는 선교사님들이 사역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듣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선교의 후방 지역에 있고 복음 전도자의 사명, 선교사님의 사명을 받지 아니하였지만, 최선을 다하여 복음 전도의 광대한 열매가 맺혀지도록 후방에서 물질과 기도로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몇몇의 동역자들과 더불어서 이와 같이 광대한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18절 후반부 이하에서,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라고 한 말씀과 같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절대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1:4,5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선교 여행 중에 복음을 전할 때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따랐기에 이러한 큰 열매를 맺는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세계 선교와 국내 복음화와 우리 천안 일대의 복음화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해주심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해주실 때 따르는 표적이 임하고 듣는 자들이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심령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 모두 성령께서 초대 교회 시대와 같이 동일하게 우리를 통하여 일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일해주시기를 위하여 중보 기도합시다. 모든 예배 때에도 성령께서 친히 함께하사 말씀 자체에 큰 확신이 함께해주기를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을 위하여 성령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과거 초대 교회 때에나 19세기, 20세기의 큰 부흥의 때와 같이 21세기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복음 전도의 위대한 사역이 다시금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