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더 이상 시집을 사지 않는 시대에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내면 풍경은 어떨까?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가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민음사 펴냄), <우주 전쟁 중에 첫사랑>(민음사 펴냄)에 이어서 세 번째 시집 <곡면의 힘>(민음사 펴냄)을 펴냈다. 서동욱 교수는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펴냄), <일상의 모험>(민음사 펴냄), <철학 연습>(반비 펴냄) 같은 책을 펴낸 철학자다. 때로는 논쟁도 마다하지 않은 문학 평론가로서 <익명의 밤>(민음사 펴냄)과 같은 비평서도 냈다.
시인 서동욱'은 "시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출판 시장에서 시집이 팔리지 않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시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한국 시가 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고작 열두 명의 사도와 몇 명의 신도가 전부였던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교회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 시대 교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했습니까?"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국민 오락"처럼 시가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든 현실도 포착한다. 시 모임, 웹사이트 심지어 최근 논란이 된 지하철 역사 게시판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시가 넘쳐난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순간을 포착한 짧은 단상 역시 그 형태는 시의 모습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을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모두가 그의 작품을 향유하면서 희로애락을 체험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지닌 문학을 거의 상실한 게 아닌가 싶다.
옷장 안에 전기를 잘 가두었다
버려진 스웨터 속에서 잠을 자던
영혼의 마지막 조각 같은 정전기
생과
생을 통과하는 감전
나는 마흔을 슬프게 보낸 것 같고
너는 저녁이 와도 불을 켜지 않았으며
아마도 대흥역의 똑같은 개찰구를
언젠가 통과했겠지
세월을 인내할 줄 아는 것은
옷장이 아니며 냉장고다
저토록 엄격한 보호자를 보라
개찰구의 센서들만이 인과율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한 사람이 우는 물처럼 지나갔고 왜
한 사람이 오지 않는지
그러나 금방 치워지는 식당 밥상처럼
새 밤이 오고 새날이 온다
어느 날 마른 발걸음은 기억을 잃어버리고서
역에서 내린다
탁, 탁 정전기 하나가 별을 괘도 밖으로 던질 때마다
깜짝 놀라서
낯익은 난간을 꽉 쥐어 본다
-<감전> 전문
시작(詩作)이란, 홀로 훈련하는 운동선수가 오직 스스로에게 몰두하는듯하지만 기실 자신의 의식과 상관없이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듯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수백 개 째 혼자 공을 던지는 투수의 훈련에서 오로지 의식되는 것은 자신의 구질이지만, 다른 한편 그의 공을 쳐낼 자를 의식의 바깥에서 필연적인 근거로 삼으며, 패스를 연습하는 축구 선수는 공의 향방만을 의식하지만 그야말로 자신의 패스를 받을 자를 필연적인 근거로 삼는다.
우리가 공동체를 인식하기 이전에, 우리의 실존은 공동체를 향해 이미 개방되어 있으며, 이 개방성은 타자를 향한 영원한 운동으로 표현될 것이다. 우리는 고독할 새가 없다기보다도 고독을 통해서조차 공동체를 향해 나간다. 따라서 표면에 나타난 형태가 나이건 너이건 어떤 것이건 간에 시를 주관하는 근본적인 화자는 '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