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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플라톤의 우주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플라톤은 우주적 질서의 기본원리들과 원리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일을 우주생성론의 형식을 빌어 설명한다. 기하학 수업시간에 선생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작도를 통해 도형들과 도형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작도의 시간적 순서는 도형들의 논리적 순서나 위계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플라톤은 교육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주론을 우주생성론의 표현을 빌어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계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이해해야 한다. 이데아와 매체(필연, 수용자, 물질), 데미우르고스로 표현되는 정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작용한 결과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한 상호작용을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세계설명의 대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이 우주이다. 세 가지 요소를 독립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이다.14) 플라톤에게는 지금 우주 질서가 기본 데이터로 주어졌다. 이제 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우주에 질서가 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는 그 이유를 지성과 이데아라는 두 원리에서 찾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눈에 보이는 우주이며, 생성의 세계이다. 생성의 세계란 변화를 겪고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변치 않는 구조와 질서를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정신과 이데아 덕분에 그러한 구조와 질서가 있다고 여긴다.15)
플라톤은 우주를 구(球)로 묘사한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 구의 바깥 면에 항성들이 박혀 있다. 방황하는(planomene) 운동을 하는 일부 행성(planets)을 제외하면 모든 천체는 규칙적인 원운동을 한다.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전체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눈에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성마저도 같음과 다름의 원운동이 서로 작용한 결과이다. 우리 눈에 무질서하게 보이는 운동도 실상은 질서 있는 운동이다. 이는 흙, 물, 공기, 불이라는 4원소 사이의 운동에도 적용된다. 흙이 물로, 물이 공기로, 공기가 불로 변화하는 과정은 우리 눈에는 불규칙하게 보인다. 하지만 흙을 정사면체, 물을 정육면체, 공기를 정팔면체, 불을 정이십면체로 이해하는 경우 4원소 사이의 변화는 각 정다면체의 변들의 수의 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 안의 운동 변화에는 완전한 수학적 질서가 드러난다. 물론 수학적 질서가 이 우주 안에서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직각 부등변 삼각형을 기본 삼각형으로 지니는 정사면체에 해당하는 흙은 나머지 세 정다면체로 바뀔 수 없다. 나머지 세 정다면체의 기본삼각형은 정삼각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찰에 따르면, 흙은 물로 변하며, 물도 다시 흙으로 변한다. 적어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플라톤이 제시한 기하학적 설명은 이러한 현상을 모두 다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의 수학적 설명은 한계에 부딪친다. 그래서 플라톤은 흙과 물 사이의 변화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하학적 설명을 내놓는 사람은 자신의 적이 아니라 친구(philos)라고 밝힌다. 그래서 플라톤은 보다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그렇지 못한 이론보다 더 개연적(eikos)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우주론을 엄밀한 이야기(akribes logos) 대신 개연적 이야기(eikos mythos, eikos logos)라고 불렀다. 그리고 개연적이라는 표현에 대해 비교급을 사용한다. 이는 개연성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 개연성의 정도 차이는 얼마나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그 설명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지에 대한 확신은 사람에게 있을 수 없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플라톤에 따르면,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만들 때 사용해야만 하는(sine qua non) 재료에 그 원인이 있다. 왜 그러한가?
먼저 플라톤이 이해한 우주재료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 보자. 그 동안 학자들은 플라톤의 우주재료를 순수연장(延長)으로, 즉 기하학적 공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로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여 왔다. 기존의 해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플라톤의 재료는 순수기하학적 공간이다.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플라톤의 재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이다. 세 번째 해석에 따르면, 플라톤의 재료는 순수기하학적 공간이기도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이기도 하다. 그런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살펴보면, 첫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구절과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구절이 나란히 나온다. 따라서 첫 번째 해석이나 두 번째 해석을 따르는 학자들은 반대편 구절을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기존의 학자들이 내놓은 설명은 어딘가 억지 해석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세 번째 해석을 따르는 학자들이 나온다. 이 해석에 따르면, 플라톤 자신은 아직 자신의 재료가 무엇인지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 번째 입장을 따르면서 플라톤을 변호하기 위한 시도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슐츠의 해석이다. 그는 기존의 문제 제기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플라톤의 재료가 순수기하학적 공간이냐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이냐는 문제 제기는 이미 특정의 물질관을 전제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의 테제에 따르면, 근대적 물질관 대신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온 이후의 현대의 물질관에서 출발하는 경우 플라톤의 재료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물질관에 따르면, 공간과는 달리 물질에는 본질적 속성이 있다. 불투과성(不透過性)과 관성(慣性)이 그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물질관에 따라 플라톤의 재료 논의를 살펴보면, 플라톤이 자신의 재료 개념에 어떤 본질적 속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플라톤의 재료가 순수기하학적 공간이냐 아니면 물질이냐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 플라톤이 우주 재료를 때로 순수기하학적 공간인 것처럼 묘사하는(예: en ho) 동시에 공간의 운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또한 우주 재료를 황금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플라톤이 혼선을 빚고 있다고 여겼다. 슐츠에 따르면, 플라톤은 여기서 모순을 범하지 않는다. 도리어 기존의 물질관을 이천 년 이상 뛰어넘어 현대의 물질관을 예견하고 있다. 모든 물리적 성질이 순수기하학적 성질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여긴다. 현대 물리학에서 빛이 입자라는 가설과 파장이라는 가설이 모두 옳듯이, 플라톤의 우주 재료가 기하학적 공간인 동시에 물질이라는 생각은 옳다. 슐츠는 그렇게 주장한다.16)
그의 독창적인 주장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천 년 이상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주장은 일부 학자들로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17) 더 나아가서 플라톤은 자신의 논의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필자가 보기에 플라톤이 설명하는 우주 재료 개념에는 모순이 있다. 또한 플라톤도 이 점을 의식한다. 그가 자신의 설명을 그럼직한 이야기(eikos logos)로 규정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필자가 보기에, 플라톤이 서로 모순된 측면을 우주 재료 개념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자연 세계를 설명할 때 끌어들이는 이데아론과 기하학적 설명이 서로 환원될 수 없다는데 있다.18) 이 테제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다룰 예정이다.
플라톤이 이해한 우주 재료를 (질적 규정인 이데아를 받아들이는) 순수공간으로 이해하든, (기하학적 질서를 통해 이해해야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물질로 이해하든 간에, 이데아의 질서나 기하학적 질서는 순수공간이나 물질에 완전히 구현되지 못한다. 순수공간이나 물질안에 저항하는 힘 때문에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질을 규정할 때 사용하는 헬라어는 hyle이다. hyle의 원 의미는 '목재'이다. 플라톤도 『티마이오스』에서 hyle를 목재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목재를 예로 들어보자. 뛰어난 목공수라면 좋은 목재를 구하기 위해 방방곡곡을 다닐 것이다. 그는 그가 머리속에 구상하고 있는 완성품과 관련해서 목재의 좋음을 정할 것이다. 목재의 나무결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목재의 좋고 나쁨은 목재를 사용하여 완성품을 만드려는 제작자의 의도나 설계에 달려 있다. 그래서 똑같은 목재라도 문을 만드는데는 나빠도 목공예품을 만드는데는 좋을 수 있다. 그런데 목수가 목재를 사용해서 완성품을 만들 때 그는 자기 마음대로 제작할 수는 없다. 그는 나무결과 같은 목재의 독특한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나무결을 살리는 동시에 자신의 설계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과정을 설득이라고 표현했다. 설득을 하려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지식 수준 등을 고려해야 하듯이, 목수의 설득은 목재의 성질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플라톤에 따르면, 설득이 100퍼센트 성공하는 일은 없다. 설득은 언제나 한계에 부닥친다. 목재에 아무런 성질이 없었다면, 목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완전히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목수는 강제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목재의 나무결을 때로 무시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이루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강제만 사용하는 경우 결과가 나쁘게 나올 수 있다. 목재는 완성품이 되기 전에 쪼개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설득과 강제라는 두 방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섞어 쓰느냐에 따라 훌륭한 제작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우주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언제나 남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완전의 책임은 데미우르고스에게 있지 않다. 데미우르고스는 그 점에 있어서는 무능하기 때문이다. 우주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불완전하게 만들었다면, 데미우르고스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능성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에게 없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플라톤에게는 기독교의 오랜 숙제인 신정론(theodicy)의 문제가 없다. 세상에 악이 있는 이유를 신에게 찾을 필요가 없다.
우주의 재료만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데미우르고스를 제약한다. 세계 제작의 설계도가 되는 이데아는 데미우르고스 안에 있지 않다. 이데아는 데미우르고스와 독립적으로 있다. 그래서 데미우르고스는 세계를 제작할 때 모델인 이데아를 보아야 한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에게 두 가지 능력을 부여한다. (1) 데미우르고스는 모방에 뛰어나다. (2) 데미우르고스는 좋다. (1)의 능력 덕분에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모델을 가능한 한 잘 모방해낸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완전한 세계는 아니지만, 가능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이다. (2)의 능력 덕분에 데미우르고스는 이데아를 모델로 삼는다. 데미우르고스가 인간을 질투하여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하는 전통적인 헬라신들과 같았다면, 그는 이데아를 모델로 삼기보다 변하기 쉬운 생성물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Tim. 29c). 그러한 점에서 볼 때 플라톤의 신관은 당시에 매우 혁명적인 신관이다. 만일 데미우르고스가 (1)의 능력을 지니면서 (2)의 성품을 지니지 않는다면, 그가 만든 세계는 최악이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서두에서 그러한 예로 당대 소피스트들을 들었다. (1)의 능력마저 없었더라면 소피스트들은 그렇게까지 큰 해악을 끼치지 않았을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문제는 뛰어난 모방능력에 있지 않고 모델을 잘못 선택한 데 있었다. 데미우르고스가 비록 (1)과 (2) 능력을 모두 갖추었지만, 자신 속에 우주 설계도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전지한 존재가 아닌 셈이다.
이제 이렇게 만들어진 우주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운동이 나타난다. 헬라 사람들이 완전한 운동이라고 여긴 원운동이 하늘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헬라 사람들이 불완전한 운동으로 여긴 직선운동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직선운동은 좌(左), 우(右), 전(前), 후(後), 상(上), 하(下)라는 여섯 가지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월상세계와 월하세계의 구분으로 나타나며, 이후 뉴튼의 만유인력법칙 발견 때까지 우주론을 지배하게 된다. 뉴튼은 달 위의 세계나 달 아래의 세계 모두 인력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직선운동이 나타나는 지상의 변화는 원운동이 나타나는 천상의 변화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 직선운동은 불규칙 운동을 대변하며, 원운동은 이성적이고 규칙적인 운동을 대변한다.
천체들의 원운동은 서로 비례와 조화 속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천체의 운동은 일종의 우주적 교향악인 셈이다. 모든 천체 운동은 모든 천체의 운동이 한 점에서 시작하는 대원년(大元年)을 기준으로 서로 비례 관계에 있다. 땅 위에 사는 인간의 신체 부위 가운데 머리를 둥글게 만들고 하늘에 가깝게 둔 이유는 이성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 머리이기 때문이다. 불멸하는 인간 영혼의 이성적 부분은 천체의 완벽하게 조화로운 회전을 보고(theoria)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신적 이성의 운동의 리듬에 맞춘다. 플라톤은 '신적'(theion)이라는 용어를 '이성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성적인 원운동을 하는 천체들을 신들이라고 부른다. 또한 원운동을 하는 우주를 이성적 영혼이 들어 있는 생물(joion)이라고 부른다(Tim. 69c).19) 그래서 결국 인간이 천체를 보는 목적은 신과 같이 되려는데(homoion to theo) 있다. 하늘을 연구하는 천문학자 티마이오스를 플라톤의 우주론을 제시하는 등장인물로 내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플라톤의 우주론을 이성적이고 교육받은 사람을 위한 신학으로 여길 수 있다.20) 우주 속에 있는 수학적 질서를 봄(theoria)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려는 피타고라스적 전통이 플라톤의 우주론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의 우주론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플라톤의 우주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전지한 신도 전능한 신도 아니다. 그의 머리에는 우주 설계도가 없으며, 그에게는 우주 재료의 저항을 완전히 이겨낼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데미우르고스에게는 우주 설계도가 외부에서 주어진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좋은 모방품을 만들어내는 과제가 그에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철저하게 인간적이다. 그는 창조자가 아니라 모방자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관은 헬라 사람들의 인간중심적 사고와 밀접히 연결된다. 또한 데미우르고스는 전능하지 않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불완전은 데미우르고스의 책임이 아니다. 불완전의 책임은 우주 재료 안에 본래부터 있는 성질에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그 성질을 만들지 않았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는 신정론의 문제를 피해간다. 하지만 재료의 저항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무능한 신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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